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 098. 동시사건(13)
* * *
건물 옥상을 통해 이동한 우리 네 사람은 이내 야트막한 야산을 끼고 있는 섬유공장 앞에 도착했다.
“강하늘이 잡혀있는 곳이 저기야?”
지예원의 물음에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이 꺼져 있는 공장건물 옆, 을씨년스러운 슬레이트 지붕이 달린 창고 하나가 우뚝 서있었다. 퀘스트가 준 지도에는 강하늘이 저 안에 있다고 나와있었다.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는 것 같네.”
“그래도 혹시 모르죠. 어디 안 보이는 데에 숨어 있을 지도.”
“하긴…….”
류태현의 말에 지예원이 침음성을 흘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십년도 더 전에 망한 것으로 보이는 공장 주변은 완연한 어둠에 싸여있을 뿐이었다.
“제가 한 번 확인해보죠.”
그때 설아현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확인을 한다고?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곧 그녀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미래시로 확인해보겠다는 말인가요?”
그때 지예원이 미심쩍은 얼굴로 설아현에게 물었다.
“맞아요. 애초에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능력이니까요.”
그 말과 함께 설아현이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집중했다.
미래시, 라고 간단하게 표현하긴 했으나 기실 설아현이 가진 초능력의 정체는 미래 그 자체를 본다기 보다는 미래에 벌어질 수 있는 여러 ‘가능성’ 중 하나를 관측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사과와 딸기를 앞에 둔 채 미래를 본다고 했을 때, 그녀가 그 순간 사과를 먹고자 하면 사과를 먹는 미래가 보이게 된다. 반면 그 다음 순간 딸기를 먹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채 다시 미래를 보면 그 전에 보았던 미래와 달리 딸기를 먹는 장면이 눈앞에 보이게 되는 식이다.
즉 지금 같은 상황의 경우 ‘정면으로 창고에 돌입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채 미래시를 발동하면 창고로 향하는 과정이나 창고 안에서 벌어질 일을 파악할 수 있다. 물론 그 범위는 기껏해야 수십 초 정도였지만.
“……창고 중앙에 사람들이 보여요. 이상한 헬멧을 쓴 사람이 다섯에 장신의 여성이 한 명. 그리고 의자에 앉은 채 잠들어 있는……? 여자가 한 명. 아마 이 여자가 강하늘인 것 같아요. 수호 씨가 보여준 사진이랑 일치하네요.”
미래를 본 설아현이 눈을 뜨며 말했다.
“적은 여섯이라는 거군요.”
“네. 일단 보이는 숫자는요. 다른 곳에 복병이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
“안쪽 상황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설아현이 관측한 창고 안의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눈에 보이는 적은 앞서 말했듯 여섯 명.
주변에는 창고에 임시로 생활 환경을 만들려고 한 듯 소파나 테이블 따위가 중구난방으로 있었으며 그 외 공장 기자재는 보이지 않았다. 입구는 정면에 있는 단 한 개이며 창문 또한 없었다.
“아무래도 정면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겠군요.”
“들어가면? 그 다음은 어쩔 건데?”
“일단 협상을 시도해보고, 안 되면 싸워야지.”
“형. 하늘이가 인질로 잡혀있는데 싸움을 거는 건…….”
류태현의 우려 섞인 말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마 놈들은 강하늘을 인질삼아 우리를 협박하진 못할 거야. 왜냐하면…….”
강하늘은 다중 능력 연구에 필요한 귀중한 샘플이니까. 그러한 사실을 사정을 모르는 류태현이나 설아현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왜냐하면, 강하늘을 납치했다는 건 놈들에게도 무언가 목적이 있다는 뜻일 테니까. 그 목적을 이루기 전에 강하늘을 죽이진 않겠지.”
결국 나는 강하늘 납치의 원인에 대해서 애매모호하게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설아현과 류태현은 그 정도로도 납득하는 눈치였다.
그때 지예원이 설아현에게 물었다.
