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088. 동시사건(3)
* * *
오버랭크 던전. 기사의 무덤.
S급 길드의 탐사대마저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그 흉악한 던전의 공략을 위해 국내에 존재하는 모든 S급 길드의 간부진들이 이곳, 흑룡회 본사 회의실에 모였다.
참여한 길드의 면면을 보자면 다음과 같았다.
S급 1위 길드. 로열 나이츠.
2위. 아스테로이드.
3위. 흑룡회.
4위. 겨울 동맹.
그리고 5위. 용감한 사내들.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은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에서 나온 헌터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회의에 참석한 헌터들은 거의 전원이 각 길드에서 최소 간부급 이상의 위치에 오른 길드의 주요 멤버이기도 했다.
다만 예외가 있다면 딱 두 사람. 각 길드의 간부진은커녕 정식 멤버조차 아닌 이들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아스테로이드 길드의 학생인턴 신분으로 참석한 한여름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참석에 대해서 이 자리에 이견을 가진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한성그룹이라는 뒷배경을 따지지 않더라도, 그녀의 실력은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와 비교하더라도 결코 뒤지지 않았으니까.
반면 나머지 한 사람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 있는 거의 전원이 의문을 품고 있었다.
회의에 참여한 내로라하는 헌터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그 시선 끝에 자리한 남자, 안수호는 자신을 보는 유명 헌터들의 시선에 난처한 듯 입술을 잘근 씹었다.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네.’
그렇게 생각한 안수호가 회의에 자리한 이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살폈다.
S급 길드의 간부진, 이라고 하여도 안수호에게 있어선 그렇게까지 익숙한 이들이 아니었다. 아무리 저들이 이 세상에서 유명하다 한들, 바깥에서 온 안수호에게 있어선 생판 남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나마 회의에 참석하기 전 한여름이 참석자 명단과 사진을 보여주어 어찌어찌 누가 누구인지 분간은 할 수 있었다.
“그럼 참석자도 전원 모였으니 슬슬 오늘 회의를 시작해보죠.”
기다란 직사각형 형태의 테이블 가장 안쪽. 상석에 위치한 한 여성이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성은 언뜻 보기에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앳된 외모의 소유자였다. 샛노랗게 물들인 머리카락색과 앙증맞게 양갈래로 묶어 늘어뜨린 헤어스타일이 그런 그녀의 어린 외모를 더욱 강조했다. 그 탓일까, 여성이 걸치고 있는 오피스룩 블라우스조차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꼭 교복 와이셔츠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어려보이는 외모를 핑계 삼아 그녀를 얕보지 않았다.
얕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회의에 참석한 열여덟 명의 초인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였으므로.
여성의 이름은 설아현.
S급 길드 흑룡회의 길드마스터이자 흑룡회주라는 이명으로도 유명한, 명실상부 국내 최강의 초인 중 한 명이었으니까.
“우선 오늘 회의를 소집한 건 미리 말씀드렸듯 빌헬름…… 기사의 무덤의 주인 괴수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에요. 정보의 출처는 여러분이 조금 전부터 빤히 바라보고 계시던 저 안수호 씨고요.”
설아현의 지목에 안수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혹시 저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까요?”
“괜찮습니다. 아현 씨. 저분에 대해서는 이미 저번 회의 때 들었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것은 이번에 겨울 동맹의 서브마스터 자리에 오른 성유진이었다. 안수호와 눈을 마주친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안수호 씨. 예전부터 당신에 대해서는 흥미가 있었거든요.”
안수호는 민채령이 가장 최근에 자신의 밑으로 스카우트한 경비대원.
그렇기에 민채령을 신경 쓰던 성유진은 당연히 안수호에게도 어느 정도 흥미가 있었다. 그러나 안수호는 그런 사정을 몰랐다. 다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성유진도 빌런이니까.’
성유진은 원작에서도 여일그룹의 이사이자 나주용과 밀접한 연관이 있던 인물. 당연히 저번 강하늘 사태 때 자기네들의 일을 방해한 자신에 대해서도 파악하고 있을 테지. 그렇게 생각한 안수호가 부담스럽다는 듯 성유진의 시선을 살짝 피했다.
