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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91화 (92/266)

〈 91화 〉 090. 동시사건(5)

* * *

“저는 서울 온 김에 저희 쪽 본사에 들를 예정이라서. 죄송하지만 돌아가실 땐 혼자 가셔야 할 것 같네요.”

흑룡회 본사 건물 앞. 주위에 과시하듯 주차된 리무진 앞에 선 채 한여름이 그렇게 말했다.

“여기까지 올 때 태워주신 것만 해도 감사하죠. 그럼 조심히 들어가시길.”

“그쪽도요. 다음에 보죠.”

다음에 보자. 그 말에 안수호가 살며시 쓴웃음을 지었다. 고작 며칠 전만 해도 한여름과 다음에 보자는 인사말을 나누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

리무진에 오른 한여름은 짙게 선팅 된 창문 너머로 안수호를 바라봤다. 그녀가 탑승하자 안수호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 그가 한참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한여름이 옆에 탄 자신의 비서에게 말했다.

“미정 씨.”

“네. 아가씨.”

“안수호와 설아현의 관계에 대해 조사해주세요. 그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과거에 만난 적은 없는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전부.”

“알겠습니다. 그럼 저번에 의뢰한 그 탐정에게 다시 부탁해볼까요?”

“……그래요. 일리아나의 실력은 이미 증명된 셈이니 믿고 맡겨도 되겠죠.”

리무진이 출발하고 한여름은 팔걸이에 팔꿈치를 얹은 채 턱을 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선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경우의 수가 오갔다.

“그냥 재야에 묻힌 고수인줄만 알았는데…….”

설아현은 국내 3위의 길드 흑룡회의 길드마스터이자 전국의 모든 초인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

그런 그녀와 안수호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에 대한 중요도를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재미있네.”

한여름은 실로 오랜만에 자신의 흥미를 끄는 인물의 등장에 즐겁다는 듯 미소 지었다.

기실 그녀는 요즈음 삶이 너무 뻔해서 지루했던 참이었다. 랭킹전의 의무방어전은 승리하는 게 당연했고 시험도 당연히 1위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아스테로이드 길드에서의 인턴 생활조차 그녀에게 있어선 이렇다 할 자극거리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던 와중 터진 이중던전 사태. 그러던 와중에 터진 오버랭크 던전이었다. 거기에 더해 대뜸 등장한 안수호라는 ‘기인’의 존재는 그녀로 하여금 즐거운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미정 씨.”

“네. 아가씨.”

“저, 가지고 싶은 게 생겼어요.”

“말씀만 하시면 그게 어떤 것이든 아가씨 앞에 대령하겠습니다.”

“그게 사람이라도?”

“아가씨께서 그리하라 하신다면.”

“좋아요 그럼.”

턱을 괸 손을 푼 한여름이 스마트폰을 들었다. 화면에는 그녀가 가장 최근에 통화를 걸었던 상대, 안수호의 전화번호가 떠올라 있었다.

“안수호. 저 남자를 제 것으로 만들고 싶어요.”

한여름. 그녀는 쓸데없는 것에 자신의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는 걸 극도로 혐오하는 자였으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흥미를 끈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참으로 극단적인 여자였다.

***

한편 그 시각.

한여름과는 다른 의미로 머릿속이 안수호로 가득 찬 한 여성이 자신의 집무실에서 테이블에 엎드린 채 끙끙 앓고 있었다.

“…….”

단정하게 정리한 앞머리와 살짝 웨이브 진 단발머리가 인상적인 여비서, 예카테리나 알렉산드로브나 이바노바는 좋아하는 남자아이에게 고백한 사춘기 여자아이마냥 행동하는 자신의 상사, 설아현을 보며 걱정스런 한숨을 내쉬었다.

‘회주님께서 원래 이런 분이 아니신데…….’

그녀의 상사, 설아현이라 하면 어떤 자인가.

그녀는 그야말로 완벽한 초인이었다. 무력. 지력. 경영력. 정치력. 인망. 평판. 그 모든 분야에 있어서 설아현은 단 하나의 흠조차 없는 초인이자 철인이고 현인이었다. 그런 그녀의 면모에 반해 예카테리나는 설아현의 비서가 되었다.

헌데 그 상사가 뭐 잘못 먹은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꼴이, 비서인 예카테리나로서는 낯설기 그지없었다.

‘흐아아아아…….’

한편 설아현은 그런 예카테리나의 심정은 하나도 모른 채 머릿속이 안수호에 대한 일로 가득 차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내가 그 남자랑 그런 파, 파렴치한 짓을…….’

