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102. 동시사건(17)
* * *
무릇 삶이란 후회의 연속이다.
세상에 지난 일을 후회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인간이란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고 과거의 실수는 곧 후회를 불러일으키니까. 겉으로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밝게 말하는 사람들도, 그 가슴을 열어보면 마음 한켠에서 은연중에 후회를 품고 있는 법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그렇다.
그리고 안수호 또한 인간이기에, 그는 지금 자신의 과오를 후회하고 있었다.
강하늘이 달려들었다. 그 얼굴에 단 한 줌의 감정조차 띄우지 않은 채. 이지를 상실한 인형처럼 달려들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안수호가 생각했다.
안일했다.
방심했다.
자만했다.
신중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리석었다.
무엇을 그리도 안일하다 하는가하면 당연히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을 뜻하는 것이었다.
안일한 태도로 전투가 끝났으리라 판단하고, 방심과 자만에 찌들어 어울리지도 않는 패악질을 부렸으며, 그러한 신중치 못한 행동으로 인해 새로운 적이 당도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리고 그 결과, 지켜야만 하는 강하늘이 적의 세뇌에 당해 자신에게 칼끝을 들이대는 상황.
그렇기에 어리석었다.
그렇기에 후회스러웠다.
그렇기에, 스스로가 부끄럽고 원망스러웠다.
스스로도 왜 자신이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그 순간의 감정에 충실해 어리석은 판단을 했다고 자조할 뿐.
그러나 그런 자조와 후회는 잠시 접어둬야만 했다. 지금은 우선 눈앞의 적에게 집중해야 할 때.
“……빌어먹을.”
그러나 눈앞의 적을 과연 적이라 할 수 있을까.
스팟!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강하늘의 손날이 안수호의 뺨을 스쳤다. 그 이후 이어지는 매서운 맹공.
허나 그중 단 일격조차 안수호에게 닿지 못했다. 민첩 능력치는 안수호가 강하늘보다 확실하게 우위에 있었다. 샛별의 숨소리를 발동하지 않아도 말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기본 아바타 상태의 강하늘에 한해서.
파아앗!
일순 강하늘의 몸이 밝은 빛에 휩싸였다. 이윽고 빛이 꺼지자 모습을 드러낸 건 푸른 단발을 한 강하늘이었다. 그녀가 가진 아바타 프리셋 중 하나, ‘가속’ 능력을 지닌 전투형 아바타.
파바바바밧!
환자복 같이 생긴 푸른 가운을 휘날리며 강하늘의 연격이 매섭게 펼쳐졌다. 그 속도는 전과 달리 안수호를 능히 능가했다.
퍽! 퍼억! 퍽!
“크윽……!”
그 맹공에 안수호가 반사적으로 반격하려 했다. 그러나 공격 직전 그 손이 멈추고, 찰나의 갈등 끝에 안수호는 결국 입술을 잘근 씹으며 있는 힘껏 연막을 터뜨렸다.
연막이 퍼진 틈을 타 안수호가 거리를 벌린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옆구리에서 다시금 스멀스멀 퍼지기 시작한 알싸한 격통.
허나 안수호의 신경은 전혀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강해졌어.’
강하늘이 강해졌다. 아바타의 능력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아바타의 가속 능력의 위력은 강하늘의 랭킹전을 관람했을 때 이미 그 눈으로 본 적이 있었으니까.
안수호의 생각은 그 능력까지 포함해서, 랭킹전 당시의 강하늘보다 지금의 강하늘이 명백히 강해졌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상태창.”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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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하늘’의 상태창 ]
이름 : 강하늘
성별 : 여성
신장/체중/나이 : 161cm/47.1kg/20세
직업 : 아카데미 재학생
소속 : 그린하우스 헌터과 1학년 1분반
보유 초능력 : 아바타(C)
[ 능력치 ]
근력 D
민첩 C(A*)
내구 D
마력 B
기교 B
의지 C
행운 D
1. 전투형 아바타를 통해 ‘가속’ 능력을 발동할 경우에 한해 일시적으로 민첩 능력치가 C에서 A로 상승합니다.
[ 보유 스킬 ]
1. 슬로우 스타터(유니크. S)
2. 연심의 벚꽃(레전더리.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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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안수호의 예상대로 강하늘의 능력치는 모든 부분에서 향상되어 있었다. 빌헬름과의 사투에서 의지 능력치의 상승에 의해 슬로우 스타터의 능력치 제한이 완화된 것이었다.
