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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98화 (99/266)

〈 98화 〉 097. 동시사건(12)

* * *

강하늘이 납치되었다. 그것도 어쩌면 이틀도 전에.

당연히 당장 구하러 가야 했다. 그러나 참으로 공교롭게도, 민채령에겐 현재 강하늘 구출에 투입할 수 있는 부하가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지예원이 있긴 했지만 적이 몇 명이나 있는지도 모르는 와중에 지예원과 단 둘이서 적진에 무턱대고 쳐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

그렇다면 나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언뜻 방법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 속에서 나는 고민했다. 그리고 고민한 끝에 도출한 결론은 의외로 간단했다.

민채령이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그렇다면 내 개인적인 인맥을 동원하면 그만이지 않은가.

“……급하게 불렀는데 와줘서 고맙다.”

그리하여 현재.

고속도로 위를 질주하는 중형 세단(민채령에게서 빌렸다) 안, 내 바로 옆 조수석에는 강하늘 납치 소식에 급하게 달려온 류태현이 앉아 있었다.

“뭘요. 하늘이가 납치됐다면서요. 그럼 당연히 달려와야죠.”

그 말처럼, 이번 일에 류태현을 끌어들이는 건 무척이나 쉬웠다. 류태현은 천성이 이야기 속 주인공이요, 히어로였다. 같은 반 친구가 악의 조직 무리에게 납치당한 이 상황에 그가 몸을 내뺄 리가 없었다.

“하늘이가 있는 위치는 이미 알고 계신다고 그랬죠?”

“그래.”

“경찰에 신고는…….”

“안 했다. 사정이 있어서.”

“그렇군요.”

류태현은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내가 슬쩍 시선을 보내자 류태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뇨. 뭐. 그럴 것 같았거든요.”

“그럴 것 같았다니?”

“하늘이 걔가 학기 초부터 이래저래 일이 많았잖아요. 자퇴하려다 번복하기도 하고, 웬 괴한들한테 습격당하기도 하고.”

“그러긴 했지.”

“게다가 지금은 좀 덜하긴 하지만 학기 초에는 좀 애가 많이 겉도는? 느낌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아, 얘 분명 남들한테 말 못할 무슨 비밀 같은 게 있구나 싶었죠.”

주인공 특유의 눈썰미를 과시하며 류태현이 씨익 웃었다.

‘하늘이가 겉돌았다고…….’

예전이면 그것이 그저 강하늘의 성격 탓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이제는 달랐다. 강하늘 또한 나와 같은 빙의자일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그야 대뜸 소설 속 세상에 들어왔는데 캐릭터들하고 하하호호 어울릴 순 없겠지. 학기 초의 자퇴 소동도 아마 비슷한 맥락일 테고.

‘그럼 자퇴하고 스트리머 한다고 한 것도 원작 전개에서 벗어나려고 그런 건가? 이걸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하긴,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캐릭터로 빙의한 나와 달리 그녀가 빙의당한 캐릭터는 단역이긴 해도 빌런. 살아남기 위해선 원작 캐릭터들과 최대한 엮이지 않은 채 조용히 살아가는 게 최선책이었겠지.

전부 어디까지나 강하늘이 정말로 빙의자였을 때 한한 이야기지만.

“근데 형도 참 하늘이랑 자주 엮이네요.”

그때, 류태현이 조수석 창틀에 턱을 괸 채 말했다.

“맨 처음에 괴한한테 습격당했을 때 구해준 것도 형이고, 자퇴한다고 했을 때 상담해준 것도 형이라 했고, 이중던전 때 구해준 것도 형이고, 그리고 지금도. 무슨 사정 때문에 경찰도 못 부르는 일에 형은 당연하다는 듯이 끼어들어 있잖아요.”

“……그래서?”

“그냥. 도대체 둘이 무슨 사이인가 해서요. 혹시 이건가?”

류태현이 새끼손가락을 세우며 씨익 웃었다. 그 장난스런 동작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멋쩍게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강하늘과 무슨 사이냐라…….’

