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129화 (130/266)

〈 129화 〉 128. 정실대전(3)

* * *

“후우우.”

흑룡회 본사 길드마스터 집무실.

이미 밤이 깊어진 늦은 시각이었지만 설아현은 여전히 길드에 남아 서류더미와 씨름 중이었다. 조금 떨어진 응접용 소파에 앉은 예카테리나 또한 테이블에 한가득 노트북이며 태블릿이며 펼쳐둔 채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었다.

“카챠. 방금 보낸 서류 확인했어. 이대로 올리면 될 것 같아.”

“네. 회주님. 그럼 협회와 게이트 관리국에 제출할 서류는 다 끝났습니다. 이제…….”

“공략에 참가한 다른 네 길드한테 보낼 공략 보고서 사본, 장비랑 소모품 청구서, 정부 지원금 내역 확인서, 부상자 현황, 던전 내 취득물 분배 결과, 괴수 수색영장 사본……. 그리고 또 뭐더라? 아주 할 일이 태산이네. 카챠.”

“늘 있는 일이죠……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확실히 오버랭크 던전은 관련 서류의 양도 오버랭크군요. 오늘 안에 끝내는 건 무리일 것 같습니다.”

“피곤하면 먼저 퇴근해도 돼.”

그 말에 예카테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회주님께서 퇴근을 안 하시는데 제가 어떻게 퇴근하겠습니까. 저는 회주님의 전속 비서인데.”

“먼저 퇴근해도 된다니까?”

“회주님께서 퇴근하시라는 걸 돌려 말씀드린 겁니다.”

예카테리나가 능글맞게 설아현을 바라봤으나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그 거절의사에 예카테리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회주님. 휴식도 업무의 연장선입니다. 낮에 공략에도 직접 참가하셨는데 오늘 하루는 쉬시지요. 관련 서류야 내일이든 모레든 처리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래도 빨리 처리하는 편이 우리도 편하고 저쪽도 좋잖아. 안 그래?”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예카테리나는 휴식할 마음이 하나도 없는 듯한 자신의 상사를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 자신의 퇴근은 알 바 아니었다. 예카테리나의 마음 속에는 오직 설아현을 염려하는 마음뿐이었다.

“일단 부상자 현황부터 정리하자. 길드별로 입원한 사람하고 가입실한 사람, 약품 지원만 받은 사람으로 나눠서 따로 모아줘. 나중에 복사해서 첨부하기 편하게.”

“알겠습니다. 헌데 안수호 씨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분은 길드 소속이 아닌데. 따로 빼두면 되겠습니까?”

“수호 씨? 수호 씨는……”

미처 생각 못했다는 듯 크게 뜨여진 눈이 이내 부드럽게 풀렸다. 앙증맞게 턱을 괸 채 고민에 빠진 설아현이 이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일단 흑룡회로 분류해놔. 공략할 때 편제도 우리 쪽으로 빼놨으니까 그러는 편이 좋겠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칼같이 대답한 예카테리나는 전자서류와 종이서류를 이렇게 저렇게 분류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일.단. 흑룡회로 분류하는 거지만…….’

한편 업무를 지시한 설아현은 전혀 다른 생각 중이었다.

‘기왕이면 수호 씨가 정식으로 우리 길드에 들어와줬으면 하는데. 다음에 한 번 권유해볼까?’

안수호가 이번 공략에서 벌인 활약상은 눈부시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였다. 태스크 포스의 일원으로 빌헬름과 짧게나마 근접전을 벌였으며 최후의 일격 또한 그가 장식했다. 그 활약상 덕에 공략에 참가한 다섯 S급 길드는 너나할 것 없이 안수호라는 인재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허나 설아현이 안수호를 기용하고 싶어 하는 건 단순히 그의 활약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자신과 같은 회귀자이기에 확보하고 싶은 것 또한 아니었다.

물론 그런 마음들이 없다면 거짓말이리라. 그렇지만…….

