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113. 베갯머리 송사
* * *
쏴아아아아아아.
불이 꺼진 어두운 방 안.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샤워기 소리에 안수호가 침대에 걸터앉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경솔했어.’
그 말대로 경솔하기 그지없었다. 최소한의 피임 도구도 없이, 그저 ‘직전에 빼면 되겠지.’라는 안일한 판단 끝에 저질러선 안 될 실수를 저질러버리고 말았다.
정사 동안 고조되었던 흥분감이 가라앉자 뼈아픈 자괴감이 몰려왔다. 그의 안에서 강하늘은 여동생 같은 이미지였기에 더욱 그랬다.
마치 더럽혀선 안 될 순수한 아이를 더럽혀버린 느낌.
“하아아…….”
벌컥.
그때 욕실 문이 열리며 강하늘이 나왔다. 이미 못 볼 꼴까지 다 본 사이임에도 그녀는 수건으로 몸을 조신하게 가린 채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강하늘이 쭈뼛거리는 걸음걸이로 안수호 곁에 다가와 앉았다. 샤워를 마친 직후의 후끈한 열기가 그의 뺨을 간질였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야?”
“뭐, 뭐가요?”
“마지막에 왜 다리로 나 끌어안았냐고.”
“그, 그게. 저, 저도 모르게 본능? 적으로? 실수 비슷하게 그만…….”
“…….”
“그, 그래도 안쪽까지 잘 씻어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게, 게다가 안전한, 날이었기도 했구…….”
“그러길 바라야지. 만약 덜컥 애가 생겨버리기라도 하면 얼마나 골치 아프”
안수호가 흠칫 입을 다물었다. 그가 슬쩍 강하늘의 눈치를 보자 강하늘이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상냥하게 웃었다.
“치이. 제 눈치 그렇게 안 봐도 돼요. 저도 지금 당장 임신하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요?”
“그, 그래?”
“한가롭게 임신해서 애 낳고 둘이서 오순도순 키우는 건 나중에 하면 되죠. 이 세상에서의 일이 마무리되고 원래 세상으로 돌아간 다음에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토옥. 하고 강하늘이 안수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아직 샤워하지 않은 안수호에게선 두 사람의 체취가 섞인 시큼한 냄새가 은은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냄새가 불쾌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 체취를 맡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강하늘에게 있어선 그 살내음이야말로 두 사람이 나누었던 사랑의 증거였으니까.
“오빠.”
“응.”
“언젠가 이런 날이 올까 상상만 했었는데, 드디어 오빠랑 이어졌네요.”
“……알게 된 지 한 달 조금 더 지났으니 꽤 빠른 편이지.”
“그러니까요. 오빠를 보고 있으면 꼭 훨씬 오래 전부터 사랑했던 것처럼 두근거리는데. 진짜 이상하다. 그쵸?”
“원래 세상에서 살던 동네가 비슷했으니까. 어쩌면 오고 가면서 몇 번 마주쳤을지도 모르지.”
“오빠는 원래 모습도 지금 모습이랑 똑같았어요? 저는 그런데.”
“나? 나는…….”
말끝을 흐린 안수호가 상반신만 드러낸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여인혁에게 근골정렬을 받은 뒤 그의 몸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원래도 운동이 취미라 썩 괜찮은 몸이긴 했다만, 골격 그 자체가 바뀌었으니까. 실제로 키도 꽤 자라기도 했고.
“……얼굴은 지금이랑 똑같아. 키는 한 3cm정도 자란 것 같고. 근육도 원래 세상에 있을 때보다는 좀 더 붙었지.”
“별로 차이는 없네요.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서 서로 못 알아볼 일은 없겠다.”
“돌아갈 수 있다면 말이지…….”
그가 튜토리얼 퀘스트 보상으로 보았던 원래 세상으로의 귀환.
오직 그것만을 목적으로 쉴 틈 없이 달려왔으나 아직도 최종 퀘스트의 클리어는 요원하기만 했다. 애초에 최종 퀘스트가 뭔지도 몰랐고, 그 이전에 이 세상의 이야기가 어디까지 준비되어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으니까.
“그, 그럼 있잖아요. 조, 조금 부끄러운 질문이긴 한데…….”
강하늘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안수호의 상반신을 따라 내려가 한 곳에 멈췄다.
