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 116. 기사의 무덤 공략(3)
* * *
설아현이 두 사람에게 숙이라고 말하기 5초 전.
찌릿.
주기적으로 미래시를 발동하며 던전을 전진하던 설아현의 뇌리에 강렬한 두통이 스치고 지나갔다.
쐐애애애애애액!
부지불식간에 날아든 검붉은 도끼. 이에 반응한 안수호와 설아현이 각각 몸을 피했다. 그러나 두 사람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있던 한여름은 미처 피할 새가 없었다.
까드드드득!
이에 차선책으로 얼음을 만들어 도끼를 막아보려 했지만 무용지물. 강력한 기세가 담긴 도끼는 한여름의 방어를 찢어발기고 그대로 그녀의 가슴에 박혔다.
‘그럴 리가 없다’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쓰러지는 한여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미래시가 끝났다.
“다들 숙여요!”
그리고 미래시가 끝나자마자 설아현이 다급하게 외쳤다. 직후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도끼가 날아든다.
콰직!
그녀가 관측한 미래와 달리 도끼는 그들이 방금 돌았던 모퉁이 벽에 박혔다. 다음 순간 미궁의 어둠 저편에서 검붉은 기사가 나타나고, 설아현은 다시 한 번 미래시를 발동했다.
‘어?’
그리고 스스로 관측한 미래를 믿지 못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야. 겨우 망령기사 하나 때문에 그런 거예요? 저런 놈이야 저 혼자서라도”
“……아니에요.”
“네?”
“겨우가 아니라고요. 저건. 저건……”
설아현이 도움을 구하듯 안수호를 바라보았다. 안수호라면, 이미 한 번 미래를 겪은 안수호라면 무언가 아는 게 있을 거라며.
“이런 씨발. 저건 또 뭐야?”
그러나 혼란스러운 건 안수호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알기로 기사의 무덤에 등장하는 일반 괴수는 망령기사뿐. 새까만 연기를 휘날리는 검은 갑옷들뿐이었으니까.
물론 눈앞의 기사도 검긴 했다. 다만…….
‘검붉은색…….’
그냥 검다기보다는 붉은 기운이 도는 검붉음. 그 차이가 안수호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이 세상에서 그가 모르는 일이 일어난 것치고 좋은 일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므로.
그때.
주군의 잠을 방해하는 침입자들이여…….
검붉은 기사가 입을 열었다. 설아현이 보았던 미래와 동일하게.
던전에서 출현하는 괴수는 대부분 지능이 낮다. 기껏해야 짐승 수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괴수는 극히 일부였다. 그러나 그 ‘극히 일부’에 속하는 괴수들은 늘 한결같이 성가시거나, 엄청 강하거나, 혹은 엄청 강하면서 성가셨으니까.
마치 그들이 목표로 한 던전의 주인 괴수 빌헬름처럼.
그 순간.
까드드드드드등!!!!
설아현과 안수호 사이의 바닥을 따라 한 줄기 성에가 달렸다. 그 성에가 검붉은 기사의 발치에 닿더니 이내 거대한 눈꽃 모양의 얼음이 솟아나 기사를 덮쳤다.
“귀찮아 보이는 놈과 마주쳤을 땐 선수필승이죠. 그래서 저건 뭔가요? 받은 자료에는 빌헬름말고 언어 구사가 가능한 괴수는 없었는데?”
그 물음에 두 사람이 고개를 젓자 한여름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정체는 불명이지만 상태를 보아하니 끝난 것 같은데요?”
그 말마따나 얼음 속에 갇힌 기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겉으로만 보면 한여름의 공격에 단번에 죽은 듯한 모습.
“회주님? 왜 멈춰계십니까?”
뒤따라오던 다른 헌터들이 합류했다. 한여름이 저만치 앞에 얼어붙은 기사를 대수롭지 않게 가리켰다. 그러나 흑룡회 소속 헌터들의 시선은 얼어붙은 기사가 아닌, 얼어붙은 표정으로 굳어 있는 설아현에게 향했다.
“……회주님?”
안수호 또한 설아현을 바라봤다. 설아현은 두 눈을 뜨고 있었으나 그녀가 보는 건 눈앞의 기사가 아니었다. 불그스름한 기운이 서린 그 눈동자는 그녀가 아직까지도 미래의 풍경 속을 헤매고 있음을 나타냈다.