‘수호 씨한테는 이번에 잔뜩 받기만 했으니까. 어떻게든 보답해주고 싶어.’

내 사람과 아닌 사람이 확실한 설아현의 안에서 안수호는 이미 ‘내 사람’이었다. 안수호가 흑룡회에 들어오는 미래를 상상하자 자연스레 그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떠오른다.

‘흐으읏♡ 수호야. 이제 그만 괴롭히고 이거 풀어줘. 응? 이렇게 부탁할게에……♡’

‘부탁하는 태도가 글러먹었군. 아무래도 아직 반성을 덜 한 것 같은데?’

‘헤윽♡! 미, 미안해애. 아니, 죄송해여 선생니힘♡ 아혀니, 아현이 이러케 반성하고 이쓰니까하…….’

“읏.”

무심코 떠올린 ‘그 미래’의 광경에 설아현이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에 예카테리나가 슬쩍 설아현을 바라봤지만 이내 다시 서류업무에 집중했다.

‘도대체 어쩌다 그런 관계가 된 걸까? 미래의 나랑 수호 씨는…….’

설아현은 안수호라는 남자를 찬찬히 떠올려봤다. 180을 살짝 넘기는 키에 호들갑 떨 정도의 미남은 아니지만 깔끔하고 준수한 얼굴. 예의 바른 성격에 눈치도 빨랐으며 배려심도 깊었다. 게다가 초인으로서의 강함도 S급에 준하는 수준이니, 보편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안수호는 ‘매력적인 이성’이라는 조건에 부합한다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안수호의 외적 조건들과 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설아현은 남자의 외모나 조건만 보고 사랑에 빠지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가 안수호에게 반했다면 분명 그럴만한 ‘사건’이 있어야 할 터.

‘도대체 무슨 사건이 벌어졌길래 내가 그런 야한 짓을 수호 씨랑 하는 거냐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져만 갔다. 미래시로 엿본 그 특이한 성적취향은 안수호의 취향인지 혹은 자신의 취향인지. 만약 자신의 취향이라면 본래부터 내재되어 있었는데 깨닫지를 못한 건지, 아니면 안수호가 그런 취향을 심어준 건지.

고민에 빠진 그 얼굴은 어느새 홍당무처럼 빨갛게 익어있었다.

‘수호 씨는 지금 뭐하고 있으려나. 내가 수호 씨 때문에 이렇게 머리 아파하고 있는 거, 수호 씨는 꿈에도 모르겠지? 아니면, 설마 수호 씨도 나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려나?’

그랬으면 좋겠다고. 무심결에 떠오른 바람에 설아현이 고개를 휙휙 저었다.

‘그랬으면 좋겠다니? 그러면 꼭 내가 수호 씨랑 사귀고 싶어 하는 것 같잖아.’

안수호라는 남자에게 호감은 있지만 그건 결코 연심이 아니었다. 설아현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고 실제로도 그랬다. 적어도 아직은, 그녀의 가슴에 자리한 호감은 이성으로서가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호감이었다.

물론 여자의 마음은 갈대 같다고. 그 건전한 호감이 언제 연심으로 바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하아.”

복잡해져만 가는 머릿속에 설아현이 힘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이 꼭 격무에 시달려 힘들어하는 것 같아, 예카테리나 또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 다른 이유로 새어나온 한숨이 겹치며 흑룡회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

한편 그 시각.

지예원의 자취방 내 분위기는 그 전과 180도 달라져있었다.

후끈하게 차오른 열기와 공기 중에 떠도는 알싸한 술 냄새. 테이블 위에는 진즉에 다 먹은 중국집 음식 대신 간단한 주전부리와 술병이 올려져 있었으며 그 주위에는 텅텅 빈 술병 두어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하나같이 도수가 40도를 넘는, 초인이라도 과음하면 취할 수밖에 없는 독주들.

­쿵.

“크으으으……!”

잔을 비운 지예원이 앓는 소리를 내며 테이블 중앙에 술잔을 내려두었다. 테이블 위의 술잔은 하나뿐이었다.

