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 132. 천사 아라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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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과의 대련은 내 패배로 끝났다. 정확히는 기권이었지만, 기권도 패배는 패배니까.
대련이 끝난 뒤 한겨울은 이 정도면 류태현도 이길 수 있을 거라며 자신만만했다. 허나 그의 진짜 강함을 아는 나로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 시점의 류태현의 전력은 A급 상위 수준. 아무리 한겨울이 일주일 사이에 부쩍 성장했다곤 하나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원작에서도 ‘전력을 발휘한 류태현’을 한겨울이 처음으로 이긴 건 2학년에 올라간 이후였으니까.
뭐, 그거야 한겨울이 알아서 할 일이고.
그렇게 내 주말 유일한 일정이 끝났다. 그 이후엔 이렇다 할 일 없이 주말을 보냈다.
토요일에는 집에서 푹 쉬다가 저녁 즈음에 하늘이가 시험 족보를 받으러 예원이네 집에 온 김에 같이 저녁을 먹고(사실 족보는 이메일로 보내면 되기에 굳이 직접 올 필요는 없었다), 일요일에는 교직원용 트레이닝 센터에서 운동과 훈련을 마친 뒤 저녁 타임 근무를 3시간 들어갔다.
그렇게 주말이 끝나고 일요일 밤. 정확히는 월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나는 천사 아라엘을 만나기 위해 그녀의 말대로 영랑호 호수공원 시계탑 앞에 혼자 와있었다.
시계탑이 가리키는 시각은 오전 2시 29분.
이윽고 분침이 달칵, 하고 움직여 30분을 가리키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시계탑 앞 공간에 푸른 일렁임이 발생하고.
탓.
그 일렁임 사이에서 흰색 날개를 지닌 천사 한 명이 내려왔다.
연한 보라빛이 도는 백색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동자. 사각형으로 각진 동공은 그녀가 평범한 인간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었다.
허리춤까지 깊게 파인 드레스 자락이 바람조차 불지 않음에도 천천히 나풀거렸다. 얇은 비단 같은 재질의 드레스 한 벌만이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의 전부였다.
키이잉.
머리 위에 떠오른 노란 헤일로가 밝은 빛을 뿜어 새벽의 어둠을 몰아냈다. 아무리 천사의 강림이라지만 참 요란했다. 그 눈부신 광경에 내가 눈을 찌푸리자, 그런 날 배려한 것처럼 헤일로의 광량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고.
“……오랜만에 뵙네요.”
이내 차분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허나 꾸며낸 차분함에 불과했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내리깐 시선.
그 자신감 없는 모습에 나는 눈앞의 천사가 일찍이 만났던 그 어리숙한 천사임을 실감했다.
“그래. 오랜만이야.”
천사 아라엘.
날 이 세상에 빙의시킨 가증스런 쾌락천마의 부하. 그녀가 떨리는 눈동자로 날 올려다보았다.
“멀쩡히 잘 있는 거 보면 나한테 네 존재를 들켰다는 건 아직 잘 숨기고 있는 모양이네? 쾌락천마도 신이라더니 전지전능한 건 아닌가봐?”
“…….”
내 이죽거림에도 아라엘은 입술을 달싹이기만 할뿐 무어라 반박하지 못했다. 연신 이쪽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는 것이 성격이 유약해도 너무 유약했다.
“그래서. 신의 사자이신 천사님께서 오늘 이렇게 직접 행차하신 용건이 뭐지? 퀘스트 보상 때문이라 그러던데, 직접 이렇게 올 정도면 평범한 일은 아닐 거야. 그렇지?”
“……저, 저번에 약속드린 대로. 다, 당신한테 닥칠 위기를 미리 알려드리러 왔어요. 시스템 메시지는 흔적이 남고, 애초에 전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권한도 없어서 이렇게 직접…….”
“메시지를 보낼 권한이 없다고? 그럼 날 여기로 부른 그 메시지는 뭔데?”
“그건 다른 언니의 도움을 받”
반사적으로 대답한 아라엘이 아차 싶은 얼굴로 입을 가렸다. 그 반응에 내가 비릿하게 웃었다.
“다른 언니? 다른 천사를 말하는 건가?”
“……말씀드릴 수 없어요.”
“말씀드릴 수 없기는. 뻔할 뻔자구만. 즉 나한테 우호적인 천사가 너 말고도 적어도 한 명은 있다는 거네. 좋은 걸 알았어.”
“…….”
아라엘이 분한 기색으로 입술을 잘근 씹었다.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이 천사는 어리숙해도 너무 어리숙했다. 정말 그 쾌락천마의 부하가 맞나 싶을 정도로.
거짓말 하나 제대로 못 하는 그 어리숙함은 그녀가 천사이기 때문일까.