“아현 씨……?”
불안한 낌새를 느낀 안수호가 그녀를 부르자.
“……전원. 전투 준비.”
이윽고 미래시로부터 빠져나온 설아현이 긴장된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그녀의 손을 감싼 흑색 건틀릿이 찰그락 소리를 내었다.
그 순간.
파카아아앙!!!
새된 소리와 함께 얼음이 깨진다. 헌터들의 시선이 일제히 향한 곳. 그곳에는 검붉은 기운을 풍기는 기사가 산산조각난 얼음을 즈려밟으며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명예를 건 결투가 아니니 기습에 대해 무어라 하진 않겠다. 애초에 더러운 발로 주군의 묘소에 침입하려는 불한당들에게 정정당당함 따위를 어찌 기대하겠는가…….
기사의 주위로 검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가 눈앞의 헌터들을 스윽 훑어보더니 선언하듯 말했다.
내 이름은 야코프. 서리기사단 제1 돌격대의 대장이자 그 누구보다 먼저 주군의 적을 찢어발기는 가장 빠른 검.
촤라라락!
야코프라 이름을 밝힌 기사가 손을 뻗자 검붉은 기운이 모여들며 무기의 형상을 이뤘다. 이윽고 나타난 것은 그 길이가 2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배틀액스였다.
“……자기 이름이 야코프라네요. 수호 씨. 혹시 저 놈에 대해선 알고 계신가요?”
“…………아뇨. 안타깝게도.”
“그렇담 가볍게 넘길 상대는 아니라는 거네요.”
미래에서 온 안수호가 모른다면 가볍게 넘길 수 없다. 설아현은 그런 취지로 말한 것이었으나 이유는 다를지언정 안수호 또한 야코프의 출현을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었다.
‘요즘 잠잠하다 했더니 또 설정 변경인가. 쾌락천마 이 빌어먹을 자식이…….’
원작에선 등장도 안 했던 야코프라는 기사의 출현에 안수호가 실로 오랜만에 그 이름을 뇌리에 담았다. 그러나 사실 이번 사태에 쾌락천마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서리기시단의 제1 돌격대 대장. 야코프.
그 소개에서 알 수 있듯 야코프는 본래 빌헬름이 살던 세상에서 빌헬름의 밑에서 복무하던 기사였다. 그리고 그가 이 세상에 나타난 건 쾌락천마조차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본래 ‘기사의 무덤’이라는 던전과 그 던전의 주인 괴수 ‘빌헬름’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살던 존재였다. 원작에서 쾌락천마는 자신의 권능을 이용하여, 빌헬름과 그가 지키는 묘소를 게이트라는 매개체를 통해 억지로 자신의 세상과 연결시킨 것이었다.
자신이 만든 세상은 물론이고 다른 세상에마저 영향을 줄 수 있는 그 권능은 분명 신이라 불러 마땅하나.
그가 원작이 아닌 이번 세상에서 미처 생각지 못한 변수가 있었으니, 바로 천사 라미엘이 예정되었던 빌헬름의 출현을 5년이나 앞당겼다는 점이었다.
그로 인해 세상을 감싼 차원의 벽에 자그마한 균열이 생기게 되었고, 그 결과 본래 등장할 예정이 없었던 빌헬름 휘하의 부대장 네 명이 다른 망령기사와 마찬가지로 던전의 특성에 의해 부활하여 이곳에 출현하게 된 것이다.
세상을 만든 신, 쾌락천마조차 예상치 못한 돌발 사태.
그런 일이 이 세상에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가.
이는 결코 가벼이 여길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안수호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중요한 무언가의 징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정을 모르는 안수호는 이를 눈치 챌 수조차 없었을 뿐더러, 애초에 지금 그에겐 그런 복잡한 일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이미 한 번 죽음 앞에 스러진 영혼에 기적이 찾아와 다시 단장님 밑에서 주군을 위해 싸울 수 있게 되었으니. 실로 기쁜 일이라. 겁도 없는 침입자들이 피를 바친다면 영면에 드신 주군께서도 기뻐하실 터.
야코프가 배틀액스를 사선으로 늘어뜨린 채 자세를 낮췄다. 그들이 위치한 미궁 통로의 폭은 약 10미터. 야코프가 그 커다란 도끼를 휘두르기에 충분한 너비였다.