“안수호 씨는 저희 길드의 탐사대보다 앞서 빌헬름과 마주쳐 홀로 전투를 벌이셨어요. 그 과정에서 안수호 씨는 놈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알아내셨죠. 회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안수호 씨가 알고 계신 빌헬름에 대한 정보를 공유해보도록 할게요.”
“흑룡회주. 잠깐 괜찮겠나?”
그때 중후한 목소리가 설아현의 말을 가로막았다.
“네, 오지훈 헌터. 무슨 일이시죠?”
“좀 전부터 조금 걸리는 게 있어서.”
손을 들며 발언권을 주장한 건 로열 나이츠 길드의 서브마스터 오지훈이었다. 얼굴에 진한 흉터가 가로새겨진 중년의 남자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조금 전 자네는 이번 회의를 소집한 이유가 빌헬름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라 했네. 그 정보의 출처는 저 안수호라는 남자고. 내 말이 맞나?”
“네. 맞아요.”
“그 부분이 조금 이해가 안 되어서 그러네. 내가 기억하기로 분명 저번 회의에서 저 남자를 공략에 참여시키자고 결정한 이유는 정보 따위가 아니라 그의 전투력 때문이었을 텐데?”
오지훈은 조금 전 설아현의 말로부터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녀의 말만 들어보면 꼭 안수호를 기용한 것이 전투원이 아닌 정보원으로 기용한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그야 저 남자도 나름대로 빌헬름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가 있기는 하겠지. 그렇지만 그거야 어차피 선발대가 알아낸 내용과 별반 다르진 않을 것 아닌가.”
던전 공략에 있어서 선발대는 원활한 공략을 위해 던전의 내부 정보, 특히 주인 괴수의 전투력이나 공격 패턴 등을 미리 알아내는 역할.
비록 흑룡회의 선발대가 빌헬름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곤 하나 그러한 선발대의 역할은 확실하게 완수했다. 제아무리 안수호가 선발대보다 먼저 빌헬름과 대면했다 한들, 안수호 개인이 선발대보다 더욱 많은 정보는 얻어냈으리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설아현은 이번 회의를 소집할 때 그 목적을 정보의 공유라 말했다.
“흑룡회주. 자네는 저 남자가 가지고 있는 정보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예. 맞아요.”
“보증할 수 있나?”
안수호가 쥐고 있는 정보에 그만한 가치가 있느냐. 오지훈의 물음은 그러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으나, 거기에는 또 다른 의미 또한 담겨 있었다.
“설령 그 남자가 공략의 실마리가 될 엄청난 정보를 쥐고 있다 한들, 그게 진실이란 걸 보증할 수 있느냔 말이야.”
선발대의 정보는 믿을 수 있다. 그들은 검증된 헌터들이었고 그들이 말하는 정보는 서로서로 교차검증이 가능했으니까.
그러나 안수호는 다르다. 안수호가 말한 정보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검증할 수단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강하늘의 진술? 검증되지도 않은 학생 한 명의 진술로 안수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오버랭크 던전 공략에 걸린 책임이 무거워도 너무 무거웠다.
오버랭크 던전은 S급 초인조차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인외마경.
잘못된 정보를 곧이곧대로 믿었을 때의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을 테니까.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군요. 아니, 그렇게 생각하시는 게 당연하죠.”
설아현이 인정했듯 오지훈의 의문은 비단 오지훈만의 것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다른 헌터들 역시 비슷한 의문을,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한여름도 어느 정도는 마찬가지였다. 한여름은 안수호의 강함에 대해선 의심을 품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일리아나를 통해 강하늘의 검열 전 진술서를 확보했고, 일리아나가 가진 거짓을 간파하는 아티펙트로 그 모든 내용이 진실임을 확인했으니까.
다만 진술서에 적힌 내용이 진실이라 한들, 그녀 또한 안수호가 선발대보다 빌헬름에 대해 많은 걸 알아냈으리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는 거야?’
