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144화 (145/266)

〈 144화 〉 143. 놀이공원 데이트(1)

* * *

수많은 소설 속에서 빙의자의 삶이란 대개 고독하고 외로운 법이다.

빙의자.

그들은 어떠한 필연에 의해, 혹은 별 거 아닌 사소한 이유로 인해 낯선 세상에 내던져진 이들이다.

졸지에 가족이나 친구들과 헤어지게 된 것은 물론이요. 타인의 껍질을 뒤집어쓴 채 가공의 산물임을 뻔히 알고 있는 소설 속 캐릭터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가게 되었는데 어찌 그 삶이 외롭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소설 속 빙의자들은 대개 남들에게 말 못할 고독을, 아픔을 품고 살아간다. 그것이 바로 빙의자의 굴레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초중반까지의 이야기.

어지간히 냉소적인 작가가 아닌 이상, 빙의물의 주인공들은 점차 소설 속 세상에 적응해가며 그 세상을 또 하나의 ‘진짜 세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가짜라 여기던 캐릭터들과 차츰 진중한 관계를 맺기 시작하고, 이내 빙의자는 마침내 고독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것이 빙의물의 정형화된 플롯이요 클리셰였다. 그렇기에 빙의자들의 삶은, 비록 시작은 고독하되 그 끝은 고독하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었다.

가령 안수호의 삶은 그러한 클리셰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본래 고독했던 그는 지예원을, 강하늘을, 그리고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만나며 이 세상을 또 하나의 진짜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외로운 빙의자의 삶을 벗어던졌다. 그렇기에 안수호는 더 이상 고독하지 않았다.

반면 강하늘은 여전히 빙의자의 굴레에 갇혀 있었다. 이 세상이 가짜라는 걸 안다는 지식의 저주는 끊임없이 그녀의 정신을, 감정을, 삶의 방식을 옭아맸다.

그러나 그녀에겐 같은 빙의자인 안수호가 있었다. 그녀를 사랑해주고,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안수호는 이 거짓된 세상에서 유일한 진짜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아직 빙의자의 굴레에 갇혀 있긴 했으나 고독하진 않았다.

앞서 말했듯 소설 속 빙의자란 늦든 빠르든 결국 고독에서 벗어나게 된다. 안수호와 강하늘은 이미 그리하였으며, 다른 두 명의 빙의자들 또한 언젠가는 이 세상을 또 하나의 ‘진짜 세상’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것이 빙의물의 클리셰, 정형화된 플롯이었기에.

그렇지만.

“하아. 하아. 하아.”

만약 그 정형화된 플롯에 해당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면.

“하아. 하아. 하아…!”

가령 주인공은 물론이요 빙의자조차 아닌, 그저 본래 그 세상을 살아가던 가공의 캐릭터가 세상의 진실을 눈치 채게 된다면.

“하아. 흐윽! 흐으으…!”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연인도.

지금껏 자신이 보고 겪어왔던 세상의 모든 것이, 심지어 이제껏 살아온 자신의 인생마저도 가짜라는 걸.

전부 꾸며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그 사실에 고뇌하고 괴로워하는 자신의 자아조차 공상의 산물, 한낱 텍스트 쪼가리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아버린다면.

결코 들춰선 안 될 진실을 들춰내버린 그 기구한 캐릭터는.

아마 평생을 의심과 불신, 고독과 절망 속에서 괴롭게 살아가게 되겠지.

“하아. 하아. 후우우우.”

미지근한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뒷골목.

낡은 건물들 사이로 난 쓰레기투성이 샛길에서 박지현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몸에는 알몸 위에 옷 대신 거적때기 한 장만 두르고 있었으며, 그마저도 빗물에 푹 젖어 보온 효과를 진즉에 상실한 상태였다.

거적때기 사이로 드러난 그늘진 얼굴은 한없이 초췌했으며, 파랗게 질린 입술과 덜덜 떨리는 뺨은 그녀가 저체온증에 시달리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박지현은 일반인보다 몇 배는 튼튼한 초인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몸 상태는 초인은커녕 병약한 일반인에게도 미치지 못했다.