허나 안수호가 그런 내막을 알 리가 없었다. 그저 자신이 훈련을 통해 능력치를 상승시켰듯 강하늘 또한 그랬으리라 짐작할 뿐.
퍼억!
“큭!”
복부에 꽂힌 일격에 안수호가 신음했다. 그 주먹이 회수되기 직전, 가까스로 그가 강하늘의 팔을 붙잡는다. 다행히 근력에선 안수호가 여전히 우위였기에 강하늘은 쉽사리 그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하늘아. 정신 좀 차려봐. 강하늘!”
이름을 불러도 대답은 없었다. 강하늘은 무표정한 얼굴로 안수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칠 뿐이었다.
“소용없어. 그 언니 정신은 완전히 잠가놨거든. 죽이지 않는 이상 안 돌아와.”
나은주의 차가운 말에 안수호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 말대로 한 번 나은주의 능력에 사로잡히면 어지간해선 자력으로 이를 풀어낼 수 없었다. 물론 ‘어지간해선’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예외는 존재했다. 당장 원작에서 나은주의 능력에 당한 한겨울이 자력으로 정신 조종에서 벗어나기도 했으니까.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극적인 전개의 일부였기에 허용된 일. 한겨울 자신의 견고한 자아와 더불어 정신 조종에 의해 억지로 싸우게 된 류태현에 대한 강렬한 감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기적이었다.
그 기적이 자신과 강하늘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면. 오직 그 가능성만을 믿고 강하늘을 깨워보려 한 안수호였으나.
“글쎄, 소용없다니까?”
당연히 기적이 그렇게 쉽게 일어날 리가 없었다.
화르륵!
강하늘의 머리가 붉게 물들더니 붙잡힌 손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가속 능력과 마찬가지로 그녀가 가지고 있는 파생 능력의 하나였다.
치이이이이…….
서리마법으로 열기를 막아내며 물러선 안수호가 고통스러운 얼굴을 했다. 육체의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결국 싸울 수밖에 없나…….’
사실 강하늘과 싸우는 것 외에도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은 존재했다. 바로 강하늘을 조종하는 장본인인 나은주를 쓰러뜨리는 것.
그러나 이는 결코 쉽지 않았다. 강하늘은 나은주를 지키듯 그녀를 등진 채 안수호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녀를 제치고 나은주를 노리기도 쉽지 않으며, 설령 가까스로 제친다 해도 분명히 뒤를 찔리리라.
주르륵.
게다가 남은 시간도 별로 없었다. 어느새 녹기 시작한 상처부위의 얼음 사이로 다시금 피가 조금씩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재빨리 다시 상처를 얼려 출혈을 막긴 했지만, 그래봤자 결국 임시방편이었다.
“…….”
결국 안수호가 마지못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그 모습에 강하늘의 뒤편에 선 나은주가 싱긋 웃었다.
“헤에. 결국 죽이려고? 그래. 오빠도 남 목숨 보다는 자기 목숨이 더 중요하겠지. 안 그래?”
“……그 입 찢어버리기 전에 닥쳐.”
“내 입을 찢기 전에 먼저 그 언니를 죽여야 할걸?”
나은주를 지키듯 비스듬히 선 강하늘.
그런 그녀에게 검을 겨눈 채 안수호가 속으로 생각했다.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희망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고.
‘나은주의 정신 조종을 푸는 조건은 죽음이 아니다. 정확히는 죽음에 이를 정도의 극심한 고통, 혹은 그에 준하는 정신적 충격이지.’
원작에서 한겨울이 자력으로 정신 조종을 풀어낸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류태현을 죽이기 직전 가까스로 제정신을 되찾았다. 사랑하는 이를 제 손으로 죽일지도 모른다는 상황에서 오는 정신적 충격이 그녀의 각성을 야기한 것이다.
물론 강하늘에게 같은 일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원작에서 온갖 사선을 넘나들며 깊은 감정 교류를 나눴던 류태현&한겨울과 달리, 안수호와 강하늘은 서로를 알게 된 지 이제 겨우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딱히 서운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안수호가 희망이 있다 판단한 것은 정신 조종이 풀리는 또 하나의 조건.
바로 극심한 육체의 고통이었다.
