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145화 (146/266)

〈 145화 〉 144. 놀이공원 데이트(2)

* * *

서울 강북구에 위치한 국내 최대규모의 테마파크 ‘네버랜드’.

그 규모만큼이나 거대하고 화려하게 꾸며진 정문 앞에 아홉 명의 남녀가 막 도착했다.

“키야! 여기도 되게 오랜만에 와보네. 중학생 때 이후로 처음인가?”

선두에 선 류태현이 인파로 북적이는 정문을 바라보며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시험도 끝났겠다, 오늘 하루 즐겁게 놀 생각에 벌써부터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꼬옥.

그런 류태현의 옷깃을 나은솔이 꼬옥 쥐었다.

캐주얼한 복장인 류태현과 달리 나은솔은 무슨 데이트라도 나온 것처럼 철저하게 꾸미고 나왔다. 그런 모습으로 꼭 어미 오리를 쫓는 아기 오리처럼 류태현에게 착 달라붙어 다니니, 행인들이 두 사람을 연인 사이로 오해하기 딱 좋았다.

“히히.”

그리고 나은솔은 그러한 오해의 시선을 남몰래 즐기고 있었다. 류태현이 슬쩍 그녀를 바라보자 나은솔이 길게 늘어뜨린 앞머리 사이로 싱긋 웃어보였다.

“와. 여긴 어떻게 개장하고 1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이렇게 사람이 많지? 저거저거 매표소 줄 좀 봐! 아무리 주말이라지만 진짜 미친 거 아니야?”

“고작 10년 가지고 뭘 그래? 저기 강 아래 롯○월드는 30년도 더 됐을 텐데.”

“그런가? 하긴. 것도 그러네!”

그 옆에선 오빠 류진의 핀잔에 동생 류설이 고개를 갸웃하며 쾌활하게 웃었다.

류설의 머리카락은 전과 달리 진한 블루블랙 색상이었는데 바로 어제 시험이 끝난 기념으로 염색한 결과였다. 한껏 들떠있는 여동생을 바라보며 류진이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흥. 고작 시험 하나 끝났다고 다들 놀자 판인가. 저래서야 기말고사 성적은 안 봐도 뻔하겠군.”

한편 앞선 네 사람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하성민이 거만한 투로 내뱉었다.

그는 류태현과 비슷한 수준의 미청년이었지만 서글서글한 인상의 류태현과 달리 까칠하고 신경질적인 인상이었다. 그리고 실제 성격도 그런 인상과 비슷했다.

당장 지금도 하성민은 라이벌이자 앙숙인(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정작 류태현은 하성민도 평범하게 친구라 생각하고 있다) 류태현과 주말 대낮부터 놀이공원에 온 것이 상당히 불쾌한 모양이었다.

“초인의 몸으로 놀이기구를 타는 게 뭐가 재밌다는 건지. 내가 보기엔 그저 시간 낭비에 돈 낭비에 불과해. 안 그런가?”

허나 그가 오늘 류태현과 함께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성민이 관심 없다는 듯 팔짱을 낀 채, 슬쩍 자기 옆에 있던 여성의 눈치를 보았다.

“…….”

하성민의 곁에는 날카로운 인상의 미녀, 성아라가 서있었다. 기다란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 두 눈을 감고 있던 그녀가 하성민의 기척을 느끼고 한쪽 눈만 슬쩍 떴다.

눈꺼풀 아래로 드러난 눈은 흰자위가 검고 눈동자가 금색인, 소위 말하는 마족눈이었다. 날카로운 시선이 하성민을 훑는다.

“……그러는 너도 지금 놀이공원에서 시간 낭비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 아니야?”

“그, 그건……. 가끔은 기분 전환이란 것도 필요하니까. 말하자면 더 능률적인 성장을 위한 휴식이라고 할까…….”

성아라의 시선을 피하며 하성민이 무언가 숨기는 투로 내뱉었다. 잠시 그 꼴을 지켜보던 성아라는 이내 한심하다는 듯 눈을 픽 감더니 일행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후우.”

성아라가 떠나고 하성민이 안도인지 후회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기실 그는 성아라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오늘 놀이공원에 온 것도 성아라를 보기 위해서였지만. 그건 성아라 본인은 물론이고 누구에게도 절대 밝힐 수 없는 비밀이었다.

비밀이었으나, 하성민이 성아라를 연모하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이미 두 명이나 있었다.

“킥.”

뒤편에서 하성민의 추태를 관람하고 있던 강하늘이 피식 웃었다.

“숨긴다고 숨긴 거겠지만 옆에서 보니까 아라 좋아하는 티 엄청 나네요.”

그녀는 안수호처럼 원작의 모든 내용을 꿰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대략적인 캐릭터의 설정이나 전개는 기억하고 있었다. 하성민이 왜 저리 성아라한테 전전긍긍하는지 뻔히 알던 그 모습에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다.