본래대로라면 안수호는 오지훈의 말마따나 새로운 전투원의 일원으로서 소개되고 끝났어야 했다. 그야 그 과정에서 안수호가 가진 정보의 공유가 일어날 수야 있겠다만, 그것이 이렇게 회의의 주된 안건이 될 정도의 사안은 아닐 터였다.
헌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여름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으나,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둘이 따로 만났을 때 뭔가 일이 있었던 모양이네.’
오늘 회의가 열리기 앞서, 안수호는 한여름에게 회의 전에 설아현을 따로 만나게 해줄 수 없느냐고 그녀에게 요청했다.
어려운 요구는 아니었다. 비록 한여름이 학생인턴에 불과하다 한들 그녀는 한성그룹의 후계자 중 한 명. 그녀의 부탁이면 아무리 흑룡회의 길드마스터라도 회의 시작 전 잠깐 시간을 내주는 것 정도는 들어줄 테니까.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설아현은 흔쾌히 안수호와의 사전 만남을 수락했다. 두 사람은 회의에 앞서 설아현의 집무실에서 짧은 만남을 가졌다.
“그렇지만 안심하시길. 이제부터 안수호 씨가 말할 정보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그 만남에서 분명 무언가 일이 일어난 모양이라고. 한여름은 그렇게 생각했다.
“……제가 보증하도록 할 테니까요.”
그러지 않고서야 설아현이 안수호에게 저런 태도를 보일 리가 없을 테니까.
***
회의가 시작하기 약 30분 전. 설아현의 집무실.
소파에 앉은 채 안수호를 마주한 설아현의 눈에는 경악의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지금, 당신, 그, 도대체, 뭐라고……?”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단발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에게 선고하듯, 안수호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흑룡회주 설아현. 당신이 회귀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설아현. 남들의 시선에 보이는 그녀는 자수성가의 표본이자 오로지 성공가도만을 달린 전형적인 승리자였다.
그녀는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그리고 졸업 직후 자신의 길드를 세워 순식간에 S급 길드로 키워내었다. 어디 그뿐인가. 던전 공략을 통해 벌어들인 돈을 공격적으로 투자하여 수천%대의 수익을 올리는가 하면 본신의 무력 또한 최연소 S급 초인의 자리에 오를 정도로 뛰어났다. 인망 또한 두터워 그녀의 주위는 늘 사람으로 가득했고, 그녀에 대한 평판은 언제나 압도적으로 긍정적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스물여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이룩해낸 성공 신화였다.
이처럼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고 있으니 당연히 그 성공의 비결을 알아내고자 하는 이들도 잔뜩 있었다. 그 과정에서 세간은 그녀의 성공가도에 그녀의 초능력, ‘미래시’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예상했다. 실제로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으나, 진정한 비결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그녀가 미래를 내다보는 것으로도 모자라, 한 차례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온 회귀자라는 사실이었다.
“저, 안수호 씨?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이해가 안 되네요. 회귀자라뇨? 제 능력이 미래시이긴 하지만 그건 미래를 보는 거지 과거로 돌아오는 게 아니에요.”
설아현이 당황한 태도로 뒤늦게 변명하였으나 안수호는 그녀의 변명을 단 한 마디 말로 묵살했다.
“2019년 4월 15일.”
“……네?”
“당신의 첫 번째 인생에서 당신의 동료들이 전멸한 날이자, 당신이 회귀석이라는 아티펙트로 과거로 돌아온 날이기도 하죠. 안 그렇습니까?”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느냐. 차마 거기까지 말하지조차 못한 채 설아현이 당황한 얼굴로 말을 흐렸다.
‘어떻게 알기는. 원작을 읽어봤으니까.’
설아현은 원작에서 등장했던 히로인 중 한 명이자 중후반부 류태현을 도와주는 조력자 중 한 명이었다. 조금 전에 안수호가 말한 내용도 원작 후반부 그녀가 류태현에게 자신의 전생을 고백하며 해주었던 말이었다.