“힘드시면 슬슬 그만 하시죠오? 언니이?”

고개를 숙인 채 신음하는 지예원을 보며 강하늘이 말했다. 적잖게 취했는지 배배 꼬여있는 말꼬리.

심지어 그녀는 지금 본체가 아닌 아바타 상태였다. 본체의 주량은 진즉에 넘긴지 오래였다.

“……능력빨로 버티고 있는 주제에 잘난 척은.”

“제 초능력 제가 쓰겠다는데 불만이세요오? 아니면, 이제 쫄리셔서 그러시나아? 그럼 제가 이긴 걸로 할게요오?”

“쫄리기는. 얼른 잔이나 채워. 이번엔 내가 이길 차례니까.”

“킥. 전판도 그렇게 말해놓고 벌주 마셨잖아요?”

“잔 채우라고.”

“네에. 네에. 분부대로 하겠습니다아~.”

황금빛 액체가 잔에 차오르자 두 사람이 본능적으로 경기를 일으켰다. 술병 옆면에 인쇄된 151프루프(75.5도)라는 글자가 유독 눈에 박힌다.

“규칙 기억하죠오? 먼저 나왔던 거 말하면 실격패인 거?”

“알고 있어. 너야말로 10초 이상 머뭇거리면 벌주인 거 알지? 은근슬쩍 말꼬리 늘어뜨리면서 시간 애매하게 넘긴 적 몇 번 있었는데, 이번엔 절대 안 봐줄 거야.”

“그러시든가요. 자 그럼 언니가 좀 전에 져쓰니까, 이번엔 저부터…………시작!”

­삑!

외침과 함께 강하늘이 스마트폰 타이머를 눌렀다. 10초라고 표시된 시간이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하고.

“매일 와이셔츠 다려 입어서 깔끔하게 하고 다녀서 좋아해요!”

그렇게 외친 강하늘이 타이머를 초기화하고 지예원 쪽으로 밀었다. 그러자 지예원이.

“빨래할 때 번거로워도 흰옷이랑 수건 분리해서 빠는 점이 좋아!”

라고 외치며 강하늘처럼 타이머를 초기화하고 그녀에게 넘겼다.

“잠깐! 그걸 언니가 어떻게 알아요? 오빠가 빨래를 한꺼번에 하는지 따로따로 하는지­”

“저번에 봤어! 수작부리지 말고 타이머나 눌러!”

­삑!

“익. 그, 그럼 턱수염이 가늘게 나서 촉감이 좋아서 좋아해요!”

­삑!

“매일 마트 세일품목 체크하면서 돈 관리를 알뜰하게 잘해서 좋아!”

­삑!

“술 마실 때 밑잔 안 깔고 깔끔하게 원샷해서! 그, 남자다워서 좋아요!”

­삑!

“휴일에도 일찍 일어나서 아침 차려먹는 부지런한 점이 좋아!”

“그걸 언니가 어떻게­”

“옆집이니까 알지!”

­삑!

“출근! 아니, 퇴근할 때마다 따로 시간 내서 저 보러 와줘서 좋아요!”

­삑!

“혼자 사는데도 매일매일 자기 밥 차려먹는 부지런한 점이 좋아!”

“아까부터 비겁하게 먹는 거로만 계속­!”

“태클 좀 그만 걸어 시간 끌지 말고!!”

­삑!

“요, 요리를 잘하는 점이 좋아요!”

“뭐래. 쟤 요리 못하진 않지만 잘하지도 않거든?”

“호, 혼자 밥 차려먹을 수 있으면 잘하는 거죠! 언니야말로 수작부리지 마요! 자!”

­삑!

“미래를 대비해서 벌써부터 주택 청약 들어둔 견실함이 좋아!”

“거짓말 치지 마요!”

“거짓말 아니거든?! 너 아까부터 계속 태클 걸면서 시간 끌래?”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절대 아니에요! 오빠 주택 청약 안 들었을 거라구요!”

