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 108. 사랑과 원망 사이(1)
* * *
멍하다.
머리가 멍했다. 마치 뇌가 물속에 둥둥 떠있는 듯한 감각. 아니, 뇌는 원래 물속에 떠있던가. 아무튼.
머릿속이 엉망진창이다. 마치 배수구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처럼 생각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켰다. 원인은 가슴에 있었다. 가슴에서부터 차오르는 감정들이 마치 배수구에서 역류한 구정물처럼 찐득하게 이성을 적셨다.
슬픔이.
원망이.
서러움이.
억울함이.
평소 품어볼 기회가 없던 시커먼 감정들이, 마치 날 끝이 보이지 않는 늪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것만 같았다.
전부 수호 오빠 때문이었다. 이 감정들은 전부 수호 오빠가, 내 앞에서 그런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했기 때문에.
‘어째서…….’
내가 소중한 것만큼 지예원도 소중하다고? 선택할 수 없어? 한쪽을 버리기가 싫어?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이 만들어진 세상에서 오직 오빠와 나만이 유일한 진짜인데! 고민할 게 뭐가 있다고!
머릿속에서 나 자신의 억울한 목소리가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오빠가 미웠다.
나를 선택하겠노라고. 나만을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않은 오빠가 미웠다. 내 고백을 듣자마자 양다리 따위를 걸치겠다 한 오빠가 미웠다. 밉고 원망스러웠다.
그렇지만 그 이상으로 사랑했다. 그 감정이 날 더 괴롭게 만들었다.
세 번.
오빠는 날 세 번이나 구해줬다. 세 번이나 내 목숨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 세 번의 구원에 내 감정은 맹목적으로 변해갔다. 사랑. 그리고 의존. 그것이 내가 수호 오빠에게 품은 감정의 정체였다.
그래. 맹목적인 사랑이요.
맹목적인 의존이었다.
나는 의지할 이 하나 없는 이 세상에서 벌써 몇 번이고 목숨을 위협받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수호 오빠에게 구원받았다.
그 결과 내 가슴 속에 자리한 건 커다란 연심과, 그 연심만큼이나 무거운 의존과 집착이었다. 자신의 감정이지만, 자신의 감정이기에 그렇게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었다.
오빠가 밉다.
그렇지만 사랑한다.
그래서 곁에 두고 싶다.
오직 나만 오빠 옆에 있고 싶다.
그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고, 오직 나만의. 나만을 바라보고. 나만을 구해주고. 나만을 사랑해주었으면 했다.
‘그야.’
나한테는 오빠밖에 없는데 오빠한테 다른 사람이 있다니. 도저히 견딜 수 없었으니까.
“흐윽.”
베개를 잡아 뜯듯 끌어안으며 소리 없이 흐느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으나 역설적으로 그랬기에 나는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의외로 소유욕이 강한 여자였다. 집착이라도 해도 좋을 것이다. 본래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아마 이 세상에 온 뒤 그런 성격으로 변한 것이리라.
나는 내가 온전히 오빠를 사랑하듯, 오빠도 온전히 나만을 바라봐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오빠에겐 나 말고도 소중한 존재가 있었다.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마음을 터놓은, 지예원이라는 여자가.
똑. 딱. 똑. 딱. 똑. 딱. 똑. 딱.
정적이 내리 앉은 병실에 시계 초침 소리만이 작게 울렸다. 그 정적 속에서 생각한다.
……사실 마냥 슬프기만 한 것도 아니라고.
오빠가 내 고백을 받아주었을 때. 오빠 또한 날 사랑한다고 해주었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그 기쁨은 아직도 가슴 한 켠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비록 그 기쁨 이상으로 설움이 크긴 하였으나, 어쨌든 기쁜 건 기쁜 거였다.
지금도 가만히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어찌 되었든 내 감정이 오빠에게 받아들여졌다는 뜻이니까.
그렇지만 지예원. 그 여자의 존재 때문에 그 미소는 잠시도 유지될 수 없었다. 그래, 전부 그 여자가 문제였다.
지예원만 없었다면. 원작에선 이름도 나오지 않았던 그 엑스트라만 없었다면 이렇게 슬프지 않았을 텐데.
