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 124. 막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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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사 아라엘로부터 전달. ]
[ 보상 수령을 위해 지정일시에 지정된 장소로 혼자서 와주시기 바랍니다. ]
[ 일시 : 2020년 4월 20일 월요일 오전 02시 30분. ]
[ 장소 : 영랑호 호수공원 시계탑 앞. ]
[ 이 메시지는 20초 후 파기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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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떠오른 메시지는 그 말대로 20초가 지나자 가루가 흩날리듯 사라졌다. 다행히 복잡한 내용은 아니라 안수호는 금방 내용을 외울 수 있었다.
‘다음 주 월요일 오전 2시 반. 영랑호 호수공원 시계탑 앞.’
천사 아라엘로부터의 호출.
안수호는 아라엘을 기억하고 있었다. 샛별의 숨소리를 얻었을 때 협박한 천사. 기억은 하고 있었다만 거의 잊고 지내다시피 했는데, 이제서야 연락이 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함정……은 아니겠지. 쾌락천마가 나한테 뭔 짓을 하려 했다면 굳이 귀찮게 함정을 팔 필요도 없을 테니까.’
함정일 가능성은 적었다. 허나 마냥 낙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라엘을 협박했을 때, 안수호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쾌락천마가 치졸한 짓거리를 벌이려고 하면 자신에게 미리 말해달라고.
그 이후로 여러 역경이 안수호에게 닥쳐왔지만 아라엘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반쯤 잊고 살다시피 했다. 헌데 코빼기도 보이지 안던 그녀가 이제서야 나타난 이유는 무엇인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그러는 거야?’
안수호가 생각했다. 설마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시련이 자신에게 닥쳐오는 것은 아닌가, 하고.
빌헬름이 준 정체불명의 로자리오부터 시작해 아주 머릿속이 복잡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가 허공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공략도 끝났으니 하늘이한테 능력부터 반환해야지.’
시야 구석에 표시된 타이머는 채 10분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조금만 싸움이 길어졌어도 큰일 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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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킬 :="" 연심의="" 벚꽃="">을 통해 시전자 ‘강하늘’로부터 대여 받은 ‘초인으로서 지닌 모든 능력’을 반납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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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반환을 수락하자 갑자기 온몸에서 힘이 쫙 빠졌다. 마치 온몸에 모래주머니를 잔뜩 매단 것 같은 느낌.
“쿨럭!”
동시에 속이 뒤틀리는 기분과 함께 피가 울컥 솟았다. 내구 능력치 하락에 의한 부상의 격화. 안수호는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실소했다.
내로라하는 헌터들 사이에서 두각을 보이고. 그 빌헬름을 상대로 싸움이 성립되어 뭐라도 된 줄 알았으나, 결국 빌려온 힘에 지나지 않았다고.
새삼 그 사실을 깨달은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나 불만은 없었다. 빌려온 힘이면 뭐 어떤가. 자신은 그 빌헬름을, 오버랭크 던전의 주인 괴수를 쓰러뜨렸는데.
‘일단 연기부터 지워야겠지.’
따악!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주변에 자욱하게 깔렸던 검은 연기가 일소됐다. 동시에 탁 트인 전장의 풍경이 드러났다.
“수호 씨!”
그 순간 설아현이 다급한 외침과 함께 그에게 뛰어왔다. 그러나 그 속도는 점차 느려졌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그녀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서히 번지기 시작한다.
“……어?”
이윽고 설아현이 안수호의 곁에 당도했을 때.
그 시야의 중심에는 흉갑을 포함한 몸통의 갑옷 태반이 날아간 채 쓰러져 있는 빌헬름이 잡혔다. 생동감을 잃고 싸늘하게 식어버린 그의 시체가.
키잉.
설아현의 두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눈앞의 결과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녀가 미래를 엿보려고 한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아현 씨.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안수호의 그 말에 그녀의 정신이 미래에서 현재로 되돌아왔다. 놀란 눈을 한 설아현이 안수호를 바라보자,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빌헬름을 쓰러뜨렸습니다. 공략 성공이에요.”
“에……?”
털썩.
그 한 마디에 긴장이 탁 풀린 설아현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눈이 의심스럽다는 듯 빌헬름의 잔해를 훑는다.
빌헬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제야 그녀의 인식이 현실을 따라잡기 시작한다.
“쓰러, 뜨렸, 네, 요……?”
“보시는 대로요.”
“수호 씨가, 한 건가요……?”
“저야 뭐 막타만 친 거죠.”
“그렇지만. 그, 그게. 어라? 진짜? 진짜 우리가 이긴, 거예요?”
싸움의 결말은 명백하게 눈앞에 제시되어 있었다. 허나 바로 직전까지 자신의 죽는 미래를 보고 있던 탓에, 설아현은 쉽사리 자신들의 승리를 믿지 못했다.
“네.”
그런 설아현에게 안수호가 담담히 대답했다. 한쪽 무릎을 꿇어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며, 아직 얼떨떨한 얼굴을 한 그녀에게 작게 속삭였다.
