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124화 (125/266)

〈 124화 〉 123. 그가 휘두르는 검끝에 천사의 축복이 함께할지니

* * *

빌헬름과의 전투 양상은 전과 비슷했다.

전위는 설아현과 진소월. 한여름과 박철이 그 둘을 보조하며 빌헬름을 견제하고 이따금 생겨난 아군의 빈틈을 안수호가 커버한다.

자그마한 실수 하나에 금방이라도 무너질 게 뻔한 아슬아슬한 연계.

그러나 그 연계로 태스크 포스는 확실하게 빌헬름을 몰아세웠다. 싸움이 계속될수록 그의 갑옷에는 점차 크고 작은 상처가 늘어갔다.

흐림투르스가 억지로 해제된 빌헬름의 강함은 눈에 띄게 떨어져 있었다. 헌터들 또한 적지 않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으나, 전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약해진 그 모습에서 승리의 희망을 엿보았다.

허나.

“크윽!”

비록 약해졌다고 해도, 검이 부러졌다고 해도 빌헬름은 빌헬름.

오버랭크 던전의 주인 괴수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스위치!”

설아현의 외침에 진소월이 몸을 뒤로 뺐다. 지면을 쿵! 밟은 그녀가 초능력을 발동해 힘을 축적하기 시작한다.

그 사이 빌헬름의 상대는 전적으로 설아현이 맡았다. 짓쳐드는 그의 검격에 설아현의 눈이 수십 가지의 미래를 단번에 꿰뚫는다.

­파바바바바밧!

검과 주먹이 교차했다. 허나 둘 다 상대방의 몸에 닿지 못했다. 설아현과 달리 빌헬름은 미래시 따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그 몸에 축적된 경험이, 초월의 영역에 다다른 기량이 미래시에 근접할 정도로 갈고 닦였을 뿐.

­빠각!

노도와 같은 연격의 틈을 찔러, 백에 달하는 검격을 넘어서 마침내 설아현의 주먹이 빌헬름에게 닿았다. 이번 전투 내내 지속적으로 대미지를 입은 흉갑이 한 치 정도 더 우그러졌다.

허나 설아현의 주먹이 닿았다는 건 즉 빌헬름의 주먹 또한 닿는다는 소리.

­퍼억!

“끄흑?!”

검을 쥐지 않은 왼손으로 빌헬름이 설아현의 명치를 가격했다. 그녀의 몸이 부웅 떠오르며 입에서 왈칵! 하고 핏물이 역류한다.

“설아현 헌터!”

그때 충전을 마친 진소월이 지면을 박찼다. 이제껏 내지른 모든 찌르기 중 가장 빠른, 신속에 다다른 찌르기.

그 찌르기에 맞춰 박철과 한여름도 저마다 공격을 준비했다. 설아현이 가슴을 부여잡고 물러서는 것과 동시에, 진소월이 교차하듯 파고들어 창을 내지른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흉갑을 노리는 그 일격은 그야말로 신속.

S급 초인의 신체능력, 그간 쌓아온 경험과 기술, 그리고 이 싸움에서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던 모든 힘을 털어넣은, 필살이자 필사의 일격이었다.

그러나.

­콰득!!

“!!”

진소월의 얼굴에 경악이 서린다. 그녀가 내지른 창날을 빌헬름이 왼손으로 우악스럽게 틀어쥔다.

찔러들어오는 창날을 손으로 낚아챘다.

이것이 수준 낮은 싸움이라면 있을 법도 한 일이었다. 그러나 창을 내지른 건 국내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S급 초인인 백은 진소월. 그런 그녀가 내지른 필살의 일격을 막는 것도 피하는 것도 아닌, 손으로 잡아챈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빠르지만 궤적이 뻔하다.

허나 빌헬름은 해냈다.

창날이 날아드는 순간 그 궤적을 예상하고.

자신을 노려보는 그 시선을 읽어.

