〈 147화 〉 146. 좁혀오는 그림자(1)
* * *
세 사람은 놀이공원 안에 위치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흔히 이런 곳은 맛도 없고 가격만 비싼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의외로 맛도 좋고 가격도 착했다.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친 그들은 바로 옆의 카페로 향해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식사를 빨리 마친 덕에 시간은 아직 12시 40분이 안 되었다.
“…….”
휘핑크림을 빨대로 이리저리 휘저으며 강하늘이 안수호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눈을 깜빡이거나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것이 무언가 신호를 보내는 모양새였다.
거래 시간까지는 앞으로 약 80분. 슬슬 준비를 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신호였다.
샤오메이에게서 태초의 은을 가로챌 방법은 이미 논의가 끝났다. 그 부분에 대해선 더 이상 따로 준비할 건 없었다.
다만 문제는 지예원이었다.
‘거래 장소에 언니랑 같이 갈 수는 없어. 그럼 언니를 떨어뜨려놔야 하는데. 뭐라 말해야 하지?’
강하늘은 안수호에게 넌지시 눈치를 줬다. 지예원을 데리고 온 걸 보아하니 아마 대책이 있겠지 싶었다. 실제로 안수호에겐 대책이 있었다.
다만, 그 대책은 지예원을 따돌리는 형태가 아니었으며, 애초에 따돌릴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지예원이 넌지시 운을 떼며 턱을 괴었다.
“슬슬 두 사람은 그 중국인 브로커 만나러 빠질 거지? 그동안 나는 어디서 뭐하고 있을까?”
“엥?”
강하늘이 놀란 반응으로 지예원을 돌아본다. 도대체 언니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냐는 표정.
대답한 건 지예원이 아닌 안수호였다.
“내가 말해줬어. 원래는 여명단하고 마주칠 수도 있으니 오지 말라고 이야기해준 건데, 오히려 그런 위험한 일을 할 거면 자기가 보탬이 될 수 있다고 따라온다고 그러더라.”
지예원은 빙의자가 아니다. 따라서 모든 건 설명할 수는 없었다. 다만 여명단이 태초의 은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과 이를 자신이 가로채려 한다는 것만 말해주었다. 지예원은 그 이야기만 듣고 안수호를 돕고자 했고.
“……그래도 괜찮아요 언니? 여명단 사람이랑 마주치면 들킬지도 모르잖아요.”
강하늘이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지예원의 사정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만약 여명단 단원이 그녀를 알아본다면 결코 가만히 넘어가진 않으리라.
이에 지예원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걱정이었으면 애초에 놀이공원에 따라오지도 않았어. 뭐, 괜찮을 거야. 조직 사람이라고 다 내 얼굴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머리카락도 염색했고. 혹시 몰라서 이렇게 모자랑 마스크도 챙겨왔잖아?”
지예원이 턱에 걸친 마스크를 주욱 당기며 말했다.
“게다가……. 수호가 위험한 일을 꾸미고 있는데 혼자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는 건 성미에 안 맞거든.”
사랑하는 사람이 위험에 빠질 지도 몰라 걱정된다. 그래서 곁에 있고 싶다. 단순한 심리였고 강하늘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지예원의 사정이 사정인 만큼 걱정을 접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웬만하면 앞에 나서지 마. 내가 여기 온 건 태초의 은을 가로채기 위해서지 여명단하고 싸우기 위한 게 아니니까.”
“알고 있어. 그래서? 니들이 그 중국인 만나는 동안 난 어디 있으면 될까?”
“적당히 사람 눈에 안 띄는 곳에 숨어 있어. 네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 그때 부를게.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일이 원작대로 흘러간다면 안수호는 이번에 싸울 필요조차 없었다. 여명단의 상대는 류태현과 그 일행이 알아서 해줄 테니까.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지.’
다만 이번에도, 또다시, 어김없이 무언가 변경점이 생기리라고 그는 의심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아라엘이 말한 난이도 변경 건도 있으니, 결코 방심할 수는 없었다.
“거래 장소가 어디라 그랬지?”
“거울미로. 특정 순서대로 모퉁이를 돌면 나오는 막다른 길. 거기가 거래 장소야.”
“괜찮네. 미로 안이면 숨어서 뭘 꾸미기엔 딱 좋으니까. 그 브로커를 감시하는 공안 사람들도 설마 미로 안까지 쫓아 들어오진 않을 테고.”
