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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127화 (128/266)

〈 127화 〉 126. 정실대전(1)

* * *

지예원의 방에는 방금 막 짐들을 옮긴 듯 옷이나 가재도구들이 담긴 박스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한켠에 있는 냉장고를 열어본 지예원이 표정을 찌푸리며 물었다.

“……오늘 막 돌아와서 냉장고에 재료가 없네. 그냥 배달 시켜먹을까? 두 사람은 어때?”

“난 좋아.”

“저도……괜찮아요.”

지예원은 마침 이삿날이기도 하니 중국집은 어떠냐고 물었고 안수호와 강하늘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저녁 메뉴 따위야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두 사람의 관심사는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흠. 그럼.”

털썩. 바닥에 펼친 탁상 옆에 지예원이 앉았다. 그녀의 눈이 안수호와 강하늘을 훑는다.

“하늘이가 내 본명을 안다는 건 안수호 네가 말해줬다는 뜻일 테고. 안수호 네가 내 본명을 말해줬다는 건, 그만큼 강하늘을 믿는다는 거니까…….”

무심한 듯 턱을 괸 채 지예원이 툭 던지듯 물었다.

“혹시 둘이 사귀니?”

“네.”

강하늘이 곧바로 대답했다. 마치 그 질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럴 것 같았어. 하늘이 너 병원에 집어넣고 자기가 깰 때까지 옆에서 보고 있겠다고 하길래 대충 너 일어나면 고백하겠구나 싶었거든. 내 말 맞지?”

“고백은 제가 했어요.”

“그래? 나 때도 내가 먼저 고백할 때까지 기다리다 넙죽 받아먹더니. 아주 복에 겨운 놈이네 안수호?”

지예원이 피식 웃으며 안수호를 흘겼다. 안수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채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마치 이 상황을 기다렸다는 듯 청산유수로 말을 쏟아내는 다른 두 사람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알고 있지? 나도 수호랑 사귀고 있는 거. 설마 수호가 네 고백을 받아주면서 그 이야길 안 했을 리는 없으니까……”

“네. 다 들었어요.”

“어땠어? 고백한 남자가 이미 다른 여자하고 사귀고 있었고. 심지어 그런 주제에 당당하게 양다리 걸치고 싶다고 말했을 때. 괜찮았어?”

“괜찮았을 리가 있겠어요? 당연히 엄청 화났죠. 또 엄청 슬펐고, 오빠가 진짜 원망스러웠어요.”

그렇지만.

그렇게 덧붙인 강하늘이 심호흡했다. 후우우우, 하고 깊게 숨을 내쉰 그녀가 결연한 눈빛으로 이어서 말했다.

“제가 양보해주기로 했어요. 전 오빠를 정말 좋아하니까. 그리고 오빠도 절 진심으로 좋아해주니까. 언니가 좀 눈엣가시이긴 하지만, 오빠랑 이어질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눈엣가시라고. 강하늘이 노골적으로 지예원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안수호의 양다리를 용인해주는 것과 별개로, 그녀로선 지예원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었으니.

“그런데 언니.”

그래서 강하늘은 오늘 이 자리에서 자신과 지예원의 관계를 확실히 정하고자 했다. 관계라고 할까, 조금 과격하게 말하자면 서열 같은.

“오늘 수호 오빠가 오버랭크 던전 공략에 참여했던 건 아시죠? 저는 너무 걱정돼서 오빠한테 연락받자마자 곧바로 병원으로 튀어나갔는데. 언니는 오빠가 걱정되지도 않았나 봐요?”

노골적인 비꼼이었다. 강하늘은 오늘 이 자리에서 지예원을 견제하며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다지려고 했다.

그래, 마치 조선시대 양반의 정실부인과 첩실처럼. 비록 사귀는 순서는 자신이 늦었더라도 자신이야말로 안수호의 첫 번째 연인이라고.

참으로 어린애 같은 발상이고 행동이었다. 허나 그런 강하늘의 모습도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아온 지예원에게는 그저 귀엽게만 보였다. 치기어린 웃음을 띠고 있는 강하늘에게 지예원이 시원스레 대답했다.

“응. 맞아. 별로 걱정 안 되던데?”

“네?”

그 말에 강하늘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 지예원은 여유만만인 얼굴이었다.

“안수호라면 어련히 잘 할 거라 믿었지. 쟤는 승산 없는 싸움에 머리 들이미는 바보가 아니거든. 그래서 별로 걱정은 안 됐어.”

“아무리 그래도 오버랭크 던전이잖아요. 근데 걱정이 안 된다는 게 말이 되는­”

“그럼 넌 수호를 못 믿은 거야?”

날카로운 질문에 강하늘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궤변이었다. 아무리 안수호를 믿는다 한들,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걱정이 안 될 리가 없었다. 실제로 지예원 또한 비록 표현하진 않았지만 안수호를 적잖이 걱정하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그녀가 저렇게 대답한 건, 순전히 강하늘의 장단에 맞춰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안수호가 걱정도 되지 않냐며 공격을 가한 그녀는, 이제 역으로 자신이 안수호를 신뢰하지 못한 여자가 되어버릴 위기에 처했다.