마치 이야기 속 왕자님과 공주님처럼. 왕자님에게 구원받은 공주님은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고. 그렇게 원만하게, 아무런 장애도 없이, 그저 행복하고 또 행복한 결말이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지예원만 없었다면.
그러나 비록 지예원이 원망스럽긴 하나, 마냥 원망하기만 할 수도 없었다. 물론 지예원이 밉기는 했다. 가슴으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는 오빠의 심정도 납득이 되었다.
오빠에게 있어 지예원이란 내게 있어 오빠와 비슷한 위치였다.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마음을 터놓은 상대. 처음으로 진심을 보일 수 있었던 상대. 당연히 소중하겠지. 내게 오빠가 소중하듯, 오빠한테도 지예원이 소중하겠지.
머리로는 그렇게 이해했다. 다만 가슴으로 납득할 수가 없을 뿐.
‘그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새까만 구정물에 잠기는 것 같았다. 나는 애써 다른 생각을 했다.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떴다.
그래. 몸 상태도 멀쩡하니 수업에 나가야 했다. 기말고사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필기 준비도 해야 하고. 납치되었던 이틀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알아봐야 한다. 그러고 보니 류태현도 날 구할 때 함께 왔었다고 했던가. 그럼 학교 생활은 걔한테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수많은 생각이 어지럽게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하.”
문득,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기말고사니 아카데미니 어차피 다 가짜에 불과한데. 가짜밖에 없는 세상인데. 그 세상의 유일한 진짜는 나만을 온전히 봐주지 않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오빠…….”
수호 오빠가 보고 싶었다.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문득 든 그 생각에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둔 스마트폰을 집는다.
그렇지만 곧 연락하길 관두었다. 갈 곳을 잃은 손끝을 진한 후회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 쫓아내듯이 보내버렸는데 무슨 염치로 내 쪽에서 연락을 하느냐고. 설령 연락한다 하더라도 뭐라고 말할 거냐고.
지금 당장 만나고 싶다? 그래. 그렇게 말하는 건 쉽겠지.
그렇지만 만나서는? 순간의 외로움을 해소한 뒤에 남을 오빠의 선택은? 오빠가 나만을 봐주지 않는다는 걸 직시해야만 하는 그 현실을, 어쩌면 날 선택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그 불안을 내가 과연 견딜 수 있을까?
분명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견딜 수 없었기에 오늘 새벽, 오빠를 그렇게 쫓아내버린 거였으니까. 다시 만난다 한들 새벽의 전철을 밟을 뿐이다.
그렇지만 견디기 어려운 건 지금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홀로 있으면 감정은 안으로 향한다. 오빠에 대한 수많은 복잡한 감정들이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 채 안쪽에서 휘몰아쳤다. 때문에 어지럽고 답답했다.
답답해. 그래. 누구라도 좋으니 나의 이 답답함을 호소하고 싶었다. 호소하고 위로받고 싶었다. 괜찮다고. 넌 틀리지 않았다고. 네 이야기 다 이해한다고.
이럴 때 수호 오빠가 내 곁에 있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오빠는 지금 내 곁에 없다. 없을 뿐더러, 부를 수도 없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라도 부를까.
그렇게 생각한 내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다른 ‘사람’이라니. 오빠 말고 다른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이 세상에 빙의하고 세 달. 나는 소설 속 캐릭터들과 나름대로 관계를 맺었다. 친구라고 부를 이가 있냐고 묻는다면, 그래도 몇 명 정도는 있다고 답할 수 있으리라.
그렇지만 어차피 전부 가짜였다. 그들과 만나고 어울리며, 겉으로는 웃으며 즐겁게 떠들다가도 뒤돌아서면 그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다 가짜라고. 그리 생각하며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수호 오빠는 말했다. 비록 만들어진 세상이지만 그들 또한 진짜라고.
그 말이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다. 어디까지나 논리적으로는 이해했단 소리였다. 지예원에 대해 납득하지 못했던 것처럼, 오빠의 말에 대해서도 차마 이해는 하되 공감할 수는 없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주체적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자 노력하던 오빠와 달리, 나는 빙의하자마자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게 도망치는 거였으니까. 온갖 위기가 닥쳐올 이 그린하우스라는 원작의 무대로부터 자퇴라는 수단으로 도망치려고만 했으니까.