‘피를. 피를 더 빨아야 해.’

그것은 전적으로 피가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흡혈귀의 능력을 지닌 그녀는 식성 또한 흡혈귀와 비슷했다. 그녀는 초능력의 발동은 물론이고 단순히 생명을 이어가는 것에조차 타인의 피를 필요로 했다.

헌데 민채령에게 감금당해 있던 한 달 동안 그녀는 단 한 방울의 피도 마시지 못했다. 탈출하면서 김호철의 피를 남김없이 마시긴 했지만 아직 부족했다.

정상적인 컨디션을 회복하려면 최소한 셋, 못해도 다섯 명분의 피를 남김없이 흡혈해야 했다.

‘그렇지만 그래서 뭐? 그 뒤엔 어쩔 건데?’

힘겨워하던 박지현의 얼굴에 다시금 절망의 기색이 피어오른다. 진한 무력감이 그녀의 눈동자에 번진다.

막 탈출했을 때는 의욕이 넘쳐흘렀다. 그녀의 머릿속에선 인적 드문 새벽에 행인을 습격해 힘을 회복하자는 것부터 시작해 탈리스만 탈취 임무를 재개하고 민채령에게 복수하기까지의 계획이 빠르게 세워졌다.

‘다 부질없는 일이야.’

그렇지만 이내 다 부질없는 일임을 깨달았다. 깨달았다기 보다는 다시 떠올렸다는 표현이 맞으리라. 탈리스만도, 민채령에 대한 복수도, 가슴 깊이 공감하며 믿어 의심치 않았던 조직의 이념조차. 그녀에겐 이제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날. 안수호의 피를 빨아 기억을 엿보았던 그 순간, 그녀는 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이 부질없는 가짜라는 사실을 알아버렸으니까.

박지현은 삶의 목표를 잃어버렸다. 삶 그 자체가 가짜인데, 삶의 목표가 생길 턱이 없었다. 묵직하게 다리를 옭아매는 무기력함에 그녀가 더러운 건물 외벽에 기대어 털썩 주저앉았다.

­쏴아아아아아…….

떨어지는 빗방울이 박지현의 몸을 차갑게 적셨다. 건물 사이에 난 자그마한 샛길에는 바깥의 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따금 그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많았지만 누구도 박지현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박지현은 그들이 마치 기계 같다고 생각했다.

정해진 명령에 따라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는 세상의 톱니바퀴들.

진실을 모르는 그들은 튕겨져나온 톱니바퀴인 박지현에게 일절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녀가 있는 샛길과 그 너머의 골목길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일찍이 그녀도 저 세상의 일원으로 살아갔었지만, 진실을 알아버린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그 단절감에, 그 상실감에 박지현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빗방울보다 따스하고 조금 짠 물기가.

‘……이제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을까.’

박지현은 삶의 의욕도 의미도 잃어버렸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살로 삶을 끝내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미래는 의심과 불신의 검정으로 까맣게 물들었다.

“안수호…….”

문득, 박지현이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이 거짓된 세상에서 유일한 진짜, 바깥세상에서 넘어온 이방인의 이름을.

‘……그래. 그 녀석을 찾아가야 해.’

찾아가서 뭘 어떻게 할지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막연하게 그를 찾아가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막연하게, 본능적으로. 안수호를 만나면 절망으로 가득 찬 자신의 삶에도 무언가 새로운 방향성이 생길 것 같았다.

새벽이 돼서 인적이 드물어지면 바깥에 나가 행인을 사냥하자.

그렇게 힘을 회복한 뒤에 안수호를 찾아가자.

그리고 그에게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보자.

어느새 박지현의 머릿속에선 새로운 계획이 차근차근 세워지고 있었다. 박지현이 건물 그늘에 몸을 숨기며, 조금이라도 체온을 유지하고자 팔다리를 움츠렸다.

