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084. 잠시 이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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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3화 후반부가 조금 수정되었습니다. 한여름의 제의를 받는 과정에서 안수호의 내면 묘사를 조금 더 설득력 있게 바꾸었습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해당 부분(안수호가 한여름의 공략 참가 제의를 받는 부분부터)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길 권장해드립니다.
“한여름이 너한테 접근했다고?”
다음날. 나는 출근하자마자 곧바로 민채령에게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한여름이 내게 던전 공략 참가 제의를 하고 이를 수락하기까지의 과정을.
“……그 아가씨가 도대체 어디서 냄새를 맡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꽤 귀찮게 됐네.”
“그 상황에선 제의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거절했다간 저에 대한 정보가 여기저기 퍼졌을 테니까요.”
내가 변명하듯 말하자 민채령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알아. 거절했으면 당장 아침부터 정문이 기자 놈들로 문전성시를 이뤘겠지. 혜성처럼 등장한 S급 후보니 뭐니 하면서 말이지. 잘 선택했어.”
당초 강하늘의 진술서를 독단으로 검열했던 행동에서 알 수 있듯, 민채령은 내가 매스컴의 주목을 받는 것을 원치 않는 듯 했다. 아마 자신의 장기말이 남들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다 생각했겠지. 지극히 민채령다운 사고방식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민채령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이쪽을 흘겼다.
“제의를 수락한 이유가 그게 전부는 아니잖아? 안 그래?”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이야기하는 그 모습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실직고했다.
“……뭐, 기왕 이렇게 된 거 이번 기회에 저도 인맥이나 만들어보자 싶었죠.”
“그럴 줄 알았어. 하여간 음흉하기는.”
“팀장님한테서 그런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 말이라도 못하면 귀엽기라도 하지.”
말은 그렇게 했으나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이 그다지 불쾌해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괜찮겠어? 공략에 참가하는 거 말이야.”
“아마 괜찮을 겁니다.”
민채령이 우려하는 바는 대충 짐작이 갔다.
던전 공략은 대중에게 공개된 활동이다. 모든 던전 공략은 국가기관인 협회의 관리 하에 이루어지며, 그 과정에 관한 정보는 정보 공개 원칙에 따라 전 국민에게 알려진다. 민채령이 우려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나에 대한 정보가 바깥에 새는 것이리라.
“한여름 학생에게 눈에 띄기 싫다고 했더니 그 부분은 배려를 해준다고 하더군요. 현장에서는 얼굴을 가리고 신분도 철저히 숨긴 채 활동할 수 있도록 해준다 했습니다. 제 신원을 아는 자는 어디까지나 당시 회의에 참여했던 일부 간부진뿐일 겁니다.”
“내가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닌데.”
민채령이 책상 위에 놓여있던 버블티를 후루룩 빨아마셨다. 저번에 초콜릿도 그렇고 그녀는 아무래도 단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뭐가 걱정되신다는 겁니까?”
“너.”
“예?”
“오버랭크 던전 공략이잖아. 근데 네 실력으로 감당할 수 있겠어?”
“아.”
내 예상과 달리 민채령이 우려한 부분은 보다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부분이었다.
오버랭크. 말 그대로 규격 외의 등급을 자랑하는 인외마경이나 다름없을 던전.
그 던전의 공략에 감히 네 수준으로 참가해서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고. 민채령이 걱정하는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사실 나는 강하늘의 진술서에 적힌 내용이 다 사실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민채령이 서랍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냈다. 강하늘이 지난 이중던전 사태에 대해 작성한 진술서. 그 검열되기 전의 원본이었다.
“진술서 내용을 요약하자면 ‘오버랭크 던전의 보스를 상대로 네가 수비전을 벌이다 빈틈을 노리고 도주했다.’인데…….”
“팀장님은 그 내용이 거짓일 거라 생각하신다는 겁니까?”
“전부 거짓말은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과장이 섞여있을 거라곤 생각하고 있어.”
그 말에 내 입가에 자연스레 쓴웃음이 떠올랐다.
‘과장은커녕 오히려 축소한 건데.’