지예원과 다시 만나기 전에 그 무슨 사이인지를 확실하게 정하기로 했는데, 결국 정하지도 못한 채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둘이 사귀는 사이에요?”

“아니. 아직은 아냐.”

“아직은? 그렇다는 건 곧…….”

“그것도 아직 잘 모르겠어. 그,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저번에 들어보니 둘이 뭐 데이트도 하고 그랬다면서요? 그런데 사정이 있어봐야 뭐가 있다고……. 잠깐, 설마.”

류태현이 미심쩍은 눈으로 날 바라봤다. 곧 그 입가에 류태현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그려졌다.

“인기 많은 남자는 괴로운 법이죠. 그 심정 저도 이해합니다.”

“……뭘 다 안다는 듯이 말하고 있어?”

“그거야 딱 보면 견적 나오죠. 대충 몇 명한테 동시에 고백 받아서 그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

정곡……까지는 아니지만 꽤 근접한 추리였다. 과연 주인공다운 눈썰미다 하고 생각했으나, 아무리 그래도 아무런 정보도 없이 저런 정황을 추리해내는 건 불가능하단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즉.

“……하늘이한테서 뭐라도 들었어?”

“데이트코스에 있던 레스토랑에 옆집 여자가 일하고 있던 거랑 그 여자네 집에서 형이랑 같이 술 마셨다는 이야기 정도? 아, 연애 상담 비스무리한 것도 몇 번 들어주긴 했어요. 자기 입으론 친구 이야기라고 하는데…… 딱 봐도 자기 이야기인 티가 너무 나서.”

“그래…….”

그 말에 나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강하늘과의 감정 문제도 복잡했고 그녀가 납치당한 지금 상황도 복잡했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여튼 형.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마세요.”

있는 대로 미간을 찌푸린 채 운전하고 있던 내게 류태현이 말했다.

“하늘이는 아마 괜찮을 거예요. 하늘이를 납치한 놈들도 뭔가 바라는 게 있으니 하늘일 납치한 걸 거 아니에요?”

“…….”

“게다가 지금 형 옆에 있는 게 누굽니까. 1학년 재학생 랭킹 넘버 원! 다음 분기 A급 승급 유력 후보! 바로 저 류태현 아닙니까. 여명단 간부도 줘팼는데 그깟 납치범 놈들 혼내주는 거야 일도 아니죠.”

류태현이 과장된 태도로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 행동거지에 은연중에 녹아있는 그의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하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마음의 짐을 덜어주려는 심산이겠지.

“류태현.”

“네. 형.”

“진짜 고맙다.”

“킥. 알면 됐어요.”

내가 두 눈을 게슴츠레 뜬 채 그를 바라보자 류태현이 손으로 브이자를 그리며 짓궂게 웃었다. 그 웃음에 나도 결국 표정을 풀고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 이만한 동생 어디 없습니다. 안 그래요. 형?”

“그래. 너만한 동생 어디 없다.”

“정말요? 그럼 혹시 말 까도 돼요?”

“마음대로 해.”

“오예.”

기왕 말을 놓으라고 했으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류태현은 입을 다물었다. 나도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말없이 운전에만 집중했다.

조금 전까지의 왁자지껄함이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침묵.

그러나 운전대를 잡은 내 마음은 조금 전보다 아주 약간 편해진 것 같았다.

***

강하늘이 잡혀 있는 의정부의 공장으로 향하는 길. 그 중간.

지예원과 만나기로 한 접선지에 도착한 나는 저 멀리 보이는 지예원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지예원이 멋쩍은 얼굴로 슬쩍 웃었다.

"예원아."

"응."

"잘 지냈어?"

어색하기 그지없는 물음. 지금 상황에 이런 말을 하는 게 맞나 싶었으나 반사적으로 그 말이 튀어나왔다.

"그냥저냥 지냈지. 너는?"

"나도 뭐……."

"되게 오랜만에 보는……것도 아니네."

"……그러게."