“뭐, 하여튼 고생했어 안수호. 너라면 해낼 줄 알았거든. 그렇게 심하게 다친 곳도 없어 보이고. 다행이네.”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는 강하늘로부터 시선을 돌린 지예원이 안수호에게 싱긋 웃어보였다. 그녀가 수고했다는 듯이 손을 내밀자 얼떨결에 안수호가 그녀와 악수했다.

강하늘이 판 함정에서 능숙하게 빠져나온 것으로도 모자라 그녀의 말문을 막고 안수호와 자연스럽게 스킨십.

그 일련의 과정에 강하늘은 입을 살짝 벌린 채 부르르 떨고 있었다.

허나. 지예원의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 내 임무도 끝났으니 이건 이제 돌려줄게.”

지예원이 머리를 살짝 쓸어넘기며 귀를 드러냈다. 그곳에는 안수호가 준 냉염의 십자가가 귀걸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일부러 강하늘에게 십자가를 자랑하듯 드러낸 그녀가 이를 안수호에게 건넸다.

“임무 수행하면서 이 아티펙트 덕 정말 많이 봤어. 덕분에 이렇게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네. 진짜 고마워.”

“……고맙기는. 그리고 돌려주지 않아도 돼. 그냥 네가 가지고 있어.”

“그래도 괜찮아? 이런 귀한 아티펙트를 공짜로 받기는 조금 그런데…….”

“넌 지금도 여명단에 계속 노려지고 있잖아. 나보다는 네가 가지고 있는 편이 더­”

그 순간, 옆에서 쿡쿡 찌르는듯한 강하늘의 시선에 안수호의 말이 멈췄다. 아차 싶은 그가 천천히 강하늘을 돌아본다.

“……오빠. 그거 뭐예요?”

“어? 이거? 이거는 그­”

“안수호가 나랑 사귀기로 한 날 기념으로 준 선물이야.”

“기념……선물……?”

나 때는 그런 거 없었는데.

무심코 떠오른 서운한 생각이 그대로 강하늘의 얼굴에 드러났다. 슬쩍 고개를 돌린 그녀의 시선이 싸늘하게 안수호의 양심을 찔러댔다.

‘귀엽네.’

그 모습을 보며 지예원은 속으로 웃었다. 어떻게든 자기보다 앞서려고 발버둥치는 강하늘도, 두 여자 사이에 껴서 당황하는 안수호도 지예원이 보기엔 귀엽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슬슬 그만해야지.’

강하늘과 달리 지예원은 자신의 연적에게 이렇다 할 악감정이 없었다. 애초에 망설이던 안수호에게 차라리 양다리를 걸치라고 먼저 제안한 게 그녀였으니.

독점욕이 강한 강하늘과 달리 지예원은 안수호가 자신을 사랑해주기만 하면 족했다. 그렇다고 그가 양다리를 넘어서 여친을 셋, 넷, 다섯 계속 늘려가는 걸 환영하는 건 아니지만, 아마 그녀라면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넘기겠지.

정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예원에게 질투나 적개심을 드러내는 강하늘이 정상에 가까웠다. 지예원이 그런 뒤틀린 연애관을 가지게 된 것은 그녀의 성장환경에 기인했다.

어려서부터 여명단의 첩보원으로서 훈련받은, 사람이 아닌 장기말로써 길러진 그녀.

그녀는 인생에 있어서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전무했다. 친구 김민아와의 관계도 사랑보다는 우정에 가까웠으니까. 때문에 그녀는 평범한 연애관을 가진 강하늘과 달리 지금의 상황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단 하나 피하고 싶은 상황은 바로 안수호가 그녀를 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지금의 상황에 만족했다.

만족하려고 했다.

만족하지 않으면, 이 관계를 용인하지 않으면 혹시 안수호가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을까 하는, 무의식적인 방어기제였다.

“오빠. 이런 질문 유치한 건 아는데. 왜 예원 언니한테만 선물 준 거예요? 왜 저는 없어요?”

“오해야 오해. 저건 선물이 아니라 그, 지예원이 민채령이 시킨 임무 때문에 위험해질까봐 준 거라고. 그냥 우연히 준 날이 사귀게 된 날이랑 겹쳐서 그런 거지……”

“저도 맨날 납치당하고 습격당하고 고립되고 위험했는데…….”

“크흠……”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던 지예원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한 남자를 두 여자가 좋아한다는 이 관계가. 낯설긴 하지만 그리 나쁘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따지고 보면 저도 사귀기로 한 날 선물을 받기는 받았죠. 눈에 보이는 물건은 아니지만 정말 만족스러운 선물을 말이죠.”

“선물? 내가 그런 걸……아.”

강하늘의 말을 뒤늦게 이해한 안수호가 탄성을 뱉었다. 사귀기로 한 날 준 무형의 선물. 짐작가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그날 정말 좋았어요 오빠. 오빠도 좋았죠?”

