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140화 (141/266)

〈 140화 〉 139. 데이트 약속

* * *

1학년 랭킹 1위인 류태현. 그리고 랭킹 2위인 한겨울.

그 두 사람의 랭킹전 중간결산은 별다른 이변 없이 류태현의 승리로 끝났다. 문자 그대로 박살이 난 경기장 한가운데에서 두 사람이 의례적으로 악수를 나눴다. 허나 류태현과 달리 한겨울의 표정은 결코 좋지 못하다.

“좋은 시합이었어. 며칠 사이 몰라볼 정도로 강해졌더라. 하마터면 질뻔했어.”

류태현의 말은 진심이었다. 경기장 바닥을 분쇄해 바위로 공격한다는 발상을 하지 못했다면 정말 그가 질 수도 있는 시합이었다. 심판에 의한 닥터 스톱이든 시간 종료에 의한 판정패든 말이다.

물론 그 두 경우 모두 규칙 때문에 패배하는 것이지 류태현이 한겨울과의 ‘싸움’에서 진 것은 아닐 테지만. 적어도 한겨울이 시합이라는 틀 안에서나마 류태현을 몰아붙였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류태현은 진심을 담아 그녀를 격려했으나.

“…….”

그 격려조차 한겨울에겐 승자의 여유, 내지는 비웃음으로만 느껴졌다. 그녀의 표정에는 분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만 허망하고 허탈한 감정만이 옅게 풍겨올 뿐이었다.

악수가 끝나자마자 한겨울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서둘러 경기장을 나섰다. 마치 자신의 패배가 부끄럽고 치욕스러워, 한시도 더 이곳에 남아있고 싶지 않은 것처럼.

도망치듯 떠나는 그 뒷모습을 류태현이 조금 씁쓸한 얼굴로 바라봤다. 경기에는 진심으로 임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류태현은 한겨울을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한겨울의 저런 모습에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허나 그렇다고 그녀를 붙잡을 순 없었다. 그가 무신경하게 같잖은 위로의 말이라도 건넸다간, 그것이야말로 승자의 기만이요 비웃음이 될 테니까.

패배의 설움은 남이 풀어줄 수 없다. 그녀 스스로 딛고 일어서야 할 문제였다. 류태현은 패배를 모르는 남자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패배를 대하는 자세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걱정이었다. 안 그래도 자존심이 강한 한겨울이, 혼신의 준비를 다한 이번 시합에서도 패배했다는 충격에서 잘 빠져나올 수 있을까, 그것이 걱정이었다.

“결국 원작대로 흘러갔네요.”

한편 한겨울이 막 경기장을 나섰을 즈음, 때마침 안수호와 강하늘도 반대편에서 경기장을 나서고 있었다. 류태현을 보고 간다던 류설&류진 남매와 달리 두 사람은 이후 일정이 있었기에 두 사람은 서둘러 경기장을 나섰다. 안수호는 한겨울의 상태가 신경 쓰이긴 했으나, 강하늘을 놔두고 그녀를 쫓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겨울이 나름 성장했다곤 하지만 류태현한테는 안 됐나 보네요. 아니면 한겨울이 강해진 것처럼 류태현도 강해진 걸까요?”

“글쎄. 경기 내용만 보면 거의 한겨울이 쭉 우세를 잡았었어. 비행이 조금만 더 능숙했더라면 아마 한겨울이 이겼을 수도 있었겠지.”

안수호는 이번 경기의 흐름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었다.

애초에 한겨울은 초능력의 상성에서만큼은 이미 류태현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런 그녀가 번번이 패배한 것은 기술과 센스의 부족 때문.

허나 기술에 대해선 이번에 발전의 성과를 보여주었고 센스 또한 나날이 성장하는 중이었다. 안수호는 1학기가 끝나기 전에는 한겨울이 류태현에게 승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에이. 그래도 류태현이 주인공인데 설마 한겨울한테 지겠어요?”

“질 수도 있지. 시합이랑 싸움은 다른 거니까.”

“어떻게 다른데요?”

“여러 가지가 다르지. 판정패나 닥터 스톱이 없다면 류태현도 좀 더 적극적으로 달려들 수 있을 테고. 한겨울의 비행은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니까. 그냥 체력이 떨어질 때까지 도망 다니다가 역습하면 그만이야. 랭킹전에서는 경기 시간 때문에 그 수를 못 쓴 모양이지만. 게다가…….”

안수호가 잠시 고민에 빠진 듯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말했다.

“나는 아직도 의문이야. 과연 오늘 류태현이 진심을 발휘한 게 맞기는 한 건지.”

“진심이 아니었다고요?”

“류태현은 완성형 주인공이라서. 피의 겨울방학 에피소드 이전에는 이렇다 할 성장 이벤트가 없거든. 만약 겨울방학 시점의 전투력을 류태현이 이미 가지고 있다면……. 오늘 시합에서의 모습은 아마 진심이 아니었을 거야. 애초에 탈리스만도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탈리스만이야 랭킹전이니까 일부러 안 쓴 걸 수도 있죠. 템빨로 이기는 건 비겁하잖아요.”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안수호는 특수대책과 전과부터 시작해 온갖 싸움에서 템빨의 혜택을 지대하게 누렸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강하늘이 배시시 웃으며 안수호에게 팔짱을 꼈다.