‘아바타 상태에서 입은 피해는 본체에 피드백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여분의 목숨인 셈이지. 설령 아바타 상태에서 죽음에 이르는 부상을 입는다 해도 강하늘이 죽을 일은 없어.’
만약 안수호가 아바타 상태인 강하늘에게 죽음에 이를 정도의 치명상을 입힌다면. 운이 좋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나은주의 정신 조종이 풀릴 수도 있다. 설령 풀리지 않더라도 아바타 능력을 발동하지 않은 강하늘이라면 최소한의 부상으로 제압할 수 있을 터.
“……미안하다. 하늘아.”
그 사과는 강하늘을 공격하는 것에 대한 사과인가. 아니면 이런 상황을 야기한 자신의 안일함에 대한 사죄인가.
“…….”
그러나 사과를 들은 당사자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아주 살짝, 그 눈썹이 조금 꿈틀거리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타앗!
먼저 몸을 움직인 건 안수호였다. 지면을 박찬 그의 검이 강하늘을 향해 날아들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움직임. 망설임은 없었다. 망설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 비극적인 상황이 자신의 안일함 때문에 초래된 걸 뻔히 알고 있는데 이 이상 어리석은 짓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휘리리리릭!
두 사람의 공격이 종횡무진 오갔다. 다시금 가속 형태로 아바타를 전환한 강하늘과,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안수호. 절대적인 속도는 여전히 강하늘이 우위였으나 망설임을 덜어낸 안수호의 공격 또한 결코 느리지 않았다.
투웅!
강하늘의 발길질이 안수호의 무릎을 꺾었다. 그의 몸이 덜컥 주저앉는다.
서걱!
그러나 다음 순간 안수호의 검이 강하늘의 허리를 베었다. 베이기 직전 피해서 경상에 불과하긴 했으나, 길게 파인 가운 안쪽에서 붉은 핏방울이 튀었다.
파앗!
무릎을 꿇었던 안수호가 그 반동을 이용해 앞으로 치고 나갔다. 그리고 다시금 시작된 재빠른 공방.
이윽고 강하늘의 가슴을 노리고 안수호의 찌르기가 맹렬하게 날아들었다.
푸욱!
선혈이 튀어오른다.
강하늘은 그 일격을 피하지 않았다. 피하는 대신 왼손으로 검을 막아, 살이 뚫리는 것을 감수하고 안수호의 검을 잡아내었다.
우드득. 우득.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에 오히려 안수호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에게 강하늘이 불꽃을 두른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 오른손을 안수호가 있는 힘껏 붙잡았다.
치이이이이이익!
격돌한 두 손 사이에서 진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안수호는 제 팔을 통째로 얼려버릴 심산으로 서리마법을 발동했다. 서리정령의 가호가 담긴 얼음덩어리가 불꽃과 만나 순식간에 기화해 허공에 흩어졌다.
“어?”
그 모습을 본 나은주가 작게 탄성을 뱉었다. 안수호가 냉기 관련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화르르르르륵!
치이이이이익!
허나 두 사람 모두 나은주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마치 서로 두 손을 맞잡은 듯이 두 사람이 마주선다. 한쪽은 검으로 손을 꿰뚫고 다른 쪽은 얼음과 불꽃이 길항했다.
“하늘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다. 수많은 감정이 휘몰아치는 안수호의 눈과, 반대로 아무런 감정이 비치지 않는 강하늘의 눈.
“……미안해. 조금 아플 거야.”
이윽고 안수호가 입술을 잘근 씹으며 탈리스만을 발동했다. 검을 쥔 오른손이 푸른 빛을 발하고 검신을 따라 시커먼 연기가 끈적하게 휘몰아쳤다.
투확!
다음 순간 강하늘의 왼손이 펑 하고 터져나갔다. 그럼에도 그녀는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그 일격으로 인해 강하늘의 자세가 무너졌다. 엉거주춤 뒤로 물러서는 강하늘을 추격하며 안수호가 있는 힘껏 검을 뒤로 당겼다. 목표는 강하늘의 가슴. 그 한 가운데 심장을 꿰뚫는 것으로 강하늘의 아바타를 해제시킬 심산이었다.
두근.
안수호가 검을 내질렀다.
두근.
자세가 무너진 강하늘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두근.
전투의 승패가 갈릴 극적인 순간. 안수호의 감각이 끝없이 확장하며 시간이 한없이 느리게 흘렀다.
