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123화 (124/266)

〈 123화 〉 122. 빌헬름(4)

* * *

S급 초인이라고 해서. S급 길드의 마스터급 헌터라고 해서 무적인 것은 아니다. 아무리 그들이 강하다 한들 그들 또한 고작해야 한 사람의 초인에 불과하니까.

인간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괴수들과 싸우다보면 다치는 게 일상이고, 때로는 목숨의 위협마저 느끼게 되는 경우도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그것은 초인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사선을 넘어온 S급 초인들 또한 예외는 아니다. 다만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되, 그 두려움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지금껏 마주쳐온 고난들을 이겨낸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이번 기사의 무덤 공략에 있어 불안감을 느끼지 않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지훈도, 박철도, 성유진도, 진소월도, 한여름도. 모두 전대미문의 오버랭크 던전 공략을 앞두고 저마다 약간씩은 두려움을 느꼈었고.

“허억. 허억. 허억.”

그것은 설아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단번에 전세가 뒤집어졌어.’

그렇게 생각한 설아현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전세가 뒤집힌 게 아니다. 애초부터 빌헬름이 우세했던 전세를 가까스로 얼버무리며 버티고 또 버티던 게 한계에 다다랐을 뿐.

설아현은 내심 안수호가 왜 A급 이하의 초인을 빌헬름 공략에서 배제한지 알 것 같았다. 어중간한 실력의 초인은 빌헬름의 노도와 같은 공격 앞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

‘그렇지만 강해도 너무 강하잖아……!’

허나 안수호의 말이 전부 맞는 것도 아니다. 구체적으로는 빌헬름이, 그가 말한 것에 비해 강해도 너무 강했다.

그의 빙결 능력은 염제의 불꽃에조차 아랑곳 않았고, 한여름의 초능력조차 흐림투르스를 무력화하기는커녕 아주 약간 약화시킨 것이 고작.

결코 공략이 쉬울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리 어렵지도 않을 거라 생각했다. 적어도 안수호는 그렇게 말했다.

허나 실상은 어떠한가.

단 한 차례의 빈틈에 의해 만신창이가 헌터들을 보던 설아현이 문득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설마…….’

안수호는 말했다. 자신이 겪었던 미래에서 빌헬름은 지금과 같은 멤버로 공략할 수 있었다고.

그러나 설아현은 미래라는 게 딱 들어맞게 정해져 있는 개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미래는 과거에 의해 얼마든지 변할 수 있으니까.

원인이랄 것도 없었다. 내지른 권격 한 번. 휘두른 검의 궤적 하나의 차이만으로도 미래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자그마한 차이가 하나둘 쌓이다 보면 결국 커다란 결과도 변하는 법이니.

다만 이번에는 그 변화가 안 좋은 방향으로 작용했을 뿐.

­꿀꺽.

긴장감이 감도는 표정으로 설아현이 자세를 잡았다.

내심 그녀는 흑룡회의 헌터들이 바깥에 남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만약 자신의 동료들이 근처에 있었다면, 혹시 그들이 죽으면 어쩌나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을 테니까.

다른 헌터들이 들으면 섭섭할 소리지만, 설아현은 소중한 동료들이 이곳에 없었기에 역설적으로 냉철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 공격이 빌헬름에게 통하긴 한다는 거야. 그렇지만…….’

오지훈은 빈사. 박철과 성유진은 중상. 다른 헌터들도 멀쩡한 이가 없는 이 상태로 과연 빌헬름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인가.

­키이잉.

설아현의 눈동자에 붉은 기운이 깃들었다. 미래시를 발동한 그녀가 벌어질 수 있는 수백 수천의 가능성들을 빠르게 열람한다.

그때.

“저한테 작전이 하나 있습니다.”

등 뒤에서 다가온 안수호가 그렇게 말했다.

“……네?”

설아현이 놀란 눈으로 돌아봤다. 안수호가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한여름 학생. 제가 신호하면 빌헬름의 검을 다시 한 번 녹여볼 수 있겠습니까?”

