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 137. 류태현vs한겨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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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대부분의 랭킹전은 관객이 그리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
국내 최고의 아카데미 랭킹전인데 관객이 없다니 무슨 말인가 싶을 수도 있다. 허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린하우스의 헌터과 한 학년 정원은 약 1,000명. 4개 학년을 다 합하면 4,000명에 육박한다. 한 학기에 치러지는 랭킹전 경기 수는 가뿐히 일만을 넘기는데 그 모든 경기에 관객이 따를 리가 없잖은가.
랭킹전도 결국엔 일종의 스포츠 경기다. 관객들은 흥미롭고 재미있는 경기만 보길 원한다. 중위권 이하 순위의 학생들이 겨루는, 소위 말하는 ‘재미없는’ 랭킹전의 관객은 경쟁 상대의 전력을 확인하러 온 비슷한 순위의 학생들, 그 외 가끔 보이는 중하위권 길드의 스카우터가 전부였다.
허나 이는 반대로 말해서 ‘재미있는’ 경기에는 그만큼 관객이 몰린다는 뜻이기도 했다. 실제로 상위권 학생들이나 화제성 있는 학생의 경기는 매번 상당한 관객 수를 보여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류태현과 한겨울의 경기는 특히 인기가 많았다. 둘 다 남녀 수석입학자 출신에, 두 사람 모두 지금껏 단 한 번도 랭킹전 1, 2위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없었다. 무패의 1위에게 계속해서 도전하는 2위라는 대결 구도는 뭇 학생들의 흥미를 끌기에 더할나위 없었다.
그리하여 현재.
두 사람의 랭킹전 중간결산 경기가 열리는 그린하우스 제11 야외 경기장은 상당한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마침 시간도 오후 6시 30분인지라 학생뿐만 아니라 퇴근하던 교수나 직원들도 꽤 많았다. 개중에는 사전에 출입 허가를 받아둔 대형 길드 관계자들도 몇몇 보였다.
“잠시만요! 지나갈게요!”
그런 인파를 가로지르며 안수호와 강하늘, 두 사람이 적당히 빈자리에 앉았다. 경기 시작까지 시간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관중석은 몰려든 인파로 혼잡 그 자체였다. 덕분에 두 사람이 앉은 곳은 경기장으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구석진 자리였다.
“후아. 진짜 사람 엄청 많네요.”
“그러게. 나도 설마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어. 저 두 사람 랭킹전을 본 건 처음이니까.”
“평소에도 많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닐걸요? 아마 중간결산 경기라 사람이 많이 몰렸나 봐요.”
“하긴. 오늘 경기에서 누가 이기냐에 따라 중간순위 1, 2등이 결정되는 거니까.”
“오빠는 누가 이길 거라 생각해요?”
그 말에 안수호는 잠시 고민하듯 팔짱을 끼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말했다.
“원작에선 류태현이 이긴 경기였어. 그렇지만 한겨울은 지금 원작보다 훨씬 강해진 상태야. 그러니 어쩌면…….”
“어쩌면 한겨울이 이길 수 있다고요?”
안수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로서도 확답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였다.
강함과 한계가 명확하게 드러난 겨울방학 이후의 류태현과 달리, 이 시기의 류태현의 실력은 작중인물은 물론이고 독자들에게도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래서 현 시점의 강함을 쉽게 가늠할 수가 없었다.
‘만약 지금 류태현의 수준이 겨울방학 시점하고 별반 차이가 없다면……. 한겨울이 류태현을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
“어? 하늘아!”
그때 관중석 옆 계단에서 발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설이?”
강하늘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며 올라온 여학생은 그녀와 같은 1분반 소속이자, 강하늘의 기숙사 옆방을 쓰고 있는 류설이었다. 그 뒤로는 류설의 쌍둥이 오빠이자 강하늘의 첫 랭킹전 상대였던 류진이 뒤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공부하다 말고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나 했더니 너도 태현이 경기 보러 온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같이 보러 가자고 말할걸 그랬다.”
“으응. 아니야. 원래 보러 올 생각 없었는데 지나가다 우연히 들른 거거든.”
“맞다. 약속 있다 그랬었지? 어? 근데 약속은 어쩌고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그게…….”
강하늘이 슬쩍 안수호를 바라보자 류설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에게 향했다. 안수호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다.
“처음 뵙겠습니다. 경비대 특수대책과 소속 안수호라고 합니다.”
“아. 네. 하늘이랑 같은 분반 류설이라고 해요. 그, 안녕……하세요?”
류설이 어색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당황한 그녀는 순간 왜 낯선 경비대원이 하늘이 옆에 앉아서 자신에게 인사하나 이해하지 못했다.
