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107화 (108/266)

〈 107화 〉 106. 새벽녘의 고백(1)

* * *

눈을 뜨자 시야에 보이는 건 낯선 천장.

조명이 꺼져 어둡게 물든 방 안에 창밖에서 새어 들어온 은은한 조명이 푸르게 비치고 있었다.

“……?”

몽롱한 의식을 붙잡으며 생각한다. 코끝을 찌르는 희미한 약품 냄새.

처음에는 병원인가 싶었다가 뒤늦게 이곳이 어디인지를 깨닫는다. 그린하우스 의무실. 그래, 분명 그곳이야.

‘예전에 수호 오빠 병문안 때문에 온 적 있었지.’

그렇지만 내가 왜 이곳에?

의문을 품은 채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옆에서 들린 인기척.

“깼어?”

“어?”

고개를 반대로 돌리자 수호 오빠가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연한 파란색으로 물든 창문을 등진 채 수호 오빠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수호 오, 빠?”

“응. 나야 하늘아.”

“오빠가 왜 여기, 아니 그보다 제가 왜 의무실에……. 어어…….”

의식은 몽롱하고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이곳에 오기까지의 기억이 전혀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 직전 며칠간의 기억이 마치 가위로 잘라 기워 붙인 듯 뜨문뜨문 이어졌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나는 며칠 전, 나와 똑같이 생긴 적에게 화장실에서 습격당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어두운 창고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을 정신을 잃은 채 보내 그곳에 대한 기억은 분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기억나는 건 숲 속 풍경.

그래,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능력에 의해 수호 오빠와 억지로 싸웠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멋대로 움직이는 몸을 어떻게든 멈춰 세워보려 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허나 오빠가 어떻게든 날 쓰러뜨려 제압한 것 같다. 그 부분의 기억은 조종당한 탓인지 애매했지만, 아무튼 그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

그 순간 뇌리에 떠오른 한 장면.

‘하늘이 너도 빙의자였구나.’

의식을 잃기 직전, 수호 오빠가 그렇게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나도 너랑 똑같거든.’

분명히 그렇게 들었다. 잘못 들었을 리가 없다. 그 말을 들은 순간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니까.

나는 놀란 눈으로 수호 오빠를 바라보았다. 내 눈빛에서 무언가 읽어낸 것인지, 오빠가 살며시 웃으며 상냥한 어조로 물었다.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어?”

“오빠.”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수호 오빠에게 반대로 질문을 건넸다.

“오빠도 빙의자예요?”

마침내 던진 그 물음에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의혹은 예전부터 있었다.

안수호. 원작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던 아카데미 경비대의 경비대원.

자퇴 건부터 시작해 아카데미 주변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에 머리를 들이미는 수호 오빠를 보며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상하다 느꼈다 뿐이지, 설마 오빠 또한 나와 같은 빙의자라고 의심하진 않았다.

왜 의심하지 않았을까. 돌이켜보면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던 하나의 편견 때문이었다.

빙의물 소설에 빙의자는 단 한 명뿐이라는 편견.

읽다 하차한 소설 속에 빙의당한다는 그야말로 소설다운 일이 나 자신에게 벌어졌을 때. 나는 내가 빙의당한 이 세상의 이치 또한 여타 소설들과 같으리라 섣불리 판단했다. 그래서 차마 나 이외의 다른 빙의자가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래, 맞아.”

“호, 혹시나 해서 다시 묻는 건데요. 오빠가 빙의자라는 건 그게, 그러니까……”

“네가 생각하는 게 맞을 거야. 소설 제목은 초인들의 시대. 작가는 쾌락천마. 주인공은 류태현. 맞지?”

그런 내 안일함을 비웃듯, 두 번째 빙의자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도 이렇게나 가까운 곳에.

“아. 아아…….”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더 이상 정상적인 사고를 이어갈 수 없었다.

살며시 벌어진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머릿속을 수많은 감정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처음에는 의심.

그 다음은 놀라움.

이어지는 기쁨. 그리고 안도감.

그 끝내 복받쳐 오르는 설움에, 나도 모르는 사이 뺨에 따듯한 눈물 한 줄기가 또르르 흘러내렸다.

“하늘아?”

“어, 으, 네? 어라?”

망가진 인형처럼 삐걱이며 눈물을 닦는다. 그러나 한 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내 마음대로 멈추지 않았다.

한 방울, 두 방울,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눈물은 어느새 손으로 다 훔치기도 버거워졌다. 입고 있던 환자복 가슴 부분에 진한 얼룩이 하나 둘 늘어갔다.

“흐읏! 흐, 흐끅!”

