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 121. 빌헬름(3)
* * *
한기가 몰아친다.
흐림투르스. 빌헬름이 전력을 다할 때만 꺼내는 그의 애검이자 비검.
그가 마침내 그 검을 꺼내들자 시공간 그 자체가 얼어붙었다. 그렇게밖에 느낄 수 없을 정도의 압박감.
사방에 피어오른 박철의 불꽃에도 불구하고 침투하는 살을 에는 한기에, 한여름은 다른 헌터들의 몸 주위에 두르던 냉기를 제거했다.
흐림투르스가 뿜어내는 냉기가 워낙 강해, 더 이상 불꽃의 열기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필요가 없어졌으므로.
게다가.
“한여름 학생.”
빌헬름이 애검을 꺼낸 순간이 비로소 한여름이 나설 순간이었기에.
“지금입니다.”
팟!
안수호의 지시에 한여름이 손을 뻗는다.
그 손끝이 향한 것은 드높은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빌헬름의 애검, 흐림투르스.
한여름의 초능력은 단순히 얼음을 만들어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녀의 초능력은 문자 그대로 얼음에 관한 모든 것을 아우르는 능력이다. 얼음의 생성, 조종은 물론이고 융해에 이르기까지.
주륵.
흐림투르스의 검신에 물방울 하나가 또르르 흘렀다.
‘녹아라!’
한여름이 능력을 집중하자 물방울의 갯수가 둘, 셋, 넷, 계속해서 늘어난다. 검 자체가 워낙 극한의 냉기를 품고 있어 녹기 시작한 순간 곧바로 얼어붙었으나, 그녀의 초능력은 확실하게 흐림투르스의 검신을 깎아가기 시작했다.
호오?
빌헬름의 안광에 이채가 떠오른다. 빙결과 융해를 반복하는 자신의 애검을 보던 그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가소롭구나. 그 알량한 능력이 서리정령의 권능에 비할 바가 되겠는가.
그 말처럼, 한여름은 자신의 전력을 흐림투르스를 녹이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음에도 검은 거의 녹아내리지 않았다. 녹아내리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얼어붙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
허나 안수호는 개의치 않았다. 흐림투르스는 빌헬름의 비기이자 오의. 그걸 꺼낸 빌헬름의 발목이나마 잡을 수 있다면, 조금이나마 그 강함을 깎아낼 수 있다면 그들로서는 선방한 셈이니.
‘흐림투르스는 현현한 것만으로도 놈의 체력과 마력을 급속도로 소모시킨다. 하물며 한여름의 능력 때문에 부담이 더 심해졌으니, 오래 꺼내고 있을 순 없겠지.’
빌헬름을 사이에 두고 헌터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가 흐림투르스를 꺼낸 뒤 어떻게 움직일지는 이미 사전에 다 논의해둔 뒤였다. 말 한 마디 나누지 않고 그들이 각자 위치를 잡았다.
쓸모없는 발버둥이다.
빌헬름은 그런 그들의 행동을 그 한 마디로 일축했다. 다음 순간, 그 말을 부정하듯 헌터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크아아아아아아!”
가장 먼저 튀어나간 것은 성유진이었다.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앞세운 그를 향해 빌헬름이 허공에 검을 휘두른다.
카가가가가가각!!!
그러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날카로움과 기세를 품은 얼음송곳이 지면을 따라 거세게 솟아났다.
성유진이 두 팔을 종횡무진 휘둘렀다. 성유진의 신체능력 앞에서 그깟 얼음송곳 따위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얼음송곳을 부서뜨리며 그가 빌헬름에게 달려들었다.
“크윽?!”
허나 그 돌진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덜컥, 하고 멈춘 그 돌진에 성유진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오른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얼음을 분쇄한 두 손이, 질풍처럼 달리던 두 발이 어느새 허옇게 얼어붙었다. 괴물의 이성으로 그가 상황을 파악한다.
따로 공격을 당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생각한 순간 성유진의 시야에 반짝이는 얼음 가루들이 잡혔다. 그가 얼음송곳을 분쇄한 탓에 흩뿌려진, 허공을 날아다니는 미세한 다이어몬드 더스트.