“저래서야 아마 아라도 벌써 눈치 챘을 거예요. 안 그래요 오빠?”

“글쎄. 하성민도 하성민이지만 성아라도 워낙 연애 쪽으론 둔감하니까. 아마 모르고 있지 싶은데.”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건요?”

“성아라 성격에 그럴 일은 절대 없을걸?”

“그런가요? 전 다르게 생각하는데. 예원 언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안수호의 왼편에 찰싹 달라붙은 강하늘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물었다. 강하늘과 달리 안수호로부터 조금 떨어져 있던 지예원이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는 투로 반문했다.

“글쎄. 난 쟤네들 다 오늘 처음 보는 거라서 잘 모르겠네.”

“하긴! 언니는 오늘 저랑 오빠 빼고 다 처음 보는 사이였죠? 진짜 어색하겠어요! 그러게 왜 괜히 동생들 놀러가는 데에 따라오셔서는…….”

“그건 수호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래서 너희 둘은 중간중간 따로 행동하기로 했다며?”

“……그걸 아는 사람이 왜 눈치도 없이 꼽사리를 끼셨을까?”

강하늘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녀는 입은 웃고 있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강하늘은 안수호의 왼팔을 감싼 팔에 힘을 꽈악 주었다. 꼭 넘겨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파지직.

강하늘의 눈에서 살벌한 스파크가 튀었다. 그런 착각을 할 정도로 그녀의 눈빛에선 살벌한 기세가 형형하게 피어올랐다.

“그냥. 너희가 놀러간다는데 마침 오늘 시간 비길래 따라온 거지. 원래 이런 곳 놀러올 때는 사람 많은 편이 더 즐거운 법이잖아? 안 그래?”

그 살벌한 눈빛을 지예원은 능글맞게 받아넘겼다. ‘안 그래?’라며 안수호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는 지예원. 마치 그의 동의를 구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지예원의 얼굴에 요망한 눈웃음이 떠오른다.

“그건…….”

“놀러온 게 아니라 데이트거든요?!”

안수호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강하늘이 버럭 소리 질렀다.

“어머, 데이트였어? 그건 몰랐네? 미안?”

“모르긴 무슨! 다 알고서 온 거잖아요! 모처럼 오빠랑 단둘이 데이트하려 했는데 왜 따라왔냐고요! 언니 차례는 다음 주라고 했잖아요!”

“그건 네가 일방적으로 결정한 거잖아. 미안한데 난 다음 주 주말 일정 이미 꽉차있거든? 아카데미 일정 빼곤 놀기 바쁜 누구씨랑 달리, 난 돈을 벌어야 해서.”

“저도 생활비는 제가 벌고 있거든요?!”

“그래? 알바라도 하나봐? 무슨 일 하는데?”

“그, 그건…….”

그 물음에 따박따박 대꾸하던 강하늘의 말문이 막혔다.

알다시피 강하늘의 주 수입원은 인터넷 방송이었다. 방송이라곤 해도 여캠 벗방 같은 야시시한 장르가 아닌 평범한 게임 방송.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비록 방송 내용이 건전하다 한들 사회적 인식은 그렇지 않다. 여자가 인방으로 돈을 번다하면 열에 아홉은 그렇고 그런 방송인줄 지레짐작한다. 일종의 편견이자 사회적 통념이었다.

물론 그런 오해를 벗어던지는 건 쉽다. 그냥 방송 닉네임을 당당하게 까면 되니까.

그렇지만.

‘……지예원한텐 죽어도 말 못해!’

비록 방송의 장르가 건전하다고 한들, 어쨌든 그녀가 자신의 성별과 외모를 무기 삼아 시청자들에게서 돈을 뜯어내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헌데 방송 닉네임을 밝히면 당연히 어떤 방송인지 호기심에라도 찾아볼 것이고, 지예원은 이내 철저하게 꾸며낸 강하늘의 ‘방송용 얼굴’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절대로 말 못해!’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된다. 안수호에게 방송 닉을 들켰을 때 얼마나 창피하고 얼마나 부끄러웠던가. 강하늘은 이전의 기억을 되새기며 입을 꾸욱 다물었다.

그러나 가만히 보고만 있을 지예원이 아니었다.

“뭐야. 왜 대답을 못해? 설마 뭐 떳떳하지 못한 일이라도 하니?”

“아, 아니거든요! 되게 떳떳한 일이거든요?! 괜한 오해 살만한 말 하지 마세요!”

“그럼 뭔데? 말해보라니까?”

“아으으으……!”

차마 대답하지 못한 강하늘이 도움을 구하는 표정으로 안수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지예원이 보기엔 꼭 그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보였다.

‘뭐야. 그냥 농담삼아 찔러본 건데 진짜 이상한 일 하는 거 아니야……?’

