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111화 (112/266)

〈 111화 〉 110. 사랑과 원망 사이(3)

* * *

강하늘은 왜 뜬금없이 술에 취한 채로 방송을 켜 시청자들에게 하소연하고 있었을까.

이 세상 모든 게 가짜라며 아카데미 동기들에게 고민 상담조차 하려 하지 않았던 그녀가 왜, 얼굴조차 모르는 시청자들을 상대로는 제 고민을 술술 털어놓았는가.

그 원인을 한 마디로 정리해보자면, 강하늘의 행동은 기실 자포자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첫 맥주 캔을 땄을 때 강하늘이 느끼는 감정은 이러했다.

지예원에 대한 질투와 원망.

안수호에 대한 실망감과 배신감.

그리고 이 세상 그 자체에 대한 회의감.

강하늘의 심리 상태는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들이 안수호에 대한 사랑을 꾹꾹 짓누르고 있는 형국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부정적인 감정이 들면 이를 해소하고 토해내고 싶어 한다. 강하늘 또한 그랬다.

문제는 그녀에게 제 가슴에 자리한 부정적인 감정들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으레 힘든 일이 있으면 다른 이에게 하소연하며 위로와 공감을 얻어내려 하는 법이나, 강하늘의 주변엔 그렇게 하소연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 결과 강하늘의 속에서 부정적인 감정은 점점 쌓여가기만 했다. 거기에 더해 다량의 알코올이 들어가자, 종국에 이르러선 반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방송을 켜버린 것이다.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은 마음.

그러나 얼굴을 알고 지내던, 이 세상의 ‘캐릭터’들과 마주하고 싶진 않은 마음.

그러한 마음이 겹친 끝에 강하늘은 인터넷상의 상대들에게 제 고민을 털어놓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기실 말로는 나름 논리정연하게 풀이했으나, 강하늘의 행동에는 아무런 논리도 없었다. 번지르르한 포장을 한 꺼풀 벗겨보면 그저, 술김에 뒷일 생각 안 하고 감당 못할 짓을 저지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여트은. 제가, 제가아 진짜 이해가 안 되는 게? 사실 제가 그 언니보다 더 이쁘거든요? 그 언니가 얼굴은 저보다 쪼끔? 아주 쪼끔 이쁠 수도 있는데에. 그 언니는 그. 몸이 완전, 완전 빼빼마른 몸이거든요오? 근데 저언 나올 곳 다 나오고 들어갈 곳 다 들어갔잖아요오? 얼굴도 이정도면 나쁘지 않고. 아니 제가 아니라 친구요. 친구. 친구가 그렇다고요. 흐. 시바알…….”

납치 사건으로 인해 며칠 간 방송을 쉬다 갑작스레 공지도 없이 켠 방송. 시청자 숫자는 아직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얼마 없는 시청자들은 강하늘의 날 것 그대로인 하소연을 흥미진진하게 관전하고 있었다.

“네헤? 뒤에 전화 계속 오는데 안 받냐구요? 제가 받기 싫다고 몇 번을 말해요! 지금, 지금 받으면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에요오. 크힝.”

등 뒤에서 들려오는 벨소리를 애써 외면하며 강하늘이 맥주를 들이켰다.

방송이 시작되고 약 한 시간. 그 사이 강하늘의 집에 있던 술은 거의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적지 않은 양이었던 만큼 그녀는 그야말로 만취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시청자들은 그런 강하늘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으나, 그런 강하늘을 보며 개중에는 악질적인 장난을 치는 이도 있었다.

­빰빠라빰!

[ 프로냄챙호빠에이스 님이 10,000원 후원!

=“섹시 제로투 추면 오만원”= ]

“제로투 오만원……?”

강하늘이 멍한 눈으로 시청자가 보낸 메시지를 읽었다. 곧 그 두 눈에 불쾌한 기색이 떠오른다.

“이씨. 내가 술 좀 마셨다고 이딴 도네를 쏴? 야! 공지사항에 그거 금지라고 적어놨거든?! 넌 내가 취한 거 가타? 나 아직 하나도 안 취해써! 너 밴이야 밴! 죽어랏­! 에헤헤헤헷! 으힛! 으, 으흑! 끄히이잉…….”

조울증 환자마냥 강하늘이 울다가 웃기를 반복했다. 그런 반응이 재미있던 건지 곧바로 다음 도네이션이 올라왔다.