그 자그마한 알갱이가 그의 피부에 닿은 순간, 까드드득! 세를 불리며 피부를 얼음으로 덮었다. 그제야 성유진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흐림투르스를 꺼낸 것으로 인해 몇 배나 강해진 빌헬름의 서리 마법.
그 위력은 빌헬름이 만들어낸 얼음에 닿는 모든 것을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즉, 더 이상 그의 공격을 방어하는 게 불가능하단 소리.
강하긴 하나 그래봤자 짐승이로군.
그 사실을 깨달은 게 한 박자 늦었던 성유진을 향해, 비릿하게 웃은 빌헬름이 흐림투르스를 휘둘렀다.
무방비하게 드러난 성유진의 가슴을 향해서.
짓쳐드는 죽음의 일격에 성유진이 검이 닿기 직전 필사적으로 허리를 뒤로 꺾는다.
서걱!
검신이 그의 가슴을 가르고 지나갔다. 피는 튀지 않았다. 검이 지나간 순간 그의 피부가, 근육이, 혈관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성유진 헌터!”
그 좌우로 진소월과 설아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그들을 노리는 빌헬름의 얼음송곳. 두 사람은 성유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그 공격을 막거나 분쇄하는 대신 회피했다.
쐐애애액!
두 사람의 출수. 노도와 같은 기세를 지닌 권격과 창날이 빌헬름의 흉갑과 격돌한다.
투콰아앙!
새된 폭발음과 함께 빌헬름의 몸이 크게 밀려난다. 동시에 그의 가슴에 덮여 있던 얼음이 깨어지며 사방으로 파편이 비산한다.
까드드드드득!
그 파편조차 빌헬름의 공격이었다. 비산한 파편들이 설아현과 진소월의 피부에 닿자 허연 서리가 퍼져나갔다.
“꺄읏?!”
“으윽!”
“둘 다 물러서라!”
그때 오지훈이 두 사람을 지키듯 나타나며 대검을 휘둘렀다. 그 대검이 아홉 자루의 검으로 나뉘어 빌헬름을 향해 짓쳐든다.
“박철!!!”
오지훈의 외침에 박철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그의 손에서 발해진 불꽃이 얼어붙은 세 사람의 몸을 빠르게 녹였다.
“……예상보다 놈의 능력이 강해요. 공격 한 번 하면 거의 온몸이 얼어붙는다고 봐야 해요.”
설아현의 말에 다른 이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빙결 자체는 박철의 불꽃으로 녹이면 되긴 하다. 허나 무기와 무기가 복잡하게 얽히는 접전 상황에서 한 번의 공격이 끝날 때마다 박철에게 달려갈 수도 없는 노릇.
“거 참 골치 아프게 됐군!”
“한 사람이 공격하면 얼어붙은 몸을 녹일 동안 다른 사람이 그 틈을 메워줘야 해요. 조금이라도 타이밍이 어긋났다간 순식간에 당해버릴 거예요.”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설아현 헌터는 제 백업을. 성유진 헌터는 부상부터 치료하세요.”
진소월이 얼얼한 손으로 창을 꽈악 쥐며 초능력을 발동했다.
발경. 힘을 축적해놨다가 단번에 터뜨리는 심플한 능력.
오지훈이 조종하는 검들을 튕겨내고 있는 빌헬름을 향해 자세를 낮춘 채, 진소월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철이 아저씨.”
“암!”
박철이 양손에서 불꽃을 쏘아냈다. 푸른 불꽃이 오지훈의 양옆을 스치고 날아가 빌헬름의 몸과 격돌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지금!’
그 틈을 노리고 진소월이 지면을 박찼다. 축적되어 있던 에너지가 단숨에 폭발하며 그녀가 초음속의 속도로 창을 내질렀다.
카아앙!
한 줄기 은광이 허공을 달렸다. 불꽃을 헤치며 질주한 그녀의 일격이 빌헬름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다.
촤아아아아악!
“크윽…….”
돌진하던 기세 그대로 지면을 주르륵 미끄러진 진소월이 신음했다. 찰나의 격돌에도 창날은 절반이나 얼어붙었고 몸 군데군데에도 하얀 성에가 번져가고 있었다.
투화아아악!