“혹시 싸움의 승패 같은 건 볼 수 없나요?”
“그건 좀 힘들 것 같아요. 정확한 시점을 특정해서 볼 수 있는 범위는 1분 정도가 한계라…….”
“굳이 볼 것까지 있나요. 어차피 이길 텐데.”
류태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 얼굴엔 조금의 걱정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 있는 사람들 다들 한 가닥씩 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심지어 이분은 S급 초인이신데. 이 정도 전력이면 납치범 대여섯 정도야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을걸요?”
“그러길 바라야지.”
일이 그렇게 잘 풀린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마음 편히 생각할 수 없었다.
이 빌어먹을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럼 슬슬 들어가죠.”
부디 이번만큼은, 제발 별일 없이 일이 잘 풀리길.
***
끼이이이익.
둔중한 창고 문이 열리고 네 사람이 그 안으로 들어섰다.
창고 안에는 설아현의 말처럼 강하늘과 여섯 명의 남녀가 있었다. 그중 유일하게 헬멧을 쓰지 않은 장신의 여성이 바로 스테파니의 파트너 청부업자인 ‘K'였다.
“…….”
K는 갑작스레 나타난 불청객의 면면을 쭈욱 훑었다. 그러다 그 시선이 안수호에게 멈춘 순간, 그녀의 두 눈이 크게 뜨여졌다. 직후 그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스테파니한테서 정기 연락이 없어서 설마 했는데…….”
K가 골치 아프다는 듯 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앞으로 나왔다.
“그래서 이 장소는 어떻게 아셨대? 스테파니가 그렇게 입이 가벼운 애는 아닌데.”
“말하는 걸 들어보니 그쪽이 스테파니의 파트너인 K인가 보군.”
“와, 진짜 골때리네. 설마 정말로 다 불어버린 거야?”
아니었다. 안수호가 이 장소를 알아낸 건 어디까지나 퀘스트 덕분이요, 스테파니와 K에 대한 정보는 허성찬과 유진수가 말한 걸 지예원을 통해 전해들은 것뿐이었다. 그러나 사정을 모르는 K 입장에서는 스테파니의 배반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경찰이 아니라 댁들이 들이닥친 걸 보아하니 조용히 이 여자애만 데리고 가려는 것 같은데…….”
“K. 제안을 하나 하지.”
“아카데미 경비원 나으리께서 제안이라. 어디 한 번 들어나 볼까?”
갑작스런 상황에도 헤실헤실 웃으며 이죽거리는 K를 보며 안수호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내 제안은 간단하다. 순순히 강하늘을 넘겨. 그러면 네가 도망치든 말든 관여하지 않도록 하지.”
“참나. 그렇게 말하면 내가 네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합죠, 하고 도망칠 줄 알았어?”
“현명하게 판단하는 게 좋을걸. 이쪽에는 S급 초인이 있으니까.”
“S급……?”
그 말에 K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안수호 일행을 훑었다. 곧 그녀의 두 눈이 좀 전보다 더욱 휘둥그레 떠졌다.
“잠깐. 설마 서, 설아현……?”
“훗.”
K가 자신을 알아보자 설아현이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그래. 내가 바로 흑룡회 길드마스터, 흑룡회주 설아현이다.”
설아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 말투나 행동거지에서는 강자 특유의 여유로움이 자연스레 묻어나왔다. 은근히 안수호가 있는 뒤편을 흘긋흘긋 보는 것이 안수호를 의식하는 기색이 다분했다.
“알아봐줘서 고마워. 제대로 된 인프라도 없는 슬럼가 출신도 날 알아보는 걸 보면 내가 꽤 유명하긴 한가봐? 하긴, 청부업 일을 하는 주제에 바깥 사정에 어두울 리가 없겠지만.”
자신만만한 설아현의 태도에 K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 말처럼 설아현은 이 나라에서 누구나 다 알 정도로 유명한 초인이었다. 당연히 그 강함 또한 익히 알려져 있었다.