그 끝에서 발해지는 몸을 쿡쿡 찌르는 듯한 살기의 방향을 간파하낸 끝에.

누구나가 불가능하다 고개를 저을, 진소월의 창을 맨손으로 잡아채낸다는 신기를 그 몸으로 직접 해내고야 말았다.

­우득!

창날을 옆에서 낚아챈 그가 있는 힘껏 팔을 당겼다. 절대적인 근력의 차이에 의해 진소월은 속절없이 자신의 창을 빼앗기고 만다.

­쐐애애애액!

그리고 교차하듯 뻗어지는 빌헬름의 서리검.

“……아.”

진소월이 뒤늦게 몸을 내뺐으나 이미 서리검은 그녀의 허리 깊숙한 곳을 베고 지나간 뒤였다. 하얀 얼음이 까드드득 퍼지며 그녀의 무릎이 덜컥 꺾인다.

“진소월!!”

안수호와 설아현이 무기를 꺼내든 채 달려들었다. 박철과 한여름도 언제라도 공격을 쏘아낼 수 있게 준비했다.

그 순간 빌헬름의 시선이 전장을 훑었다. 채 0.1초도 걸리지 않는 시간. 적들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파악해낸 그가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쐐애애액!

­퍼억!

“끄흑?!”

가장 먼저 꺼낸 행동은 투창.

빌헬름이 내던진 진소월의 창이 한여름의 어깨에 박혔다. 새빨간 피를 흩뿌리며 그녀의 몸이 회전하듯 튕겨져 나갔다.

여기까지가 약 0.3초.

“소월아!”

다음 순간, 빌헬름이 투창을 위해 앞으로 딛었던 발을 휘둘러 쓰러진 진소월을 뻥 걷어찼다. 박철 방향으로 정확하게 날아간 그녀의 몸을 박철이 가까스로 받아냈다.

­빙결폭산.

그 순간, 빌헬름의 서리검에서 거대한 얼음이 솟구쳤다. 진소월에 정신이 팔려 미처 방어를 준비하지 못한 그가 날카로운 얼음 세례에 휘말렸다. 어떻게든 진소월만은 지켜내겠다고 몸을 돌린 그 등에 수십의 송곳이 박혔다.

여기까지가 약 0.7초.

“흐읍!”

그 순간 안수호가 질풍같은 기세로 파고들었다. 남은 두 번의 스톡을 전부 소모한 샛별의 숨소리가 붉게 발광한다.

강하늘에게 신체능력을 빌리고, 아티펙트로 몸을 가속하고, 탈리스만을 있는 힘껏 발동하여 뿜어낸 연기로 그 검신에 폭풍을 두른 채.

이윽고 휘둘러지는 그 검격 또한 필사의 일격이었다. 그 순간 그 일격에 한해 안수호는 분명하게 S급의 문턱에 발을 들이밀었다.

­카앙!

허나 경지에 다다른 신체에 비해 휘두른 무기가 변변찮았다. 흑룡회에서 지급한 2형 헌터블레이드는 빌헬름의 서리검과 격돌한 순간 마침내 한계에 달했다. 새된 소리와 함께 부러진 검신을 뚫고 빌헬름의 주먹이 그를 후려쳤다.

­투콰앙!

안수호의 몸이 땅바닥을 굴렀다.

여기까지가 약 0.9초.

채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다섯 중 넷을 쓰러뜨린 빌헬름.

어느새 홀로 남은 설아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았다. 붉게 빛나는 그 눈동자가 1초에만 수십 번 점멸하며 수많은 미래를 꿰뚫는다.

­파바바바바밧!

설아현의 두 눈동자가 바삐 움직인다.

자신의 가슴을 노리고 날아드는 검격. 찰나의 순간 그 미래를 읽고 몸을 숙인다.

그러자 아래에서 올려치는 발차기. 마찬가지로 미래를 읽어 땅바닥을 구르듯 몸을 피했다.