“우리가 이겼습니다. 이제 다 끝났어요.”
“아…….”
그 자그마한 속삭임이. 모든 게 끝났다는 그 별 거 아닌 한 마디가.
“끝났, 군요…….”
설아현은 그토록 안심이 될 수가 없었다. 안도감과 허탈함 사이에서 망연자실하게 바닥만 내려다보던 설아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단언하건대, 빌헬름의 검격이 내리쳐진 순간 그녀는 죽을 운명이었다.
그 검격을 피하든, 막든, 반격하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 순간 그녀가 엿본 수십 개의 미래는 전부 그녀의 죽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단념했다.
자신의 삶은 여기까지일 거라고.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받아들였다.
이르건대 자신이 과거로 회귀한 이후 처음으로 마주한, 활로 따위 보이지 않던 완전한 죽음이었노라고.
헌데.
그럼에도 지금, 자신이 이렇게 살아있는 건.
“……수호 씨.”
분명 눈앞의 남자가 자신을 구해주었기 때문일 거라고. 미래를 바꾸어주었기 때문일 거라고.
“고마워요. 구해줘서. 수호 씨 아니었으면……. 전 아마 죽었을 거예요.”
뒤늦은 자각으로부터 복받쳐오르는 감정에 설아현이 멍한 어투로 말했다. 그런 설아현에게 안수호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저야말로. 절 믿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손길을 멍하니 바라보던 설아현이, 이내 살며시 그 손을 잡았다. 곧 안수호가 설아현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설아현은 일어섰음에도 꽉 쥔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 그 손아귀에 더욱 힘을 쥐었다.
스스로도 왜 그랬는지는 몰랐다.
다만 설아현은 눈앞의 안수호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감사함은 아니었다. 사랑도 아니었다.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럼에도 한 단어로 정의를 내리자면, 그것은 동료애였다.
그녀가 흑룡회의 헌터들에게 느끼던 것과 같은. 생사가 오가는 전장에서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애.
비록 만난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함께한 시간은 무척이나 적었지만.
“저, 수호 씨.”
예정된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은 설아현의 마음은 어느새 안수호를 깊게 받아들였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설아현이 싱긋 미소 지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색 만큼이나 화사한 밝은 미소.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안수호의 대답에 설아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줄곧 꽉 쥐고 있던 안수호의 손을 미련 없이 놓아주었다.
비록 잡고 있던 손은 놓았지만, 두 사람은 어느새 보이지 않는 유대감으로 이어져 있었다.
***
빌헬름과의 전투가 끝난 뒤.
공략대는 빠르게 전후 수습에 나섰다. 바깥에 대기하던 인원들과 연계하여 부상자를 호송하고 회수팀이 돌입해 괴수의 잔해나 아티펙트 등을 회수했다. 빌헬름의 잔해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설아현은 그 모든 과정을 진두지휘했다. 그녀 또한 적잖은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략대 리더로서의 역할을 져버리지 않았다.
“……그 기사가 도망쳤다고요?”
덕분에 그녀는 태스크 포스의 헌터들 중 가장 먼저 그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예에. 마지막에 검은 연기가 엄청 솟아나지 않았습니까? 그 전까지는 분명 저희랑 싸우고 있었는데……. 연기가 걷히니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더군요.”
마지막 사방기사. 서리기사단 척후대장이제 제1 부관. 아인 디트리히.
다른 기사들과 달리 활을 쓰던 호리호리한 실루엣의 여기사. 그녀가 도망쳐버리고 말았다고. 유격조의 헌터가 면목 없다는 듯 말했다.
허나 설아현은 크게 질책하지 않았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연막 속에서 적을 놓친 것을 어찌 나무라겠는가.
‘도망쳤다면 아직 이 근처 어딘가에 숨어있는 건가? 아니면 게이트를 넘어 미궁 속으로……?’
설아현은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크라이시스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괴수는 던전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그리고 게이트 관리국은 기사의 무덤의 크라이시스 발생 시점이 적어도 2주는 남았다 보고 있었다.
따라서 아인 디트리히가 도망쳤다 한들 기껏해야 미궁 속. 다른 잔여 괴수들을 사냥할 때 함께 사냥하면 되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회주님. 회수팀 사람들 말로는 빌헬름 토벌 성공 소식이 전해지기 전에 게이트에서 그 녹색 기사가 튀어나왔답니다. 그대로 산 속으로 도망쳤다고 하는데, 이거 큰일 난 거 아닙니까?”
“네?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크라이시스 시점까진 아직 2주나 남았는데?”
“저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놈이 던전 밖으로 도망친 건 확실합니다. 목격자도 잔뜩 있었고 특징도 유격조가 싸우던 그 활잡이 기사랑 일치합니다.”
아인 디트리히는 게이트 너머 바깥세상으로 도망쳤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그렇다는 사실만이 사실로서 존재할 뿐.