“저번 던전 실습 때 파견 나와주셨던 대원님이시죠?”
그때 류설의 뒤에서 류진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설이 오빠 류진이라고 합니다. 말씀 듣기 전까지는 긴가민가했는데 아무래도 맞는 것 같네요.”
“맞습니다. 그걸 또 기억하고 계셨네요.”
“전에도 한 번 마주쳤던 적이 있어서 얼굴이 익숙했거든요. 저랑 하늘이 랭킹전 때 구경하러 오셨었죠?”
그 말에 안수호는 뒤늦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서로 말 한마디 안 한 채 스쳐 지나간 정도였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니. 기억력이 남다르다며 안수호가 작게 감탄했다.
“아, 아아!!”
그리고 그제야 뒤늦게 류설도 안수호를 기억해냈다. 그녀가 과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때 던전에서 하늘이 구해줬던 대원분이시죠? 어쩐지. 맨날 혼자 다니던 애가 오늘따라 약속 있다길래 누군가 싶었거든요. 아, 여기 자리 비었는데 앉아도 되죠?”
안수호나 강하늘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류설이 풀썩 자리에 앉았다. 앉은 자리는 왼쪽에서부터 순서대로 류진류설강하늘안수호 순이었다.
“하늘아.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
“어? 으응. 뭔데?”
자리에 앉자마자 류설이 강하늘에게 바짝 붙으며 물었다. 그 거리감 없는 모습이 살짝 부담스러웠던 강하늘이 몸을 조금 내뺀 순간.
“혹시 둘이…………사귀는 사이야?”
지체하지 않고 류설이 그렇게 훅 치고 들어왔다.
“엣, 어?”
강하늘은 당황했다. 아는 사람을 마주칠 거라고도, 그 사람이 안수호와의 관계를 물어볼 거라고도 미처 생각지 못했으니까.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강하늘이 전전긍긍한 얼굴로 안수호를 돌아봤다. 그러자.
“네. 사귀고 있습니다.”
안수호가 몸을 숙여 고개를 내밀며 그렇게 대답했다. 더욱 당황한 강하늘이 입모양 만으로 묻는다. 그렇게 밝혀도 되는 거냐고.
기실 그녀는 안수호와의 연애를 일종의 비밀 연애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의 관계에는 두 사람뿐 아니라 지예원까지 끼어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남들에게 자신들이 사귄다는 사실을 비밀로 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한텐 말해도 상관없겠지. 아카데미 학생이니 오고가며 자주 만날 테고. 이 둘이 지예원하고 마주칠 일도 없을 테니까.’
“그렇지 하늘아?”
그렇게 생각한 안수호는 아무런 거리낄 것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강하늘에게 되물었다. 류설과 안수호 사이에 껴서 어쩔 줄 몰라하던 그녀가 이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그러자 류설이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눈을 크게 떴다.
“와. 미쳤다 미쳤어! 이거 진짜야? 자길 구해준 대원이랑 사귄다고? 대박! 완전 드라마 같다 진짜!”
그녀가 연신 탄성을 흘려대며 몸을 들썩였다. 한창 풋풋할 시기인 20살 대학교 새내기였던 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한 친구의 연애사에 엄청 흥분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럼 그때 옆방에서 하늘이랑 질펀하게 섹스하던 상대가 저 사람인 건가?’
두 사람이 몸을 겹쳤던 밤. 옆방에 있던 류설은 그 둘이 나누던 정사 소리를 전부 듣고 있었다. 벽 너머에서 새어나오던 달뜬 교성과 신음소리를 떠올린 류설의 뺨이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졌다.
“세상에…….”
“이, 이게 그렇게 놀라워 할 일이야……?”
그런 사정도 모른 채, 강하늘은 격한 반응을 보이는 류설을 보며 부끄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류설은 흥미로워하는 표정을 전혀 숨기지 않은 채 거듭 물었다.
“그, 하나 더 물어봐도 돼? 혹시 둘이 사귄 지는 얼마나 됐어? 둘이서 진도는 어디까지”
“설아. 그만.”
보다 못한 류진이 흥분한 자기 동생을 만류했다. 그가 경기장을 가리키며 그녀의 관심을 돌린다.
“슬슬 경기 시작한다.”
그 말처럼. 어느새 경기장 중앙에는 두 선수와 심판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이크를 잡은 심판이 경기 시작 전 두 사람의 간단한 이력과 경기 규칙을 관객들에게 설명했다.
“두 분은 누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안수호가 넌지시 묻자 두 쌍둥이 남매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 이내 두 사람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답한다.
