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087. 동시사건(2)
* * *
“반가워! 나는 허성찬이라고 해!”
허성찬. 의정부의 슬럼 지역에서 활동하는 청부업자이자 나주용의 사주를 받아 강하늘의 납치를 꾀했던 자.
그가 얼굴 가득 호쾌한 미소를 띤 채 지예원에게 악수를 청했다.
“근데 너 되게 예쁘게 생겼다!”
“…….”
그 의도를 알 수 없는 뜬금없는 칭찬, 내지는 추근거림에 지예원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헌팅인가?’
그렇게 생각한 지예원이 질색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별다른 거절의 말조차 없었다. 상대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으음. 쌀쌀맞은 성격인가 보네.”
졸지에 바람을 맞은 꼴이 되었으나 허성찬은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그에게 있어 여성에 대한 칭찬은 일상적으로 튀어나오는 인사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방금 전에도 지예원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의도가 있던 게 아니라, 그저 순수하게 자신이 품은 감상을 입으로 뱉은 것뿐이었다.
“친해지고 싶었는데 아쉬운걸.”
허성찬이 입맛을 다시며 저 멀리 멀어져 가는 지예원의 뒷모습을 쫓았다.
허성찬은 자기 취향의 여성을 보면 이처럼 막무가내로 들이대고는 했다. 외모나 체격이 준수했던 덕에 헌팅이 성공하는 날이 결코 적진 않으나,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았다.
“모르겠다! 쟤랑은 인연이 아닌가 보지!”
지예원에 대한 미련을 훌훌 털어버리며 그렇게 말했으나.
두 사람의 인연은 끝이 아니었다.
“어! 어제 걔!”
“엑.”
다음 날. 청소업체 직원용 유니폼을 입은 채 연구소로 첫 출근을 하던 지예원은 어제와 비슷하게 골목 어귀에서 연구소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던 허성찬과 마주쳤다.
“어! 그 옷 여기 직원들 옷 아니야? 너 여기 연구소 직원이었어? 그건 몰랐네!”
허성찬이 무어라 하든 지예원은 무시한 채 제 갈 길을 갔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앞을 허성찬이 가로막았다.
“저기 있잖아!”
“헌팅이면 거절할게요.”
“헌팅 아니야! 물론 헌팅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긴 한데, 그거보단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실실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허성찬을 보며 지예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이런 이상한 사람에게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출근해야 하니까 비키세요.”
“출근하기 전에 잠깐만 이야기하지 않을래?”
“제가 시간이 없어서요.”
“아직 출근 시간 30분 남지 않았어? 잠시 정도는 시간 내줄 수 있잖아.”
“제가 오늘 첫 출근이라 미리 나가서 배워야 할 게 많거든요.”
“첫 출근이었어? 그럼 안에 아는 사람은 별로 없겠”
허성찬의 말이 끝나기 전에 지예원이 그를 지나쳐 연구소 안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허성찬은 전혀 불쾌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일 끝나고 봐!”
불쾌해하기는커녕 한껏 손까지 흔들며 지예원을 배웅해주는 모습이 꼭 친한 친구 사이 같았다. 물론 허성찬과 지예원은 어제까지만 해도 일면식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지?’
단순히 헌팅이라기엔 집요했다. 계속 연구소 앞에서 마주치는 이유도 궁금했다. 그러나 지금 지예원에겐 임무가 아닌 일에 할애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지예원은 그날 하루 첫 출근한 청소업체 직원으로서 업무 내용이나 연구소 내부 구조 등에 대해 배우는 한편, 나주용과 그 측근들의 동선이나 감시 장비의 반입 방법 등을 고민하며 일과를 보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퇴근 시간.
그 사이 친해진 업체의 다른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며 지예원이 연구소 바깥으로 나온 순간이었다.
“오! 일 끝났구나!”
“미친…….”
연구소를 나서자 허성찬이 길목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에 그녀를 배웅한 바로 그 자리에서.
이쯤 되면 단순 헌팅이 아니라 스토킹 수준이었다. 지예원이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보이며 그에게 따지고 들었다.
“저기요. 이게 지금 뭐하자는 짓이죠?”
“아침에 일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고 말했잖아. 그래서 기다렸지!”
“그쪽이 왜 절 기다리는데요? 뭐 헌팅이라도 하는 건가요?”
“아니! 그런 마음도 조금 있긴 한데, 더 큰 건 너랑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야!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거든!”