“……헷. 그렇게 말하면 내가 지레 겁먹을 줄 알고?”
허세였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K는 갑작스런 S급 초인의 등장에 충분히 동요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여유로운 태도를 가장하면서, 그녀가 네 사람 몰래 자그마한 버튼이 달린 호출기를 꺼내들었다. 이런 일을 대비해서 의뢰인으로부터 받아둔 호출기.
찰칵.
버튼이 눌린 걸 확인한 K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 앞을 봤다. 그런 그녀를 향해 안수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모한 선택을 하려 하는군.”
“무모한지 아닌지는 붙어 보면 알겠지.”
그 말처럼 K는 결코 항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것이 그녀 나름대로의 자존심이요, 청부업자로서의 프로 의식이었다. 그 태도를 본 안수호가 짧게 혀를 찼다. S급 초인을 앞에 두고도 저리 자신만만한 걸 보면, 아무래도 믿는 구석이 있는 게 분명했다.
"하아."
안수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째 이놈의 세상은 당초 자신이 생각한 대로 일이 흘러가는 법이 없다고.
그러나 안수호는 괘념치 않았다. 눈앞의 청부업자를 회유할 패는 아직 몇 장 더 있었으니.
“왜 항복하지 않는 거지? 혹시 돈 때문에 그런가? 고용주한테서 얼마를 받았길래?”
“왜? 내가 말하면 웃돈이라도 얹어주려고?”
“원한다면야 못 낼 것도 없지.”
이 부분은 여기 오기 전 민채령과 이야기가 된 부분이었다. 만약 강하늘을 납치한 청부업자를 돈으로 회유해야 할 것 같다면 그리하라고. 비용은 자신이 부담하겠노라고.
“솔깃한 제안이긴 한데…….”
K가 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그녀가 강하늘이 앉은 의자 등받이에 상반신을 걸친 채 연기를 후우 내뱉었다. 강하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거절할게. 진짜로 돈을 줄지 안 줄지도 모르는 일이고. 애초에 우리 업계는 신뢰가 생명이라, 그런 식으로 돈에 눈이 멀어 박쥐처럼 왔다갔다했다간 매장당하기 쉽상이거든.”
“신뢰라.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네가 우리에게 협력한다면 네 파트너를 풀어주겠다. 반대로 네가 우리와 싸운다면 그녀의 안전을 보장해줄 순 없을 테고 말이지.”
“헷. 마음대로 하셔. 어차피 스테파니랑은 그냥 비즈니스 관계거든.”
“좀 전에는 신뢰가 중요하다 하더니? 동료를 챙기는 것 또한 신뢰가 아닌가?”
“신뢰는 그 여자가 먼저 깼지. 그러니 너희들이 지금 여기 올 수 있었던 것 아니겠어?”
먼저 정보를 분 건 스테파니니 자신 또한 그녀를 구해줄 의리는 없다고. 명백한 거절 의사를 보이는 K의 모습에 안수호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협상은 결렬이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그렇다면 남은 것은 충돌 뿐.
안수호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옆에 있던 류태현 또한 같은 생각을 품었다. 그가 주먹을 쥔 채 자세를 잡으며 안수호에게 말했다.
“형. 그냥 싸우자. 저 여자 우리 말 들을 생각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나참. 니들 지금 이 여자애 구하러 온 거 아니야? 그런데 가만 보니 조금 전부터 얘는 안중에도 없네?”
K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니들 나한테 인질 잡혀 있는 거야. 알아?”
K가 의식을 잃은 강하늘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직후 그녀가 품에서 나이프를 한 자루 꺼내 강하늘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안수호가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러나 K는 그 살벌한 눈빛에도 아랑곳 않고 이죽거릴 뿐이었다.
“이제 좀 상황파악이 돼? 니들이 지금 그렇게 큰 소리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이거야. 어디 한 번 거기서 한발자국이라도 움직여봐. 이 여자애 모가지를 아주 그냥 난도질해서 걸레짝으로 만들어버릴 테니까.”