감시란 기본적으로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미행했다간 곧바로 들킬 미로 안까지 쫓아올 수는 없었다. 기껏해야 미로 입구와 출구를 바깥에서 지켜보는 정도일 터.
때문에 거울미로는 감시의 눈을 피하기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문제는 그거네. 꽉 막힌 길이니까 여차할 때 도망칠 수 없다는 거?”
한때 여명단의 첩보원이었어서 그런가 지예원은 요점을 정확히 파악했다. 실제로 원작에서 샤오메이는 한가람한테서 거래 장소를 들어낸 여명단에 의해 독 안에 든 쥐 꼴이 날 뻔했다. 그러기 전에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 빠져나오긴 했지만…….
‘미로에서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습격당했지 아마.’
안수호는 머릿속으로 이번 사건의 순서를 정리해보았다.
1. 여명단 단원 다나카 진이 거래 장소를 알아내기 위해 한가람을 습격한다. 그 과정에서 한가람은 죽고 다나카는 샤오메이의 신상과 거래장소에 대해 알아낸다.
2. 그러나 다나카는 제시간에 거래 장소에 도착하지 못한다. 조금 늦게 거울미로에 들어가긴 했지만 그때는 이미 수상한 낌새를 느낀 샤오메이가 떠난 뒤였다.
3. 헌데 다나카가 거래장소에 도착했을 때, 마침 길을 잃은 나은솔이 그의 앞에 나타나게 된다. 다나카는 순간 그녀에게 샤오메이냐고 물어보나 이내 한가람에게서 들은 특징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빠져나온다. 여기서 나은솔은 수상한 낌새를 느낀다.
4. 출구로 나온 나은솔은 류태현에게 미로 안에서의 일을 말한다. 이때 출구 근처를 서성이던 샤오메이가 류태현 일행에게 접근, 사정을 묻는다. 동시에 출구로 나온 다나카가 샤오메이를 발견한다.
5. 이후 다나카는 샤오메이가 인적이 드문 장소로 가는 걸 기다렸다가 그녀를 습격. 그러나 다나카의 미행을 알아차린 류태현이 그를 막아서고, 이내 쓰러뜨린다.
여기까지가 그가 기억하고 있는 놀이공원 에피소드의 전말이었다. 이후에도 이어지는 내용이 있긴 하지만 당장 중요한 건 아니었다.
‘내가 한가람인 척 제시간에 거래 장소에 나타나기만 하면 태초의 은을 빼돌리는 건 어렵지 않아. 게다가 보험 차원에서 한가람 쪽에도 손을 써놨고. 정말 어지간히 일이 꼬이지 않는 이상 위험한 일은 안 생길 거야. 안 생길 테지만…….’
안수호는 지금까지도 늘 계획은 있었다. 기껏 세운 계획이 늘 예상치 못한 다양한 이유로 인해 어그러져서 그렇지.
“……슬슬 이동할까.”
“어디로?”
“거울미로 근처에서 기다리려고. 샤오메이가 일찍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
“생김새는 알고 있어?”
“응. 사진으로 봤어.”
“……그래?”
네가 그걸 어떻게? 라는 의문이 지예원의 뇌리를 스친다.
여명단조차 입수한 정보는 거래가 있다는 정보 그 자체뿐. 때문에 구체적인 장소나 시간은 한가람을 협박해서 얻어낼 수밖에 없었다. 헌데 안수호는 무슨 수로 이번 거래에 대해 알았으며, 하물며 이미 거래 당사자들의 신원까지 파악하고 있는가.
‘뭔가 커넥션……내지는 정보원 같은 게 있는 건가.’
지예원은 새삼 자신이 안수호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게 많다는 걸 실감했다. 그야 만난 지 이제 겨우 두 달이 지난 시점이니 이상할 것도 없지만.
“가자.”
싱숭생숭한 지예원을 뒤로하고 안수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뒤를 강하늘과 지예원 두 사람이 뒤따른다.
거울미로는 중앙광장 옆에 있었다. 그 자체로도 커다란 건물의 1층을 통째로 쓰는 등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었으나, 그보다는 광장에 마련된 가설 무대 쪽으로 시선이 더 쏠렸다.
웅성 웅성.
무대 위에는 아무도 없었음에도 그 앞에는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지예원의 눈이 무대 주변에 걸린 현수막을 쫓는다.