그런 내가 이 세상에 애착을 가진다면 어떻게 애착을 가질 것이요, 하물며 이 세상을 진짜로 받아들이는 일이 가당키나 할까.
결국 내게는 이 답답한 마음을 호소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스마트폰을 쥔 채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비릿한 철 맛이 났다.
“…….”
실은 오빠에게 전화해서 사과할까. 그런 생각도 아주 잠깐 했었지만.
오빠에 대한 설움 때문인지. 원망 때문인지. 혹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인지.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일단 나가자.’
얼마간 고민한 나는 그렇게 결정했다. 일단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자고. 몸 상태도 멀쩡한데 더 이상 병실에 있어봐야 뭐하겠냐고.
일단 방으로 돌아가서 개운하게 따듯한 물로 샤워라도 한 뒤에 한숨 푹 자자.
그러면 이 꿀꿀한 기분도 조금은 나아질 지도 모르고.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 꽉 막힌 상황에 대한 답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나는 그 길로 짐을 챙겨 의무실을 나섰다. 떠나려던 날 본 접수처 직원이 잠시 날 불러 세웠지만 이내 흔쾌히 보내주었다. 아마 나도 모르는 사이 이미 이야기가 다 끝나있던 것 같았다.
그렇게 난 내 기숙사 방으로 돌아왔다. 곧바로 옷을 벗고 사흘 만에 따듯한 물로 몸을 씻었다. 피부에 들러붙어있던 땀이나 먼지 따위가 떨어져나가는 개운한 감각에 잠시나마 근심 걱정을 잊을 수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는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수업이 예정되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애초에 새벽부터 의무실에 있었으니, 수업 관련해선 이미 경비대든 어디에서든 다 처리를 해뒀을 것이다. 아니면 뭐 어떤가. 오늘 하루 정도 결석한다 한들 잘리는 것도 아니고.
아니. 이제는 잘리든 말든 상관없나.
“……하아.”
뇌리에 찐득하게 달라붙은 부정적인 사고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깨어있으면 계속해서 안 좋은 생각만 들었다.
일단 자자.
자고 일어난 뒤에, 차분한 머리로 다시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두 눈을 감았다. 다행히 아직 피로함이 완전히 가신 게 아니었는지 나는 곧바로 잠에 들 수 있었다.
“…………하아.”
그러나 세상 무슨 일이 몇 시간 낮잠 좀 자고 일어났다고 해결되겠는가.
해가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한 저녁 즈음에 깨어난 나는 여전히 꿀꿀한 기분에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나마 피곤함은 완전히 가셔 개운하긴 했다.
나는 침대맡에 놔둔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는 세 통. 류태현이 두 통이었고 도소영 교수가 한 통이었다.
오빠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치익.
정신을 차렸을 때 어느새 내 손에는 차가운 맥주캔이 들려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술이라도 마시자 싶었다. 다행히 냉장고에는 나 한 사람 취하기에 충분한 양의 술이 있었다. 귀찮게 바깥에 술을 사러 나갈 필요는 없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맥주를 들이켰다. 갈증에 허덕이듯 단번에 한 캔을 통째로 비웠다. 탄산 때문에 목이 따가워 눈물이 찔끔 흘러나온다.
“하아.”
이내 나는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알싸한 알코올 향이 잔잔하게 피어올랐다.
“…….”
허나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 아무래도 술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애초에 초인이 고작 맥주 한 캔으로 취할 리가 없을 테니.
나는 냉장고에서 다음 캔을 꺼냈다. 아니, 냉장고 안에 있던 술이랑 술은 모조리 전부 꺼냈다. 테이블 위가 순식간에 주류로 가득 찼다.
치익.
곧바로 다음 캔을 깠다. 안주고 뭐고 없었다. 빈속에 그저 기계적으로 알코올을 들이부었다. 이 답답한 마음을 술로 씻어 내리고자, 그저 하염없이 마시고 또 마셨다.
이윽고 노을이 사라지고 완연한 밤이 도래할 때까지.
나는 직시하고 싶지 않은 현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저 마시고 또 마셨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