“부탁……?”
그 말에 지예원이 불현듯 어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부탁이니 뭐니 하며 말을 했었지, 하고.
“부탁이야! 너 말고도 다른 사람들한테도 말 걸어봤는데 다 무시하더라고! 진짜 곤란한 일이 있어서 그래! 꼭 부탁을 들어주진 않아도 되니까, 잠깐 이야기만 좀 들어줄 수 없을까?”
지나가는 사람들 다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사정하는 허성찬.
그의 부탁에 지예원은 대답보다 앞서 주위를 살피기에 바빴다. 퇴근 시간인지라 연구소 앞 길목은 인파로 붐볐으며, 그들 대부분이 심상치 않은 소란을 벌이고 있는 허성찬과 지예원에게 한번씩 시선을 주며 지나갔다.
‘첫날부터 너무 눈에 띄는 건 좋지 않은데.’
잠입의 철칙은 눈에 띄지 않는 것. 이대로 가다간 이 정체모를 남자 때문에 임무를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해버릴지도 모른다며.
“……그렇게까지 사정하니 이야기 정도는 들어줄게요.”
차라리 이야기를 들은 뒤 확실하게 거절해서 끊어내는 편이 나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지예원이 마지못해 그의 부탁에 응했다.
“고마워! 근처에 좋은 카페가 있으니까 거기로 가자!”
허성찬이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며 호쾌하게 말했다. 그 모습은 뭇 여성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할 정도로 매력적이었으나, 지예원이 보기엔 그저 귀찮고 짜증이 날 뿐이었다.
“시간 없으니까 얼른 끝내죠.”
***
연구소 인근에 위치한 어느 카페.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지 않는 구석 자리. 지예원과 허성찬은 각자 음료를 테이블에 올려둔 채 이야기 중이었다. 대충 허성찬이 열띤 태도로 말하면 지예원이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건성건성 고개를 끄덕이는 모양새였다.
허성찬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예원이 생각했다.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어.’
허성찬은 지예원에게 무언가 부탁하기에 앞서 자신의 사정에 대해 설명했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있었고 왜 연구소 안에 들어가야만 하며 무슨 이유로 지예원을 불러세웠는지.
이에 대한 설명이 그의 입에서 길게 이어졌으나 참으로 장황하고 두서가 없었다. 심지어 허성찬의 이야기에는 사정의 이해에 필수적인 여러 요소들이 결여되어 있었다.
하여 지예원은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 허성찬의 말에서 대략의 흐름을 유추해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우선 허성찬은 초인재활연구소 소속 연구원으로부터 무언가 의뢰를 받았다. 그리고 실패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실패에 대한 사죄를 위해 연구소를 찾아왔다.
그의 업무 파트너는 계약금을 반환했으니 원칙상으론 문제될 게 없다고 했으나 허성찬의 생각은 달랐다. 그가 몸담은 업계는 신용과 평판이 생명으로, 따라서 확실하게 클라이언트에게 사과하고 가능하면 그 전의 실패를 만회할 기회를 받고 싶었다.
그것이 지예원이 파악한 허성찬의 사정이었다. 허성찬이 무슨 일을 하는지, 의뢰가 무엇인지 따위의 중요한 정보는 전혀 듣지 못했으나, 지예원이 맥락만으로 유추한 그 사정은 얼추 진실과 들어맞았다.
……다만 지예원은 눈앞의 남자가 강하늘의 납치를 꾀했던 청부업자라는 건 꿈에도 몰랐다.
“아무튼, 그래서 네 도움을 받고 싶어!”
장황한 설명이 끝난 허성찬이 두 주먹을 꽉 쥐며 외쳤다. 지예원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눈앞의 남자가 당최 뭐 하는 사람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녀가 생각하길, 일단 연구소로부터 의뢰를 받았으니 연구와 관련된 업무 관계자이긴 할 것이다. 허나 그렇다기엔 보안 ID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게 이상했다. 그 이전에 관계자라면 사죄든 뭐든 정식 절차를 밟아서 하면 그만이지 구태여 오늘 첫 출근을 한 자신에게 사정사정하며 부탁할 필요가 없을 터.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못한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건데…….’
수상했다. 그리고 지예원은 수상한 일에 연루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현재 민채령의 명령에 따라 이곳에 잠입한 상태.