그 순간 빌헬름이 검을 크게 내리쳤다. 그를 감싸던 불꽃이 흩어지고 빌헬름이 진소월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진소월이 작게 웃었다. 빌헬름의 어깨. 조금 전 그녀의 창이 찌르고 지나간 부분이 크게 우그러져있었다.
쐐애액!
흐림투르스의 궤적을 진소월이 회피했다. 반쯤 얼어붙은 몸으로 행한 필사적인 회피기동. 허나 이어지는 연격까지 피해내는 건 무리였다.
“숙여요!”
카앙!
허나 그 순간 설아현의 건틀릿이 흐림투르스의 옆면을 쳐냈다. 휘둘러지던 검의 옆을 쳐 튕겨낸다는 신기에 가까운 묘기.
까드득!
얼어붙기 시작하는 건틀릿에 신음하며 설아현이 진소월 대신 빌헬름과 대치한다. 그런 그녀에게 날아드는 죽음의 궤적. 그 순간 설아현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위에서 아래로 크게 내리찍는 일검. 지면과 격돌한 순간 사방으로 비산하는 얼음 파편들. 그 틈을 노리고 휘둘러지는 횡베기.
찰나의 순간 일련의 미래를 엿본 설아현의 몸이 물 흐르듯 움직였다. 검을 피하고, 파편을 흘리고, 그 눈에 또다시 붉은 기운이 깃든다.
빌헬름이 내뿜은 노도와 같은 연격이 설아현을 덮쳤다. 설아현은 1초에도 수십 번 눈동자에 붉은 빛을 점멸시키며 공격을 버텨냈다. 필사적으로 시간을 벌었다.
진소월이 재정비할 시간을.
그리고.
“크아아아아아아!!!!”
투콰아앙!
성유진이 상처를 회복할 시간을.
콰르르르르르르르륵!
땅바닥을 나뒹구는 빌헬름 위로 성유진이 달려들었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그의 주먹이 계속해서 빌헬름의 몸에 꽂혔다.
쾅! 쾅! 쾅! 콰앙! 콰아앙!
주먹이 얼어붙는 것조차 무시한 채 쏟아내는 연격. 그 광기어린 주먹질에 빌헬름의 몸이 삐걱이기 시작했다. 흐림투르스를 꽉 쥔 그가 반격을 위해 거센 냉기를 일으켰다.
파앗!
허나 그보다 아주 조금 앞서, 성유진이 크게 도약하며 몸을 피했다. 이에 빌헬름이 추격하고자 일어선 순간.
휘오오오오오!
화르르르르륵!
바람소리. 그리고 화염이 타오르는 소리.
빌헬름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안수호와 박철이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두 사람의 손끝에서 푸르고 검은 파도가 솟구친다.
안수호의 오른손이 탈리스만의 푸른 빛을 발하며 시커먼 연기를 토해낸다. 그 검은 연무가 소용돌이치며 푸른 화염을 게걸스레 먹어치워 이내 검푸른 화염 폭풍으로 변했다. 하늘의 구름마저 태워버릴 기세로 솟구친 소용돌이의 위용에 그 빌헬름마저 할 말을 잊었다.
……빙결폭산.
이내 검을 치켜든 그가 지면 깊숙이 흐림투르스를 꽂았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얼음. 그리고 진동하는 대지.
이윽고 빌헬름의 머리 위로 화염 폭풍이 떨어진 순간, 지면에서 수백 수천의 얼음 기둥이 하늘을 찌를 기세로 솟아났다.
콰르르르르르르릉!!!!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
불꽃과 얼음, 그리고 극한으로 압축된 연기가 한데 모여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사방으로 튀어나간 얼음파편이 닿는 모든 것을 얼리고, 한 박자 늦게 찾아온 불꽃의 파도가 모든 것을 불태웠다.
“후퇴! 후퇴애애애애!!”
그 폭발의 여파는 멀찍이서 싸우던 유격조 헌터들에게까지 미쳤다. 마지막 사방기사, 아인 디트리히를 상대하던 헌터들이 부리나케 폭발의 여파로부터 몸을 피했다. 그보다 한 박자 늦게 그들이 있던 자리를 얼음과 불의 파도가 휩쓴다.
고오오오오오오…….