“그렇게 생각하면 이걸로 승부 보던가! 안수호!”

“오빠!”

한창 떠들던 두 사람이 동시에 안수호에게 고개를 돌렸다. 안수호는 진심으로 괴롭다는 표정을 지은 채 탁자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제발 그만 좀 해라 진짜…….”

“오빠! 주택 청약 안 들려있죠?! 오빠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쵸!?”

“안수호! 너 저번에 매달 10만원씩 박히고 있다 그랬잖아! 내 말 맞지! 그치?!”

“그게 도대체 뭐가 중요하다고­”

“중요해요!!” “중요해!!”

잔뜩 상기된 얼굴로 씩씩대는 두 사람 앞에 결국 안수호가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꺾었다.

“……지예원 말이 맞아. 주택 청약 들어놨어. 매달 10만원씩.”

“거봐! 내 말 맞지! 얼른 마셔!”

“네? 거짓말이죠 오빠? 오빠가 주택 청약을 왜 들어요? 어차피 집 살 것도 아닌데!”

“안수호 쟤가 미래에 집을 살지 안 살지 니가 어떻게 알아! 얼른 마시기나 해 뜸들이지 말고!”

강하늘이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안수호를 바라봤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본래 이 세상의 주민이 아닌 안수호가, 언젠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안수호가 미래를 생각해서 청약을 신청했을 리가 없으니까.

“……3년 전에 신청했었어.”

“아.”

그러나 안수호라는 캐릭터가 원래 주택 청약을 신청해두었다고 ‘설정’되어있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뒤늦게 그 가능성을 알아차린 강하늘이 작게 탄식했다.

­턱.

허나 탄식도 잠시. 거칠게 잔을 거머쥔 그녀가 단숨에 술을 비우기 시작했다. 꿀꺽꿀꺽 목구멍이 맥동하며 진한 알코올이 식도를 따라 흘러들어갔다.

“끄흐으으으……!!!”

이내 신음을 흘리며 잔을 쿵!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동시에 초기화되는 타이머.

“……바로 다으음!! 바로 다음 판 가요오! 뜸 들이지 말고오!!”

전보다 확연히 늘어진 발음. 허나 결코 승부를 미루지 않겠다는 그 기개는 지예원마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예원이 호기롭게 술병 주둥이를 잡았다.

“……슬슬 질릴 때도 됐잖냐. 이제 그만 하자.”

“아니. 절대 안 그만둬. 이건 우리 두 사람의 승부야.”

“맞아요오! 한 사람이 패배를 인정할 때까지 절대!! 절대 안 그만둘 거예요!!”

“듣는 내 입장도 생각해줘라 제발…….”

깊은 탄식과 함께 안수호가 작금의 상황을 되짚는다.

약 1시간 전. 강하늘이 던진 ‘안수호의 어떤 부분에 반했느냐’라는 질문은 술자리가 과열됨에 따라 어느새 ‘안수호의 좋은 점을 누가 더 많이 알고 있느냐’, 혹은 ‘누가 더 안수호를 좋아하느냐’는 주제로 변질되었다. 그 결과가 바로 조금 전까지 치러진 ‘안수호의 좋은 점 말하기 대결’이었다.

건전하다면 건전한 대결이었다. 적어도 살벌하게 말싸움하고 드잡이질 하는 것보단 나았다.

그러나 가운데 낀 안수호 입장에서는 이건 이것대로 괴로웠다. 두 사람이 날 이렇게 좋아해주는구나 하고 기뻐하는 것도 5분 10분이지. 나중에 가니 낯간지럽고 창피해서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애초에 너희 둘 중간부터 말한 거 죄다 엉터리였어. 와이셔츠 매일 다려 입지도 않고, 술 마실 때 밑잔도 깔고, 휴일에는 점심 때까지 늦잠 자는 경우도 많고, 그리고 또…….”