결국 난 눈물을 닦는 걸 포기했다. 내가 두 손을 늘어뜨린 채 계속 눈물을 흘려대자 수호 오빠가 당황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했다.

내가 왜 갑자기 울기 시작했는지 짐작도 안 가겠지.

그야 나 스스로도 이유를 모르겠는걸.

“하늘아? 왜 그래? 괜찮아? 혹시 어디 아픈 거야?”

“아니! 흐끅! 아뇨. 그게 아니라아…….”

나도 모르는 걸 어찌 설명할까. 나는 그저 도리도리 고개만 저어댔다.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왜 나는 수호 오빠가 빙의자라는 걸 알고 이렇게 목 놓아 우는 걸까.

나는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찬찬히 음미했다. 나는 울고 있었다. 그렇지만 슬픈 건 아니었다. 그래, 이건 기쁨의 눈물이었다. 가슴을 옥죄고 있던 긴장의 끈이 탁 풀리면서, 그 반동으로 차오른 안도감에 의한 안심의 눈물.

그랬다. 나는 안심한 것이다.

이 낯선 세상에 홀로 떨어지고 거의 4개월.

외롭게 홀로 이 세상을 살아가다 처음으로 만난 ‘진짜 사람’의 존재에 나는 그만 안심해버리고 만 것이었다.

­꼬옥.

그때 수호 오빠가 날 살며시 안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그저 내 등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위로하듯 날 끌어안았다.

마치 나의 이 심정을 전부 이해한다는 듯.

“흐윽! 끅! 흐으아아아아앙!”

그 따스한 포옹에 나는 결국 가까스로 참던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의무실이 떠나가라 흐느끼며 나는 수호 오빠의 가슴에 얼굴을 깊숙이 묻었다.

이렇게 울고불고 하는 게 꼴불견이란 건 알지만.

오빠 앞에선 늘 예쁜 모습으로만 있고 싶었지만.

지금은.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이 터져나오는 감정에 거스르지 않고, 그저 하염없이 울고 또 울고 싶었다.

***

강하늘이 정신을 차린 것은 사태가 끝나고 의무실에 온 그날 새벽이었다. 본래라면 늦은 오후까지 약 기운이 남아있어야 했지만, 중간에 강제로 아바타 능력을 발동한 덕에 약 기운이 어느 정도 중화되어 일찍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한 사실을 안수호가 예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강하늘을 의무실에 인계한 뒤에도 걱정이 되어 자리를 뜨지 못했을 뿐.

그 결과 강하늘이 깨어났을 때 안수호는 바로 곁에 있을 수 있었고, 그녀가 목 놓아 울기 시작했을 때 두 손으로 그녀를 끌어안을 수 있었다.

안수호는 말없이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강하늘의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이윽고 어스름한 새벽 하늘 끄트머리에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 마침내 강하늘이 안수호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두 눈가는 빨갛게 부어오르고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뻗쳐있었다. 안수호는 말없이 강하늘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질해주듯 쓸어내렸다.

­꼬옥.

그 손길이 기분 좋았던 걸까. 강하늘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안수호에게 다시 기댔다.

그러자 장난기가 발동한 안수호가 일부러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배배 꼬거나 당기거나 했다. 한 두 번은 의아해 하던 강하늘이었으나, 그런 장난이 계속되자 결국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들었다.

“뭐 하는 거예요 오빠?”

“그냥. 귀여워서?”

“치.”

귀엽다는 말에 귀여운 콧소리로 응수한 강하늘이 배시시 웃었다.

“좀 진정됐어?”

“네. 그런 것 같아요.”

“뭐라도 좀 마실래? 물? 아니면 음료수?”

“물로 주세요.”

안수호가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건네자 강하늘이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도 울어댄 탓에 수분이 부족했던 모양.

“하늘아.”

그런 강하늘을 앞에 두고 안수호가 상냥하게 말했다.

“넌 아직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일단 나부터 이야기할게. 내가 이 세계에 오고 나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할 말은 이미 전부 정리해뒀다. 강하늘이 잠들어 있던 동안 옆에서 내내 생각했던 게 바로 그거였으니까.

그렇게 안수호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빙의당했던 그날 원래 세상에서 있었던 일부터 시작해 그간 자신의 행적을 쭈욱, 마치 소설 줄거리를 설명하듯 담담하게 풀어나갔다.

“……진짜 고생이 많았네요.”

이야기를 다 들은 강하늘은 딱 그렇게만 말했다. 빈말은 전혀 아니었다. 갑작스레 낯선 세상에 던져진 이가 얼마나 고통받고 힘들어하는지, 그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 이제 제 차례죠?”