­빰빠라빰!

[ Cobin 님이 10,000원 후원!

=“그럼 공식 리액션 음주냥이 함 가죠.”= ]

“음주냥이……? 나 오늘 그럴 기분 아닌데…….”

­빰빠라빰!

[ 제이컵디그롬 님이 10,000원 후원!

=“청자들이 님 하소연만 벌써 한 시간째 들어주고 있는데 솔직히 한 번 정돈 해줘도 되는 거 아님? ]

“아……. 하긴, 그것도 그런가? 청자님들 아니었음 혼자 끙끙댔을 텐데, 그래도 털어놔서 좀 후련해진 것 같기도 한­”

­빰빠라빰!

[ 나리야물어 님이 200,000원 후원!

=“나리야 냐앙 해봐 냐앙.”= ]

“냐아앙~”

자본 앞에 굴복해버린 그 모습에 채팅들이 빠르게 올라갔다. 그 광경을 보며 강하늘이 실소했다.

이젠 자기도 다 모르겠다고. 될 대로 되라는 듯이.

문득 강하늘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설움이 복받쳐 올라옴을 느꼈다. 방송을 시작한 건 그녀 자신이었으나, 안수호와 싸우다시피 해놓고 얼굴도 모르는 시청자들에게 아양이나 떨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비참하고 꼴사나웠다.

­띠리리리리리!

그때 다시 한 번 울린 벨소리.

침대 위에 던져둔 폰을 슬쩍 바라본 강하늘이 애써 그 소리를 외면했다.

그러나.

­캉캉!

연이어 울린 타격음의 강하늘이 퍼뜩 고개를 들렸다. 그녀의 시선이 방 저편의 창문으로 향했다.

“……어?”

그 창문 너머에 까맣게 보이는 사람 그림자.

당황한 강하늘이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녀의 방은 건물 5층이었다. 창문으로 지나다니는 사람이 보일 리가 없었다.

“뭐, 뭐야. 당신 누구­”

강하늘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갑작스레 등장한 괴한이 잠겨 있지 않던 창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새까만 연막을 토해냈다.

­투화아악!

까만 연막이 방송용 카메라 렌즈를 가렸다. 졸지에 검게 물든 화면에 시청자들이 당황한 찰나, 정체불명의 괴한이 성큼성큼 컴퓨터 앞으로 다가왔다. 그제야 강하늘은 그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 오빠?”

“…….”

안수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안수호는 모니터를 말없이 바라보더니 방송이 진행중이던 브라우저 창을 닫았다. 그걸로도 모자라 카메라와 마이크 선까지 뽑았다.

“강하늘.”

컴퓨터 전원까지 끈 뒤에야 겨우 안수호가 입을 열었다. 급하게 뛰어오기라도 했는지 그 입에서 가쁜 숨결이 새어나왔다.

“왜 전화를 안 받아. 내가 몇 번을 전화했는데.”

“……받기 싫으니까.”

강하늘의 눈에서 눈물이 찔끔 새어나왔다. 그녀가 언성을 높이며 안수호에게 쏘아붙였다.

“받기 싫어서 안 받았다! 왜! 그럼 오빠는 아침에 그딴 식으로 말해놓고도 슬쩍 전화하면 내가 네 오빠! 하고 받을 줄 알아써?! 그럴 줄 알았냐고!”

“하늘아. 조금만 조용히. 옆방에서 듣기라도 하면­”

“들으라고 해! 들으라고! 아예 온 동네방네 다 들으라고 해! 콱 여학생 방 멋대로 침입한 걸루 징계나 먹어라 안수호!”

“야, 좀만 조용히­”

그 순간 풍겨온 알싸한 알코올 향에 안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책상 위아래에 널브러니 술병들을 보며 그가 진땀을 흘렸다.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얘 지금…….’

“하늘아. 일단 진정하고. 너 지금 많이 취했으니까 아바타부터 발동하자. 응? 좀 진정하고 이야기 좀 하자고.”

“싫어! 내가 왜 오빠말대로 해야 하는데? 그리고 나 안 취했어! 안 취했다, 흐끅, 흐으에에에엥……”

“하늘아?”

“흐윽! 가서, 가서 지예원인지 뭔지랑 물고 빨고 다 하라고! 흐에엥. 왜 나는, 나는 너 좋아한다 했는데에 왜 넌 나 안 좋아하냐고오오……. 히끅!”