내 입으로 말하기 뭐하지만, 당시 나는 강하늘의 능력 덕에 일시적으로나마 빌헬름과 대등한 전투를 벌였다. 진술서에 적힌 내용은 강하늘이 자신의 능력이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아 내 활약상을 의도적으로 축소시킨 결과물이었다.
헌데 그마저도 민채령이 보기에는 충분히 화제가 될 거라 생각했는지 그녀는 자의적으로 강하늘의 진술을 검열했다. 그 결과 정식으로 올라간 진술서에 적힌 내용은 내가 빌헬름과 마주치자마자 강하늘을 데리고 도망쳤다는, 실제 벌어진 일과는 상당히 다른 내용이 되었다.
“그야 그렇잖아. 얼마 전까지 E급 초인이던 네가 대뜸 A급 이상, 어쩌면 S급에 준하는 수준으로 강해졌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점은 격하게 공감한다.
그러나 이 세상은 판타지 소설 속 세상. 그리고 판타지 소설이란 본래 말도 안 되는 일이 밥 먹듯이 일어나는 이야기였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강하늘이 작성한 원본 진술서는 과장 하나 없는 진실입니다. 팀장님도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내심 짐작하고 계실 텐데요.”
“…….”
“갑작스럽게 강해졌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곤 하셨지만, 팀장님께선 이미 그 눈으로 직접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2월 말에 있었던 특수대책과 전과 시험. 민채령은 그때 이미 내가 고작 사흘만에 E급 초인에서 특책과에 어울릴 수준까지 강해진 것을 목격했다. 헌데 그로부터 벌써 한 달도 넘게 지났으니, E급에서 C급 수준으로 강해졌던 내가 A급 이상으로 더욱 강해졌다 한들 이상할 건 없지 않은가.
‘실제로는 그 뒤로 신체 스펙은 거의 성장하지 않았지만…….’
여인혁의 근골정렬 이후 상승한 능력치는 의지와 행운이 전부였다. 그러나 민채령이 이를 어떻게 알겠는가.
그녀 입장에서 안수호라는 초인은 E급이었던 주제에 갑작스레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기 시작한 불가사의한 존재일 터. 그렇기에 그녀가 강하늘의 진술을 허무맹랑한 헛소리로 치부하지 않은 채 날 더욱 경계하게 된 것 아니겠는가.
“……정말 자신감 하나는 철철 넘치는 구나. 이게 두 달 전 면접 때 그 객기만 있던 E급 초인이 맞나 싶어.”
내 당당한 말에 민채령이 피식 웃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 네 말은 즉 네 지금 수준이 던전 공략에 참여할 정도는 된다는 뜻이니?”
“그렇습니다. 한여름의 말처럼 S급 수준까진 아니어도, 적어도 남들 발목 잡지 않고 있다가 한 방 먹이는 정도는”
파앙!
그 순간, 내 말을 가로막듯 민채령이 책상을 박차고 내게 달려들었다.
“잠까”
갑작스런 공격에 나는 곧바로 샛별의 숨소리를 발동했다. 이런 기습 상황을 대비해서 언제든 아티펙트를 발동할 수 있도록 연습한 결과였다.
쉬익!
급하게 고개를 꺾자 민채령의 손날이 조금 전까지 내 머리가 있던 곳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뒤 나는 곧바로 물러서려 했으나, 민채령에게 더 이상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파악한 나는 내 뺨을 스친 손날을 붙잡은 채 그녀에게 물었다.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기량 파악. 확실히 예전보다 쓸만해지긴 했네.”
내 손을 뿌리친 민채령이 내 몸을 위아래로 쭈욱 훑었다.
“속도야 아티펙트의 힘이겠지만 예전보다 움직임이 훨씬 좋아졌어. 갑작스런 공격에도 당황하지 않고, 두 눈으로 끝까지 내 공격을 쫓았지. 막 전과했을 때엔 완전 초보자의 움직임이었는데, 그새 뭔 일이 있었담?”
마치 자식의 성장이 기꺼운 부모마냥 흐뭇한 미소를 짓는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설설 저으며 대답했다.
“뭔 일이야 많았죠.”
“하긴. 이런저런 일이 많긴 많았지.”
서큐버스 사건. 강하늘 납치 미수. 이중던전 사태. 그리고 한겨울과의 대련까지.