이윽고 폭풍이 잦아들고, 눈과 얼음이 녹아내린 수증기와 까만 연기가 가득 차오른 전장에 고요가 찾아왔다.
“크으읏…….”
그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연무 속에서 설아현이 신음하며 일어섰다. 폭발에 거의 지근거리에서 휩쓸렸음에도 그녀의 상태는 비교적 양호했다. 미래시 덕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눈동자에 붉은 기운이 서린 순간, 등 뒤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뛰어왔다.
“아현 씨!”
“수호 씨? 그리고 박철 헌터…….”
나타난 건 조금 전 화염 폭풍을 일으킨 두 사람이었다. 설아현의 상태를 확인한 박철이 불꽃을 일으켜 그녀의 몸에 달라붙은 성에를 녹였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했나요?”
“저쪽일 겁니다.”
설아현의 질문에 안수호가 한쪽 방향을 바라봤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건 그 또한 마찬가지였으나, 지금 이 공간에 넓게 퍼진 검은 연기는 전부 안수호의 수족이나 다름없었다. 공기의 흐름이 분명하게 갈라지는 지점을 파악한 그가 두 사람을 이끌고 나아갔다.
“이건…….”
이윽고 세 사람이 마주친 건 거대한 빙벽이었다. 허나 빌헬름이 만든 게 아닌, 한여름이 폭발을 막아내기 위해 만든 빙벽이었다.
허나 그 빙벽은 반쯤 무너져 있었다. 그 빙벽 아래, 피를 철철 흘리는 성유진이 무언가를 감싼 채 웅크리고 있었다.
“성유진 헌터!”
설아현이 외치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의 품에 안겨 있던 것의 정체도 드러났다. 한여름과 진소월이었다.
성유진은 한여름의 빙벽이 미처 막아내지 못한 폭발의 여파로부터 두 사람을 지켜냈다. 그 결과 그의 등에는 자잘한 얼음 파편이 수십 개나 박혔다. 피부에 박힌 얼음은 한여름이 전부 녹여냈지만 벌어진 상처는 여전히 붉은 피를 울컥울컥 토해내고 있었다.
“수호 씨. 여분의 포션을.”
안수호가 허리춤의 파우치에서 포션을 꺼내 건넸다. 성유진의 등에 포션을 바르자 허연 김과 함께 그의 상처가 천천히 아물기 시작했다. 허나 워낙 넓은 면적에 상처를 입은 탓에 포션 하나로 전부 치료할 수는 없었다. 결국 포션 하나를 더 쓰고 나서야 그의 부상이 말끔하게 치료됐다.
“지켜줘서 감사해요. 성유진 헌터.”
“……고마워요.”
진소월과 한여름의 감사인사에 성유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에는 힘겨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봐. 혹시 오지훈이 그 자식 못 봤나?”
박철의 물음에 한여름이 고개를 저었다.
“폭발 직전에 저한테서 좀 떨어진 곳에 계셨어요. 아마 지금은 폭발 때문에 어디로 날아가신 것 같은데…….”
한여름이 후끈하게 차오른 수증기 너머를 바라봤다. 주변 온도가 워낙 차가우니 금방 가라앉긴 하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시간이 걸릴 터였다.
“안수호 씨. 안수호 씨 초능력으로 수증기를 제거할 수 있을까요?”
“아마 가능할 겁니다. 수증기를 밀어내듯이 한 방향으로 폭발을 일으키면”
챙! 채앵! 캉!
그때, 뿌연 수증기 너머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호 씨!”
설아현의 외침에 안수호가 곧바로 탈리스만을 발동했다. 최대한 넓은 범위를 휩쓸듯 연기를 발사하여 안수호가 주변에 산재한 수증기를 흩어지게 했다.
그러자.
“저기!”
그들로부터 약 50여미터 떨어진 곳. 오지훈이 양손에 각각 검을 쥔 채 빌헬름과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여러 자루의 검들이 얼어붙은 채 지면에 박혀 있었다.
“얼른 가세하죠!”
헌터들이 오지훈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이미 두 사람의 싸움은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전력을 발휘한 빌헬름을 상대로, 제아무리 오지훈이라 한들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콰직!
“크아아악?!”