“야 내가 언제 널 싫어한다 그랬어. 나 너 좋아한다고­”

“양다리 걸치고 싶다매 양다리! 내가, 내가 그 말 듣고 얼마나 서러웠는지 알기나 알……흐아아아아앙!!”

­쿵쿵쿵!

옆방에 있던 학생이 시끄럽다며 강하늘 방 쪽 벽을 쾅쾅 두드렸다. 안수호가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현재 여자 기숙사에 몰래 침입한 몸, 다른 사람에게 들켰다간 보통 일로 끝나지 않을 테니.

“끄헤에에엥, 허읍?”

“하늘아. 제발. 제발 좀 진정하고. 일단 아바타부터 발동해봐. 진정하고 이야기 좀 하자. 응? 제발.”

서럽게 울던 강하늘의 입을 틀어막으며 안수호가 필사적으로 부탁했다.

“이야기. 알겠지? 이야기.”

“…….”

훌쩍이며 안수호를 올려다보던 강하늘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녀의 몸을 새하얀 빛무리가 감쌌다.

“……”

이윽고 강하늘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녀는 평소 방송 때 사용하던 하늘색 머리카락의 아바타 모습이었다. 퉁퉁 부어오른 눈가도, 헝클어진 머리카락도 전부 정돈된 상태.

“…………아.”

당연하지만 취기 또한 말끔히 날아갔다. 뒤늦게 자신의 추태를 자각한 강하늘이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안수호를 밀쳐냈다.

강하늘이 안수호를 외면하듯 고개를 숙였다. 안수호 또한 굳이 말을 걸진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은 잠시간의 침묵.

“……왜 왔어요?”

이윽고 강하늘이 질문을 던졌다. 아바타 능력 덕에 되찾은 이성으로. 새벽에 자신을 배신했던 남자에게 그렇게 물었다.

“네가 방송에서 할 말 못할 말 다 하고 있길래 막아야겠다 싶었거든.”

“……그건 고마워요. 그래서 끝인가요?”

“그리고 너한테 할 이야기도 있고.”

“양다리를 받아달라는 이야기죠?”

“맞아.”

“오빠,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오빠 좋다고 고백한 사람한테, 사실 내가 너 말고 좋아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어서 그러니 셋이서 알콩달콩 잘 지내보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고요!!”

“……”

“지예원은요? 설마 지예원은 받아주겠데요?”

“……내 선택을 존중한다고 했어.”

“하.”

다리에 힘이 쭈욱 빠진 강하늘이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착잡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자기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양다리라니.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이상하잖아요. 그런데 지예원은 그걸 받아들였다. 오빠, 이게 뭘 의미하는 건지 알겠어요?”

“…………뭔데?”

“지예원이 진짜 사람이 아니라 소설 속 캐릭터에 불과하다는 뜻이에요.”

갑작스러운 논리의 비약. 그러나 강하늘은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저는요. 소설 같은 거 읽을 때, 하렘이든 역하렘이든 엄청 작위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중세시대 판타지 세상이 배경이라면 모를까, 상식 제대로 박힌 현대인이 그런 집단불륜을 하하호호 웃으면서 인정할 리가 없잖아요? 그건 그냥, 작가가 독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현실성을 포기했기에 가능한 전개라고요. 작위적이고. 작가편의적인.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요.”

“…….”

“오빠. 오늘 아침에 이 세상도 진짜 세상이라고 하셨죠?”

그러나 자신은 인정하지 못한다고. 강하늘이 그렇게 덧붙였다.

아무리 이 세상이 진짜 같다고 한들 본질은 결국 소설이라고. 쾌락천마라는 작가가 만들어낸, 꾸며진 것들로 가득 찬 작위적인 모형정원이라고.

그 증거로 이 세상엔 온갖 작위적인 전개가 판을 치고 있다고. 당장 지예원 건만 해도 그러며, 두 달도 안 되는 시기에 세 번이나 죽을 뻔한 자신이 바로 그 작위성의 산증인이라고.

자신이 지금껏 겪어온 고난이, 역경이, 괴로움이, 설움이 곧 이 세상이 거짓임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그 부분은 격하게 공감해.”

강하늘의 절절한 호소에 안수호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작위적인 사건들에 시달린 건 안수호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오히려 정도로만 따지면 안수호가 강하늘보다 더 시달리면 시달렸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이 세상은 작위적이야. 현실성 따위 진즉에 말아처먹은지 오래지. 그렇지만…….”