애써 해맑게 물은 강하늘이 입을 열었다.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해보지 않았던, 진짜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

소설 속 캐릭터 강하늘이 아닌, 어느 겨울날 트럭에 치여 진즉에 하차한 아카데미 소설 속으로 빙의당해버린 대학생 강하늘의 이야기를.

처음에는 안수호와 마찬가지로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러나 점차 감정이 고조되기 시작하던 그녀의 이야기에는 이윽고 강하늘이 그간 느꼈던 설움과 외로움이 진득하게 담기기 시작했다.

그리 길지는 않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처량하고 불쌍한 이야기였다.

원작은 물론 수많은 웹소설을 섭렵한 안수호와 달리 강하늘은 흔히 말하는 라이트한 독자였다. 그런 그녀가 소설 빙의라는 상황에서 안수호처럼 능동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결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원작 내용조차 전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가능한 일이라고 해봐야 고작, 여러 위험 요소가 도사리고 있는 원작의 무대에서 떠나는 것뿐.

그것이 강하늘이 처음에 아카데미 자퇴를 선택한 이유였다. 그리고 일련의 사건 끝에 자퇴를 포기한 그녀는 결국 악의적으로 꼬이기만 하는 사건의 흐름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

안수호는 착잡한 심정으로 그 이야기를 들었다. 강하늘이 뱉는 단어 하나하나에서 그녀가 어떤 심정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버텨왔는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이야기가 끝났을 때.

“많이 힘들었지?”

자연스레 나온 그 말 한 마디에, 겨우 멈춘 눈물이 다시 강하늘의 뺨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강하늘이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었다고. 외로웠다고.

“죄송해요. 어른스럽지 못한 모습만 보여드려서……”

손가락 끝으로 눈물을 훔치는 강하늘을 보며 안수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조금 전 강하늘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강하늘.

우연찮게도 소설 속 캐릭터 강하늘과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안수호가 빙의당했던 날 그 옆에 있다가 트럭에 치인 바로 그 여대생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안수호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녀가 이 세상에 끌려온 건 어쩌면 자신의 탓이 아닐까 하고.

강하늘 또한 ‘초인들의 시대’의 독자이긴 했다. 또한 소설 속 캐릭터와 이름이 똑같다는 우연도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강하늘은 안수호처럼 작가에게 장문의 댓글을 달지도, 게시판에서 수십 합이 넘는 키보드배틀을 벌이지도 않았다. 그저 다른 평범한 독자들처럼 소설을 읽었고, 중간에 그만뒀을 뿐이었다. 적어도 작가의 원망을 사 빙의당할 짓은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빙의 방법조차, 그날 게시판에 달렸던 다른 덧글에 해당하는 환생트럭.

그 모든 것이 우연일 가능성 또한 0은 아니었으나 안수호는 강하늘의 빙의가 자신 탓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잠깐, 그렇다면 설마 철골이랑 강도도……?’

안수호가 기억을 되짚었다. 분명 자신이 빙의당하기 전에 맞은편 길목에서 누군가 공사현장 철근을 맞은 것을 보았다.

강도 또한 마찬가지다. 사방으로 칼을 휘두르며 자신의 옆을 스쳐지나갔던 그 남자가, 어쩌면 자신과 만나기 전 이미 누군가를 찌른 뒤였던 건 아닐까.

‘그럼 빙의자가 앞으로 최소한 둘은 더 있다는 건가?’

설마 그럴 리가……라고 치부하기엔 이미 버젓이 또 다른 빙의자가 앞에 있는 상황에 안수호는 그 가능성을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

그때.

“그나저나 정말 의외네요. 설마 오빠가 캐릭터가 아니라 진짜 사람이었을 줄은…….”

강하늘이 어딘가 홀가분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안수호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오빠도 그러지 않았어요? 당연히 절 소설 캐릭터라고 생각하셨겠죠?”

“응? 어어, 그렇지.”

“그렇겠죠. 그야 그렇잖아요. 보통 빙의물에 빙의자는 한 명밖에 없으니까. 자기 말고 또 빙의자가 있을 거라 보통은 생각하지 못하잖아요. 안 그래요?”

그 말에 안수호가 얼떨떨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어쩌면 우리 말고도 두 사람이나 빙의자가 더 있을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해야 하나 그가 고민했다.

그러나 그 순간.

“저 있죠. 오빠가 캐릭터인 줄 알아서 많이 혼란스러웠어요.”

무언가 결심한 듯한 결연한 눈빛과 함께 강하늘이 말했다.

“혼란스러웠다고?”