설아현은 바빴다. 당장 이번 회의에서 나온 안건조차 아직 정리하지 못한 채였으며 지금까지 세운 공략 계획도 대대적인 검수와 보완이 필요했다. 심지어 그녀의 업무는 기사의 무덤 공략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예상 외로 회의가 길어진 탓에, 지금 그녀의 집무실 테이블 위에는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그, 근데 내가 미래에 그 남자랑 그런 짓을 한다는 건 즉, 나랑 그 남자가 여, 연인 사이가 된다는 건가……?’

그러나 설아현의 머릿속은 오직 안수호에 대한 일만 가득했다. 당연히 일이 손에 잡힐 턱이 없었다.

‘어째서? 난 그 사람이랑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설마 이번 공략이 계기가 돼서 사이가 발전하는 건가? 그, 그럼 이대로 가다간 난 내가 본 미래처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끙끙 앓다가 돌연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그런가 하면 대뜸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리기도 하더니 애먼 테이블을 쾅쾅 두드리는 설아현.

“저, 회주님?”

예카테리나는 그런 그녀가 걱정이 되어 미칠 노릇이었다. 설아현이 이 정도의 감정적 동요를 보이는 모습을 보이는 건 그녀가 설아현을 모시기 시작하고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조금 전부터 왜 그러시죠? 혹시 회의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그 말처럼 회의에선 아무 일도 없었다. 회의 전에 일어난 일이 문제였지.

‘그래. 아무 일도 아니야.’

설아현이 애써 정신을 가다듬었다. 비록 그녀가 안수호와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그렇고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한다고 한들, 관측한 미래는 결코 절대적인 게 아니었다. 바꾸려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미래가 보였다는 건 나랑 그 남자가 그렇게 엮일 건덕지가 있다는 거잖아? 어쩌다 나는 그 남자랑 그런 짓을 하게 되는 거지? 애초에 나랑 그 남자는 그……. 연인, 사이가 되는 게 맞기는 한가?’

그녀가 본 것은 어디까지나 단편적인 장면 하나. 그 장면 하나만으로 미래의 안수호와 자신의 관계를 단정짓기란 섣부른 판단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럼 도대체 어쩌다 자신은 그런 미래에 도달하게 되는 거냐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으나, 설아현은 이렇다 할 답을 내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설아현은 초인으로선 완벽한 자였으나 한 사람의 여성으로선 완벽과 거리가 멀었다. 까놓고 말해 연애와 관련해선 완전히 쑥맥, 숫처녀나 다름없었다. 회귀 전에는 연애 따위 할 정신이 없었고, 회귀한 뒤에는 오로지 동료들을 지키고 길드를 키우느라 여념이 없었으니까. 사실상 그녀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연애의 ㅇ 자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설아현이 단편적인 장면 하나만으로 안수호와의 연애 서사를 유추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잠깐, 카챠라면 뭔가 알지 않을까?’

그런 그녀에게 구세주처럼 다가온 것이 바로 그녀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비서 예카테리나, 애칭 카챠였다.

‘그래. 카챠는 나보다 연애 경험이 풍부하니까, 그녀라면 무언가 조언을 해줄 수 있을 지도……?’

그렇게 생각했으나 문제는 물어보는 방식이었다. 다짜고짜 비서에게 자신이 미래에 파렴치한 짓을 하는 장면을 보았다고 밝히기엔 설아현은 의외로 부끄러움이 많은 여자였다.

“저기, 카챠. 뭐 하나 물어봐도 돼?”

그리하여. 심사숙고 끝에 최대한 덜 부끄러운 질문 방식을 생각해낸 설아현이 예카테리나에게 말했다.

“네. 말씀하시죠.”

“그, 별 건 아니고. 남녀 관계에 대한 이야기인데…….”

“역시 그랬군요.”

“엥?”

아직 질문의 ㅈ 자도 꺼내지 않았는데 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에 설아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 계신다 했더니, 아무래도 회의 참석자 중에 연모하시는 분이 있으신 것 같군요. 누구죠? 성유진인가요? 아니면 신재호? 하의찬? 설마 오지훈은 아니겠죠. 회주님과 그 자의 나이 차이는 거의 삼십­”

“아냐! 아니라고! 그런 거 아니야! 얘가 지금 상사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지극히 자연적인 일인걸요.”

“글쎄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냥 호기심에 물어보는 거라고 호기심!”

“예. 호기심이라. 그럼 말씀해보시죠. 저, 예카테리나. 회주님의 호기심을 풀어드리기 위해 성심성의껏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어째 자신을 놀리는 듯한 그 모습에 설아현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본래 예카테리나는 설아현에게 깍듯한 태도를 취했으나 조금 전부터 그녀가 보인 소녀스런 모습에 조금 장난기가 발동한 모양이었다. 실은 이쪽이 예카테리나의 본심에 가까운 편이었다.

평소의 설아현이라면 예카테리나의 그런 무례한 태도를 결코 좌시하지 않았을 것이나, 안수호의 일로 머릿속이 가득했던 그녀는 무어라 지적하지 않았다.