안수호가 두 눈을 강하늘과 맞췄다. 그의 입가에 피식, 하고 힘없는 웃음이 떠오른다.

“그깟 현실성 좀 없으면 어때?”

“……네?”

“현실성 없고. 작위적이고. 이게 진짜냐며 의심할 수밖에 없는 기상천외한 일들. 그런 일들은 원래 살던 세상에서도 종종 일어났었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그쪽 세상이나 여기나 별반 다를 건 없지 않아?”

“……설마 지예원이 양다리를 받아들인 게 그런 일이다, 그렇게 말하려고 하는 거예요?”

“사실 우리가 살던 원래 세상이라고 모형정원이 아니라는 보장은 없어.”

안수호는 강하늘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안에 줄곧 자리했던 하나의 생각을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중요한 건 나 자신이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야. 내가 진짜라 생각하면 진짜고, 가짜라 생각하면 가짜인 거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늘아. 넌 내가 캐릭터가 아니라 진짜 사람이라서 날 좋아하게 된 거야?”

그 말에 강하늘의 말문이 턱 막혔다. 비겁하다고. 일순 강하늘의 뇌리에 그런 감상이 스쳤다.

“난 아니었어. 네가 빙의자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했을 때도 난 너를 좋아했어. 진짜고 가짜고 상관하지 않고. 내게 있어 강하늘은 그저 강하늘이었어. 그래서 좋아하게 된 거야.”

강하늘의 감상처럼, 지금 안수호가 하는 말은 참으로 비겁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논리적 해명을 포기한 대신 강하늘의 감정에, 감성에 호소하는 전략.

“넌 이 세상이 다 가짜라고. 다 의미 없다고 그랬었지.”

“……그건.”

“그럼 나는? 나도 네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캐릭터에 지나지 않았어?”

그 물음에 강하늘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려 했다.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고.

강하늘이 안수호를 사랑하게 된 건 그의 본질에 관한 요소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안수호라는 사람이, 그가 보여준 그간의 모습에 반하고 마음을 빼앗긴 것이었다.

비록 안수호가 만들어진 캐릭터에 불과하다며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두고 갈팡질팡하긴 했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녀가 안수호를 캐릭터라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했다는 걸 의미했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하늘아. 말해봐. 너는 왜 날 좋아하게 된 거야? 내가 빙의자라는 걸, 너처럼 똑같이 원래 세상에서 온 사람이란 걸 눈치 채서야?”

“……아니에요.”

“그럼?”

“오빠가, 오빠가 그냥 좋았으니까……”

강하늘은 대답하면서 자신이 안수호의 의도대로 놀아나고 있음을 얼핏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입에 담은 말이 거짓이 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설령 네가 만들어진 존재였더라도 널 사랑했을 거야. 그리고 너도 똑같을 거고. 그건 결국 네가 너도 모르는 사이에 이 세상을, 적어도 나만은 거짓된 게 아닌 진짜로 받아들였단 이야기야. 결국 중요한 건 어떻게 받아들이냐야. 설령 가짜라도 그걸 진짜라고 생각하면, 그건 받아들이는 사람한테 있어선 진짜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

“만약 내가 너처럼 지예원을 그냥 소설 캐릭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면, 두 사람이 날 사랑하는 걸 알았을 때 주저 없이 하늘이 널 선택했겠지.”

그 말에 강하늘의 눈가에 촉촉한 눈물이 고였다.

어디까지나 가정법, 만약의 이야기를 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오늘 하루 동안 심신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던 강하늘에게는 고작 그 말 한 마디가 너무나도 고맙고 기뻤다.

“진짜, 요?”

“그래. 아마 그랬을 거야. 아니, 분명 그랬을 거야.”

그렇게 대답한 안수호가 덧붙였다.

그러나 자신은 지예원을 캐릭터가 아닌 사람으로 받아들였다고.

강하늘이 자신에게 있어 진짜였듯, 지예원 또한 진짜였노라고. 그래서 자신으로서는, 자신에겐 과분하기 그지없는 그 연심을 어느 한쪽도 포기할 수 없었다고.

“그래서 욕심 좀 부리고 싶었어. 가뜩이나 나한테 악의적으로 돌아가는 세상, 사랑하는 사람들과 온전히 함께한다면 조금이나마 버틸만해질 것 같아서.”