헤어질 때는 한동안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설마 거의 일주일만에 다시 만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와 지예원은 어색한 재회에 서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도 늘 옆집에 있던 그녀를 만나지 못했던 게 알게 모르게 아쉬웠던 걸까. 이렇게 지예원을 보고 있으니 가슴 한 켠에 반가운 감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상황이 상황임에도 말이다.

"그래도 반갑네. 이렇게 얼굴 보니까."

지예원도 나랑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그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그러던 지예원이 앗, 하고 탄성을 뱉더니 막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맞다. 좀 전에 저 사람도 여기 도착했어."

그 말에 나는 지예원의 뒤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에 우리 두 사람을 빤히 지켜보고 있던 여성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현 씨.”

“네. 안수호 씨.”

내 목례에 설아현이 마주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흑룡회 길드마스터. 흑룡회주 설아현.

그녀 또한 류태현과 마찬가지로 내가 개인적으로 부른 인맥이었다. 사실 그녀의 경우 아직 인맥이랄 수준의 관계조차 아니었지만, 이 야밤 중에 S급 길드 길드마스터를 호출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일전에 그녀에게 친 ‘거짓말’의 효과가 컸다.

설아현은 회귀자다. 그리고 그녀는 나 또한 미래에서 온 회귀자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쉽다. 강하늘을 구출하는 것이 미래에 벌어질 끔찍한 사고를 막아내기 위함이라고,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만 말하면 그녀는 만사 제쳐두고 날 도우러 나올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저 말이 마냥 거짓말인 것도 아닌 게, 나주용은 원작 후반부까지 줄기차게 등장하는 빌런이니 그런 그의 계획을 막는 게 곧 끔찍한 미래를 막아내는 것 아니겠는가.

“일단 이동하기 전에 각자 통성명부터 하는 게 먼저겠군요.”

내 말에 서로 초면인 세 사람이 시선을 바쁘게 옮겼다. 그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단연 친화력 톱을 달리는 류태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누님들! 그린하우스 헌터과 1학년 류태현이라고 합니다! 초인 등급은 B+, 보유 초능력은 신체강화입니다! 여기 수호 형이랑은 친한 형동생 사이예요! 지금 구하러 갈 하늘이랑도 친구고요!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대학교 선배들에게 신입생이 인사하듯 빠릿빠릿하게 외친 류태현이 허리를 90도 숙이며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그런 그의 행동에 당황한 지예원과 설아현이 멋쩍은 얼굴로 서로 눈치를 봤다.

“……예지원이에요. 안수호랑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고, 납치된 강하늘하고도 면식은 있어요. 초인 등급은 대충 C 언저리고, 초능력은 이거.”

까드득! 지예원의 손바닥에서 보랏빛이 도는 칼날이 솟아났다. 그 모습을 본 설아현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서 말했다.

“제 소개는 아마 필요없겠지만 다들 했으니 저도 할게요. 흑룡회 길드마스터 설아현이라고 해요. 초인 등급은 S. 사용 초능력은 미래시. 여기 안수호 씨랑은 개인적으로……으음. 좀 돈독한 관계? 아무튼 나름 친분이 있는 사이에요.”

그렇죠? 하고 내게 묻는 설아현의 얼굴은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 내가 그녀에게 시선을 맞추자 설아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슬쩍 고개가 돌아갔다.

어째 귓볼이 조금 빨개진 것 같기도 하고.

“……돈독한?”

한편 지예원은 설아현을 째려보듯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꼭 무언가 물어보고 싶은 거라도 있는 것처럼.

“그럼 이동하죠.”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마음 편히 서로에 대한 궁금증을 풀 시간 따위 없었다. 강하늘로 변장했던 스테파니를 잡아 족친 이상, 이쪽이 눈치 챘다는 걸 언제 들켜도 이상하지 않으니.

우리 네 사람은 내가 타고 온 세단에 탑승한 채 의정부로 향했다. 슬럼가의 경계면에 위치한, 강하늘이 잡혀있는 섬유공장 창고를 향해.

“안수호. 허성찬이 너 만나면 말 좀 전해달라더라.”

어두운 밤길을 달리던 중. 조수석에 앉은 지예원이 내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놈이랑 만났다고 했지. 왜? 나보고 뭐라 그래?”