그렇기에 안수호는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원작에 등장하는 내용을 그는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회귀자라 한들 소설 속 등장인물에 불과한 그녀가 그러한 사정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뭐죠?”
그렇게 묻는 설아현의 얼굴은 불안해보이면서도 묘하게 반가운 표정이었다. 안수호는 그 이유를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날 자신과 같은 회귀자라 생각하겠지.’
이 세상에 남의 기억이나 생각을 읽어내는 능력자는 무척 적었다. 하물며 설아현은 안수호가 그런 능력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안수호를 자신과 같은 회귀자라고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안수호를 회귀자라고 생각하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는가.
‘불안할 테니까.’
그 이유는 바로 그녀가 회귀자였되, 더 이상은 회귀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회귀 시점은 2019년 4월 15일. 현재로부터 거의 1년 전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미래는 이미 1년 전에 끝났다. 그녀의 초능력 ‘미래시’는 수십 초 이내의 짧은 미래를 엿보는 능력으로 그보다 먼 미래를 보는 데에는 수많은 제약이 따른다. 그렇기에 그녀는 요즈음 들어 늘 불안에 떨곤 했다.
회귀자였기에, 늘 미래를 알고 행동해왔기에 더 이상 미래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은 그녀를 불안에 떨게 하기 충분했다.
그녀는 1회차의 인생에서 소중한 동료가 전부 죽고 홀로 살아남았다. 설마 이번 생에도 그런 일이 벌어지진 않을까. 또 다시 끔찍한 사건이 자신에게 닥치지 않을까. 그러한 우려들은 지난 1년간 줄곧 그녀의 뇌리를 떠나지 않은 채 그녀의 정신을 괴롭히고 좀먹었다.
그런 와중에 벌어진 오버랭크 던전 사태.
선발대에 참여했다가 줄곧 의식불명의 중태에 빠졌던 한용수는, 1회차에서 그녀가 가장 아끼던 동료 중 한 명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불안은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녀는 새로운 회귀자의 등장에 반가워했다. 아직 안수호가 회귀자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만약 그가 회귀자라면 자신의 이 불안을 해소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한 기대심리가 그대로 설아현의 얼굴에 드러났다. 안수호가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뜸을 들이자 안달이 난 그녀가 다시 한 번 물었다.
“당신의 정체가 뭐냐고 물었어요. 설마 당신도…….”
“굳이 말로 이야기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안수호는 일부러 애매하게 대답했다. 혹시라도 설아현이 거짓을 간파하는 아티펙트 따위를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그러나 그 의뭉스러운 태도가 설아현으로 하여금 오히려 더욱 확신을 가지게 해주었다. 당황과, 불안과, 안도와, 반가움과, 다양한 감정에 휩쓸린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며 입술을 연신 오물거렸다.
“아현 씨. 저는 당신의 불안을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결과를 알던 세상을 걷다 불확실한 미래로 나아가는 건 무척이나 어렵고, 두려운 일이죠. 그러나 당신이 절 도와준다면 그 불안을 해소해드리는 데에 도움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읽던 소설 속으로 빙의한 안수호는 빙의자였지만 소설 속 인물이 보기에는 회귀자와 별반 다를 것도 없었다. 최신화 전개까지 일어날 굵직한 사건들은 다 기억하고 있었으니, 설아현이나 그녀의 동료들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해주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할 테니.
“제 불안을…….”
자신이 품고 있는 이 불안을 해소해줄 수 있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설아현에게 그 달콤한 제안은 거의 악마의 속삭임이나 다름없었다. 안수호의 말에 설아현이 홀린 듯 그의 말을 되뇌었다.
한편 안수호는 그런 설아현을 보며 생각했다.
‘운이 좋았군.’
본래 그는 설아현과 만날 기회를 모색하고 있었다. 지금처럼 자신이 회귀자인양 행동하며 그녀의 불안감을 자극하면 손쉽게 조력자로 삼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문제는 일개 경비대원인 그가 S급 길드의 길드마스터와 독대할 기회를 좀처럼 잡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으나, 이는 한여름이 해결해주었다.