“에이. 오빠는 전부 시합이 아니라 실전이었잖아요. 그거랑 이건 경우가 다르죠. 그리고 원래 빙의물 주인공은 템빨 기연빨 스킬빨로 승승장구하는 게 국룰이잖아요. 안 그래요?”

“승승장구는 무슨. 시작부터 지금까지 고생밖에 안 한 것 같은데.”

“그래도 연애 부문에선 나름 승승장구 아니에요? 겨우 두 달인가 세 달 만에 히로인 둘이나 공략 완료했잖아요.”

주인공이니 히로인이니 공략이니. 강하늘은 꼭 안수호의 인생이 소설이라도 되는 듯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았다. 실제로 소설에 빙의당한 인생이니 반쯤은 맞는 말이었기도 하고.

“……참고로 메인히로인은 저예요.”

그렇게 덧붙인 강하늘이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안수호의 팔을 꽈악 안았다.

자신이 메인히로인이라는 건 즉, 은연중에 지예원을 서브히로인 취급한다는 것이었다. 별다른 악의가 있어 한 말은 아니었을 테지만, 강하늘만큼이나 지예원도 사랑하고 있는 안수호로선 조금 듣기 거북한 말이었다.

‘심정은 이해가 간다만…….’

강하늘이 보기에 지예원은 캐릭터에 불과하고, 반면 자신은 안수호와 같은 ‘진짜 세상’ 출신이니 자기가 메인히로인이라며 자신할 법도 했다. 애초에 지금의 관계가 성립된 것부터가 강하늘의 그러한 우월감이 알게 모르게 작용한 덕도 있었고.

그렇지만.

­꼬집.

“윽?”

안수호는 강하늘의 메인히로인 선언에 무어라 답하는 대신, 말없이 웃으며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흠칫 놀란 강하늘이 눈을 가늘게 뜨며 쏘아붙였다.

“……머하은 거혜여?”

볼이 당겨진 탓에 강하늘의 발음이 귀엽게 뭉개졌다.

“그런 식으로 줄 세우려 하지 마. 너나 예원이나 난 똑같이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좀 사이좋게 잘 지내주면 안 될까?”

“예워니 언니랑 싸울 생가근 없지만…….”

강하늘이 고개를 휙 돌리며 안수호의 손가락을 뿌리쳤다. 당겨져 있던 볼이 원상태로 돌아가며 탄력 있게 탱글거렸다.

“……오빠 1번 여친 자리는 저어어어얼대 양보 못해요. 사귄 순서는 늦지만 제가 정실이고 제가 메인이라고요.”

“나한텐 둘 다 똑같다니까 그러네.”

안수호의 핀잔에 입을 다문 강하늘이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빠도 참 고지식하네요. 어차피 지금 오빠랑 저 단 둘밖에 없는데 여기서라도 ‘그래 하늘아 네가 첫 번째야.’ 라고 빈말이라도 말해줄 수도 있잖아요. 그냥 그 말이 듣고 싶었던 건데.”

그 말대로, 조금 전 메인히로인 선언은 딱히 지예원보다 앞서겠다느니 뭐니 하는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그저 안수호에게 어리광부리고 싶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안수호는 철저했다.

“미안. 그렇지만 두 사람하고 사귀게 된 뒤로, 다시는 둘한테 거짓말하지 말자고 다짐했거든.”

“착한 거짓말은 괜찮잖아요!”

“그럼 넌 내가 예원이랑 단 둘이 있을 때 내가 예원이한테 너보다 예원이를 더 사랑한다고 말해도 괜찮아?”

“윽…….”

미처 그 부분은 생각지 못했는지 강하늘의 말문이 막혔다. 머릿속으로 별 의미도 없는 저울질을 한참 하던 그녀가 이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

“……그건 싫어요. 설령 제가 듣지 못하는 곳이라 해도, 오빠가 저보다 예원 언니가 좋다고 말하고 다니는 건 못 참아요.”

강하늘이 토라진 듯 고개를 홱 돌렸다. 그렇지만 안수호의 팔에 걸친 팔짱은 여전히 풀지 않은 채였다. 삐진 척은 하지만 별로 감정이 상하진 않은 모양.

그 모습에 안수호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말없이 강하늘의 옆모습을 바라보기를 약 30초.

“오빠. 저희 이번 금요일에 어디 놀러가요.”

“응?”

잠시간의 침묵을 깨며 강하늘이 갑작스럽게 제의했다.

“금요일? 금요일이면 내일모레 말하는 거야? 바로 토요일에 같이 놀이공원 가기로 했잖아?”

“금요일도 만나고 토요일도 만나면 되죠. 왜요. 혹시 싫어요?”

“아니, 싫은 건 아닌데…….”