“……호, 혹시 거기도 조금 자랐, 나요?”
“뭐?”
놀란 눈으로 안수호가 고개를 돌리자 강하늘은 두 뺨을 빨갛게 붉히고 있었다. 샤워 후의 온기 때문은 아니었다.
“구, 궁금해서요! 키도 근육도 자랐다고 하니까, 호, 혹시 거기도 자랐을까 싶어서……?”
“그런 걸 왜 궁금해 하는데?”
“그게……”
허리를 곧추세운 강하늘이 몸을 감싸고 있던 수건 앞섬을 살짝 들췄다. 그러자 뽀얀 아랫배부터 탄력 있는 허벅지까지 그녀의 몸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 마지막에 턱 막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비, 빈 공간 없이 꽉 차는 느낌이 들어서. 대, 대충 한 이쯤?”
강하늘이 아랫배의 한복판을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마치 눈금으로 길이를 재듯 두어 번 손가락을 쥐락펴락 한 그녀가 풀어헤친 앞섬을 다시 가렸다.
그 야릇한 행동에 안수호가 할 말을 잊고 있자 강하늘이 수습하려는 듯 빠르게 외쳤다.
“보, 보통 창작물에서는 거, 거기 크기가 좀 과장? 되는 편이잖아요? 만화든 소설이든! 그래서 현실 물건은 좀 더 작다? 고 그랬는데! 그, 그런데 오빠꺼는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아서, 호, 혹시 소설에 들어오면서 보정 같은 거라도 받은 건가……. 하으으…….”
횡설수설 외친 강하늘이 자기가 한 말에 부끄러워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고 궁금한 건 궁금한 것이라는 듯. 어깨를 잔뜩 움츠린 강하늘이 곁눈질로 살며시 안수호를 올려다보았다.
“…………진짜 이런 걸 도대체 왜 물어보는 거야?”
“구, 궁금해서…….”
부끄러움에 몸부림치면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그 모습에 안수호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안 자랐어.”
“……네?”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저쪽 세상에서나 이쪽 세상에서나. 지금이랑 똑같은 크기였어. 이제 됐어?”
“어어……. 네…….”
입술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인 강하늘의 시선이 다시금 아래쪽으로 향했다. 그 노골적인 시선에 안수호는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내색할 수밖에 없었다. 버클을 동여맨 바지 앞섬이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강하늘은 여전히 그의 옆에 찰싹 달라붙은 채였다. 수건을 제외하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씻고 올게.”
결국 안수호는 머리도 식힐 겸 샤워실로 향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일어서려던 순간, 강하늘이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저, 오빠?”
“왜?”
“씻으신 다음엔 어쩌실 거예요? 자고……가실 건가요? 아니면…….”
강하늘은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으나 안수호는 그녀가 뭘 물어보려 했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이에 그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미안. 곧바로 가봐야 해. 내일 아침에 중요한 일이 있거든.”
“중요한 일이요?”
“기사의 무덤 공략. 그게 바로 내일 아침이야. 그래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흑룡회 사무실에서 자료 검토 중이었고.”
“앗…….”
강하늘이 나지막한 탄성을 뱉더니, 이내 미안한 표정으로 안수호를 바라봤다. 그의 말대로라면 즉 그는 술에 꼴아 방송에서 날뛰던 자신을 말리기 위해 일도 내팽개치고 달려왔다는 뜻이니까.
“기사의 무덤이라면 거기죠? 저번에 오빠가 빌헬름이랑 싸운…….”
“맞아. 원작에도 나온 던전이지. 너도 거기까진 읽었다고 했나?”
“읽은 것 같긴 한데……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200화 쯤 내용 이상해지고 부터는 대충대충 읽다가 하차해서…….”
“뭐 그럴 수 있지.”
“오버랭크 던전이면 역시 많이 위험하겠죠……?”
“안전하진 않겠지. 그렇지만 괜찮을 거야. 던전이 원작보다 일찍 등장하긴 했지만, 공략에 참가한 초인 라인업은 원작보다 지금이 훨씬 좋으니까.”
빌헬름 공략조에는 안수호 본인도 포함되어 있긴 했으나, 사실상 그의 역할은 빌헬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작전을 수립한 시점에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최강의 헌터들이 모인 공략조는, 설령 안수호가 없더라도 자신들끼리 알아서 빌헬름을 공략해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가 함께하는 것은 그가 세운 작전에 있어 그 자신의 존재가 나름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이다.
