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 107. 새벽녘의 고백(2)
* * *
“지예원……이요?”
강하늘이 불안해하면서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녀가 아는 건 예지원이지 지예원이 아니었으니까.
“예지원을 말하는 거야. 걔 원래 이름이 지예원이거든.”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정이 있어서 신분을 숨기고 있었거든. 그러니까…….”
말끝을 흐리며 생각했다. 어차피 밝힌다면 모든 걸 밝히는 게 낫겠지. 애초에 나와 같은 빙의자인 걸 안 시점에서, 즉 그녀가 더 이상 나의 적일 리가 없다는 확신을 얻은 시점에서 그녀에게 정보를 숨길 이유가 없었다.
“지예원은 원작에 등장했던 캐릭터야. 너도 잘 알고 있을걸.”
“글쎄요. 제가 원작을 다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이름의 여캐가 있었던 것 같지는…….”
그야 지예원의 이름으로는 기억하지 못하겠지. 허나 그녀가 지예원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건 이미 증명된 사실이었다.
“탈리스만.”
“네?”
“……원작 313화. 류태현에게 탈리스만을 넘긴 정체불명의 여성. 그게 바로 지예원이야.”
“아……?”
일순 멍한 표정을 지은 강하늘의 입이 이내 점점 벌어지기 시작한다. 짝! 하고 손뼉을 친 그녀가 과장된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아하! 분명 그런 캐릭터가 있었죠! 그렇구나. 예지워……지예원이 그런 역할이었던 거네요. 근데, 어쩌다 그 캐릭터랑 만난 거예요?”
캐릭터, 라는 말에 묘하게 강세를 둔 물음.
나는 강하늘에게 지예원에 관해서 모조리 설명했다. 지예원을 살리라는 퀘스트를 받았단 사실이나 그녀가 여명단을 배신한 전 조직원인 점. 경비대와의 협력을 대가로 그녀의 신변을 줄곧 보호해주고 있던 점 등.
이야기를 하며 나는 시스템이 제시하는 퀘스트가 나에게만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른 빙의자가 있다면 그들이야 어떤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강하늘은 지금껏 단 한 번도 퀘스트 따위를 받아본 적이 없다고.
허나 지금 중요한 건 그런 사실이 아니었다.
“으음. 그게 다 그렇게 된 거네요. 지예원 걔도 엄청 중요한 캐릭터였네요. 그래서 둘이 그렇게 붙어 다닌 거구나…….”
사실을 되새기는 듯한 강하늘의 그 말.
‘그래서 둘이 그렇게 붙어 다닌 거구나.’
그 말에 지예원과 보낸 나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오래 붙어 다니긴 했지. 거의 같이 살다시피 했으니까.”
“아하하하. 많이 불편하셨겠어요.”
“처음에는 그랬지. 그렇지만 살다보니까 익숙해지더라고.”
“아핫. 그런가요?”
“익숙해지니까 서로 말도 터놓게 되고 그러더라. 지금 생각해 보면 걔나 나나 주변에 의지할 사람 없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나도 모르게 동병상련을 느꼈던 걸지도 몰라.”
“아아. 네…….”
“이래저래 서로 의지하고 지탱하는 사이였어. 지예원이랑 나는.”
“…….”
처음에는 웃으며 맞장구치던 강하늘의 표정이 차츰 굳었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이 대목에서 내가 갑자기 지예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그녀와의 관계를 마치 설득하듯 늘어놓는 속뜻을 강하늘이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일순, 가슴 아래서 차오른 망설임에 혀가 굳었다.
그러나 진실을, 내 심정을 이 이상 숨길 수는 없었다. 그건 강하늘을 속이는 행위다. 강하늘이 내게 진심을 건넸으니 나 또한 그녀에게 진심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설령 그것이 그녀를 상처 입히게 되더라도.
적어도 위선적인 기만보다는 나을 테니까.
“……나한테 있어선 이제 지예원도 엄청 소중한 사람이야. 하늘이 너처럼.”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오빠 지금, 지금 말하는 게 꼭……. 그러니까…….”
강하늘의 표정이 망가진 태엽 인형처럼 파르르 떨렸다. 입꼬리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웃어넘기려고 설설 올라가고 있었으나 두 눈에는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꼭, 오빠가 지예원을, 좋아하는…….”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도 못한 채, 강하늘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잘근 씹었다. 고작 5분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뻐하던 사람의 표정이라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변화.
“맞아.”
허나 내 대답이 떨어진 순간, 그 이상 어두워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강하늘의 표정이 더욱 납빛으로 물들었다.