“이 세상은 소설 속 세상이니까 결국 다 가짜잖아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워낙 진짜 같은 세상이니까, 저 스스로도 계속 헷갈리더라고요. 혹시 이 세상은 진짜인 게 아닐까? 내가 마주하는 이 사람들도 전부 진짜 사람인 건 아닐까? 하고.”

일찍이 안수호 또한 가졌던 고민이었다. 우연찮게도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고민을 품었다. 어쩌면 둘 다 똑같이 빙의자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빠를 대할 때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그렇지만, 이젠 오빠가 진짜 사람이란 걸 알았으니 더 이상 고민할 필요도, 망설일 필요도 없겠네요.”

그러나 강하늘은 안수호와는 전혀 다른 결론을 내렸다. 이 세상을 또 하나의 진짜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안수호와 달리, 강하늘은 여전히 이 세상을 그저 소설 속 세상, 사람들을 그저 소설 속 캐릭터로 치부하고 있었다.

“수호 오빠.”

그 차이에서 오는 미묘한 온도 차에 안수호가 위화감을 느낀 순간, 강하늘이 이어서 말했다.

“저, 오빠 좋아해요.”

그렇게 말한 강하늘의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부끄러움 앞에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강하늘이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 오, 오빠를 좋아한다구요! 친한 오빠동생 이야기가 아니라! 하, 하하한 사람의 남자로서 오빠를 사, 사랑한다는 이야기에요…….”

일찍이 강하늘이 안수호의 방에서 술에 취해 그에게 고백하려고 했을 때.

그녀는 안수호를 소설 속 캐릭터라 생각해 제 마음을 밝히지 않았다. 진짜도 아닌 존재에게 품은 연정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안수호가 자신과 같은 ‘진짜 사람’이라는 걸 안 이상, 그녀의 말마따나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강하늘은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고백했다.

좋아한다고.

당신을 사랑한다고.

­두근.

그 말을 들은 순간 안수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강하늘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막연한 느낌은 있었지만 그 심증이 마침내 확신이 된 순간이었으니까.

“제 마음, 받아주실래요……?”

그러나 이어지는 그 물음에 안수호의 뇌리에 아주 잠깐 고민이 스쳤다.

과연 나는 강하늘을 사랑하는 게 맞을까.

호감은 확실하게 있었다. 하지만 그 호감이 과연 사랑인가. 어쩌면 동생에 대한 귀여움 내지는 보호욕일 지도 모른다. 일순 그런 안일한 고민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아니. 이미 답은 정했잖아.’

그러나 안수호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 말대로 이미 답은 정했다. 결론은 이미 내려진 상태였다.

그에게 있어 강하늘은 소중한 존재였다.

지금껏 그는 몇 번이나 강하늘의 목숨을 구해왔다. 처음에는 퀘스트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사적인 감정이 앞섰음을 느꼈다. 어제 그가 스테파니나 칼리에게 느꼈던 맹렬한 분노도 분명 그 감정의 연장선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이란 분명 그녀에 대한 사랑일 것이라고. 안수호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장 조금 전 고백에 자신의 가슴이 반응한 것만 봐도, 자신은 강하늘을 사랑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그에게 있어 강하늘은 이 거짓된 세상을 또 하나의 진짜 세상으로 받아들이게 된 계기이자 이유였다. 그런 그녀가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말해주니 정말 기쁘네.”

“엣? 그 말은…….”

“하늘아. 먼저 고백해줘서 고마워. 나도 하늘이 네가 좋아. 나도, 널 이성으로서 사랑하고 있어.”

어떠한 미사여구도 없는 담담한 대답.

“……!”

그러나 그 건조한 대답에 강하늘은 귓볼까지 빨갛게 물들이며 소리없이 기뻐했다. 마치 이 세상 모든 걸 가진 것처럼, 밀려오는 황홀함에 녹아내릴 듯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이내 기쁘게 활짝 웃었다.

허나 안수호는 기뻐하는 그녀에게 마냥 어울려줄 수 없었다.

그에게는 아직 해야 할 말이 있었기에.

지예원에 대해서.

강하늘과 마찬가지로, 그의 마음속에 커다랗게 자리한 또 한 명의 여성에 대해서. 그녀에게 말해야 하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말해야만 했다.

비록 그 말을 함으로써 자신이 쓰레기 같은 인간말종이 된다고 해도.

“하늘아.”

“네?”

“나한테 고백해준 건 정말 고마워. 그렇지만. 네 고백을 받기 전에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어.”

이미 그렇게 정한 이상, 반드시 말해야만 했다.

“네……? 그게 무슨, 무슨 말이에요?”

“지예원에 관한 이야기야.”

그 서두만으로도 무언가 불안함을 느낀 것일까.

마냥 행복해보이기만 하던 강하늘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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