아주 작은 빈틈을 노리고 내질러진 흐림투르스가 오지훈의 어깨 갑옷을 관통했다. 한 차례 핀 튀가 순식간에 얼어붙고, 그의 어깨를 중심으로 표면에 하얀 성에가 빠르게 번져가기 시작한다.
“오지훈이!!!!”
박철이 다급하게 외치며 불꽃을 일으켰다. 동시에 빌헬름이 시선을 그들에게 향했다.
파가가가가각!
지면을 따라 얼음이 거세게 일어섰다. 거대한 파도 모양으로 일어선 빙벽이 파캉! 하고 깨지며 수백 수천의 자그마한 얼음송곳으로 변했다. 그 전부가 안수호 일행을 향해 날아든다.
“젠장!”
박철이 불꽃을 쏘고 한여름이 빙벽을 세웠다. 두 사람의 방어에 얼음송곳은 단 하나도 그들에게 닿지 않았다. 허나 박철의 표정은 한없이 찡그러지기만 했다.
휘익.
그때 얼음과 불의 벽 너머로 무언가 거대한 형체가 날아왔다. 온몸이 얼어붙은 오지훈이었다.
“오지훈!!”
“!! 손으로 받으면 안 돼요!!”
다급하게 외친 한여름이 비스듬하게 빙벽을 만들어 오지훈의 몸을 받아냈다. 미끄럼틀을 타듯 주르륵 미끄러진 그의 몸이 헌터들 앞에 다다른다.
“오지훈!! 대답해 오지훈!! 정신 좀 차려봐 이 양반아!! 어!?”
“크, 으으으……”
박철의 외침에 오지훈이 힘겹게 신음했다. 허나 반신이 문자 그대로 시퍼렇게 얼어붙은 그는 말조차 잇지 못했다. 한여름이 얼어붙은 그의 몸을 빠르게 녹이기 시작했다.
“앞에!”
허나 빌헬름이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가 없었다. 헌터들의 시선이 오지훈에게 팔린 사이 돌격을 감행한 그가 흐림투르스를 휘둘렀다. 그러자 수백의 얼음송곳이 뿜어져 나왔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분노에 찬 박철이 거세게 불꽃을 일으키며 응수했다. 날아들던 얼음조각들이 불꽃의 벽을 넘지 못하고 그대로 산화한다.
그러나.
까득!
“……어?”
지근거리에서 들린 불길한 소리.
빌헬름에게 시선이 팔렸던 한여름이 고개를 숙인다. 오지훈의 얼어붙은 반신. 그곳에서 갑작스레 거대한 얼음송곳이 솟구쳤다.
파바바바바박!
“꺄아아아악!”
“크어억!!”
“크윽?!”
폭발하듯 솟아난 얼음송곳들에 헌터들이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튕겨져 나갔다. 얼어붙은 핏방울이 흩날리고 그들의 몸에 하얀 서리가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팟!
그 틈을 노리고 빌헬름이 자세를 낮춘 채 돌진했다. 얼어붙은 어깨를 부여잡고 뒷걸음질 치고 있던 한여름을 향해서.
“한여름!!!”
가장 먼저 그 돌진을 알아차린 안수호가 연기를 토해냈다. 검은 탄환 세례가 빌헬름의 측면에 격돌한다. 허나 워낙 급하게 쏜 탓에 연기를 제대로 압축하지 못했다. 그의 돌진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스릉.
빌헬름의 애검이 나지막하게 울었다. 중후한 울림을 내며 한껏 당겨진 흐림투르스가 푸른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크르아아아아!”
쾅!
그러나 아슬아슬한 순간 달려든 성유진이 빌헬름의 옆구리에 주먹을 꽂았다. 허나 그의 주먹은 공중에 생성된 얼음 방패에 막혀 빌헬름의 몸에 닿지 않았다.
서걱!
빌헬름의 검이 한여름 대신 성유진을 가른다. 그의 복부에 생겨난 거대한 자상.
“크아아아아아!!”
허나 성유진은 얼어붙기 시작하는 신체에도 아랑곳 않고 손톱을 휘둘렀다. 가히 폭풍과도 같은 기세.
캉! 카앙! 챙! 채앵! 서걱! 피슛! 서걱!