흥미로운 주제였지만 아무래도 좋을 사실이었다. 피식 웃으며 대충 넘긴 나는 문득 든 생각에 질문했다.
“근데 이렇게 직접 날 만나러 와도 괜찮나? 다른 천사들이나 쾌락천마가 보면 어떻게 하려고?”
“지금 당신을 관측하고 있는 언ㄴ……. 천사는 없어요. 천사들은 각자 맡은 업무가 있고 당신을 관찰하는 건 제 업무거든요.”
거기까지 말한 아라엘이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계를 관찰하는 천사가 셋 더 있긴 하지만, 그 천사들은 다른 빙의자들을 관찰하느라 이쪽을 신경 쓰진 않을 거예요.”
좀 전과 달리 이번에는 말실수가 아니라 명백히 말하고자 해서 말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 내용은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른 빙의자‘들’이라고?”
나 외의 빙의자가 하늘이 한 사람이라면 그런 표현을 쓸 이유가 없다. 내 지적에 아라엘이 불안한 얼굴로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이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현재 이 세상에 빙의된 빙의자는 총 네 명. 당신이 아는 강하늘을 제외하고도 아직 둘 더 있어요.”
“그 둘은 누구지?”
“그건 정말 말씀드릴 수 없어요. 당신이 그 두 사람의 정체를 알게 되면 무언가 행동을 취할 게 뻔하니까. 아무런 단서도 없이 빙의자의 정체를 눈치 챈 것처럼 행동하면 다른 천사들이 이상하게 여길 거예요.”
“그런데 왜 빙의자가 두 사람 더 있다는 건 순순히 말해주는 건데?”
“그건……. 라미엘 언니가 그러라고 했거든요. 거기까진 당신에게 말해주는 편이 좋다고.”
“라미엘?”
“네. 라미엘 언니는 어째서인지 당신을 엄청 편애해요. 저한테 당신을 도와주라 한 것도, 이번에 시스템 메시지를 사용할 권한을 빌려준 것도 다 라미엘 언니예요.”
무슨 생각의 변화인지, 좀 전까지만 해도 꽁꽁 숨기던 다른 천사의 존재를 아라엘은 시원하게 밝혔다. 어중간하게 숨기려다 좀 전처럼 덜미를 잡힐 바에야 차라리 말해도 상관없는 정보는 먼저 공개해버리겠다는 심산인가.
‘그나저나 날 편애하는 천사라…….’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내 편의를 봐주는지 알 수가 없으니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허나 설령 속셈이 있다 한들 일단 겉으로는 내게 우호적이고 날 도와주려는 것 같으니, 지금 당장은 잠자코 지켜봐도 괜찮겠지.
“……뭐, 다른 빙의자 관련해선 더 말해줄 수 없다니 이쯤 하도록 하고. 그래서 나한테 닥쳐올 위기라는 건 도대체 뭔데?”
“빙의 초기에 쾌락천마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이런저런 변경점을 만드셨던 건 기억하죠?”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당장 원작에 없던 경비대의 존재는 물론이고, 지금껏 클리어해왔던 퀘스트의 태반은 쾌락천마가 날 엿먹이기 위해 멋대로 원작을 비틀어온 결과였으니까.
“……세상을 만든 신이라고 해도 하계에 일정선 이상의 간섭을 하는 건 금지되어 있어요. 하지만 쾌락천마님께선 당신과 관련해 그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기 직전까지 하계에 개입하셨어요. 특히 라미엘 언니가 멋대로 기사의 무덤을 앞으로 당긴 것 때문에 차원 간의 벽이…….”
말끝을 흐린 아라엘이 곤란한 표정으로 입술을 연신 달싹였다. 양손의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꼼지락거리며 답답한 표정을 짓던 그녀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자세히 설명은 못 드리지만, 아무튼 사정이 생겨서 쾌락천마님께선 당분간 하계에 직접 개입하지 못하게 되셨어요.”
“이야기만 들어보면 전혀 위기가 아닌데?”
“아뇨. 쾌락천마님께선 스스로 직접 개입할 수 없으시게 된 대신 당신에게 책정된 시련의 난이도를 최상으로 올렸어요. 세상의 모든 변수가 당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게끔 말이에요.”
그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세상 모든 변수가 내게 불리하게 작용한다니. 대충 들어봐도 결코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이전까지 당신에게 찾아온 시련들이 의도된 시련이었다면, 이제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갖가지 고난이 무작위로 찾아올 거예요. 아니, 이미 시작됐어요. 강하늘 납치범들이 그린하우스의 보안을 그렇게 쉽게 뚫을 수 있었던 것도, 빌헬름이 원작보다 강해진 것도 다 시련의 난이도가 올라간 탓이에요.”