“와. 너 진짜 양심이 있니? 그럼 지금까지 아무런 소리나 대충 안수호의 장점이라고 말해댄 거야?”

“피차일반이거든요오?! 언니야말로, 언니야말로 양심 없슴? 왜 없슴?”

“둘 다 엉망진창이었다니까. 이쯤에서 그만하자고. 제발.”

두 사람은 명백하게 승패를 가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는 명백하게 승부를 가릴 수 없었다.

“……좋아. 안수호 좋아하는 이유 대기는 이제 그만 하자고.”

“좋아요. 그렇지만…….”

그래서 두 사람은 이 우스꽝스러운 ‘게임’을 그만두는 것에는 동의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오빠를 더 좋아하는 건 저예요.”

“아니. 나야.”

“저예요.”

“나야.”

“저라고요.”

“나라니까?”

“언니는 오빠한테 한 번 구해진 게 전부잖아요. 전 세 번이나 구해졌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오빠를 더 좋아하는 게 맞아요.”

“싸구려 로맨스 소설도 아니고 위기에서 구해줬다고 사람이 좋아져? 하, 난 너보다 훨씬 오랫동안 안수호랑 같이 지냈거든? 그러니까 내가 더 안수호를 좋아해.”

“흥. 로맨스는 아니지만 싸구려 소설은 맞거든요? 언니가 몰라서 그러는데 사실­”

“그만.”

안수호가 두 사람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자연스레 두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향한다.

“둘 다 나 때문에 싸우지 말아줘. 너희 둘이 나 때문에 싸우는 걸 보면 너무 괴롭다고. 두 사람이 날 사랑하는 마음은 아주 잘 알았어. 그러니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돼. 알겠지?”

안수호는 일부러 재수 없게 들리도록 목소리를 느끼하게 깔며 말했다. 어떻게든 이 과열된 논쟁을 멈추려고.

“아…….”

“어우……”

그러자 효과가 있었는지 두 사람의 표정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야. 재수 없으니까 그딴 소리 하지 마. 우리가 좋아한다 좋아한다 해주니까 아주 지가 상전인 줄 알지?”

“……목소리 뭐예요 진짜? 오빠, 그 이상한 목소리 다신 내지 마요. 어우. 소름이 다 돋네…….”

두 사람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지만 안수호는 개의치 않았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까. 안수호의 중재로 달아올랐던 머리가 식은 두 사람이 멋쩍게 서로를 쳐다보다 이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래도 언니가 오빠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알겠어요.”

“나도야. 네가 진심으로 안수호를 사랑한다는 게 느껴졌어.”

“인정할게요. 양다리가 좋다는 건 아니지만, 언니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용인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순서를 따지면 내가 용인해준 건데……?”

“……그건 그렇네요. 고마워요. 언니.”

“그래. 나도 고마워.”

묘한 분위기로 의기투합하는 두 사람을 보며 안수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때 파국으로 치달을 뻔한 분위기가 원만하게 수습된 게 안수호는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생각해보니 뭔가 신기하네요. 언니도 저도 오빠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오빠한테 구해져서라니…….”

“그러게. 우연치곤 신기하다.”

“우연이 아닐 수도 있죠.”

웹소설에서 주인공에게 구해진 여캐가 주인공에게 반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리고 강하늘은 여전히 이 세상을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빠. 부탁 하나만 할게요. 이제부턴 함부로 여자 구하지 마요. 이 이상 오빠한테 반한 사람이 늘어나는 건 못 참으니까.”

“……경비대원이 성별 가려가며 사람 구하면 꽤 문제 있는 거 아니냐?”

“그럼 구하더라도 정 붙일 구석을 아예 주지 마요. 딱 비즈니스적인 태도로. 혹시 여자가 오빠한테 반하더라도 칼같이 거부하시고요. 언니도 그랬으면 좋겠죠?”

“그야 그렇지. 이 이상 안수호한테 여자가 늘어나는 건 싫어. 싫지만…….”