“어. 다음에 만나면 죽여버리겠다던데.”

“아.”

그러고 보니 강하늘의 집에서 싸웠을 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었다. 꽤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아직도 원한을 품고 있었구나.

하긴, 한쪽 고막을 터뜨려놨는데 원한을 안 품는 게 이상하지.

허성찬과의 싸움을 회상하던 나는 남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상태창을 불렀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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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수호’의 상태창 ]

이름 : 안수호

성별 : 남성

신장/체중/나이 : 182.3cm/76.5kg/24세

직업 : 아카데미 경비원

소속 : 그린하우스 경비대 특수대책과

보유 초능력 : 검은 연기(D), 마력 흡수(A)

[ 능력치 ]

근력 D+*

민첩 B+*

내구 D

마력 C

기교 C

의지 C

행운 B

1. 의 착용 효과에 의해 근력과 민첩에 플러스 보정이 붙습니다.

[ 보유 스킬 ]

1. 아카데미의 경비원(유니크. D)

2. 서리정령의 계약(유니크. E)

[ 장비 목록 ]

1. 마력 흡수의 탈리스만

2. 샛별의 숨소리

3. 서리정령의 증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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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찬과 싸웠을 당시와 비교하면 그래도 나름 발전이 있긴 했다. 특히 민첩 능력치의 경우 최근 훈련 덕분에 한 단계 상승하여 이제는 A랭크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여전히 주요 등장인물들에 비하면 부족한 능력치였지만 어찌어찌 1인분은 가능한 수준.

거기에 더해 탈리스만을 위시한 각종 아티펙트를 활용하면 순간적으로나마 A급 수준까지는 아슬아슬하게 비벼볼만 했다. 실제로 A급에 준하는 한겨울과의 대련에서 판정승을 거두기도 했고.

‘문제는 이미 샛별의 숨소리 스톡을 다 써버렸다는 건데…….’

샛별의 숨소리의 스톡은 하루 3회. 그리고 스톡의 회복 기준은 자정. 지금 시각이 오후 10시가 조금 안 되었으니 샛별의 숨소리를 다시 쓰려면 아직 두 시간을 넘게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였다.

공장에 도착하는 예정 시각이 10시 40분 정도. 즉 전투가 길어지지 않는 이상 이번 전투에서 샛별의 숨소리를 사용할 순 없겠지.

제아무리 아군으로 설아현과 류태현이 있다 한들, 늘상 강적을 타도하기 위해 사용했던 아티펙트를 쓰지 못한다는 사실이 불안감을 스멀스멀 부추겼다.

“……도착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우리가 탄 차는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정확히는 목적지로부터 1km 정도 떨어진 골목길에.

“아직 더 가야하는 거 아니야? 왜 여기 멈춰?”

“여기가 맞아. 차는 여기 두고 공장까지는 건물 옥상들을 건너면서 갈 예정이거든.”

“옥상을 건너면서……? 아하, CCTV 때문에?”

지예원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처럼 건물 옥상을 통해 이동하는 건 도로를 찍는 CCTV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디어 자체는 민채령의 것이었다.

공용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우리는 미리 봐둔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우리가 있는 호원동은 슬럼의 경계 지역이라 그런가 건물들의 높이가 전체적으로 낮고 건물 사이사이의 간격도 좁았다. 초인이라면 충분히 넘나들 수 있을 정도로.

“……이런.”

그러나 아무리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한들 대로변은 예외였다.

열심히 건물 옥상을 넘나들던 나는 널찍하게 벌어진 6차선 도로를 앞에 두고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 뒤로 날 뒤따라오던 다른 세 사람이 다가왔다.

“수호 씨. 왜 그러세요?”

“길 폭이 제 생각보다 좀 넓어서요.”

“음. 조금 넓긴 하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설아현에겐 손쉽게 뛰어넘을 수 있는 거리일 터였다. 그리고 류태현 또한 마찬가지겠지.

“지예원. 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

“도움닫기할 거리만 있으면 아슬아슬……하게 되려나. 아니, 안 될지도.”