‘한여름이 검열된 진술서에 대해 알아냈을 땐 위기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전화위복이었군. 게다가 타이밍도 좋았어. 마침 흑룡회의 탐사대가 큰 피해를 입었던 터라 그녀의 불안감이 최고조를 찍고 있었을 테니까.’
오늘 있을 회의에 앞서 안수호는 설아현을 어떻게든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그래야만 오늘 회의에서 보다 손쉽게 다른 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 테니까.
‘자, 설아현. 어떻게 나올 거냐.’
안수호는 설아현이 자신의 제안에 응할 거라 생각했다. 확률로 따지면 최소 90% 이상.
원작에서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류태현에 대한 의존으로 해결했을 정도로 그녀의 정신 상태는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요구를 마다할 리가 없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당신을 도와달라고 했죠?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리고 마침내 설아현의 대답이 나온 순간, 안수호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에 살며시 미소지었다.
“오늘 회의에서 빌헬름에 관한 정보를 공개할 겁니다.”
“빌헬름에 대한 정보요? 잠깐, 설마?”
“예. 저는 미래에서 빌헬름이, 기사의 무덤이 어떻게 공략되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 말에 설아현의 얼굴에 눈에 띄게 화색이 돌았다. 오버랭크 던전 공략이 불안하기 그지없던 그녀로서는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건 그 정보를 공개하는 과정에서 아현 씨가 제 정보의 신뢰성을 보증해주었으면 한다는 점입니다. 아현 씨의 능력을 언급하면서요.”
“제 능력이라면 미래시 말인가요? 그렇지만 그건 그런 능력이 아니에요.”
“알고 있습니다. 아현 씨의 미래시는 1분 이내의 짧은 미래를 엿보는 능력이죠. 그렇지만 특정 대상과 신체를 접촉하는 것으로 그 대상과 관련된 먼 미래를 무작위로 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걸 어떻게 알았죠? 그건 세간에 공개하지 않은 내용인데…….”
“그렇지만 아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세간에 공개하지 않았다곤 하나 대형 길드의 간부진 정도 되면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적어도 오늘 회의에 참석할 이들이라면 알고 있으리라고. 안수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미래의 제가 당신에게 그 사실을 말한 건가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게다가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습니까.”
안수호가 말했다. 조금 뒤에 있을 회의에서 신체 접촉을 통해 자신의 먼 미래를 보았노라고. 그 미래는 기사의 무덤 공략에 성공하는 미래였다고 말해달라고.
설아현이 그렇게 말하면 그녀의 능력을 알고 있는 간부진들은 안수호의 의견을 경청할 것이다.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참고할만한 의견 정도로는 생각하겠지.
그리고 안수호에게 있어선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인상적인 첫인상일 테니까.
“제 말대로만 하면 이번 기사의 무덤 공략의 성공확률은 엄청 올라갈 겁니다. 당연히 아현 씨의 동료들이 무사할 확률도 올라가겠죠. 그렇지 않겠습니까?”
“맞아요. 그럴 거예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뭐죠?”
“불안해서요. 어쩌면 당신의 말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니까.”
“제가 왜 거짓말을 한다는 겁니까?”
“만약 당신이 제게 우호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저와 제 길드에 피해를 끼치기 위해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수도 있겠죠.”
안수호는 설아현의 신중함에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심하기도 했다. 설아현의 말을 들어보면 적어도 지금 그녀에게 거짓을 간파하는 아티펙트 따위는 없는 것 같았으니.
“저는 당신의 편입니다……라고 말해도 그렇게 생각해서야 납득할 수 없겠죠. 그럼 어떡할 겁니까?”
그렇게 말했으나 사실 안수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다음 순간 설아현이 안수호의 두 손을 살며시 잡았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저는 저와 관련된 일이라면 먼 미래라도 어느 정도는 엿볼 미래의 범위를 좁힐 수 있어요.”
“그래서?”
“지금부터 당신의 미래를 엿볼 거예요. 정확히는 당신과 저 사이의 관계의 미래를.”