“누구 연예인이라도 오나 본데? 미야? 아이돌인가?”
“미야라면 설마…….”
강하늘이 설마하는 눈으로 안수호를 바라봤다. 이에 안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야. 풀네임으로 타카나시 미야는 초인들의 시대 원작에 등장했던 걸그룹 출신 솔로 가수였다. 연예계물도 아닌 초인들의 시대에 대뜸 아이돌이 등장한 배경은 바로 미야의 사상이나 가치관에 있었다.
여명단의 조직 이념은 초인 위주의 신사회의 건설. 즉 초인우월사회의 이룩.
미야는 그러한 여명단의 신조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선 연예인 중 한 명이었다. 워낙 유명한터라 발언의 영향력도 만만찮은데 심지어 미야는 가수임과 동시에 C급 초인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평등을 부르짖으며 여명단의 테러가 일어날 때마다 꼬박꼬박 비난성명을 내댔으니 여명단 입장에선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결국 원작 후반부 즈음 타카나시 미야를 대상으로 한 여명단의 테러가 일어나고, 그 과정에서 우연히 류태현이 엮이게 된다.
참고로 히로인인지 아닌지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정확히는 타카나시 미야와의 관계가 진전되는 내용이 나오기 전에 안수호는 이 세상에 빙의당해버렸다.
따라서 비중만 보면 조연 내지는 단역에 불과한 인물이었으나 두 사람은 똑똑히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비중은 적더라도 원작에 등장했던 유일한 연예인이고, 게다가 일본인이라는 캐릭터성은 상당히 기억에 강하게 남았기에.
“검색해보니까 오늘 1시부터 특별 공연이 있다네요. 매달 마지막 토요일마다 가수를 초청해서 공연하는 행사가 있나 봐요.”
“그게 이번에는 미야라는 거군. 어쩐지. 왜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모여 있나 했네.”
“그 미야라는 가수가 인기 많나봐?”
“엥? 언니, 미야 몰라요? 되게 유명한데?”
“응. 그런 쪽은 관심이 없어서.”
바깥세상에서 온 강하늘이 소설 속 인물인 지예원에게 소설 속 아이돌을 왜 모르냐며 묻는 아이러니한 상황.
안수호는 피식 웃음이 나왔으나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지예원 성격에 아이돌 노래는 챙겨들을 것 같지도 않았으니.
“이참에 한 번 들어보면 어때? 마침 거울미로도 바로 옆이고. 이렇게 인파가 많은 곳이면 혹시 여명단 놈들이 와도 널 알아보진 못할 거야.”
“그렇게 하죠! 저도 미야 노래 실제로 한번쯤 꼭 들어보고 싶었거든요!”
“……두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좋아. 그럼 저기 벤치에 앉아서 보자. 무대에서 멀리 떨어져있긴 하지만 움직이긴 편할 테니까.”
안수호가 무대에서 멀찍이 떨어진 벤치를 가리켰다. 상당히 멀긴 했지만 초인인 세 사람에게 그 정도 거리는 별로 먼 것도 아니었다.
“읏.”
벤치로 다가가던 강하늘이 돌연 허벅지를 살살 꼬며 신음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부끄러운 얼굴로 말했다.
“……저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요.”
“어디?”
“그런 게 있어요.”
얼른 다녀오겠다며 종종 걸음으로 멀어지는 강하늘. 누가 봐도 화장실이 급한 모양새임이 뻔히 보였다.
“저게 저렇게 숨겨야 할 일인가.”
“부끄러울 수도 있지. 남자 앞에서 대놓고 화장실 가고 싶다고 말하는 게.”
“이미 볼 장 다 본 사이인데 새삼스럽게 뭐가 부끄럽다고…….”
“그거랑 이건 다르지.”
지예원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안수호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미 서로 침대에서 뒹굴면서 온갖 부끄러운 꼴은 다 본 사이인데 고작 화장실 가고 싶다는 말을 부끄러워서 못 한다는 게 말이나 되나 싶었다.
‘뭐 예원이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여자 마음은 여자가 더 잘 알 테니까.’
두 사람은 그 이후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강하늘을 기다렸다. 그러나 화장실에 사람이 몰린 탓인지 강하늘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어느새 시간은 1시.
와아아아아아아!