“난 지예원을 좋아해. 지예원을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사랑하고 있어.”
“………………네?”
강하늘의 두 눈이 크게 뜨여졌다.
잘못 들었다는 것처럼.
믿기지 않는다는 것처럼.
믿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이윽고 그 눈가에 또르르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금 전 흘렸던 기쁨의 눈물과는 다른, 진한 설움에 새어나온 찐득한 눈물이.
강하늘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멍하니 바닥만 내려다보기를 몇 분.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 설마 차인 건가요……?”
“……아니.”
고개를 저으면서도 스스로의 구차함에 낯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강하늘은 그 구차함만이 유일한 동아줄이라는 듯 필사적으로 되물어왔다.
“아니라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조금 전에 분명, 지예원을 사랑, 한다고 했으면서……?”
“맞아. 그렇지만 난 하늘이 너도 사랑해. 적어도 지예원을 사랑하는 마음에 뒤지지 않을 만큼.”
“…….”
내 답을 들은 강하늘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해준 것에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예원 또한 사랑한다고 말한 것이 슬픈 듯한, 기쁨과 슬픔이라는 공존할 수 없는 감정이 한 데 어우러진 그 표정은 참으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말은 결국, 저도 사랑하고 지예원 그 여자도 사랑한다? 즉 양다리를 걸치겠다, 그 말인가요?”
“그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어. 그렇지만 네가 납득하지 못한다면 그러지 않을 생각이야.”
“그러지 않으면, 어떡할 건데요?”
“……선택을 해야겠지.”
“누구를?”
그 말에 곧바로 강하늘 널 택할 거라고. 그렇게 말한다면 강하늘은 분명 기뻐하겠지. 어쩌면 자신이 우선시되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흔쾌히 내 양다리 선언을 받아들여 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건 결국 기만에 불과했다. 그건 그녀의 감정에 대한 모독이다. 이미 그녀의 가슴을 비수로 후벼 파듯 난도질하고 있긴 하지만, 적어도 거짓말만은 더 이상 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오늘 강하늘에게 있는 그대로의 진심을 부딪치기로 결정했다.
“왜, 왜 곧바로 대답을 못해요……?”
강하늘은 내 망설임이 탐탁치 않은 눈치였다. 두 눈에서 연신 커다란 눈물을 또르르 흘리면서, 강하늘이 매달리듯이 내 옷깃을 붙잡았다.
옷깃을 붙잡으며, 끓어오르는 설움을 토해내듯 힘겹게 말했다.
“……고작 소설 속 캐릭터잖아요?”
고작 소설 속 캐릭터.
그 한 마디가 바로 조금 전부터 내가 그녀와의 대화에서 느끼던 위화감의 정체였다.
“가짜, 잖아요. 지예원은. 소설 속 캐릭터. 작가가 만들어낸. 고작, 고작 몇 줄짜리 텍스트로 이루어진 가짜라고요. 저는 진짠데. 걔는 가짜고. 그런데, 그런데 왜, 왜 곧바로 대답을 못하는 거예요……? 네……?”
망가진 라디오처럼 단발적으로 이어진 말들. 그것이 강하늘이 가지고 있는 지예원에 대한, 나아가서는 이 세상 전체에 대한 인식이었다.
고작해야 소설.
고작해야 창작물.
고작해야 꾸며냈을 뿐의.
고작해야 가짜에 불과한 것들.
강하늘은 마치 믿었던 동료에게 배신당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심정이 이해가 됐다. 공감도 할 수 있었다. 한때는 나 또한 강하늘처럼 생각하고, 강하늘처럼 이 세상을 받아들였었으니까.
그렇지만 이제는 아니다.
“고작해야 소설 속 캐릭터, 가 아니야.”
“……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그렇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하고 마주치면서, 그리고 너나 지예원과 함께하면서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됐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
“그게 무슨 말, 이에요?”
“너랑 나랑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
갑작스런 질문에 얼떨떨한 강하늘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내게 있어서 강하늘에 대한 기억이 소중하고 강렬하듯, 그녀 또한 그럴 테니까.
“처음 만났을 때 원작이랑 성격이 전혀 딴판이 된 널 보고 어찌나 당황했는지.”
나는 담담한 어조로 강하늘에게 말했다.
처음 널 만났을 때, 원작과 전혀 다른 성격이 된 너로부터 나는 인간미를 느꼈노라고. 그 인간미는 너라는 사람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더욱 또렷하게 느껴졌다고.
내가 본 강하늘은 정말이지 진짜 사람 같았다고.