결국, 안수호의 논리는 그날 아침으로부터 조금도 발전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그의 이기적인 결정. 그것을 강하늘에게 납득시키기 위한 궤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궤변이라 한들 말에 담긴 감정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강하늘로 하여금,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떠올리게 하였다.

강하늘은 안수호를 사랑하는가.

그리고 안수호는 강하늘을 사랑하는가.

지예원의 문제에 대해 납득한 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내면에 자리했던 연심을 새롭게 자각해, 마침내 그 연심이 질투나 배신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보다 더욱 커졌을 뿐이다.

“…………결국 양다리 걸치겠다는 거잖아요. 과분한 사랑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니. 말은 잘 하네요. 무슨 막장드라마 남주인공도 아니고…….”

강하늘이 고개를 푹 숙인 채 토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할 수 있는 말을 전부 토해낸 안수호는 그런 강하늘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오빠.”

“응.”

“오빠는 절 사랑하나요?”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요?”

“사랑하고 있어.”

“앞으로도 사랑해줄 거죠?”

“응. 앞으로도. 쭉. 계속 사랑할 거야.”

“……그럼 됐어요.”

그럼 됐다. 그 말에서 드러나듯 결국 강하늘은 이 문제에 대해 타협하길 포기했다. 타협하는 대신 한 발자국 물러서며 안수호에게 양보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들어줘야죠. 제가 졌어요."

마침내 강하늘이 고개를 들었다. 그 눈가엔 어느새 투명한 눈물방울이 커다랗게 맺혀 있었다. 그러나 마냥 슬퍼보이기만 한 표정은 아니었다.

“양다리가 좋다는 건 아니에요. 지예원이 오빠 곁에 있는 거, 솔직히 말해서 도저히 참을 수 없어요. 그렇지만…….”

강하늘이 피식 웃었다. 안수호와 마주한 뒤 처음으로 지은 웃음이었다.

“오빠가 원한다니까, 너그럽게 봐주도록 할게요. 어차피 우리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면 지예원 걔는 캐릭터라서 따라올 수도 없을 테니까…….”

“하늘아…….”

“대신, 두 가지만 약속해요.”

강하늘이 자신이 걸터앉은 침대 옆을 팡팡 쳤다. 마치 자기 옆에 앉으라는 듯이. 안수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강하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첫째. 이 이상 여자 늘리지 마요. 지예원이야 저보다 먼저 만났다니 어쩔 수 없지만, 그 다음부턴 용납 못해요. 특히 원작 히로인들. 절대로 손대지 마세요. 걔네들은 얌전히 류태현이랑 사귀게 놔두라구요. 알겠죠?”

“그래. 알겠어.”

“그리고 두 번째.”

강하늘이 안수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 뺨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서리기 시작한다.

“……너그럽게 봐준다곤 했지만, 역시 제가 캐릭터 따위한테 뒤쳐진다는 건 용납할 수 없어요.”

“네가 뒤쳐지다니?난 지예원만큼이나 널­”

“그게 아니라제 말은, 연인 관계에 있어서 제가 그년보다 뒤쳐지는 게 싫다는 거예요. 먼저 고백했다고 그랬죠? 그럼 진도는 어디까지 갔어요? 손은 잡아봤어요? 단둘이서 데이트 가봤어요? 키스는 했나요?”

“뭐, 뭐?”

“됐어요. 그년이랑 뭘 어디까지 진도를 나갔든…….”

­퍽.

강하늘이 안수호의 몸을 거칠게 밀쳤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그가 풀썩, 침대 위로 쓰러졌다.

“……오늘 내가 앞질러줄 테니까.”

강하늘은 지체하지 않고 그 위에 몸을 포갰다. 하복부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안수호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하, 하늘아?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이, 이게 제 두 번째 부탁이에요! 들어줄 생각 없으면 전 포기하세요! 가서 그년이랑만 물고 빨고 하시라고요!”

“너, 너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지금은 제정신이죠.”

­파앗!

다음 순간, 강하늘의 몸이 빛무리에 휩싸이며 아바타 능력이 해제되었다. 본체로 돌아온 강하늘이 두 뺨 가득 취기어린 불그스름한 기운을 띠었다.

“야, 너…….”

당황한 안수호의 귓가에 강하늘이 끈적하게 속삭였다.

“근데 이젠 아니에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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