지예원이 안수호를 지그시 바라봤다. 이내 그 얼굴에 장난스러운 웃음이 떠오른다.

“안수호가 저어어어엉말 원한다면. 그리고 다른 사람이 생겨도 날 지금처럼 계속 사랑해준다면……. 여기서 한둘 정도 늘어나는 건 봐줄게. 특별히.”

“어? 진짜?”

놀란 안수호가 엉겁결에 되묻자 강하늘이 대노하며 외쳤다.

“진짜는 뭐가 진짜에요?! 안 돼요! 안 된다구요!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인줄 알아요? 삼처사첩 거느리게!? 절대 안 되니까 그런 줄 아세요!!”

“알아! 안다고! 나도 이 이상 여자 사귈 생각 없어! 애초에 사귈 수 있을 리도 없고! 사귀고 싶지도 않아! 안심해도 돼!”

“정말요……?”

“애초에 너희 둘도 타이밍이 겹쳐서 이렇게 된 거잖아. 좋아하는 사람 뻔히 있는데 다른 사람한테 한눈 팔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라고.”

“양다리 걸친 시점에서 이미 쓰레기 아니야?”

“……최소한 재활용은 되는 쓰레기라고 생각해. 그 이하로는 안 내려갈 거야. 정말로. 다른 여자 사귈 생각 전혀 없으니까 제발 믿어줘.”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뭐어…….”

“나야 딱히 상관은 없지만…….”

열띤 분위기가 가라앉고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발갛게 취한 강하늘이 문득 시계를 봤다.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전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두 사람은 어떻게 할 거예요?”

“너 가면 나도 이제 옆방으로 넘어가야지.”

“…….”

강하늘의 물음에 지예원이 불편한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불길한 낌새를 느낀 강하늘이 다시 한 번 물었다.

“……언니는요?”

“난 사실 안수호한테 따로 할 말 있는데…….”

즉 강하늘이 떠난 뒤에도 안수호와 함께 있겠다는 소리였다. 단 둘이. 술에 취한 상태로. 그녀의 자취방에서.

“……”

그 말에 강하늘의 두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그녀의 가슴 속에서 의심의 싹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상황이 ‘그날’과 비슷해도 너무 비슷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이야기인데요?”

“개인적인 이야기야. 네가 있으면 못 하는­”

“여명단이랑 관련된 이야기에요? 그럼 상관없지 않아요? 어차피 전 이미 언니가 여명단 배신자라는 것도 알고 있는데.”

“그건……”

지예원이 안수호의 눈치를 살폈으나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결정권을 넘겼다. 지예원 본인이 꺼낸 이야기니 그녀가 결정하는 게 맞았다.

“걱정하지 마.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진 아직 모르지만 하늘이는 믿을 수 있어. 그래서 너에 대해서도 알려준 거고.”

다만 강하늘은 신뢰할 수 있다고. 그렇게만 덧붙였다. 그 말에 지예원이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그래. 그럼. 그냥 너 있을 때 이야기할게. 조금 길어질 수도 있는데 괜찮아?”

“늦어져도 까짓 거 벌점 좀 맞으면 그만이죠. 어차피 기숙사 벌점은 성적에도 안 들어가니 괜찮아요.”

“그래. 그럼……”

후우우우. 지예원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마치 몸 안에 쌓인 취기를 도려내듯.

“그래서? 무슨 이야기인데?”

“……민아. 김민아에 대한 이야기야.”

실로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안수호가 자세를 바로했다. 그런 반면.

“…………김민아? 그게 누군데요?”

강하늘은 여전히 취기가 돌고 있는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취하지 않았어도 모를 수밖에 없었다. 김민아는 원작에 묘사되지 않은 캐릭터였으니.

강하늘의 질문에 안수호와 지예원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직후 지예원이 멋쩍게 뺨을 긁었다.

“그러니까, 김민아가 누구냐면…….”

아무래도 이야기가 꽤 길어질 것 같다고.

안수호와 지예원이 동시에 그렇게 생각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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