허공에 흩뿌려진 수많은 핏방울들.
천천히 날아드는 자신의 칼날.
뒤늦게 방어하려는 강하늘의 오른손.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는 그 눈동자.
이윽고 칼날이 가슴에 닿은 순간 살갗을 가르는 그 구역질나는 감촉까지.
안수호는 그 찰나의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것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내지른 검이 강하늘의 심장을 꿰뚫는 감각을.
푸욱!
이내 맥빠지는 관통음과 함께 안수호의 검이 강하늘의 등을 뚫고 나왔다.
“커흑?! 쿨럭?!”
강하늘의 입에서 시뻘건 피가 역류했다. 제아무리 조종당하는 중이라 해도 심장이 뚫리고도 평정을 유지할 수는 없었는지 강하늘의 눈동자에 동요의 기색이 번졌다.
“…………?”
이내 그 동요가 의문으로, 의문이 경악으로 번진다. 순간적으로 들어온 압도적인 격통에 강하늘의 정신이 나은주의 사슬로부터 벗어나 다시금 수면 위로 부상했다.
투확!
안수호가 검을 뽑아들자 강하늘의 몸이 힘없이 앞으로 기울어 그에게 기대어졌다. 그녀의 고개가 안수호의 어깨에 파묻힌다. 때문에 안수호는 강하늘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오, 빠.”
다만 그 떨리는 목소리에 말없이 강하늘의 몸을 끌어안을 뿐.
파앙!
새하얀 빛무리가 퍼지고 강하늘의 아바타가 해제됐다. 아바타가 해제된 강하늘은 급격한 졸음이 몰려오는 걸 느꼈다. 아바타 능력에 의해 일시적으로 사라졌던 마취제의 효과가 다시금 그녀의 몸을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안하다. 하늘아. 나 때문에, 내가 멍청하게 행동해서 네가…….”
“……오빠.”
아득해져가는 의식 속 강하늘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나은, 주. 능력……. 연속해서……. 지금이 기회…….”
“……뭐?”
“막대사탕……. 강화제……. 부작용……. 연속 사용은, 부담이 심하니까……. 지금이라면…….”
강하늘은 나은주의 능력에 대해 말하려 했다.
나은주의 정신 조종은 연속해서 사용할 수 없다고.
강화제로 초능력을 억지로 폭주시켜 사용하는 정신 조종은 부작용이 심하다고.
그러니 지금이라면 정신이 조종당할 염려 없이 나은주를 잡을 수 있다고.
“…….”
그러나 드문드문 이어진 그 말을 들은 안수호의 표정은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마치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기라도 한듯한 표정이었다.
‘나은주의 초능력에 대해 강하늘이 알고 있을 리가 없다.’
나은주의 능력은 원작에서도 극비로 치부되던 정보. 설령 강하늘에게 뛰어난 정보원이 있다 해도 결코 알아낼 수 없는 정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하늘은 나은주의 능력에 대해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고, 자신이 가진 지식을 토대로 안수호에게 경고와 조언을 해주려 하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이 가리키는 바는 명백했다.
“역시…….”
안수호가 강하늘의 몸을 살며시 지면에 눕혔다. 마취제의 영향으로 눈을 거의 감아가던 강하늘에게 안수호가 작게 말했다.
“하늘이 너도 빙의자였구나.”
“…………네?”
그 충격적인 발언에 강하늘이 흐릿해져가던 의식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파르르 떨리는 시선이 허공을 어지러이 맴돌았다.
“어떻게……?”
수많은 의미와 감정이 함축된 한 마디 물음.
“나도 너랑 똑같거든.”
이윽고 안수호가 그렇게 답하자 강하늘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헷.”
허나 마취 기운을 이길 수는 없었는지 결국 그 눈이 서서히 감기기 시작했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가는 의식 속, 강하늘이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어쩐지, 그럴 것 같았다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강하늘이 눈을 감았다. 새근새근 숨을 쉬며 잠든 그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마저 감돌고 있었다.
“……”
그런 강하늘의 상태를 확인한 안수호가 말없이 일어섰다.
그의 상태는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창고에서 일어난 사냥개들과의 전투. 이곳에 도착해 칼리와 벌인 일전. 그리고 조금 전 강하늘과의 사투에 이르기까지.
연속된 싸움에 누적된 부상과 피로는 결코 가벼운 수준이 아니었다.