그 순간 지면에 까드드득 서리가 퍼져나갔다. 직후 솟아난 수십 개의 얼음송곳들. 그러나 이번에도 미래를 읽어낸 설아현이 주먹을 내리쳐 지면 째로 얼음송곳을 분쇄했다.

끊임없이 물고 물리는 수싸움.

설아현은 가진 모든 능력을 활용해 빌헬름을 상대했다. 몰아치는 눈보라 앞에서 필사적으로 버티고 또 버텼다.

하지만 버틴다 한들 그 끝에 무엇이 있는가.

진소월도, 박철도, 한여름도, 안수호마저 이미 빌헬름에게 당했다. 쓰러진 이들에게 시선을 돌릴 새조차 없었으나 알 수 있었다.

1초에도 수십 번이나 관측하는 미래들 중, 누군가 그녀를 도우러 오는 미래는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허나 설아현은 멈추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어떻게든 빌헬름을 물고 늘어졌다. 어떻게든 그녀 혼자 빌헬름을 붙잡아두어, 동료들이 회복할 시간을 벌기 위해.

빌헬름이 뿜어내는 노도와 같은 연격 앞에서, 감히 1초나마 버틸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럼에도 그 1초를.

단 1초를 벌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굴렸다.

그렇게 1초를 벌었으면 다시 한 번 다음 1초를 벌기 위해.

그리고 또 1초.

1초.

1초.

그리고 또 다시, 또 다시 1초.

피해낸 검격이 열을 넘고 이십을 넘어 마침내 백에 달했다. 회피일변도였다곤 하나 가히 기적에 가까운 일.

허나 그때까지도 그녀는 빌헬름과 홀로 대치하고 있었다. 진소월도, 박철도, 한여름도, 안수호도 빌헬름에게 입은 부상을 추스르지 못한 채 여전히 쓰러져 있었다.

혹은 쓰러진 게 아니라 죽은 것인가.

일순 스친 불길한 상상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백에 달하는 공격을 피해내며 조금씩 피부에 달라붙은 얼음이 그녀의 몸을 옭아맸다. 아주 짧은 순간 설아현의 움직임이 덜컥, 하고 멈췄다.

‘아.’

그 순간 발해지는 빌헬름의 세로베기.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검을 보며, 설아현의 두 눈이 그 검 너머의 미래를 꿰뚫는다.

그 순간 선택할 수 있었던 회피기동이 7개.

마찬가지로 택할 수 있었던 방어의 방법이 셋. 카운터가 넷.

허나 그 모든 미래의 결말은 동일했다. 빌헬름의 검에 베이는 자신. 부위는 제각각 달랐지만 어느 것 하나 치명상이 아닌 게 없었다.

예정된 파멸을 채 1초도 남겨두지 않은 그 찰나. 설아현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직감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미래를 꿰뚫으며 활로를 모색했다.

이 위기를 넘어서면 다시 1초를.

그 1초를 넘어서면 또 다시 1초를.

그렇게 시간을 벌고 또 벌어서, 다른 사람들이 회복할 시간을 줘야…….

­끝이다.

허나 활로는 없었다. 사방이 꽉 막힌 닫힌 미래에 설아현의 두 주먹에서 힘이 빠진다. 의지와 상관없이 그 몸이 닥쳐올 죽음에 순응하려 한다.

다만 그럼에도 주먹을 꽉 쥐고.

꺾이려는 무릎을 애써 세우고.

어금니를 깨질 기세로 악 다물며.

설령 이 다음 순간 죽는다 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의지를 두 눈에 실어 불태운 순간.

­지직. 지지직.

그녀가 본 죽음의 미래가 지지직 일그러졌다.

“크르아아아아!!!”

다음 순간, 거세게 울려퍼지는 짐승의 포효와 함께 빌헬름의 몸이 휘리릭 반전했다.

‘성유진 헌터?’