“……그거 좀 전에 해보니까 안 되던데요.”

그녀답지 않게 자신 없는 태도. 그러나 안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타이밍만 잘 맞으면 놈의 검을 약화시키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없애버리는 게 가능할지도 몰라요.”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안수호가 왼손을 내밀어보이자 한여름의 말이 멈췄다. 그 손 위에서 나풀거리는 눈송이를 보며 그녀가 묻는다.

“그게 뭐죠……?”

“서리정령의 권능. 제가 빌헬름을 만났을 때 놈으로부터 훔친 아티펙트로 발동하는 능력입니다.”

안수호가 목걸이 형태의 아티펙트, ‘서리정령의 증표’를 내보이자 한여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이야긴 금시초문인데요.”

“제가 말을 안 했으니까요. 출력이 워낙 약해서 이번 싸움에 하나도 도움이 안 될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 말처럼 아티펙트를 통해 그가 얻은 빙결 능력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하물며 한여름보다 뛰어난 빙결 능력을 지닌 빌헬름을 상대로는 아무런 효과도 없겠지.

“……놈과 싸우다 보니까 느껴지더라고요. 이 힘과 놈의 빙결 능력이 같은 힘이라는 게. 뿐만 아니라 힘의 본질, 근원마저 같다는 것이 말이죠.”

증표를 통해 발동되는 정령의 권능은 그가 지닌 본연의 힘이 아닌, 정령과의 계약을 통해 발현되는 힘.

그것은 안수호뿐만 아니라 빌헬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였다. 그리고 빌헬름으로부터 정령의 증표를 빼앗은 안수호는 현재, 빌헬름과 동일한 정령으로부터 그 힘을 빌어 쓰고 있다.

그렇기에.

“……어쩌면 제가 놈의 힘을 어그러뜨릴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 아마 분명 가능할 거예요.”

“근거는요?”

“그런 느낌이 듭니다.”

“……확실하진 않다는 거네요.”

한여름이 미심쩍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불만은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철컥. 철컥.

성유진이 저 멀리 내던진 빌헬름이 흐림투르스를 늘어뜨린 채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기에.

강자의 여유가 물씬 풍겨오는 그 걸음걸이에 세 사람이 자세를 잡았다. 그런 그들 뒤로 박철과 진소월이 합류한다.

“다른 두 사람은요?”

설아현의 질문에 진소월이 고개를 저었다.

“둘 다 포션으로 목숨은 부지했지만 심각한 상태에요. 특히 성유진 헌터는 내장이 거의 전부 얼어붙었다 녹았어요. 웨어울프의 몸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죽었겠죠.”

“오지훈이는 그나마 낫지만 움직이지 못하는 건 똑같아. 그나마 초능력은 쓸 수 있는 것 같지만…….”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 다섯이서 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작전은­”

“저희 둘 다 들었어요. 안수호 씨의 아티펙트로 빌헬름의 검을 무력화. 맞죠?”

“요는 이 친구가 무슨 수작을 부릴 동안 놈을 상대하면 된다는 거잖아! 지금까지랑 별로 다를 것도 없구만!”

설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박철이 두 주먹을 쾅 부딪치며 호탕하게 외쳤다.

“저 검만 없으면 쓰러뜨리는 거야 일도 아니지! 자, 해보자고!”

박철이 양팔을 휘두르며 불꽃을 쏘아냈다. 동시에 천천히 걸어오던 빌헬름이 자세를 낮추고 지면을 박찼다.

­카가가가가강!

­화르르르르륵!

얼음과 불이 격돌하고 희뿌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그 수증기를 가르며 나타난 빌헬름이 검을 내질렀다. 그런 그에게 설아현과 진소월이 달려든다.

­캉! 카앙! 캉!

­챙! 파카앙!

1대 3의 격돌. 수십 수백 합의 공방이 교차하며 불똥이 튀고 눈발이 흩날렸다.