도저히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존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진짜 같았고.
그야말로 나와 똑같은 진짜 사람인 것만 같아서.
더 이상, 이 세상을 소설 속 세상이라며, 어차피 전부 가짜라며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고.
“그야 당연하죠. 저는, 저는 진짜 사람이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오늘 네가 나한테 빙의자라는 걸 밝히기 전까지만 해도 너는 내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였어. 다른 사람들처럼 비록 소설 속 캐릭터지만, 설령 만들어진 존재라 하더라도 존중받아 마땅한 ‘진짜’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설령 너가 나와 같은 빙의자였다는 걸 몰랐다 해도, 나는 오늘 너의 고백을 받아줬을 거야. 내게 있어서 너는 더 이상 소설 속의 가짜가 아닌 진짜 사람이었으니까.”
“…….”
“그리고 그건 지예원도 마찬가지야.”
소설 속 세상.
꾸며낸 세계.
가짜로 뒤덮인 곳.
모든 것이 작가의, 쾌락천마의 입맛대로 놀아나는 조잡한 인형극 무대. 당초 이 세상에 대한 내 인식은 그러했다.
허나 지예원이, 그리고 강하늘이 나의 인식을 바꿔놓았다.
그 누구보다도 진짜 사람 같았던 그녀들이.
나와 똑같은 표정으로 웃고.
똑같은 표정으로 울고.
때로는 화내고.
때로는 기뻐하며.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해하고.
미안해하며.
힘든 고난 앞에 무릎이 꺾일 뻔하더라도, 결국 그 역경을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그 모습들을 보며.
나는 이 세상을 마침내 하나의 진실된 세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강하늘 덕분에.
그리고.
“지예원 덕분에. 나는 의지할 사람 하나 없던 이 세상에서 버틸 수 있었어. 적어도 마음의 위안은 얻었지. 그래서 나한테 지예원은 무척이나 소중한 존재야. 하늘이 너만큼이나.”
그래서 선택할 수 없었다고.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좋아하고 있던 그 상황에, 차마 한 사람을 버릴 수 없었노라고.
그래서 결국 이처럼 이기적인 욕심을 부리려 하는 것이라고.
기실 번지르르한 말로 포장하긴 했으나, 결국 내 요구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요구에 지나지 않았다. 고백을 받았다는 갑의 위치에 서서 철저하게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지예원은.”
그때, 침묵한 채 내 말을 듣기만 하던 강하늘이 입을 열었다.
“지예원은, 오빠한테 고백은, 했어요?”
“응. 했어.”
“언제……?”
“……넷이서 같이 술 마셨던 날.”
“하.”
강하늘의 입에서 실소가 새어나왔다. 길쭉하게 삐져나온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어쩐지, 그럴 것 같았어요.”
눈물은 더 이상 간헐적으로 흐르지 않았다. 봇물이 터지듯 넘쳐 흐르기 시작한 눈물이 하염없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그러나 흐느끼는 소리는 조금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가슴 속에 쌓였던 감정을 눈물로 바꿔 토해내듯이.
강하늘이 소리 없이 오열했다.
“오빠, 제가 그날. 아주 이상한, 꿈을 꿨거든요? 어떤 꿈인지 아세요……?”
“……어떤 꿈인데.”
“오빠랑 지예원이랑 사귀는 꿈이요.”
그 말에 나는 차마 강하늘과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그녀가 왜 그런 꿈을 꾸게 되었는지,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으니까.
“제대로 기억은 나지 않아요. 그렇지만, 꿈 속에서 오빠랑 지예원은 엄청 다정해보였고, 그걸 멀리서,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저는 엄청, 엄청 답답해서. 그래서 그 답답했던 마음만은 꿈에서 깨고도 계속 가슴에 확실하게 남아있었어요. 그렇지만, 어차피 꿈이니까. 꿈에 불과하니까 괜찮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런데…….”
강하늘의 내 가슴에 고개를 파묻었다. 두 주먹으로 내 옷깃을 꽈악 쥔 채, 마치 멱살이라도 잡는 듯 물고 늘어진다. 그 손에서 전해져오는 떨림이, 그녀가 느끼는 지독한 감정이 여실히 전해져왔다.
“이건, 이건 아니잖아요……. 오직 나랑, 나랑 오빠만 진짜인데. 다른 건 다 가짜인데. 그런데, 그런 가짜한테 제가 졌다니, 이건 아니잖아요…….”
“미안해. 그렇지만 네게는 가짜일지 몰라도 나한테는…….”
“가짜라고요!!!!”