“그, 정말로? 정말로 호기심에 물어보는 건데.”

예카테리나가 무의식적으로 알아차렸듯, 지금의 설아현은 완전무결한 초인 설아현이 아닌 낯선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는 한 명의 소녀였으므로.

“남자랑 여자랑 사귀면? 관계가 진전돼서 서로를 믿게 되면 그, 서로 사, 사랑을 나누잖아? 학생끼리라면 몰라도 성인의 연애면 지극히 자, 자연스러운 일이잖아??”

“네. 자연스러운 일이죠. 그런데?”

“그런데 그, 그때 말이야. 사랑을 나눌 때. 여자가 남자를 막, 선생님?이라고 부른다거나?”

“……네?”

“아니면 남자가 여자를 묶어둔 채로 회, 회초리로 막, 괴롭, 힌다거나? 아무튼. 그런 것도 뭐, 평범하지……는 않지만,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겠지?”

“…….”

질문을 마친 설아현의 얼굴은 잘 익은 홍당무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참으로 부끄러운 질문이었으나 그녀로선 가장 먼저 해결하고 싶은 궁금증이었다.

안수호와 자신이 미래에서 나누게 될 파렴치한 짓. 그것이 과연 그나마 정상적인 범주에 둘 수 있는 종류의 일인가.

설아현이 그 사실을 그 무엇보다 궁금해 하는 것은 그녀가 막강한 무력을 지닌 S급 초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S급 초인. 상식적으로 그런 그녀가 억지로 ‘그러한 짓’을 당해줄 리는 없다.

고로 분명히 그 ‘파렴치한 짓’은 합의 하에 이루어진 행위일 것이고.

자신이 그런 짓에 동의했다는 건 즉, 현재의 그녀는 깨닫지 못했으나 어쩌면 자신에게 그러한 취향이 내재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 사실이 궁금하고, 우려되고, 두렵고, 걱정되어서 설아현은 새빨개진 얼굴을 감추면서도 예카테리나의 답을 기다렸다.

“………………하.”

그리고 예카테리나는 자신의 상사를 말없이 바라보더니 이내 당황 섞인 탄성을 뱉었다.

“…………회주님께서 그……런 취향이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 순간 설아현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굳어졌다. 그 말 한 마디만으로 자신이 말한 행위가 정상적이지 않은, 이상성욕에 속하는 행동이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으니까.

‘아차.’

뒤늦게 그녀가 후회했다. 질문하기 전에 능력을 발동해서 미리 답을 들었더라면 이런 부끄러운 질문 따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당황한 탓에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뒤늦게 후회한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엎지른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으니, 남은 일은 최대한 수습하는 것뿐.

“아하하하하. 역시조금 이상한 건가? 하긴.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

“딱히 이상하다……라고 할 순 없죠. 성적 취향이란 사생활의 영역. 범죄가 아닌 이상에야 존중받아야 마땅합니다. 다만 저로서는 3년만에 처음으로 듣는 회주님의 성적 취향이 그런 쪽이라는 게 조금 당황스러운 것 뿐입니다.”

“아니. 내가 그렇다는 건 아니거든? 아까 말했잖아. 어디까지나 호기, 호기심이라고.”

“회주님.”

예카테리나가 가만히 설아현의 두 손을 잡았다. 마치 고해성사를 듣는 성녀처럼, 기도하듯 고개를 숙인 그녀의 얼굴에 밝은 백금발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드리워졌다.

그것이 꼭 수녀가 머리에 쓰는 베일 같다고.

문득 설아현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 예카테리나가 참으로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말했다.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취향이란 존중받아야 마땅한 거라고.”

“……뭐?”

“좋습니다. 이 예카테리나, 비서된 자로서 회주님의 일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성심성의껏 도와드릴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호기심이라고 하셨죠? 잠시만 기다리시길. 지금 당장 이미지 플레이와 BDSM 관련 자료를 조사해서 보고서로­”

“그, 그만! 됐어! 됐다고! 그딴 거 안 알려줘도 되니까 그냥 잊어줘! 방금까지 내가 한 이야기 다 잊어달라고!”

“제가 어찌 회주님의 말씀을 머릿속에서 지우겠습­”

“잊으라고!!!! 됐어!! 나가!! 나 이제 일할 거니까 나가라고! 필요하면 그때 부를 테니까!”

“언제든 불러주시길.”

숫제 눈물까지 살짝 글썽이며 씩씩대는 설아현을 뒤로한 채 예카테리나가 집무실을 나섰다. 그런 그녀의 입가엔 묘하게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설아현. 그녀는 본래 감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완벽한 초인이었으나.

저런 모습의 설아현도 나쁘진 않다고.

예카테리나가 그렇게 생각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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