“전원. 0번 대형으로.”
설아현의 명에 헌터들이 일사불란하게 대형을 잡았다. 그 전까지 치러왔던 전투 때처럼 유쾌한 입담이나 농을 던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0번 대형이라…….’
그야 그럴 수밖에.
설아현이 말한 0번 대형은 던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중심부 게이트 너머에 있어야 할 빌헬름과 미궁에서 마주쳤을 때를 상정한 대형이었으므로.
‘즉 설아현은 놈을 빌헬름 급으로 판단했다는 건가.’
두 눈동자에 빠르게 붉은 빛이 점멸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설아현을 보며 안수호가 마른 침을 삼켰다. 야코프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이상 그는 전적으로 설아현의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휘오오오오오.
안수호가 탈리스만을 발동하자 그의 손아귀에 시커먼 연기가 모여들었다. 이윽고 1미터 조금 안 되는 검의 형상을 이룬 그것을 그가 있는 힘껏 쥐었다. 다른 헌터들 또한 싸울 채비를 마쳤다.
슬슬 가겠다.
야코프는 그 모든 과정을 기다려주었다. 마치 그것이 그가 추구하는 명예이자 기사도요, 자신에겐 적의 준비를 기다려줄 수 있는 여유가 있다고 과시하듯이.
철컥.
야코프가 무릎과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다음 순간.
투쾅!!!!
바닥에 쌓인 눈이 폭발하듯 터져나가며 야코프의 신형이 헌터들에게 달려들었다.
“흐읍!”
야코프의 돌격. 이를 막아내기 위해 가장 앞에 나선 건 흑룡회 소속 S급 초인 조광일이었다.
설아현, 한용수와 더불어 흑룡회에 단 셋밖에 없는 S급 초인.
그가 노도의 기세로 휘둘러지는 야코프의 도끼를 두 팔 벌려 맞이했다.
철퍼억!
야코프의 도끼가 조광일의 몸을 파고든다. 그러나 단 한 방울의 피도 흐르지 않았다. 반투명한 겔로 변한 조광일의 몸이 야코프의 도끼를 꽈악 붙들었다.
A급 초능력 점성육체. 신체를 끈적한 점성을 지닌 유체로 바꾸는 별볼일 없는 능력.
그러나 극한의 단련을 통해 A급 수준까지 성장시킨 그 능력은 조광일에게 국내 정상급의 방어력을 안겨주었다. 빌헬름의 서리마법과 상성이 나쁘지만 않았어도 그 또한 태스크 포스에 뽑혔으리라.
우뚝.
도끼를 뽑아들려던 야코프의 어깨가 멈칫했다. 조광일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걸리고, 그의 등 뒤에서 네 명의 초인이 휘두르는 갖가지 냉병기들이 튀어나왔다.
채채채챙!
그러나 다음 순간, 야코프의 주위에 피어오른 검붉은 기운이 일제히 무기의 형상을 이루며 그 공격들을 막아냈다. 조광일의 몸에 박힌 도끼를 포기한 야코프가 새로 만든 두 자루의 검을 휘두르려던 순간.
콰아앙!
설아현의 발길질에 야코프의 몸이 주르륵 밀려났다. 흐릿하게 아른거리는 검붉은 기운 사이로 살짝 우그러진 흉갑이 언뜻 보였다.
이를 포착한 설아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생각보다 강한 적은 아니야.’
기존 망령기사처럼 몇 번의 공격으로 갑옷을 파괴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설아현의 공격이 아예 통하지 않는 수준도 아니었다. 적어도 빌헬름 급은 아니라며. 최악의 상황을 면했다는 사실에 설아현의 얼굴에 찰나의 안심이 스쳤다.
“요한! 한여름!”
그러나 결코 방심하진 않았다. 그녀의 외침에 두 초인이 앞으로 나서며 각자의 초능력을 발동했다.
까드드드등!
한여름이 발한 얼음이 지면을 달려 야코프의 발을 묶었다. 검붉은 기운이 솟아나며 얼음이 달라붙는 족족 깨드렸지만 얼음은 계속해서 솟아나며 그의 몸을 옭아맸다.
그리고.
파직! 파지지지직!