오버랭크 던전 속 괴수의 탈출. 아무리 기사의 무덤이 오버랭크 던전 치곤 수준이 낮다곤 하나 결코 좌시할 사태가 아니었다.
“게이트 관리국은 어떻게 한다고 했죠?”
“일단 인근 지역에 수배령 내린 뒤 인력, CCTV, 위성 등 쓸 수 있는 수단은 모두 써서 찾는다고 하더군요. 평소엔 안 그러던 놈들이 오버랭크 던전 괴수라니까 아주 빠릿빠릿하덥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솔직히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도망친 괴수 잡는 게 어디 쉬운 일도 아니고. 심지어 놈은 지능도 인간 수준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만에 하나라도 잘못해서 민간인 피해자라도 나왔다간 공략 주관한 저희가 독박 쓰는 거 아닙니까?”
“그럴 일은 없을……없을 거예요…….”
설아현은 확답할 수 없었다. 다만 리더로서 아래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했을 뿐.
예상치 못한 사태에 공략 성공으로 인해 홀가분해졌던 마음이 다시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별 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설아현이 푸르게 빛나는 게이트를 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
한편 그 시각.
퍼석. 퍼서석.
우거진 수풀을 가르며 녹색 갑주의 기사, 아인 디트리히가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다른 기사들에 비해 경장이라곤 하나 전신을 감싸는 금속 갑옷을 입은 상태라곤 믿기지 않는 민첩성.
마치 산짐승처럼 능숙하게 산을 타던 그녀가 흘끗 뒤를 바라보았다. 추격자가 붙지 않았음을 몇 번이나 확인한 그녀가 그제야 바위 그늘에 몸을 숨기며 숨을 골랐다.
“후우우우우……어?”
숨을 골랐다.
리빙아머라면 결코 하지 않을 그 이질적인 행동에 아인 디트리히가 이상함을 느꼈다.
찰칵.
그녀가 건틀릿을 해제했다. 불가사의한 힘으로 이쪽 세상에 불려온 그녀의 본질은 리빙아머. 건틀릿을 해제하면 그 안쪽은 텅 비어있어야 했다.
그러나.
“세상에…….”
건틀릿 아래로 드러난 것은 뽀얀 살갗이었다. 분명 던전 안에서는 갑옷 속에 영혼만 존재하던 그녀는 어느새 피와 살로 된 육신을 얻은 상태였다.
곧 그녀가 투구를 해제했다. 그 안쪽 또한 손과 마찬가지로 살로 이루어져 있었다. 땀에 절은 머리카락 사이로 시원한 산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잘 된 일이기도 했다. 리빙아머가 아닌 평범한 인간의 몸이라면 빌헬름이 내린 명령을 수행하기에 더욱 적합할 테니.
‘아인 디트리히. 만일 내가 침입자들에게 패배한다면 눈앞의 전이문을 통해 바깥세상으로 탈출해라. 너 혼자서 말이다.’
헌터들이 제단에 당도하기 전, 빌헬름은 아인 디트리히에게 그렇게 명했다.
처음에는 명을 따를 수 없노라고 대답했다. 일찍이 본래 세상에서 맡은 바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죽었으나, 불가사의한 기적에 의해 다시금 빌헬름의 밑에서 싸울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그런 빌헬름을 버리고 혼자 도망치라니 가당키나 할 리가 없었다.
허나 이어지는 빌헬름의 명에 아인 디트리히는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도망치라는 게 아니다. 탈출해서 기회를 엿보라는 거다.’
빌헬름은 말했다.
자신들을 이 낯선 세상에 데려와 멋대로 이용하려 한 간악한 신에게, 주군의 잠을 방해한 그 치졸한 신에게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라고.
주군의 이름에, 서리기사단의 명예에 먹칠을 한 그 신을 결코 용서해선 안 된다며, 그렇기에 너라도 살아남아 복수를 위해 기회를 엿보라 말했다.
그 명에서 느껴지는 절절한 감정에 아인 디트리히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선 설령 지더라도 빌헬름과 함께 싸우다 죽고 싶었으나, 명령은 명령이었으니.
“……허나 단장님. 도대체 어떻게 보이지도 않는 신에게 복수하란 말씀이십니까…….”
빌헬름은 구체적인 방법 따위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살아남아서 기회를 엿보아라. 그렇게만 말했을 뿐.
덕분에 아인 디트리히는 던전을 탈출하여, 이렇게 새로운 육신을 얻었음에도 막막하기만 했다. 그의 마지막 명령을 어떻게 수행해야 할지 도무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으니까.
……사실 빌헬름은 그저 전생에 억울하게 죽은 아인 디트리히가 새로운 삶을 살기를 바랐을 뿐이었으나.
어려서부터 기사로 살아오며 오직 명령받기만 하던 삶을 살아온 그녀는, 그런 빌헬름의 속내를 도저히 유추할 수 없었다.
상관의 명이라곤 해도 꼴사납게 도망친 자신이, 이제는 도대체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며.
초록이 우거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인 디트리히가 나지막한 탄식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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