거적때기 아래로 드러난 다 죽어가던 눈동자에, 차츰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

다음날 아침.

안수호는 놀이공원으로 떠나기 앞서 소지품을 점검하고 있었다. 다만 최악의 경우 전투가 벌어질 것까지 상정하고 있었기에, 그가 살펴보는 물건들은 하나같이 놀이공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상용 디펜시브 코트와 테이저 건. 그리고 대인진압용 접이식 스턴블레이드.

민채령이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경비대 장비를 반출해준 덕분에 무장은 충실한 편이었다. 그러나 안수호는 자신이 이것들을 쓰게 될 일은 아마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전투를 벌이는 건 결국 류태현이니까. 나는 중간에 몰래 끼어들어서 태초의 은만 빼돌리면 돼.’

준비를 마친 안수호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원작 내용을 복기했다.

먼저 ‘태초의 은’은 중국의 던전에서 발견된 특급 아티펙트였다. 중국에서는 1급 이상의 아티펙트(중국에서는 유물이라고 음차해서 부른다)가 발견될 경우 기본적으로 국가에 소유권이 귀속된다.

대부분의 경우 약간의 수수료를 내고 발견한 길드에게 넘기거나 경매를 통해 판매하곤 하지만, 정말 뛰어난 아티펙트의 경우 국가에서 그대로 착복하는 일도 왕왕 있었다. 태초의 은이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그러나.

그 착복 과정에서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리하오위와 한국의 S급 길드 겨울동맹 사이에 비밀스런 거래가 오갔다.

이에 따라 태초의 은은 중국에서 한국으로 이동했고, 바로 오늘 서울에 위치한 놀이공원 ‘네버랜드’에서 중국 쪽 브로커 샤오메이와 겨울동맹의 헌터 한가람 사이의 거래가 이뤄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태초의 은이 빼돌려졌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에 따라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 감시의 손길을 뻗쳤으며, 그건 평소 실력 좋은 브로커로 이름 날리던 샤오메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때문에 그들은 감시자를 우려해 거래 장소를 놀이공원으로 선정했다. 샤오메이가 한국에 온 건 어디까지나 관광 목적이라는 어필이기도 했고, 설마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놀이공원에서 밀거래를 할까 싶은 심리적 허점을 찌른 것이기도 했다.

다만 문제는 여명단이 리하오위와 겨울동맹 간에 거래가 이루어진다는 첩보를 입수하면서부터였다. 여명단은 거래 장소로 향하던 한가람을 습격해 거래 장소와 샤오메이의 정보를 얻어냈다. 그리고 곧바로 한가람을 기다리던 샤오메이를 습격해 태초의 은을 빼앗으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여명단과 류태현 일행이 엮이게 되고, 이런저런 전투 끝에 류태현은 여명단을 무찌르고 샤오메이의 목숨을 구해냈다. 그것이 이번 놀이공원 에피소드의 주요 흐름이었다.

‘그때 샤오메이 히로인 각 씨게 섰었는데. 댓글창에 착짱죽짱 드립부터 시작해 온갖 인종차별성 댓글이 난무해대서 결국 흐지부지 됐었지.’

류태현에게 얼굴을 붉히던 여캐가 이후 다시 등장했을 때 뜬금없이 레즈비언이라며 커밍아웃했을 땐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안수호가 쓴웃음을 흘렸다.

‘아무튼. 난 여명단 놈들이 나타나기 전에 슬쩍 샤오메이한테 접근해 태초의 은만 빼돌리면 되니까. 스토리가 대차게 꼬이지 않는 이상 내가 싸우게 될 일은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안수호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사건의 진행이 원작과 다르게 대차게 꼬이는 건 안수호에게 이미 일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이번에는 류태현이나 나은솔, 하성민, 성아라, 류진&류설 남매와 같은 원작의 쟁쟁한 캐릭터들이 함께한다는 점이었다. 하나같이 현역 헌터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강자들이었기에 안수호는 마음이 든든했다.