커다란 외침이 병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오빠도 다 알고 있잖아요!! 초인들의 시대!! 인터넷에서 연재되던 아카데미 웹소설!! 작가는 쾌락천마!! 연재 화수는 삼백몇 편에, 주인공 이름은 류태현!! 히로인은 한겨울! 나은솔! 도소영! 설아현! 그리고, 그리고……!!”
투명한 눈물이 흐르던 그녀의 얼굴에 붉은 선 하나가 추가된다. 새빨간 선혈이, 강하늘이 잘근 씹은 입술로부터 새어나온 붉은 피가 그녀의 얼굴에 천천히 번져갔다.
“오빠도 말했잖아요. 오빠도 알잖아요. 지예원은, 걔는 그냥, 원작에 이름도 안 나왔던 엑스트라라고요. 고작, 고작 몇 줄 묘사만 됐다 뿐인, 아무것도 아닌 가짜, 가짜인데…….”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한 강하늘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내 품에 기댄 그녀의 등을 감싸 안아주려다가, 이내 그 손을 다시 거뒀다.
강하늘과 나는 똑같은 빙의자다.
그러나 우리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나는 이 세상을 진실로 받아들였고, 강하늘은 여전히 허구의 산물이라 생각한다는 차이가.
왜 그런 차이가 벌어진 것일까.
어쩌면 그건 강하늘에게 지예원 같은 존재가 없었던 것이 이유일 지도 모른다. 갓 이 세상에 빙의하여 의지할 곳 하나 없던 시절에, 지예원을 포함한 이런저런 동료들이나 원작 인물들과 부대끼던 나와 달리, 강하늘은 홀로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도망치려 했으니까.
“……미안해.”
나는 강하늘에게 사과했다. 미안할 짓을 했으니까. 당연히 사과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저는 오빠를 사랑해요. 지금도. 여전히.”
그런 내게 강하늘이 담담하게 덧붙였다.
“그렇지만, 이해할 수는 없어요.”
강하늘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두 눈에 흐르던 눈물은 어느새 말라 있었다. 대신 빨간 핏물 한줄기만이 그녀의 입술에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제가 거절하면, 납득하지 못하면 선택한다고 하셨죠.”
“……그래.”
“그럼 선택하세요. 저인지, 아니면 지예원인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강하늘이 내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날 외면했다. 은연중에 비치는 축객령이었다.
“……몸조리 잘해. 혹시 필요한 일 있으면, 부담 갖지 말고 연락하고.”
그 태도에 나는 그런 의례적인 인삿말만 남긴 채 병실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오빠.”
그러나 병실을 나가기 직전, 강하늘이 나를 불렀다.
문고리를 잡았던 손이 살짝 떨렸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려다가 관뒀다. 이유는 나조차 알 수 없었다.
“미안해요. 오빠를 이해해주지 못해서.”
다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기를 잘했다 생각했다.
만약 저 말을 강하늘의 얼굴을 본 채 들었다면, 차마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을 테니까.
덜컥.
병실을 나선 나는 그대로 문에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다지 피곤한 것도 아닌데 온몸의 힘이 쫙 빠지는 느낌이었다.
축 처진 고개로 애먼 땅바닥만 바라보며 생각했다.
결국 이렇게 됐다고.
강하늘이 내 이기적인 요구를 거절할 가능성 따위 당연히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연하게 이런 생각도 했다. 이 세상은 소설 속이니까. 그것도 하렘물 소설 속이니까 어쩌면 셋이서 평화롭게 관계를 유지하는 게 가능할 지도 모른다며.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이 세상을 더 이상 소설이 아닌 진짜 세상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 나였다는 건 차치하더라도.
설령 이 세상이 하렘물 소설이라 한들, 주인공은커녕 엑스트라조차 되지 못한 내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진짜 개쓰레기네. 나.”
나는 소설 속 인물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혼자 킥, 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과 함께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그 외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끈적한 진흙처럼 차올라 가슴에 묵직하게 자리했다.
띠리리리리리.
그때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벨소리.
스마트폰을 꺼내자 화면에는 설아현의 번호가 떠올라 있었다. 그제야 나는 빌헬름이 기거한 던전, 기사의 무덤 공략이 바로 내일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하아아.”
산 넘어서 산이라고. 아니, 아직 앞선 산을 넘지조차 못했는데 새로운 산이 나와버렸다고.
가만히 앉아 탄식한 나는 반사적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이윽고 주머니 안쪽에 반쯤 구겨져있던 담뱃갑을 쥔 나는 그 길로 의무실을 나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