“그럼 상관없잖아요. 금요일 낮에 저 시험 끝나니까. 시험 끝난 기념으로 단둘이서 데이트라도 하자고요. 토요일은 태초의 은 빼돌려야해서 제대로 놀지도 못할 테니까.”

그 갑작스러운 데이트 신청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일종의 보상심리였다. 안수호가 자기 장단에 맞춰주지 않아 샘이 났으니 데이트로 자기를 달래주라는. 유치하고 치기어린 떼쓰기였다.

안수호는 그러한 내막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녀의 떼를 받아주고 싶었으나.

“미안. 금요일 밤에는 이미 약속이 있어서.”

“……예원 언니랑요?”

“아니. 경비대 팀 회식이 있거든. 이번에 소연이가 무슨 표창을 받게 돼서.”

“소연 언니가 표창……을 받는다고요?”

강하늘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채소연과 그리 길게 알고 지낸 건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그녀는 채소연이라는 인간이 어디서 표창을 받을만한 인물상이 아니란 건 잘 알고 있었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안수호는 미국에서 일어났던 테러 사건과 그 이후 흐름에 대해 강하늘에게 설명해주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설명을 듣던 그녀는 엉망진창이었던 기자회견 이야기를 듣자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고, 그 기자회견 덕에 오히려 화제가 되어 대통령 표창을 받게 되었다는 말이 나올 즈음엔 얼굴에서 표정이란 게 사라져 있었다.

“……이거 다 사실이에요? 예원 언니랑 데이트하는 거 저한테 숨기려고 일부러 거짓말치는 거 아니죠?”

“다 사실이야. 애초에 거짓말을 치려했으면 더 그럴듯하게 쳤겠지.”

“그건 그렇네요…….”

그 반응 하나에 강하늘이 채소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고작해야 두세 번 마주친 게 끝인데도 채소연의 이미지는 이미 나락 저 깊은 곳까지 추락해 있는 모양이었다.

“회식……이면 빠지면 안 되는 거죠?”

“아무래도 그렇지. 팀 회식이라서 나 포함 7명밖에 없기도 하고. 애초에 회식이 그리 자주 있지도 않았거든. 어지간하면 한 명씩은 근무가 잡혀있으니까.”

안수호도 딱히 회식을 가고 싶진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민채령, 채소연과 함께 하는 술자리라니. 여러모로 힘들고 피곤할 게 뻔했기에.

그렇지만 사회인에겐 빠져선 안 되는 자리가 있는 법이라고. 안수호가 무안하게 말하자 강하늘이 힘없이 대답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그 얼굴에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안수호가 불현듯 아라엘이 주었던 지도를 떠올렸다.

“금요일은 안 되지만……. 일요일이라도 괜찮으면 혹시 같이 서울에라도 놀러 갈래?”

“서울이요?”

“응. 저번에 공략 회의 때문에 한 번 가봤는데 원래 살던 세상 서울이랑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르더라고. 너도 원래는 서울에 살았었으니까, 조만간 한 번 같이 당일치기라도 여행 다녀오면 좋겠다 싶었거든.”

아라엘이 말했던 ‘인간으로 위장해 이쪽 세상에 정착한 정령’은 서울 종로구에 살고 있었다. 강하늘과 서울 관광도 즐기며 겸사겸사 그 정령도 만나 정령의 가호인지 축복도 받으면 일석이조일 거라고.

이처럼 안수호는 마침 잘 됐다 싶어 가볍게 말한 것이었으나, 정작 그 말을 들은 강하늘은 얼굴 가득 기쁨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좋아요! 같이 가요 서울! 오빠랑 저 단둘이 가는 거 맞죠?”

“그럼. 당연히 단둘이지.”

“그럼 완전 데이트네요! 아니, 커플 여행인가? 아무튼 진짜 기대되네요! 오늘 바로 표부터 예약하죠!”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하자. 당장 토요일에 놀이공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잖아. 무사히 끝나면 다행이지만 어쩌면 너나 내가 다칠 수도 있고…….”

그 말에 강하늘의 표정이 일순 가라앉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가 포근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다치지 않으면 되죠. 어차피 오빠는 그날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 알고 계시잖아요. 전부 잘 될 거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일요일에 어디 놀러갈지나 같이 생각해요.”

언뜻 무신경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그건 강하늘 나름대로의 격려이자 응원이었다.

전부 잘 될 거라고.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 따듯한 마음씨를 느낀 안수호가 피식 웃었다. 그의 손이 강하늘의 뒷덜미를 살며시 쓰다듬는다.

“그래. 다 잘 되겠지. 고마워. 하늘아.”

아라엘에게서 난이도 조정에 대해 들은 그는 결코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지만, 강하늘 앞에서만은 이를 티내지 않았다. 티를 내봤자 강하늘이 걱정하기만 할 테니까.

“네. 다 잘 될 거예요.”

그런 그의 속내를 모른 채, 강하늘은 안수호의 손을 꽈악 붙잡으며 그렇게 격려해주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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