그 방향에는 빌헬름의 등을 노리고 날아든 성유진이 있었다. 그가 몸을 깊숙이 숙인 채 손톱을 세웠다. 그야말로 부지불식간의 돌격.

부상 때문에 거동조차 불가능했던 그가 어떻게 다시 일어났는가. 빌헬름은 그 경위를 알 수 없었다.

다만 달려드는 적을 베어낼 뿐.

기습적인 돌격이라곤 하나 그 속도는 전과 비교하면 한없이 느렸다. 빌헬름이 충분히 반응할 수 있는 속도였다.

­쐐애애애액!!

가로로 휘둘러지던 궤적의 연장선. 설아현을 노리던 검이 180도 더 돌아 성유진의 목을 노리고 날아든다. 자세를 한껏 낮췄다곤 해도 성유진이 워낙 거구였기에, 그 높이는 설아현의 머리 높이와 비슷했다.

참으로 우연찮게도.

마치 일부러 휘두르기 좋으라고 그 위치에 머리를 들이민 것처럼.

­파앗!

그 순간 성유진의 몸이 반짝 빛을 발했다.

­……!!

직후 나타난 광경에 빌헬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회색 웨어울프의 몸이 빛난다 했더니 돌연 안수호로 변했다. 그 순간 빌헬름은 일찍이 안수호와 싸웠을 때 보았던 한 여성을 떠올렸다.

같잖은 변신 능력으로 자신을 농락했던 어느 학생의 얼굴을.

­쐐애액!

그 순간, 한껏 자세를 낮춘 안수호의 머리 위를 빌헬름의 서리검이 스치고 지나갔다. 2미터가 넘는 성유진을 노렸던 궤적이니 맞을 리가 없었다.

그 빈틈을 파고든 안수호가 은색의 검을 휘둘렀다.

‘검은 부러뜨렸을 텐데!’

그 말대로 안수호의 검은 부러진지 오래. 그러나 그가 휘두르는 건 본래 그가 가지고 있던 검이 아니었다.

히드라의 엄니.

오지훈이 제 수족처럼 조종하던 아홉 자루의 검 중 한 자루.

어떻게 그것이 안수호의 손에 들려 있는가. 그 순간 빌헬름의 시선이 아주 잠깐 안수호의 너머로 향했다.

얼어붙었던 반신을 힘겹게 일으킨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갑옷 차림의 남성을 향해.

“우오오오오오오오!!!!!!”

안수호의 입에서 노성이 토해진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지닌 모든 힘과 기술을 그 일격에 토해냈다. 탈리스만이 맹렬한 빛을 발하며 검신을 따라 시커먼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래봤자!’

허나 빌헬름도 당해주기만 한 건 아니었다. 이미 휘둘러진 검을 억지로 멈춰세운 그가 반대방향으로 휘둘렀다. 이번에야말로 안수호의 목을 노리며.

안수호도 빌헬름도 이미 방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두 사람의 검이 서로의 목표를 노리고 짓쳐든다.

­두근.

절체절명의 순간. 두 사람의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렀다. 안수호와 빌헬름은 서로의 일격을 소상히 파악할 수 있었다.

­두근.

그 궤적을.

­두근.

그 목표를.

­두근.

그 속도를.

­두근!

그리고 누구의 검이 먼저 닿는지까지.

‘빌어먹을……!’

그 결과 두 사람은 빌헬름의 검이 먼저 안수호를 가르리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찰나의 순간 두 사람의 희비가 교차한다.

빌헬름의 검은 능히 안수호를 베어낼 것이요, 안수호의 검은 끝내 빌헬름에게 닿지 못하리라. 그것이 그 순간 두 사람의 공통적인 인식이었다.

천지가 개벽하지 않는 이상, 그야말로 신의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상 바뀔 리가 없는 결말.

­덜컥!

허나 그 찰나의 찰나의 순간. 안수호의 검이 느닷없이 가속하기 시작했다.