임시방편으로 틀어막은 옆구리의 상처에선 다시금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외 나머지 부위도 온갖 타박상과 자상으로 가득했다. 하물며 그 왼손에 이르러서는 서리마법과 불꽃의 영향으로 화상과 동상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의 몸 상태는 심각했다.
그러나 쓰러질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안수호가 말없이 나은주를 노려봤다. 순진무구하게 생긴 열 살 소녀는, 그 나이대에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안수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단하다 오빠. 설마 그런 부상을 입고도 그 언니까지 이길 줄은 몰랐는데. 게다가 내 능력도 전혀 안 통하고. 도대체 오빠 정체가 뭐야?”
“알 거 없다.”
“이잉. 궁금한 데 알려주면 안 돼?”
“알 거 없다고 했을 텐데.”
“우와. 진짜 화 엄청 났나보네? 눈빛 너무 무섭다. 완전 죽일 듯이 노려보네?”
“맞아. 죽일 거야.”
휘오오오오!
탈리스만이 빛을 발하고 대기 중의 마력이 그의 오른손으로 빨려들어갔다. 그 손아귀에 시커먼 연기덩어리가 압축되기 시작했다.
“나처럼 어린 애를 죽이겠다고? 양심에 찔리지도 않아?”
“어린 애라고 봐주기엔 넌 너무 위험해. 애초에 처음부터 망설이지 말았어야 했어.”
그랬다면 강하늘과 싸우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 스스로가 너무 안일했다고.
그렇게 생각한 안수호는 이번에야말로 망설이지 않고 연기를 해방했다. 저 멀리 한가로이 서있는 나은주를 죽이기 위해서.
그러나.
“크윽?!”
연기를 쏘아내기 직전 시커먼 인영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칼리였다. 만신창이인 몸을 던지듯 뛰어온 그녀가 안수호의 팔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투화아아악!
당황한 안수호가 능력의 제어를 실패해 연기가 폭발했다. 방향성을 잃고 무분별하게 해방된 연기에 사방으로 강력한 돌풍이 휘몰아쳤다.
“이런 미친…….”
“아, 아으. 아으으으……!”
그러나 지근거리에서의 폭발에도 불구하고 칼리는 여전히 안수호의 팔을 물고 늘어진 채였다. 조금 전까지 부상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던 칼리가 어떻게 이런 저력을 보이는 건지.
‘설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안수호가 반사적으로 나은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주르륵.
어느새 나은주는 칼리를 향해 그 가녀린 손가락을 뻗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검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굴의 구멍이란 구멍은 다 출혈이 일어나고 있었다.
“칼리.”
나은주의 정신 조종은 연속해서 사용하면 심한 부작용이 따른다. 그 말은 즉 연속해서 쓰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라는 소리였다. 부작용을 감수하고 칼리의 정신을 휘어잡은 그녀가 나지막하게 고했다.
“난 지금부터 도망칠 테니까 저 남자가 못 쫓아오게 목숨 걸고 최대한 방해해.”
우연찮게도 그 명령은 조금 전 칼리가 사냥개들에게 내렸던 명령과 흡사했다. 나은주의 명령에 사냥개들이 목숨마저 등한시하며 안수호 일행에게 덤벼들었던 것처럼, 칼리 또한 죽음을 목전에 둔 채 안수호를 막아섰다.
“그럼 오빠. 난 갈게?”
“가긴 어딜!”
안수호가 재빨리 연기를 쏘아냈다. 시커먼 흑탄 다섯 발이 나은주를 노리고 날아갔다.
퉁! 투웅! 투웅!
“끄흐으윽!!”
그러나 연기 덩어리들은 칼리의 몸에 막혀 맥없이 흩어졌다. 제대로 거동조차 하지 못할 부상임에도 칼리는 제 몸을 돌보지 않는 움직임으로 나은주를 지켜냈다. 그런 그녀의 뺨에 커다란 눈물방울이 줄줄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은 적인 안수호가 보기에도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반면 칼리의 정신을 조종한 나은주는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미소 지었다.
“만나서 딱히 유쾌하진 않았고, 다신 보지 말자 오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은주가 어두운 숲속을 향해 몸을 던졌다. 직후 칼리가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안수호에게 달려들었다. 마치 다 망가진 인형처럼.
“…………시발.”
그 기분 나쁜 광경에 안수호가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