귀를 찢는 함성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무대 위에 미모의 여성이 올라와 있었다. 스텝한테서 마이크를 건네받은 미야가 고개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어……. 오늘도 제 무대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중에선 제 팬분들도 계실 거구, 지나가시다 뭐 하나보다 싶어서 오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모두 잘 부탁드려요. 가수 미야라고 합니다. 네.
아이돌 출신이라기엔 조금 쭈뼛거리는 태가 있는 소심한 말투. 그러나 그것마저도 팬들에겐 매력으로 다가왔는지 좀 전보다 더욱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 함성에 미야는 살짝 몸을 움츠리며, 그러나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첫 곡은 저를 모르시는 분들께도 익숙한 곡일 거예요. 드라마 ‘바다와 별무리’ OST ‘베네치아의 아침’으로 공연 시작하겠습니다. 아, 스텝 분 마이크 에코 조금만 줄여주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잔잔한 피아노 멜로디와 함께 노래가 시작되었다. 시끄럽던 관중석이 거짓말처럼 일제히 침묵에 잠긴다.
이윽고 미야의 입에서 가녀린, 그러나 호소력 있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귓가를 간질이는 미성에 안수호가 작게 감탄했다.
처음 보는 가수, 처음 듣는 노래였지만 그녀의 음색은 묘하게 그의 가슴을 울렸다. 이따금 사람이 훌륭한 노래를 들으면 몸에 전율이 일곤 하는데 지금 안수호가 딱 그랬다.
샤오메이니 태초의 은이니. 그런 사사로운 일들은 잠시 잊은 채, 그가 멍하니 미야의 노래에 집중했다.
……감사합니다.
이윽고 5분여가 지나 노래가 끝나자 그제야 안수호는 정신을 차렸다. 기분 좋은 잔경련이 그의 몸에 찌르르 퍼져나갔다. 고작 노래 하나 들었을 뿐인데 상쾌한 기분마저 느껴졌다.
“진짜 대단하다. 괜히 인기 가수가 아닌가봐. 그치?”
그렇게 말하며 안수호가 지예원을 돌아봤다. 그러나 그녀는 안수호와 달리 여전히 미야의 음색 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무대에 고정되어 있던 눈동자가, 이내 안수호의 시선을 느끼곤 퍼뜩 놀라며 그에게 향했다.
“어, 어? 뭐라고 했어?”
“아주 푹 빠졌네. 이러다 팬 되겠다 야. 하긴. 진짜 잘 부르긴 했어. 그치?”
“응. 진짜 잘 부르더라…….”
맥없이 중얼거린 지예원이 홀린 듯 조금 전의 음색을 되새겼다. 아무리 노래가 좋았다곤 해도 너무 감동받은 것 아닌가. 안수호가 그렇게 생각한 찰나 지예원이 작게 말했다.
“있지. 나 처음이야. 이런 식으로 가수 노래 직접 들어본 거.”
“어? 진짜? 콘서트 같은 데에 한 번도 안 가봤”
말하던 안수호가 뒤늦게 뒷말을 삼킨다. 지예원은 어려서부터 여명단의 첩보원으로 길러졌다. 그런 그녀에게 한가롭게 콘서트 따윌 보러 다닌 경험이 있을 리가 없으니.
“대중가요 자체는 종종 들어보곤 했어. 남들이 보기에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상식이나 문화는 익혀둬야 했으니까. 그렇지만 딱히 즐기진 않았어. 즐길 여유도 없었고, 흥미도 없었으니까.”
지예원은 어릴 적부터 스무살이 될 때까지 여명단의 훈련 기관에서 자랐다. 성인이 된 뒤에는 아카데미에 다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스파이 활동의 일환. 이를 증명하듯 그녀는 3년 동안 아카데미를 다녔음에도 친한 친구 한 명조차 없었다.
깊은 교우 관계 따위 스파이 활동에 방해만 됐으니까. 그리고 그건 음악 같은 취미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기실 안수호를 만나기 전까지 지예원은 차가운 식물이나 다름없는 인간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은 남자친구와 함께 놀이공원에 와 유명 가수의 무대를 관람하고 있었다.
“신기하네.”
먼 산 바라보듯 무대를 보며 지예원이 말을 던졌다.
“……뭐가 신기한데?”
“그냥. 이렇게 마음 편히 놀이공원 같은 데 놀러와서, 난생 처음 보는 가수의 무대에 감동하게 되는 날이 나한테 올 줄 몰랐거든. 신기하달까, 감회가 새롭다고 해야 하나?”