‘뭣?’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빌헬름은 물론이고 안수호 자신에게조차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현상.

그러나 안수호와 달리 빌헬름은 곧 그 이변의 원인을 알아차렸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오른 분노가 그의 안광을 붉게 물들이고, 이내 그 시선이 창공으로 향한다.

회색빛으로 물든 겨울 하늘.

그 너머 천계에 있을, 가증스러운 신의 사자를 향해.

­설마…….

끓어오르는 노성. 그 노성을 가르며 안수호의 검이 빌헬름의 흉갑에 격돌했다.

­콰드드드득!!!

그간의 전투에서 한계에 다다른 흉갑이 마침내 부서지고, 그의 검이 빌헬름의 안쪽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네놈은… 네놈들… 네놈들이 감히……!!

분노에 찬 단말마가 울려 퍼진다. 그 순간 안수호의 검이 마침내 빌헬름의 중심부에 다다르고.

­키이이이이이잉!!!!!!

극한으로 압축되었던 검은 연기가 일제히 폭발했다.

­투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검은 폭풍이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그 기세에 설아현을 포함한 다른 헌터들이 속절없이 튕겨져 나갔다. 시꺼먼 연무가 전장을 가득 채운다.

“…….”

그 연막의 한복판에서 안수호는 검을 휘두른 자세 그대로 굳어있었다. 그 앞에는 흉갑을 포함한 몸의 중심부가 통째로 날아간 빌헬름이 있었다.

등 부분의 갑옷 덕에 가까스로 형체를 유지한 빌헬름.

힘없이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고개를 숙인 그 모습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어보였다.

“쿨럭!!”

그 순간 안수호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한 무더기의 핏물을 입에서 쏟아냈다. 전투의 부상. 탈리스만의 반동. 비록 싸움에선 승리했다곤 하나 그 또한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결국 이렇게 됐는가.

그 순간 빌헬름의 투구에 푸른 안광이 돌아왔다. 흠칫 놀란 안수호가 몸을 내뺐으나, 곧 그는 경계를 풀었다.

빌헬름과 마주친 순간부터 줄곧,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압도적인 기운.

그 기운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안수호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빌헬름은 더 이상 싸울 수 있는 몸이 아님을.

힘겹게 이어지는 저 목소리가 곧 그의 유언이라는 것을.

­……결국, 전부 정해진 운명이었던 것일 테지. 간악한 신의 농간으로 이 낯선 세상에 불려온 시점에서 이미, 나는 네놈들에게 당할 운명이었던 건가…….

­쿵!

빌헬름의 두 무릎이 덜컥 꺾였다. 마치 자신의 패배를 시인한 것처럼.

­……허나 신의 앞잡이여. 신의 뜻대로 놀아나고 있는 건 네놈 또한 마찬가지다. 설마 네놈은 이 세상의 철없는 신이 언제까지고 널 비호해주리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비호? 그 새끼는 지금까지 한 번도 날 비호해준 적 없어. 오히려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 났지. 그리고…….”

안수호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빌헬름과 눈높이를 맞춘 그가 선언하듯 말했다.

“……난 그 새끼한테 놀아나기만 하진 않을 거야. 그 새끼가 나한테 내려주는 좆같은 시련들, 다 보란 듯이 성공해서 그놈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거든.”

­……한낱 필멸자가 어찌 신에게 대항하겠는가. 너나 나나 결국 놈의 장난감일 뿐이다.

빌헬름이 자조하듯 고개를 저었다.

“그거야 해봐야 아는 거지.”

그러나 안수호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 모습에서 무언가 느낀 빌헬름이 소리 없이 웃었다.

­……어리석은 발버둥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네놈이 정녕 신에게 대항코자 한다면…….

그 순간 빌헬름의 앞 허공에 서리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안수호가 경계하며 검을 들었으나 빌헬름이 만들어낸 건 무기가 아니었다.

로자리오.