“저는 류태현이요.”
“저도 류태현이 이길 것 같습니다.”
“겨울이는 다 좋은데 너무 쉽게 흥분하는 게 문제예요. 그래서 늘 초반에는 거세게 몰아붙이다 중반 이후에 태현이한테 역습 당하고 지더라고요.”
“초능력 상성 자체는 한겨울이 우세하지만 기술이나 센스는 류태현 쪽이 압도적이죠. 센스라는 게 하루아침에 느는 게 아니니, 아마 오늘도 무난하게 류태현이 이기고 끝날 겁니다.”
두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 류태현의 승리를 점쳤다. 그리고 그 의견에는 안수호도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과연 어떨까.’
비록 류태현의 강함이 베일이 싸여 있다곤 해도, 한겨울 또한 원작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한 상태였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녀가 이번에 제대로 일을 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안수호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경기장을 내려다봤다. 어느덧 두 사람은 규정 거리만큼 물러선 채 카운트다운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5.
관객들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다본다.
4.
류태현이 쭈욱 기지개를 켜며 몸을 푼다.
3.
한겨울의 양손에 샛노란 불꽃이 피어오른다.
2.
왼쪽 다리를 쭈욱 뒤로 빼며, 류태현이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것처럼 자세를 낮춘다.
1.
그리고 마침내 카운트다운이 1에 달한 순간.
“오늘이야말로 이길 거야.”
“오늘도 내가 이길 거야.”
두 사람의 선언이 겹치고, 바로 다음 순간 심판이 손을 크게 휘두르며 외쳤다.
경기 시작!!
타앙!
류태현의 몸이 총알처럼 쏘아졌다. 둘 사이의 거리는 약 50미터. 류태현이라면 2초면 충분히 좁힐 거리였다.
타앗!
한겨울이 도망치듯 거리를 벌렸다. 동시에 그녀의 오른손에서 자그마한 불덩이가 연속으로 쏘아졌다.
탕! 타앙! 탕 탕!
고작해야 야구공 정도의 보잘 것 없는 크기. 그러나 전보다 훨씬 날카롭게 날아드는 그 기세에 류태현이 미소 지었다. 그가 거의 지면에 눕다시피 미끄러지며 날아든 불덩이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낸다.
파앗!
직후 그가 허리힘만으로 몸을 일으키며 다시 달려들었다. 한겨울의 견제에도 그의 돌진은 조금도 지체되지 않았다.
‘예상했던 바야!’
허나 한겨울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가 앞으로 뻗었던 오른손 대신 줄곧 불꽃을 모으던 왼손을 내밀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가 일순 압축되더니 다음 순간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퍼버버버버버버벙!!!!
폭발은 한 번이 아니었다. 수십 번의 폭음이 겹치고 수백 개의 자그마한 불꽃 탄환들이 류태현의 몸을 두드렸다. 류태현의 접근을 막기 위해 개발한 신기술, 버드샷이었다.
“윽?!”
허나 그 기세는 안수호와의 대련 때보다 월등히 강해져 있었다. 산탄처럼 몸을 두드리는 불꽃에 류태현의 돌격이 일순 주춤한다.
‘지금이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한겨울이 양손을 모아 권총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녀의 어깻죽지부터 타오른 불꽃이 한순간에 손가락 끝에 모이고, 이내 찬란한 백색 섬광이 공기를 찢으며 질주했다.
스파앙!!
한겨울의 두 번째 신기술. 관통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AP(Armor Piercing)샷.
그 공격에 류태현이 두 팔을 교차하며 방어 자세를 취하려 했다.
“!!”
허나 바로 다음 순간,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낀 그가 방어에서 회피로 자세를 전환했다. 그로서는 드물게, 다소 급한 표정으로.
퍼억!!
급하게 몸을 뒤튼 류태현의 왼쪽 어깨에 백색 섬광이 작렬했다. 화끈하게 올라오는 작열통에 그가 지면을 박차며 크게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에 관중석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류태현이 물러섰다고? 지금껏 한 번도 저런 적 없었는데?”
“방금 그 기술 뭐였어? 한겨울 능력은 불꽃 아니야? 근데 방금 건 꼭 무슨 레이저 같은…….”
“이거, 아무래도 한겨울이 중간결산을 두고 아주 칼을 갈고 나왔나본데?”
거의 대부분 류태현의 승리를 점치던 관중석의 분위기가 서서히 반전하기 시작한다. 그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한겨울이 류태현을 향해 씨익 웃었다.
“어때? 이번엔 좀 다르지?”
그 말에 류태현의 입가에서 처음으로 웃음기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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