“하.”
하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아라엘이 예시로 든 두 사건 모두 최근 나나 내 주변 사람의 목숨을 위협했던 대사건들이었다. 그런 사건들이 앞으로도 무작위로 찾아오게 된다 생각하니 앞날이 막막했다. 심지어 사건의 발생이 정말 ‘무작위’라면 신의 사자인 아라엘조차 내게 미래를 경고해줄 수 없으리라.
“시발. 이제 좀 살만하나 싶었는데 갈수록 산 넘어 산이네.”
답답한 마음에 무심코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찾다가 집에 두고 온 걸 떠올렸다. 모처럼 담배를 끊자고 다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좆같은 소식을 듣게 되다니, 마치 세상이 나보고 금연하지 말라며 부추기는 것 같았다.
‘뭐, 생각해보면 전하고 그리 달라진 것도 없나.’
애초에 원작 전개가 비틀리는 거야 쾌락천마가 개입할 때나 지금이나 거기서 거기였다. 차이점은 그 과정이 쾌락천마의 통제 하에 있느냐 아니냐 뿐이었다.
‘오히려 좋은 일일 수도 있어. 쾌락천마조차 개입할 수 없이 무작위로 원작이 변한다면 그 안에서 내가 하기에 따라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테니까.’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번 기사의 무덤 공략이었다. 원작보다 훨씬 일찍 출현한데다가 아라엘의 말에 따르면 난이도 또한 상승했지만, 어떻게든 공략에 성공해내어 설아현이라는 인맥과 다양한 보상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로자리오는 도대체 뭐였지?’
빌헬름이 언젠가 도움이 될 거라며 내게 넘긴 붉은색 로자리오.
받자마자 붉은 액체로 변해 내 체내에 침투한 그건 도대체 뭐였을까. 혹시 아라엘이라면 알지 않을까 싶어 그녀를 바라보자 순진한 천사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먼저 물었다.
“뭔가 궁금하신 거라도 있으신가요?”
“기사의 무덤에 관해서 궁금한 게 있긴 있는데…….”
내가 운을 떼자 아라엘이 흠칫 놀라며 표정을 굳혔다.
“……어떤 게 궁금하신데요?”
처음에는 빌헬름의 로자리오에 대해 물어보려 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기사의 무덤과 관련해 미심쩍은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님을 떠올렸다. 이미 공략이 끝난 던전이긴 하지만 던전에서 도망친 기사도 있으니. 이참에 궁금했던 전부 물어보자는 심산으로 나는 본래 생각과 다른 질문을 건넸다.
“난이도 상승 때문에 기사의 무덤이 원래보다 어려워졌다고 했잖아. 그럼 그 원작에 없던 사방기사도 그러한 난이도 상승의 일환인가?”
도망친 기사, 아인 디트리히에 대해 묻기 위해 운을 떼듯 건넨 말.
“…….”
허나 아라엘은 어째서인지 그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혹은 대답하지 못했다. 허나 모르는 눈치는 아니었다. 우물쭈물거리는 그 얼굴은 마치 말해도 되는 사실과 그렇지 않은 사실을 가늠하고 있는 듯했다.
“……왜 그러지?”
그 태도에서 나는 기사의 무덤과 관련해 무언가 중요한 비밀이 얽혀있다고 확신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제껏 잘만 이야기하던 그녀가 망설일 이유가 없을 테니.
“나한테 밝힐 수 없는 내용인가?”
내 물음에 아라엘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이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라미엘 언니는 당신한테 기사의 무덤에 관해 이야기해도 좋다고 말했어요. 아니, 이야기해주라고 당부했죠.”
“그럼 이야기하면 되잖”
“그렇지만 전 반대했어요. 아무리 언니가 당신을 편애한다 하더라도 말해줄 수 있는 내용이 있고 아닌 내용이 있는 거니까…….”
말하자면 아라엘은 언니의 명령과 자신의 기준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줏대라곤 전혀 없어 보이던 그녀가 이렇게나 갈등할 정도라면 필시 보통 일은 아니리라.
‘도대체 무슨 말 못할 비밀이 있길래…….’
그 궁금증은 오래 가지 않았다. 입술을 잘근 깨문 채 갈등하던 아라엘이 이내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기에.
“……그냥 말씀드릴게요. 라미엘 언니가 당신에게 이 사실을 전하라고 한 거엔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테니까…….”
도대체 라미엘이라는 천사가 아라엘에게 어떤 존재기에 이러나 싶었으나 나로선 환영할 일이었다. 어디 말해보라는 듯 살짝 턱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망설이던 아라엘이 마침내 입을 열었고.
“사실 기사의 무덤은…….”
이윽고 그 입에서 흘러나온 진실은, 내가 듣기에도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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