그 모습에 지예원이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그녀의 머릿속에 이런저런 ‘떳떳하지 못한 일’들이 빠르게 떠올랐다. 절도나 강도, 혹은 마약 밀매 같은.

범죄조직인 여명단 출신이어서 그런가, 그녀가 상상하는 일은 하나같이 불법적인 일들뿐이었다. 설마 사정이 어려워 범죄에 손을 대고 있는 걸까 하며, 줄곧 강하늘을 놀리던 그녀의 얼굴에 측은한 감정이 떠오른다.

“……하늘아. 아무리 돈이 급해도 그런 일로 벌면 결국 나중에 후회하게 될 거야. 당장은 들켜서 경찰에 잡혀가지 않더라도 범죄자라는 낙인은 끝까지 너 스스로를 옭아맬 테니까.”

“…………네? 경찰……요? 범죄자?”

강하늘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지금 단단히 착각하신 거 같은데. 도대체 제가 무슨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강도나 마약 판매 같은­”

“제, 제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잖아욧!!”

강하늘이 병아리처럼 삐약! 소리쳤다. 도대체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길래 저런 생각을 하는 거냐고 어이 없어하며.

“그래? 다행이네.”

한편 지예원은 강하늘의 대답에 진심으로 안도했다. 그 반응에 강하늘은 더더욱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둘 사이에 낀 안수호가 입술을 잘근 깨물며 가까스로 웃음을 참는다.

“아무튼. 하늘이 넌 내일도 수호랑 서울 관광하고 다닐 거라며. 주말 내내 수호를 독점하려는 건 너무하잖아? 오늘 하루 정도는 나한테 양보해주지 그래? 심지어 내가 누구처럼 오늘 내내 얘를 독점한다는 것도 아니고, 함께 즐겁게 놀자는 건데. 이 정돈 괜찮잖아? 안 그래 안수호?”

“어? 나?”

“오빠…….”

두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안수호에게 향했다.

여유로운 태도로 웃고 있는 지예원과 불안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는 강하늘.

그 둘 사이에 낀 안수호는 잠시 갈등했다. 그러나 지예원과 함께 놀이공원에 나타난 시점에서 그가 누구의 편을 들어줄 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뭐어……. 기왕 노는 거 다 같이 노는 게 즐겁긴 하지?”

“오빠아!”

믿음을 배신당한 강하늘이 울상을 지었다. 그러나 예정된 결말이었다. 이미 함께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돌려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잖은가.

“들었지? 그러니 오늘 하루만 양보 좀 해줘. 내일 되면 알아서 꺼져줄 테니까.”

“……내일은 정말 돌아가는 거죠?”

강하늘이 의심에 찬 눈으로 지예원을 노려봤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냐는 듯한 얼굴.

그 시선에 지예원이 능글맞은 웃음을 띠었다.

“걱정하지 마. 커플 여행에 끼어들 정도로 눈치 없진 않으니까.”

“근데 오늘은 왜!!”

“오늘은 다 같이 노는 날이잖아?”

지예원이 싱긋 웃으며 안수호에게 팔짱을 꼈다. 그녀가 안수호를 자기 쪽으로 슬쩍 잡아당기자, 지지 않겠다는 듯 강하늘도 안수호의 몸에 꽈악 밀착했다.

행인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향한다. 사람들이 잔뜩 오가는 정문에서 그렇게 염장을 질러대니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지예원과 강하늘 둘 다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미인이었으니. 뭇 남성들은 부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그들의 모습을 눈동자에 담았다.

“……우와. 대박.”

그리고 여기 남성은 아니지만 안수호 일행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하는 사람이 한 명.

“태현아. 저기 하늘이 남자친구분? 저분 어떻게 된 거야? 왜 옆에 여자가 한 명 더 있어?”

류설이 얼굴 가득 흥미진진한 기색을 띠며 류태현에게 물었다. 류태현은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안수호를 스윽 보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나도 잘은 몰라. 저 형이 워낙 인기가 많아서, 연애사가 좀 많이 복잡하거든.”

“치정극…!”

그 말에 류설이 더욱 흥분했다. 오늘 강하늘의 남자친구가 온다는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진귀한 광경을 볼 수 있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류설은 평소 즐겨보던 로맨스 드라마를 보는 시선으로 세 사람의 모습을 쫓았다.

‘수호 형. 아니, 수호 형님. 존경스럽습니다.’

한편 류태현은 당당하게 여자 둘을 이끌고 나타난 안수호를 보며 같은 남자로서 존경심을 품었다. 류태현도 여자 서넛과 동시에 썸을 타고 있긴 하지만 아직 저 정도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기에.

“태현아. 오늘 되게 재밌어질 것 같다. 그치?”

“글쎄다.”

과연 저 위태로워 보이는 삼각관계가 오늘 하루 동안 잘 유지될지.

안수호의 앞에 닥쳐올지 모를 파국을 경계하며 류태현이 애매하게 대답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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