한여름이 야코프의 움직임을 필사적으로 막아내던 사이, 요한이라는 이름의 초인이 온몸에서 전류를 일으키며 주먹 크기의 철구를 꺼내들었다.
파지지직! 콰릉! 콰르르르릉!
강렬한 스파크와 함께 천둥 소리가 미궁 가득 울려 퍼진다. 요한의 굳게 쥔 주먹 위로 떠오른 철구가 사방으로 전류를 튀기며 주홍빛으로 달궈지기 시작한다.
요한 키르히호프. 한국식 이름은 한요한. 흑룡회 소속 헌터이자 국내에서도 극히 드문 전격 계열 초능력을 지닌 A급 초인.
“흡!”
그가 주먹을 내지르자 한껏 달궈진 철구가 음속의 아홉 배 속도로 튀어나갔다.
투콰아아아앙!!!!!
거대한 폭발과 함께 차갑게 식은 공기가 단번에 후끈 달아올랐다. 지끈거리는 오른팔을 부여잡은 요한의 좌우로 근접전을 담당한 초인들이 다시 앞으로 나섰다.
지면의 눈과 쌓여있던 흙먼지에 의해 피어난 자욱한 연기.
그 연기를 바라보며 모든 헌터들이 긴장한 순간, 준수라는 이름의 초인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해치웠나?”
다음 순간 그 말을 반박하듯 야코프가 자욱한 연기를 헤치며 튀어나왔다. 양손에 들려있던 검을 투척하며, 새롭게 뽑아든 무기를 든 채 그가 다시금 달려들었다.
“광일이 아저씨!”
“예!”
조광일이 몸을 크게 벌리며 투척된 검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휘리릭!
“어엇?!”
일직선으로 날아오던 검이 돌연 휘리릭 회전하며 크게 궤도를 틀었다. 조광일의 양 옆을 스치고 지나간 두 자루의 검이 한여름과 요한 구스타프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헛!”
“크윽!”
요한이 급하게 몸을 숙이고 한여름이 자신의 앞에 얼음벽을 세웠다.
“막지 말고 피해!”
그 모습에 먼저 관측했던 미래의 광경을 떠올린 설아현이 급하게 외쳤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외침이 무색하게도, 한여름이 세운 얼음벽은 야코프의 투척 앞에 속절없이 깨지며 산산조각 났다.
파카아앙!!
새된 소리와 함께 얼음조각이 비산한다. 그러나 검의 기세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핏빛처럼 붉은 날이 한여름의 가슴을 노리고 날아든다.
‘이건 못 피하’
절체절명의 순간. 한여름이 최후의 저항으로 착탄 예정 지점에 얼음을 피웠다. 그러나 부질없는 저항이었다. 한여름조차 그 사실을 예견했다. 그녀가 있는 힘껏 몸을 틀었다. 하다못해 착탄지점을 몸의 중심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돌려서, 어떻게든 부상을 줄이고자.
그러나.
채앵!
야코프의 검이 한여름의 가슴을 가르기 직전, 그 옆에서 튀어나온 새까만 칼날이 이를 튕겨냈다. 얼떨떨한 표정의 한여름이 고개를 돌리자, 안수호가 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괜찮습니까?”
“……고마워요.”
두 사람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전투 중에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눌 순 없었으니까.
허나 그 순간.
……그 칠흑빛 검. 설마…….
야코프의 목소리가 중후하게 울려 퍼진다. 마치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꾹 눌러 담은 듯한 목소리.
설마 네놈이 바로 단장님께서 말씀하신 그 도적놈인가……!
야코프의 주위로 검붉은 기운이 요란하게 일어섰다. 검이며 창이며 온갖 냉병기의 형태를 한 그것이 일제히 헌터들에게 겨눠졌다.
“다들 방어 준비!”
설아현이 다급하게 외쳤다. 조광일을 포함해 방어에 능한 헌터가 앞으로 나서며 다른 이들 또한 저마다 야코프의 공격에 대비할 때.
휘오오오오오!!!
오직 단 한 사람. 안수호만은 방어가 아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었을 시점부터 압축한, 한 점 빛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칠흑으로 물든 연기덩어리를 거머쥔 채. 안수호가 있는 힘껏 오른팔을 휘두르며 외쳤다.
“다들 숙여!”
콰가가가가가가각!!!!!
다음 순간, 수십 다발의 검은 가시가 야코프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