미래에 자신과 안수호가 협력자일지 아니면 적일지를 보겠다는 말이었다. 엿볼 수 있는 미래의 장면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 설아현에게 안수호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그 정도밖에 없었다.
“만약 엿본 장면에 우리 둘이 총칼이라도 겨누고 있으면 어쩔 겁니까?”
설아현은 안수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만약 정말로 그런 장면이 보였다면 그녀는 주저 없이 안수호를 죽일 생각이었으니까.
당연한 반응이었다. 거의 불안장애 수준으로 걱정이 많은 그녀에게 있어서, 미래를 아는 회귀자가 적이 된다는 것만큼 끔찍한 일도 없을 테니.
“지금 능력을 발동할게요.”
그녀가 살며시 눈을 감음과 동시에 감은 눈꺼풀 사이에서 흐릿한 붉은 빛이 새어나왔다. 설아현이 미래를 볼 때에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안수호는 자신이 설아현을 적대하게 될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내심 불안했다. 미래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일이고, 지금 그가 협력하고자 하는 설아현과 이후 목숨을 노리게 될 가능성도 0은 아니었으니까.
“……에?”
그러나 설아현이 엿본 미래는 안수호의 예상과도, 설아현의 예상과도 전혀 달랐다.
‘흐으읏♡ 수호야. 이제 그만 괴롭히고 이거 풀어줘. 응? 이렇게 부탁할게에……♡’
‘부탁하는 태도가 글러먹었군. 아무래도 아직 반성을 덜 한 것 같은데?’
‘헤윽♡! 미, 미안해애. 아니, 죄송해여 선생니힘♡ 아혀니, 아현이 이러케 반성하고 이쓰니까하…….’
“……………………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설아현의 사고가 하얗게 물들었다. 그녀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S급 초인이었음에도 제대로 된 상황 판단이 되지 않았다. 그 정도로 그녀가 엿본 두 사람의 미래는 충격적이었다.
‘미……친…….’
차마 말로 옮기기조차 민망한 그 광경에 설아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미래의 장면은 그녀의 정신에 직접적으로 투사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다 한들, 눈을 감는다 한들 그 장면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미래를 엿본 시간은 고작해야 10초. 그러나 그 10초가 그녀에게 있어선 영겁의 시간으로 느껴졌다. 마침내 핑크빛으로 물든 미래의 풍경이 사라지고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오자, 살짝 당황한 듯한 안수호의 얼굴이 그녀를 맞이했다.
“아현 씨? 괜찮습니까?”
“흐엣?!”
설아현이 잡고 있던 손을 급하게 떼며 두 어깨를 감쌌다. 안수호의 얼굴을 보니 좀 전에 느꼈던 민망함이 더욱 강해져갔다. 숫제 귓볼까지 빨갛게 물든 그녀를 보며 안수호가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어땠습니까? 저희 두 사람의 미래는.”
“서, 설마 아, 아아아아알고 있었어요?”
“예?”
순간 당황한 안수호가 벙찐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러나 설아현에게 있어선 그 반응이 마치 다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지. 저 사람이 왔던 미래에서도 나랑 이 남자가 그렇고 그런……사이였다는 보장은 없어. 그렇지만 방금 본 미래는……. 그렇다는 건 즉 이, 이 세상에선 언젠가 이 남자하고 내가 그렇고 그런…….’
“아현 씨? 도대체 무슨 장면을 보셨길래 그러십니까?”
“그, 그게. 저희 두 사람이…….”
설아현은 차마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이 본 그 광경을 말로 옮기는 것조차 민망하여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상상조차 하기 부끄러웠다.
“……그, 나중에 아주 친한 관계가? 되는 것 같더라고요. 네…….”
그래서 그녀는 안수호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작게 말했고.
“친한 관계라. 그거 참 기대되네요.”
사정을 모르던 안수호는 그렇게 말함으로써 설아현의 뺨을 더욱 붉게 물들였다.
기사의 무덤 공략 회의가 열리기 30분 전의 일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