지난 두 달 동안 있었던 굵직굵직한 사건들과 매일같이 하루도 빼먹지 않은 단련은 고스란히 나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뭐, 그래도 오버랭크 던전 공략에 참가할 수준은 아닌 것 같지만……. 그렇게 자신하는 걸 보니 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 내가 도와줄 일은 없어? 뭐 필요한 거라든가.”
“아직은 없습니다. 만약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 말씀드리죠.”
“그래. 부담 가지지 말고 바로바로 말해.”
얼추 보고를 끝낸 나는 그대로 팀장실을 나섰다. 나서기 직전 지예원의 임무에 관해 말해볼까 싶었으나 관뒀다. 이제 와서 임무를 취소해달라 한들 지예원은 오늘 아침에 떠난 뒤였으니까.
“안수호. 잠깐 이쪽으로 와보겠나.”
“예. 태호 선배.”
팀장실에서 나온 나를 이태호가 불렀다. 그의 자리로 가자 그가 근무표를 보여주며 내게 물었다.
“내일부터 총장님께서 일주일간 해외 출장인 건 알고 있나?”
“예. 미국에서 열리는 무슨 컨퍼런스에 참석하신다고. 인트라넷에 전달사항 내려온 거 어제 확인했습니다.”
“그래. 그럼 네 파트너인 채소연이 총장님의 경호로 일주일 동안 차출되었다는 건 알고 있었나?”
“……금시초문인데요?”
“그럴 줄 알았다.”
그 핀잔은 내게 향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태호가 반대편 멀리서 복사기와 씨름하고 있는 채소연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업무와 관련된 일은 뭐든 간에 파트너에게 가장 먼저 알리라고 그렇게 가르쳤건만. 저 녀석도 여전하군.”
“그, 아예 자기가 차출되는 것도 모르고 있을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일은 없다. 각종 전달사항 확인은 내가 채소연과 파트너였던 시절에 확실하게 가르쳐두었으니까.”
“아하.”
그러고 보니 어째 출근할 때마다 근무표나 전달사항은 매번 빼먹지 않고 잘 확인한다 했다. 그게 다 이태호의 가르침 덕분이었던 건가. 그렇다면 예전의 채소연은 그조차 못했다는 건가.
내가 측은하게 이태호를 바라보자 그가 훗, 하고 짧게 웃었다.
“이제는 다 옛날 일이다. 물론 네게는 현재의 일이겠다만.”
“……그렇게 놀리면 재밌으십니까?”
“재미는 모르겠다만 요즘 들어 내 삶이 편안하고 윤택해졌음을 느끼긴 한다.”
내게 채소연을 짬때린 채소연의 전 파트너가 싱긋 웃었다. 첫인상은 로봇처럼 차가운 선배라는 이미지였는데 알고 지내다 보니 이태호도 은근 장난기가 있었다. 어쩌면 채소연에게 시달리느라 죽어있던 인간성이 천천히 되살아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하여튼. 채소연이 차출되기 때문에 네 근무 또한 이래저래 변경이 있을 것 같다. 아마 비슷하게 파트너가 차출당한 다른 팀 인원하고 임시로 투맨셀을 이루게 될 거다.”
“걱정이군요. 아직 다른 팀 사람들은 좀 껄끄러워서.”
“그건 다른 팀 대원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얼추 두 달 가까이 지났지만 다른 팀 입장에서 보면 넌 여전히 굴러온 돌이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이번 기회에 다른 팀하고도 좀 친해져보도록. 근무표를 보면 아마 너와 임시조를 짜게 될 사람은 이중에서…….”
우우우우웅!
그때, 주머니에 넣어둔 스마트폰이 낮게 진동했다.
“전화인가?”
“아뇨. 문자인 것 같습니다. 잠시 확인 좀……어?”
다음 순간, 액정에 표시된 이름을 보고 나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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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예원
▷혹시 지금 시간 돼?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얼굴 좀 보고 싶은데
▷지금 아카데미 정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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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지?”
“그게…….”
이태호의 물음에 나는 난처하다는 듯 그를 보며 양해를 구했다.
“혹시 잠시 바깥에 좀 나갔다 와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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