“미안. 내 불찰이야. 지도로만 봤을 땐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다른 길로 돌아가야겠…….”

“구, 굳이 돌아갈 필욘 없지 않아요?”

설아현이 날 보며 쭈뼛거리는 태도로 말했다.

“그, 저랑 류태현 씨?는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거리니까. 저희 둘이서 각자 한 사람씩 안은 채로 뛰어넘으면 되잖아요?”

“가능하겠습니까?”

“네. 별로 어, 어려울 것도 없는데요 뭘…….”

확실히 사람을 안은 채로도 이 거리를 뛸 수 있다면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설아현은 본인 입으로 가능하다 하니 됐고, 그럼 류태현은 어떨까 싶어 그를 돌아보자.

“음. 충분히 될 거 같은데.”

라고, 류태현이 어색하게 말을 놓으며 내게 말했다. 차 안에서는 장난스럽게 말 까겠다고 말하더니 아무래도 아직 어색하긴 한가보다.

“좋습니다. 그럼 부탁 좀 드리죠.”

“네! 그, 그럼 수호 씨는 제가 안고 뛸게요……!”

“에? 왜요?”

설아현이 엉거주춤 팔을 벌리며 내게 다가오던 걸 지예원이 살며시 가로막으며 말했다.

“왜 그쪽이 안수호를 안는다는 거죠? 아현 씨는 절 옮겨줘야 되는 거 아닌가요?”

“네? 아니, 그야. 제가 류태현 씨보다 힘이 세니까 당연히 더 무거운 사람을 옮겨야겠……죠?”

얼핏 들으면 사리에 맞는 말이었다. 아니, 당연히 옳은 소리였다. 겉보기엔 류태현이 설아현보다 힘이 몇 배는 세 보였지만 실제 근력은 당연히 설아현이 훨씬 앞설 테니까.

“……으음. 그, 그렇지만 남녀간에 그런……. 으, 으으.”

그러나 지예원은 설아현의 말이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자신도 설아현의 말이 맞다는 걸 알기에 이렇다 할 반박은 하지 못했으나, 입술을 달싹이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이 딱 그래보였다.

‘……설마 나랑 설아현이 닿는 게 싫어서 그런가?’

설마 고작 그런 이유로 트집을 잡는 건가 싶었으나 그거 말곤 딱히 그녀가 설아현의 결정에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어 보였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급한 상황에 그런 걸 따진다고??

“……뭐. 틀린 말은 아니네요. 어쩔 수 없죠. 그럼 아현 씨가 수호를 옮기는 걸로 해요.”

결국 지예원이 포기했다는 듯 살짝 힘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반면 설아현은 미소인지 부끄러움인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나 그 순간.

“에이. 그냥 남자가 남자 옮기고 여자가 여자 옮기는 게 낫지 않아요? 수호 형은 제가 옮길게요.”

“에?”

“네?”

“이 정도 거리는 등에 200kg 바벨 쥐고도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는데요 뭘. 형. 어서 가자.”

“어? 어어…….”

자신만만하게 날 등에 들쳐업은 류태현이 난간에서 네 다섯 발 정도 물러서더니 단숨에 옥상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통! 토옹!

가벼운 점프. 그리고 가벼운 착지.

널찍하게 벌어진 6차선 도로의 가로 거리를 류태현은 문자 그대로 반쯤 나는 것처럼 가볍게 뛰어넘었다. 그것도 날 등에 진 채로.

류태현의 등에서 내려온 뒤 반대편 옥상을 바라보자, 설아현과 지예원이 벙찐 얼굴로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설아현은 아쉽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고 지예원은 그런 설아현에게 보이지 않게 통쾌하다는 듯 주먹을 꽈악 쥐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던 류태현이 은근슬쩍 귓속말로 말했다.

“형. 나 잘했지?”

“……어. 잘했다.”

“형도 참 고생이다. 여러모로.”

그렇게 말하는 류태현의 표정은 어딘가 측은해 보이는 한편, 내게 동병상련을 느끼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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