없어도 상관은 없지만 있다면 확실하게 빌헬름의 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조커. 안수호는 그런 역할이었다.
게다가 혹시 모를 이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안수호의 존재 유무는 공략의 성패에 크게 작용할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참가는 반쯤 필수나 다름없었다. 그런 사정이 아니었다면 안수호도 미쳤다고 오버랭크 던전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진 않았을 것이다.
“저, 오빠…….”
강하늘은 그런 사정을 전부 알지는 못했으나, 다만 안수호가 무리해서 공략에 참가한 것이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하다못해 그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어서.
“……저도 같이 가줄까요?”
그렇게 말한 강하늘이 안수호의 손을 꽈악 쥐었다. 마치 결코 놓지 않겠다는 것처럼.
“같이 간다고? 괜찮아. 넌 내일 수업도 들어야 하고, 네가 와봤자 공략에 참가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제 스킬이 있잖아요. 연심의 벚꽃. 오빠가 돌입하는 타이밍에 맞춰서 발동해줄게요.”
“그건…….”
스킬의 패널티를 떠올린 안수호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거 다섯 번 다 쓰면 너 죽는다며. 절대로 안 돼.”
“아직 다섯 번 중 두 번째니까 괜찮아요.”
“두 번째든 세 번째든 안 된다면 안 되는줄 알아. 이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너나 내 목숨이 정말 위험하다 하는 상황이 아니면 그 스킬은 쓰지 마. 알겠어?”
“지금이 바로 그때잖아요. 오버랭크 던전 공략에 안 쓰면 언제 쓰겠다는 건데요?”
“괜찮을 거라니까 그러네. 네 도움이 없어도 내 목숨 하나 정돈 건사할 수 있어. 게다가 네 스킬은 효과가 오래 지속되는 능력이 아니잖아. 던전 바깥에선 타이밍을 정확하게 맞출 수도 없을 테고, 자칫 잘못했다간 스킬 횟수만 날려먹는 꼴이 될 거야.”
“그렇지만……”
안수호의 조리 있는 설명에도 강하늘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듯 그의 손을 더욱 꽉 쥐었다. 그 두 눈동자에 짙은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안수호도 그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의 안전을 조금 챙기자고 강하늘의 목숨을 깎아먹는 짓을 할 순 없었다. 그는 결코 타협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불안한걸요.”
그러나 타협할 생각이 없는 건 강하늘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 안수호와 마침내 하나로 이어지면서 안수호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더욱 짙어졌다. 연심은 물론이고 의존과 집착마저도.
안수호는 괜찮다고 했지만, 세상에는 늘 만의 하나라는 경우의 수가 있는 법이니까.
그 만의 하나를 방지할 수 있다면 강하늘은 얼마든지 연심의 벚꽃을 사용할 용의가 있었다. 벚꽃의 페널티는 5분의 1씩 축적되는 게 아닌 다섯 장의 꽃잎을 모두 사용하면 발동된다. 이제 겨우 한 장을 사용한 참이었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오빠도 싸워봤으니까 알잖아요. 제 스킬 없이는, 오빠는 전혀 그 괴수의 상대가 안 된다는 거.”
“정면으로 놈을 상대할 생각은 없어. 전투는 다른 헌터들이 할 거야. 내 역할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수준이야.”
“보조적이면 어떤 건데요?”
“그건……”
안수호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반응이 강하늘의 불안감을 더욱 배가시켰다.
“……아무튼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알아서 잘 살아남을 테니까. 내일 저녁에 보란 듯이 살아서 돌아올 테니까 중간고사 준비나 열심히 하고 있으라고.”
안수호는 애써 장난스럽게 말했으나 강하늘의 표정이 풀어지는 일은 없었다. 착잡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안수호가 강하늘의 손을 살며시 뿌리치려 했다.
그 순간.
띠링!
반투명하게 빛나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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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숨마저 내어줄 수 있는 지고지순의 사랑! 그 사랑에 반응해 <스킬 :="" 연심의="" 벚꽃="">의 등급이 레전더리에서 에픽으로 상승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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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안수호가 아닌, 강하늘의 눈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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