찰나의 순간 수십 합의 공방이 오고갔다. 성유진의 손톱은 이따금 빌헬름의 갑옷에 닿아 그 표면에 크고 작은 상처를 만들어냈다. 허나 그럴 때마다 빌헬름의 검은 보다 치명적인 상처를 성유진의 몸에 아로새겼다.
“크르아아아아아!!!!!!”
그러나 성유진은 멈추지 않았다. 노도와 같은 기세로 뻗은 주먹. 그 주먹이 돌연 펴지더니 빌헬름의 투구를 꽉 움켜쥐고는.
후우웅!
주먹을 휘두르던 기세 그대로 있는 힘껏 반대편으로 던져버렸다. 수십 미터를 날아간 빌헬름이 촤아아아악! 지면을 긁으며 착지했다.
“……그르르륵.”
허나 그것이 성유진이 짜낸 마지막 일격이었다. 쿠웅! 한쪽 무릎을 꿇은 그의 입가에서 피거품이 들끓었다. 흐림투르스에 난도질당한 몸은 이미 피가 섞인 붉은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빌어먹을……”
그 모습을 확인한 안수호가 탄식했다.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던 승패의 균형이 급격하게 빌헬름 쪽으로 기울었다. 그가 다른 헌터들의 상태를 살폈다.
박철은 피가 철철 흐르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오지훈의 몸을 녹이고 있었다. 허나 반신이 얼어붙었던 오지훈은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포션을 들이부어도 가까스로 목숨만 붙들어둘 수 있을 뿐, 더 이상의 전투는 무리겠지.
그리고 그건 성유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흐림투르스가 몇 번이고 몸을 가르며 내장 깊숙한 곳까지 얼어붙은 그는 인간보다 훨씬 튼튼한 웨어울프의 몸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죽었을 것이다. 허나 그 목숨마저도 바람 앞의 등불 상태였다.
그 옆에서 한여름과 진소월이 성유진의 치료를 시작했다. 허나 두 사람의 상태도 멀쩡하진 않았다. 한여름은 한쪽 어깨에 진소월은 허벅지에 부상을 입었는지 그 부위가 하얀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나마 설아현은 이렇다 할 부상이 없었으나 그녀 또한 빌헬름과의 싸움에서 몇 번이고 동결과 해동을 반복한 상태였다. 얼어붙은 몸을 몇 번이고 억지로 녹여가며 싸운 탓에 그녀의 심신 또한 상당히 소모되어 있었다.
‘흐림투르스를 꺼낸 이상 반격할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여 쓰러뜨렸어야 했는데…….’
안수호, 박철의 화염폭풍과 빌헬름의 빙결폭산. 그 둘의 격돌로 인한 예상치 못한 폭발. 그 폭발 때문에 생겨난 자그마한 틈 때문에 그들은 결국 빌헬름의 반격을 허용해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가 작금의 상황이었다.
‘그래도 아직 방법은 있어.’
안수호가 자세를 다잡은 채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목에는 아직 한 번도 발동하지 않은 샛별의 숨소리가 채워져 있었다.
휘오오오오오.
이내 그 손바닥 위로 차가운 냉기가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자그마한 얼음 조각을 만들어냈다.
서리정령의 증표를 통해 사용할 수 있게 된, 빌헬름의 서리마법과 완전하게 동일한 능력.
비록 그 출력은 빌헬름에게 비할 바가 못 되나, 어찌 되었든 동일한 능력이라는 점에서 안수호에게는 이판사판으로 실행해볼 수 있는 하나의 ‘도박수’가 있었다.
‘이 도박수가 실패하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나는 확실하게 죽는다.’
그렇다면 차라리 후일을 도모하고 도망칠까. 허나 도망친다 한들 무사히 나갈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전에는 빌헬름의 빈틈을 노려 기적적으로 도망칠 수 있었지만, 이미 전적이 있는 만큼 빌헬름은 안수호의 움직임을 전보다 더욱 예의주시할 테니까.
‘……그래. 결국 놈을 쓰러뜨리냐 우리가 쓰러지느냐 둘 중 하나다. 그렇다면…….’
하는 수밖에 없다고. 그렇게 생각한 안수호가 검을 꽈악 쥔 채 한 걸음 내딛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