그리고 앞서 말했듯 잠입의 철칙은 눈에 띄지 않는 것이었다. 때문에 쓸데없는 일에 연루되어 임무에 지장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별다른 메리트를 제시한 것도 아닌데 그녀가 허성찬을 도울 이유도 없긴 했다.
“……아무래도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네요.”
“아니야! 충분히 도울 수 있어! 안에 있는 내 클라이언트한테 내 의사만 전달해주면”
“그러니까 그게 불가능하다고요. 전 청소 업체 직원일 뿐이고 하물며 오늘 첫 출근이거든요. 댁이 말하는 클라이언트가 누군지도 모르고 설령 안다 해도 만날 일조차 거의 없어요.”
“끄응. 그런가. 하긴, 그것도 그렇겠네…….”
지예원의 거절을 납득했는지 허성찬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표정을 푼 그가 다시 웃음을 띠었다.
“그래도 너랑은 친해지고 싶어! 난 예쁘게 생긴 여자들을 정말 좋아하거든!”
“하아……”
일과 관련된 일로는 도움을 받지 못한다니, 기왕 이렇게 된 거 헌팅이라도 하자. 참으로 단순명료한 사고과정이었다.
“낮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그쪽하고 친해질 생각이 전혀”
“성찬. 여기 있었습니까.”
그때 지예원의 등 뒤에서 이지적인 느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예원은 이번에도 자신이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에 놀라며 고개를 홱 돌렸다.
“진수!”
목소리의 주인은 허성찬의 파트너이자 같은 청부업자인 유진수였다.
“도대체가 당신은 제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군요. 근처에 어슬렁거리지 말고 얌전히 집에 박혀있으라 하지 않았습니까?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갑작스런 등장에 지예원이 당황한 눈으로 유진수를 보았다. 유진수는 자신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 파트너의 행동이 답답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수! 그 연구원한테 다시 말해서 만회할 기회를 받아내자! 이번엔 절대 방심하지 않을게!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성공할 테니까! 응?”
“이미 끝난 일입니다. 실패는 실패예요. 그리고 제가 말했잖습니까. 저쪽에서 다시 의뢰하지 않는 이상 저희가 먼저 나서선 안 된다고.”
“그렇지만…….”
“그렇지만이고 자시고 이제는 좀 제발 제 말을 들어줬으면 하는군요. 그런데…….”
유진수의 시선이 지예원에게로 향했다. 날카롭게 벼려진 그 눈빛에 지예원이 본능적으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분은 누구시죠?”
“거기 연구소 직원! 이름은 아직 몰라! 의뢰 관련해서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불러냈어!”
“설마 부외자에게 의뢰 내용에 대해 말한 건 아니겠죠?”
“설마!”
허성찬은 바보가 아니었다.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지 들어주지 않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기네 사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밝히는 멍청한 짓을 하진 않았다. 그가 지예원에게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의뢰 내용이나 당사자를 특정할 수 없는 맥락뿐이었다.
“……제 파트너가 아무래도 결례를 범한 것 같군요.”
“결례랄 것까지야.”
“귀찮게 시간을 빼앗게 된 점, 성찬을 대신해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오늘 일은 마음 편히 잊어주시길.”
지예원에게 정중하게 사과한 유진수가 허성찬에게 나가자고 말했다. 어쩐지 급하게 자리를 뜨려는 듯한 모습.
“저기.”
그 수상한 모습이 지예원이 가지고 있는 스파이로서의 촉을 자극했다.
불필요하게 수상한 일에 연루되는 건 사양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른 채 수상한 일에 휘말리는 건 더더욱 사양이었다.
“혹시 두 분은 연구소에서 어떤 업무를 맡으셨나요?”
“……이것저것 했죠. 그냥 잡역부 비슷한 거였습니다.”
지예원의 질문에 유진수가 살며시 미소 짓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내 그는 맞은편에 있던 허성찬을 데리고 카페를 나섰다.
카페를 나서기 직전, 유진수에게 반쯤 끌려가듯 나가던 허성찬이 지예원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지예원의 신경은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잡역부라.”
어쩐지 묘하게 입에 걸리는 그 단어를 지예원이 몇 번이고 곱씹으며 생각했다.
이런 연구소에서 잡역부라 칭할만한 자가 할 일이 뭐가 있을까.
자신은 이번 임무에 앞서 민채령에게 임무에 필요한 이런저런 정보를 받았으나, 아무래도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는 것 같다고.
"……."
그리고 그런 그녀를 반대편 테이블에 앉은 한 소녀가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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