강하늘이 작게 속삭이며 윙크했다. 그 암시가 안수호의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었다. 강하늘은 지금 던전 공략 전날 밤에 두 사람이 섹스했던 걸 가지고 선물이라며 저리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걸 이렇게 대놓고 말하면­!’

작게 속삭였다곤 하나 1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테이블 너머의 지예원이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강하늘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안수호가 식은땀을 흘리며 지예원을 바라봤다. 그러나 지예원은 그의 예상과 다르게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조금은 싫어하거나 불편해할 줄 알았는데.

그렇게 생각한 안수호가 이내 깨달았다. 생각해보니 자신과 강하늘이 섹스한 걸 가지고 지예원이 불편해할 이유가 없다고.

그야, 지예원은 고백뿐만 아니라 섹스마저도 강하늘보다 먼저 했으니까.

강하늘이 두 사람의 성관계를 암시했을 때, 지예원은 살짝 놀라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당장 그녀만 해도 고백한 당일에 안수호와 관계를 가졌으니까. 그것도 강하늘이 잠들어있는 바로 옆방에서.

덕분에 강하늘이 노골적으로 그녀를 도발했을 때 그녀는 질투나 분노보다는 미안함, 내지는 측은지심이 먼저 들었다. 만약 그날 강하늘이 술 먹고 뻗은 사이에 자신이 도둑고양이처럼 안수호에게 고백하고 바로 살까지 비빈 걸 알면 어떻게 될지…….

“……안수호 이 복에 겨운 놈 같으니라고. 나로도 모자라서 이렇게 귀여운 애까지 꼬셔서 양다리나 걸치고 말이야.”

허나 지예원은 그 사실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강하늘을 속이는 거였지만, 괜히 밝힌다 해도 충격 받고 마음고생 할 게 뻔했으니까.

적어도 강하늘이 직접 물어보기 전까지는 굳이 나서서 진실을 밝힐 필요는 없겠지.

“말하는 거 들어보니까 고백한 날에 이미 진도 끝까지 다 뺀 거 같은데. 연장자로서 참견하자면 피임은 철저히 하렴. 괜히 안수호 쟤가 ‘싸기 직전에 빼면 된다’ 같은 말로 설득하려 해도 듣지 말고. 알겠지?”

일찍이 피임기구 없이 먼저 성관계를 가졌던 지예원의 충고였다. 그 암시를 알아차린 안수호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반면 강하늘은 당황스러웠다. 지예원의 태도가 여유로워도 너무 여유로웠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녀가 양다리를 용인했다고 해도 면전에서 이런 말을 들었음에도 지나치게 평온한 태도였다.

‘뭔가 기분 나빠…….’

그 평온한 태도에 강하늘은 원인 모를 패배감을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째서인지 자신이 지예원에게 진 것 같은.

­띵동

“아, 배달 왔나보다. 내가 나갔다 올게.”

현관으로 향하는 지예원의 뒷모습을 강하늘의 시선이 지그시 따라갔다. 그 눈동자에는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떠올라 있었다.

자신의 도발에도 줄곧 평온하던 그 태도. 마치 자신을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는듯한 여유로운 표정. 강하늘은 지예원의 그런 태도가 찝찝했다. 꼭 무언가 놓친 사실이 있는 것 같아서.

‘……도대체 무슨 믿는 구석이 있길래 저렇게 여유로운 거지? 게다가 뭐? 피임 철저히 잘 하라고? 참나, 자기가 뭔데 나랑 오빠의 성생활에 간섭……’

그 순간.

‘…………설마?’

번뜩이는 하나의 가능성이 강하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안수호에게 향한다.

“……왜? 하늘아?”

안수호는 묘하게 긴장한 기색이었다. 그 태도만으로 그의 속내를 짐작해낼 순 없었지만, 강하늘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기에는 충분했다.

‘설마 지예원 쟤도 이미 오빠랑 잔 건가?’

언제? 라는 물음은 의미가 없었다. 언제고 자시고 간에 강하늘보다는 빨랐을 게 뻔하니까.

‘그런가. 그래서 그렇게 여유로웠던 거구나.’

지예원은 이미 안수호와 관계를 가졌다. 그렇기에 앞에서 성관계를 암시하며 도발을 한들 씨알도 먹히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위에서 내려다보듯 여유로운 태도를 보인 것이라고.

‘……승자의 여유라 그거지?’

지예원은 딱히 승자의 여유를 뽐낸 게 아니었다. 그저 강하늘의 귀여운 도발을 부드럽게 넘긴 것뿐이었다. 허나 넘기는 방법이 조금 나빴다. 면전에 대고 피임 운운하며 안수호와의 관계를 암시한 것이, 강하늘 입장에서는 자신을 깔본 것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하.”

그렇게 생각하자 강하늘의 입에서 나지막한 조소가 새어나왔다. 싸늘한 한기가 그녀의 표정에 감돈다.

“……엑스트라년이 주제도 모르고.”

바로 옆에 있던 안수호조차 듣지 못할 정도로, 아주 작게 웅얼거린 한 마디.

강하늘의 안에서 지예원에 대한 적개심이 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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