지예원이 미야의 노래에 감동받은 건 단순히 노래가 좋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이 평화로운 일상이 감명 깊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의 눈가에 뭉클한 감정이 감돌았다.
“……앞으로 더 잔뜩 놀러다닐 건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떡해? 이러다 나중엔 아주 감동해서 울겠어?”
“왜, 내가 울었으면 좋겠어?”
“아니. 웃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잔뜩 웃게 해줄게.”
지예원의 우스갯소리에 안수호가 진지하게 답했다. 그 말에 지예원의 눈이 살짝 크게 떠졌다. 그녀가 안수호를 돌아보자, 안수호가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안. 내가 말해놓고도 좀 오글거리네. 그, 어제 밤에 내가 밤늦게까지 멜로 드라마를 봐서”
“좋아.”
“어?”
그 대답에 안수호가 반사적으로 그녀를 돌아봤다.
“좋다고. 앞으로 잔뜩 웃게 해준다며. 기대하고 있을게.”
지예원이 싱긋 웃었다. 담담한 어투와는 대비되는 환한 미소.
지예원은 안수호를 향해 어디 한 번 보라는 듯 밝게 미소 지었다. 쓰고 있던 모자도 벗은 채. 따사로운 햇살이 그녀의 은발과 만나 반짝반짝 빛났다. 그녀의 미소도 반짝반짝 빛났다.
그 미소를 본 순간 안수호의 머릿속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지예원의 미소에 시선을 빼앗겼다.
잠시간의 정적. 이내 안수호의 입에서 자그마한 말소리가 새어나왔다.
“……진짜 예쁘다.”
의식하지 않고 새어나온 감상이었다. 뒤늦게 퍼뜩 정신 차린 안수호가 멋쩍게 시선을 돌렸다. 그 반응이 마음에 든 지예원이 더욱 환하게 웃었다.
“내가 예쁜 거 이제 알았어? 앞으로 더 예뻐질 건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떡해? 이러다 나중엔 아주 감동해서 울겠어?”
“……지금 나 놀리냐?”
조금 전 안수호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지예원. 귀가 빨개진 안수호가 지예원을 노려봤으나 지예원은 세상 즐겁다는 듯 배시시 웃고 있었다.
“자기가 한 말이면서 그렇게 부끄러워하면 어떡해? 원래 연인 사이에는 오글거리는 말도 가끔씩 던져주고 그러는 거 아니”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어가던 지예원의 시선이 안수호 너머로 향한다. 다음 순간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진다.
포옥.
지예원이 달려들듯 안수호의 품에 안겼다. 그의 가슴에 고개를 팍 묻은 채 그를 꽈악 안는다.
갑작스런 애정행각에 당황하기도 잠시. 이내 그가 피식 웃으며 지예원의 등을 마주 안았다.
허나 다음 순간 그 역시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다.
“…….”
지예원은 떨고 있었다. 긴장감, 혹은 두려움이 그녀의 전신에 퍼져나갔다. 그녀는 안수호에게 안긴 상태를 유지한 채 벗어두었던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끌어올렸다.
“무슨 일 있어 예워”
“말하지 마.”
다급한 속삭임에 안수호가 입을 다문다. 그러나 그 얼굴엔 여전히 혼란한 기색이 역력했다. 떨고 있는 지예원의 등을 토닥이며 그가 고개를 돌렸으나 특별히 이상한 건 보이지 않았다.
“잠시만 이대로 있어줘.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심상치 않은 기색에 안수호는 그녀의 말대로 했다. 남들이 보기에 두 사람은 공공장소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팔불출 커플이었지만 둘 사이에는 묵직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쿵쾅거리며 세게 뛰는 지예원의 심장 박동이 안수호에게 여실히 전해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지예원이 안수호에게서 떨어졌다. 허나 불안해하는 기색은 여전했다. 마스크 위로 눈만 빼꼼 드러낸 채, 그녀가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주위를 빠르게 돌아봤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예원”
“예지원. 지금부턴 그 이름으로 불러. 적어도 여길 떠나기 전까진.”
“……지원아.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설명을 해줘야 알지.”
안수호의 물음에 지예원이 그에게 다시 안겼다. 그러나 전과 달리 그의 어깨에 턱을 기댄 채였다. 안수호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간 그녀가 아주 작게 말했다.
“……여명단 암살팀. 놈들이 지금 여기 와있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