두 사람은 빌헬름의 공격에 몸이 얼어붙음에도 아랑곳 않았다. 박철과 한여름이 두 사람을 각각 한 사람씩 맡아 신체가 얼어붙을 때마다 곧바로 녹여주었다. 그런다고 해서 대미지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 얼어붙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상황만은 피할 수 있었다.

­캉! 카강! 카앙!

그러나 빌헬름은 강했다. 빙결 능력을 제외하더라도 그의 무위는 설아현과 진소월 개개인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국내에서 손에 꼽히는 S급 초인 둘을 상대하면서도 빌헬름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검과 창이 교차하고.

건틀릿과 건틀릿이 격돌하고.

이따금 불꽃과 얼음이 허공에 흩어지는 치열한 공방.

안수호는 그 공방을 보며 기회를 노렸다. 정신을 집중한 채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떠한 ‘기운’을 느끼고자 애썼다.

평소 탈리스만을 사용할 때 느낄 수 있었던 ‘마력’과는 사뭇 다르면서도 비슷한, 이번 전투에서 처음으로 알아차린 또 다른 기운.

‘느껴진다.’

그것은 빌헬름의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넘어온 ‘정령’의 기운이었다.

빌헬름에게 깃든 서리정령의 기운.

그 서리정령이 계약에 따라 빌헬름에게 빌려준 권능의 기운.

안수호는 그 정체모를 기운이 빌헬름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이어져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목에 건 증표를 매개로 체내에 흘러들어오는 흐릿한 기운을 붙잡으며, 안수호가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확실하게 느껴져. 흐릿한 기운이 흐림투르스를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다. 저 기운을 어그러뜨리면 놈의 빙결 능력을 약화시킬 수 있을 거야. 다만…….’

안수호는 주위에 흐르는 정령의 기운에 간섭해보려고 했다. 허나 그가 간섭할 수 있는 건 그의 신체에 접촉한 기운밖에 없었다.

즉.

‘놈을 약화시키려면 저 검을 직접 만져야 한다는 소리군.’

흐림투르스. 빌헬름의 애검이자 검신에 닿는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마검.

그런 것을 맨손으로 만졌다가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러나 안수호는 물러설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한 번 정도는 얼어붙어도 포션 들이부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파앙!

===

[ ‘샛별의 숨소리’를 발동합니다(1/3). ]

[ 신체의 움직임이 3분간 2배의 속도로 가속됩니다. ]

===

그의 몸에 질풍이 깃들었다. 직후, 안수호가 지면을 거세게 박차며 치열한 공방의 사이로 달려들었다.

­오는가.

빌헬름은 그런 그의 행동을 놓치지 않았다. 애초에 공방을 나누면서도 계속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으니.

­쐐애애애액!

흐림투르스의 날이 안수호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이에 안수호가 왼손을 가져다대려 했으나.

‘시발 이걸 어떻게 잡아!!’

접촉하면 얼어붙고 자시고 손바닥 째로 몸이 두동강날 것 같은 그 기세에 안수호가 몸을 내빼며 외쳤다.

“검을 고정시켜!”

다급한 상황에 반말이 튀어나왔으나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안수호의 의도를 파악한 설아현과 진소월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빌헬름에게 달려들었다.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뜻대로 하게 두진 않을 거다!

이에 빌헬름이 지면에 닿은 발을 통해 사방에서 얼음 기둥을 일으켰다. 그 얼움기둥에서 일제히 수백 다발의 송곳이 뿜어져 나온다.

“크읏!”

“흐아아아아압!”

한여름과 박철이 사방에서 짓쳐드는 송곳을 향해 방벽을 형성했다. 푸른 화염이 얼음송곳의 기세를 죽이고 솟구친 빙벽이 이를 막아냈다. 말 한 마디 없이 해낸 완벽한 연계.

그 사이 설아현과 진소월이 손을 뻗었다. 진소월의 창날이 빌헬름의 검에 맞물린다. 짧은 순간 그의 검이 고정되자 설아현이 양손으로 빌헬름의 팔목을 꽈악 쥐었다.