“……정말 그럴 수 있겠냐?”
“뭐?”
그때, 안수호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정말 그럴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내 생각에, 아마 네 의뢰인은 강하늘이 다치는 걸 원하지 않을 텐데?”
“…….”
안수호의 날카로운 말에 K가 입을 다물었다.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야 명백히 정곡을 찔렸으니까.
당초 안수호의 예상대로 K의 의뢰인, 나주용은 가능한 한 최상의 상태로 강하늘을 확보하고 싶어 했다. 그것이 이번 의뢰의 제1 조건이었다. 따라서 K가 안수호 일행을 협박한답시고 강하늘에게 상처를 입히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젠장. 하다못해 들킬 거면 하루만 더 버티다 들키든가.’
지금으로부터 이틀 전에 강하늘의 납치를 성공했음에도 그들이 이런 허름한 창고에 있는 건 강하늘을 연구소 내부로 몰래 들이기 위한 사전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준비가 끝나는 것이 바로 내일이었다.
만약 스테파니가 들키는 게 하루만 늦었다면 강하늘은 무사히 연구소에 들여보내졌으리라. 그랬다면 K가 안수호 일행과 마주칠 일도 없었겠지.
“같잖은 허세는 그만두고 순순히 항복하지 그러냐. 지금이라면 아직 맨 처음 했던 제안은 유효하다. 강하늘을 우리에게 넘기고 도망친다면 굳이 쫓지는 않겠어.”
“…….”
안수호의 말에 분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다보던 K가 결국 나이프를 거뒀다. 그러나 그녀가 포기한 건 어디까지나 인질극을 위시한 블러핑뿐이었다.
“야. 멍멍이들.”
K의 부름에 잠자코 있던 헬멧들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부터 난 얘 데리고 도망칠 테니까 쟤네들이 못 쫓아오게 시간 좀 벌어봐.”
그 말에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던 헬멧들이 저마다 입을 열기 시작했다.
“……확인.”
“……시간. 번다.”
“……침입자. 없앤다.”
“이런 씨발.”
어눌한 말투와 함께 자세를 잡는 그들을 보며 안수호가 난색을 표했다. 처음에 그들의 복장을 보았을 때부터 긴가민가하긴 했는데, 그 특유의 말투를 듣자 마침내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여일 그룹이 뒤에서 몰래 키운 사냥개들.’
사냥개. 그들은 여일 그룹의 재력과 나주용의 과학력이 만나 만들어진 전투 집단이었다. 사냥개들은 전원 초인이었으며 불법적인 수술과 약물로 신체능력을 한계까지 끌어낸 자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여일 그룹의 자금으로 구입한 각종 하이테크 장비로 무장하기도 했다.
여일 그룹이 본격적으로 빌런 조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건 원작 중반부 이후부터. 당연히 그 시점부터 등장한 사냥개들 또한 그에 걸맞은 강함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지만.
“걔네들이 뭐하는 애들인지는 모르겠는데, 고작 다섯으로 날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설아현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 말대로 제아무리 여일의 사냥개라 한들 S급 초인 앞에서는 시간벌이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고작 다섯? 아닌데?”
어디까지나 그 숫자가 다섯에 불과할 때에만.
끼이이이익.
불쾌한 마찰음에 네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막 창고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한 새로운 사냥개들이 그들의 시선에 잡혔다.
그 숫자는 15명.
창고 안으로 들어선 사냥개들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안수호 일행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도합 20명의 사냥개들에 의해 네 사람은 순식간에 포위당했다.
“……조무래기가 늘어봤자 결국 조무래기일 뿐이야.”
“그렇지만 시간벌이 정도는 되겠지.”
명백한 비웃음을 흘리며 K가 강하늘의 몸을 어깨에 들쳐 멨다.
동시에.
“사냥개들.”
K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물어.”
다음 순간, 20마리의 사냥개가 일제히 네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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