분명 얼음이 모여서 만들어졌음에도 피처럼 붉은 빛을 띠는 로자리오. 그것을 빌헬름이 안수호에게 건넸다.

­가지고 있어라. 네놈이 정녕 이 세상의 신에게 대항코자 한다면, 분명 도움이 될 테니까.

“이건…….”

안수호는 미심쩍은 눈으로 로자리오를 받았다. 그 순간 로자리오가 붉은 핏물로 변하더니 그의 살을 째고 파고들었다.

“크윽?!”

갑작스런 현상에 놀란 것도 잠시. 아무런 이물감도 없이 몸에 녹아든 로자리오에 안수호가 빌헬름에게 되물었다.

“이게 도대체 뭐지?”

­…….

대답은 없었다. 다만 빌헬름은 안수호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전에 봤을 때보다 더 섞였군.

“뭐?”

­무얼 하든 서두르는 게 좋을 거다. 네놈에게 주어진 시간도 그리 긴 것 같지는 않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섞였다니? 뭐가?”

의미심장한 소리에 안수호가 물었으나 빌헬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할 말을 다 끝냈다는 듯, 그의 몸이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육중한 울림과 함께 불가사의한 힘으로 이어져있던 갑옷의 연결이 하나둘 끊어지기 시작한다.

­……어디, 잘, 해봐라. 낯선……땅에서 온, 이방인이여…….

그 말을 마지막으로 빌헬름의 투구에 서려있던 푸른 안광이 꺼졌다. 차갑게 식은 갑옷을 내려다보며, 안수호는 마침내 빌헬름이 죽었음을 직감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마지막 순간 그 갑작스런 가속부터 시작해, 빌헬름이 건네준 정체불명의 로자리오나 의미심장한 마지막 말에 이르기까지.

갑작스레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진 탓에 안수호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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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퀘스트 클리어! ]

[ 당신은 여러 헌터들과 협력하여 사상초유의 오버랭크 이중던전, ‘기사의 무덤’의 공략에 성공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당신이 보인 뛰어난 활약에 수많은 헌터들이 당신에게 주목합니다! 이 관심과 주목이 일회성 해프닝으로 끝날지 아닐지는 오로지 당신이 하기에 달렸습니다! ]

<보상/>

1. 경비율 증가 10%(현재 경비율 18%)

2. <스킬 :="" 아카데미의="" 경비원="">등급 상승

( 보상을 획득하려면 보상 탭을 활성화하세요. )

===

그런 안수호의 앞에 퀘스트 클리어 메시지가 떠올랐다.

오버랭크 던전 기사의 무덤.

그 공략이 마침내 끝났다고. 그렇게 말하는 듯한 모습에 안수호가 힘없이 웃었다.

‘끝났다.’

어떻게든 이번에도 한 차례 고난을 넘어섰다고. 안수호가 피식 웃으며 보상탭을 활성화했다.

그러자.

­띠링!

===

[ 아직 수령하지 않은 퀘스트 보상이 있습니다. 수령하시겠습니까? ]

<엑스트라 퀘스트="" 클리어="" 보상=""/>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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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확인하는 걸 잊고 있었네.’

납치된 강하늘을 구하라던 엑스트라 퀘스트. 워낙 그 뒤로 경황이 없어서 확인하는 걸 잊고 있었다.

‘근데 이건 도대체 뭐야?’

새까만 네모로 가려져있는 보상 내용. 무언가 미심쩍은 기운을 느끼며 안수호가 보상 수령을 선택한 순간.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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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사 아라엘로부터 전달. ]

[ 보상 수령을 위해 지정일시에 지정된 장소로 혼자서 와주시기 바랍니다. ]

[ 일시 : 2020년 4월 20일 월요일 오전 02시 30분. ]

[ 장소 : 영랑호 호수공원 시계탑 앞. ]

[ 이 메시지는 20초 후 파기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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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쩍은 메시지가 그의 시야에 떠올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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