­까드드드득!

설아현의 두 팔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창날을 엮은 진소월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1초 남짓.

­파앗!

안수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손을 뻗었다. 그의 왼손이 흐림투르스의 검신을 움켜쥔다.

­까드득! 까드드드드등!

“크으으으으윽!!!!”

그 순간 허연 서리가 그의 왼팔을 거슬러 올라왔다. 뼛속까지 사무치는 한기와 고통에 안수호가 비명을 삼켰다.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정신을 집중했다.

­고오오오오오.

주위에 흐르는 무형의 기운. 검을 움켜쥔 그 손이 그 기운을 붙잡는다. 그러자 빌헬름의 푸른 안광이 한 차례 떨렸다.

­네놈. 네놈이 어떻게…….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중얼거림.

그 순간 안수호가 다급하게 외쳤다.

“한여르으으음!!!!”

동시에 한여름이 두 팔을 뻗었다. 그녀가 자신의 모든 초능력을 빌헬름의 검에 집중한다.

­쩌적. 쩌저적!

그러자 놀랍게도 검신에 쩌저적 금이 가기 시작했다. 빌헬름이 검을 수복해보려 했지만, 안수호가 정령의 힘에 간섭하고 있는 탓에 쉽지 않았다. 수복의 속도가 한여름의 초능력을 따라가지 못한다.

­가증스런 신의 앞잡이 따위가 이제는 정령과의 계약마저 더럽히려 드는가……!

빌헬름이 안수호를 걷어차려고 발을 들었다.

“그렇게는 못 하지!”

허나 그 순간 온몸에 불꽃을 두른 박철이 그의 하반신에 달라붙었다.

­쩌저적! 쩌저저저적!

그러는 와중에도 검신에 새겨진 균열은 더욱 그 세를 불려가고 있었다. 균열투성이가 된 검신이 파르르 떨린다.

“크아아아아아아악!!”

­으오오오오오오오!!!

빌헬름과 안수호의 노성이 겹쳤다. 요란하게 날뛰는 무형의 기운을 마치 야생마의 고삐를 잡듯 필사적으로 붙잡는다. 그 얼굴은 이미 고통에 찬 표정으로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쩌적!

그 순간, 한 줄기 거대한 균열이 검신을 따라 달리고.

­파카앙!

이내 청명한 울림과 함께 검신이 절반 부분에서 맥없이 부러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직후 흐림투르스에 깃들어 있던 거대한 힘이 일제히 폭발했다. 그 폭발에 빌헬름에게 달라붙어 있던 헌터들이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튕겨져나갔다.

“크으으윽!!”

속절없이 지면을 구르다 가까스로 멈춘 안수호가 정면을 바라봤다.

빌헬름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나간 수십 갈래의 얼음 줄기들.

그 한복판에 선 빌헬름이 검을 쥔 양손을 떨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시선이 향한 검신은 절반에 조금 못 미치게 부러져 있었고.

­퍼석.

이내 맥없는 소리와 함께 남은 절반마저 허공에 녹아내리듯 부서졌다.

­네놈이, 감히……!

빌헬름의 고개가 끼기긱 안수호에게로 향했다. 그의 손에 얼음조각들이 모여들어 서리검을 형성했다.

흐림투르스가 아닌, 평범한 얼음으로 이루어진 검.

안수호의 예상대로, 한 번 억지로 파괴된 흐림투르스를 곧바로 다시 꺼낼 수는 없던 모양.

허나 투박한 서리검을 들고 있을지라도 빌헬름은 빌헬름. 여전히 오버랭크 던전의 주인 괴수였다. 그 강함은 다소 쇠했을지언정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감히이이이!!!!

노성과 함께 휘둘러진 서리검. 그 끝에서 수십 다발의 얼음송곳이 뿜어져 나왔다. 다소 약해졌다곤 하나 여전히 날카로운 기세를 품은 공격.