‘슬슬 나가볼까.’

강하늘은 친구들과 함께 간댔으니 그 혼자 따로 놀이공원으로 향하면 됐다. 외출할 채비를 마친 그가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좋은 아침.”

“어?”

그러자 무슨 일인가. 현관문 앞에는 지예원이 떡하니 기다리고 있었다. 우연치곤 공교로운 타이밍에 안수호가 의아해한 찰나, 그의 심리를 읽은듯 지예원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쓰레기 버리고 올라오는데 현관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나길래. 인사나 할 겸 기다리고 있었어. 어디 외출하나봐?”

“응. 지금 나가려고.”

“어디 가는데?”

“서울.”

“서울 어디?”

“…….”

묘하게 꼬치꼬치 캐묻는 지예원의 태도에 안수호의 뒷목에 써늘한 감각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예원이한테는 오늘 하늘이하고 놀러간다는 거 얘기하지 않았구나.’

딱히 숨겨야 할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놀러간다 과시할만한 일도 아니었다. 안수호는 두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했지만, 그는 가급적 그녀들 앞에서 다른 연인의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으려 했기에 더더욱.

‘사실대로 말하면 토라지……지는 않겠지?’

만약 지금이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강하늘은 분명 토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지예원은 그녀보다 성숙했고, 안수호의 사정을 이해해주는 여자였다. 이에 안수호가 강하늘과의 데이트에 대해 이실직고하려던 순간.

“놀이공원 가지? 강하늘이랑 같이.”

“어?”

지예원이 먼저 선수를 치고 들어왔다. 마치 그의 속내를 뻔히 읽었다는 듯이.

“어떻게 안 거야?”

“하늘이가 어제 나한테 전화로 이야기해줬거든. 자기 이번 주말 내내 너랑 함께한다고. 토요일엔 놀이공원에서 놀고 일요일엔 서울 관광지 둘러본다나?”

“하늘이가 그랬다고……?”

“응. 그렇다고 막 놀리는 식으로 이야기한 건 아니었어. 오히려 사과하더라. 어쩌다보니 이번 주말에는 자기가 널 독점해버리게 됐다면서. 대신 다음 주말에는 나보고 마음껏 너랑 즐기라던데?”

안수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두 여자들끼리 연락을 주고받았단 사실이 조금 얼떨떨했다. 한편으로는 두 사람이 나름 친해진 것 같아서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깝게도, 나 다음 주 주말은 이미 알바 시프트가 꽉 찼거든. 그래서…….”

말끝을 흐린 지예원이 두 팔을 벌리며 자기 차림새를 과시했다. 그러자 안수호가 살짝 놀란다.

박시한 사이즈의 푸른색 맨투맨에 밑단이 허벅지 시작지점에서 끊기는 짧은 핫팬츠. 그 아래로 길게 이어지는 검정색 레깅스에 깔끔한 컨버스화에 이르기까지.

분명 지예원은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참이라 했는데, 어째 그녀의 복장은 완벽한 외출용 복장이었다. 심지어 다시 보니 얼굴에도 화장기가 감돌았으며 머리카락도 완벽하게 세팅을 마친 뒤였다.

“지예원. 너 설마…….”

“그래서. 오늘 니들 데이트에 꼽사리 좀 끼려고. 어차피 원래 둘이서만 만나는 것도 아니더만. 하늘이 동기들이랑 같이 간다며? 거기 나 한 명쯤 더 껴도 상관없지?”

"그건……."

얼떨떨한 얼굴로 말문을 잃은 안수호를 보며 지예원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왜, 싫어?”

지예원이 고개를 살짝 갸웃하자 곱게 손질된 머리카락이 찰랑이며 흘러내렸다. 복도에 내리쬐는 따스한 햇살에 그녀의 미소가 유독 밝게 빛나 보이고.

그 요망한 미소 앞에서, 안수호는 차마 싫다고 고개를 저을 수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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