“크윽!”

안수호가 급하게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그의 무릎이 덜컥 꺾였다. 고개를 내리자 왼팔을 포함해 허옇게 얼어붙은 자신의 반신이 보였다.

­쐐애애액!

그러는 사이 얼음송곳은 그의 지근거리까지 날아들었다. 이미 피하기에는 늦은 상황.

하다못해 즉사만은 피하자며. 얼어붙은 반신을 앞으로 내세우듯 안수호가 몸을 돌렸다.

그 순간.

­화르르륵!

옆에서 날아든 거센 불길이 닥쳐오던 얼음송곳들을 일제히 녹였다.

“으하하하! 정말 검이 부러지니 약해졌구만!!”

직후 안수호를 지키듯 박철이 빌헬름과 대치했다. 그가 흘끗 뒤를 돌아보며 안수호에게 말했다.

“잘했다! 입만 산 놈인줄 알았는데 꽤 쓸만하구만!”

폭발의 여파를 제대로 뒤집어쓴 박철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선 고통스런 기색 따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안수호 씨!”

그때 반대 방향에서 한여름이 뛰어왔다. 안수호의 상태를 확인한 그가 그의 몸에 달라붙은 얼음을 빠르게 녹이기 시작한다.

“한, 여르…….”

“말하지 마요. 잘못하다 얼어붙은 폐가 찢어질 수도 있으니까. 천천히 숨 쉬는 데에만 집중해요. 포션 남은 건 있나요?”

이에 안수호가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 그가 지급받았던 포션은 성유진에게 사용한 뒤였으니까.

“하여간 흑룡회도 쩨쩨하기는……!”

한여름이 입술을 잘근 씹으며 파우치에서 포션을 꺼냈다. 겉에 붙은 라벨이 흑룡회에서 지급한 것과는 달랐다.

“제 사비로 준비한 거예요. 나중에 받아낼 테니까 그렇게 알아요.”

포션을 마시자 안수호는 체내의 고통이 가라앉아감을 느꼈다.

­채앵!

그 순간 울려 퍼진 금속음. 안수호가 급하게 고개를 들자 진소월이 창을 찌른 자세 그대로 지면을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녀의 창이 스친 빌헬름의 흉갑에 쩌적 금이 갔다.

그걸 본 순간 안수호가 생각했다.

약해졌다고.

“약해졌네요.”

그렇게 말한 건 안수호가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자 얼어붙은 두 팔을 늘어뜨린 설아현이 있었다.

“확실히 약해졌어요. 빙결 능력은 물론이고 움직임도 확연히 느려졌어요. 아마 놈의 검을 부러뜨린 덕분이겠죠.”

설아현이 오묘한 시선으로 안수호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그녀에게 한여름이 다가가 양팔의 얼음을 녹이기 시작했다.

“수호 씨가 겪은 미래에서도 이런 방법을­”

무심코 질문하려던 설아현이 흠칫 입을 다문다. 얼음을 녹이던 한여름이 무슨 말이냐는 듯 그녀를 바라본다.

“미래……요? 그게 무슨 소리­”

“잡다한 이야긴 나중에 하고.”

그때 안수호가 한여름의 말을 자르듯 몸을 일으켰다. 폭발 때문에 검을 잃어버린 그가 연기를 검과 비슷한 형상으로 압축했다.

“지금은 싸움부터 마무리하죠. 시간이 흐르면 놈도 회복할 겁니다. 쓰러뜨리려면 지금밖에 없습니다.”

그 말에 두 사람이 전방을 바라봤다. 빌헬름과 창날을 섞는 진소월과 그 곁에서 불꽃으로 견제하는 박철.

“…….”

안수호의 말처럼 지금은 싸움이 먼저인 상황이었다. 결국 한여름은 미심쩍은 느낌을 뒤로할 수밖에 없었다.

오버랭크 던전 기사의 무덤.

그 공략도 이제 초읽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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