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82화 (83/266)

〈 82화 〉 081. 떠나는 자의 부탁

* * *

나주용이 소장으로 있는 연구소는 여일그룹 산하 초인재활연구소.

그곳은 비록 이면에서 다중능력이라는 불법적인 연구를 자행하고 있는 곳이라고 하나, 겉으로 보기엔 지극히 평범한 연구소였다. 연구 분야 또한 신체능력이나 초능력에 장애가 생긴 초인의 치료 방법과 그 재활을 돕는다는, 지극히 평범하고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지예원은 민채령의 임무, 나주용 소장에 대한 감시를 위해 그 ‘양지’ 부분에 잠입하기로 했다.

“연구소가 고용한 청소 용역 업체가 있는데, 거기 사원 신분으로 연구소에 잠입하기로 했어. 연구소와 그 주변 부대시설에 고용된 업체 직원은 총 43명. 그 정도면 나 한 명 추가된다 해도 별로 눈에 띄지도 않을 것 같더라고.”

초인재활연구소에는 총 3개의 보안등급으로 구분된 섹터가 있고 청소 업체 직원은 이중 가장 보안 등급이 낮은 1번 섹터에만 출입이 가능했다. 그러나 합법적인 루트로 연구소에 출입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예원에겐 충분했다.

“하여튼, 구체적인 임무 내용 말인데.”

임무의 골자는 이러했다.

먼저 청소 업체 직원으로 잠입한 지예원이 연구소 내부 1번 섹터에 각종 감시, 도청 장치를 부착한다. 이를 통해 나주용 소장과 그 측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기회를 봐서 2번, 3번 섹터에도 동일하게 감시 장비를 부착해 내부 상황을 살핀다. 이 과정에서 가능하다면 다중능력 연구가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 자료를 수집한다.

그러한 지예원의 설명을 들은 안수호는 어금니를 까드득 물었다.

“……너무 위험한 거 아니야?”

보안 구역으로의 잠입과 감시 장비의 설치. 만에 하나 들키기라도 했다간 법적 처벌을 면치 못하리라. 그 과정에서 그녀의 진짜 신분이 들통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아니, 차라리 법적 처벌이 낫지. 만약 나주용 쪽에서 지예원에 대해 불법적인 방법을 쓴다면?’

겉으론 명망 높은 학자지만 나주용의 본질은 빌런. 고로 얼마든지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할 가능성이 있었다.

가령, 지예원의 배후를 캐기 위해 그녀를 붙잡은 뒤 모진 고문을 행한다거나.

안수호는 이 자리에 없는 민채령을 원망했다. 분명 자신에게는 최대한 지예원이 위험해지지 않도록 고려해준다 했건만 그 결과가 이것인가. 스멀스멀 끓어오르는 분노에 안수호의 미간에 진한 주름이 잡혔다.

그런 안수호를 보던 지예원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셔. 이래 뵈도 난 실력 좋은 스파이거든. 아카데미에서도 4년 동안 학생 신분으로 있으면서 그 누구도 내가 여명단인 걸 눈치 채지 못했잖아. 안 그래?”

“그렇지만…….”

“뭐 정 수틀리면 도망치면 되지. 여명단 상대로도 도망쳤는데 그깟 연구소 직원들 하나 못 따돌릴까. 게다가 나한테는, 네가 준 ‘이거’도 있잖아.”

지예원이 옆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겼다. 그러자 안수호가 그녀에게 준 냉염의 십자가가 드러났다. 붉은 보석이 박힌 투명한 십자가가 전등 빛을 받아 반짝이며 흔들렸다.

냉염의 십자가는 원작 후반부에서도 활약한 강력한 아티펙트. 지예원의 목숨을 위협하는 위기가 오면 분명 빛을 발하리라.

그러나 안수호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이렇게 된 거 민채령과 다시 한 번 담판을 지어 지예원에게 내린 임무를 취소시킬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흐뭇한 웃음을 지은 지예원이 안수호의 목덜미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포옥.

그녀가 안수호의 머리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 마치 기특한 자식을 칭찬하는 어미처럼, 천천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오구오구. 우리 수호 누나 다칠까봐 걱정돼요?”

“……누나는 무슨. 내가 너보다 한 살 많거든?”

“걱정해주는 게 기특해서 그런다, 기특해서.”

“참나……”

안수호가 볼멘소리를 뱉었으나 그는 지예원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씻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지 기분 좋은 샴푸 향이 그의 코끝을 간질였다.

“……이번 일은 네 생각보다 위험한 일이야.”

그렇게 지예원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안수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 실력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상대는 한성 그룹 다음가는 재벌가로 유명한 여일 그룹이야. 게다가 불법 연구를 하는 연구소인 이상 보안 수준은 그린하우스보다 훨씬 삼엄할 거야. 아무리 너라도 그런 곳에서 스파이짓을 하는 건 위험­”

“글쎄, 괜찮다니까 그러네?”

“도대체 아까부터 뭐가 괜찮다는 거야?”

답답한 마음에 안수호가 고개를 들어 지예원을 바라봤다. 자신을 걱정해주는 그 올곧은 눈에 지예원의 눈에 잠시 미안한 기색이 스친다.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어쩔 수 없는걸.’

며칠 전 안수호가 민채령과 지예원의 문제에 대해 담판을 지었다고는 하나, 본질적으로 민채령과 지예원의 관계는 철저한 갑과 을의 관계였다.

여러 요인이 있지만 다른 건 다 떠나서 지예원은 그녀의 둘도 없는 친구인 김민아를 찾기 위해 민채령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민채령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여 민채령은 지예원에게 하나의 사실을 말해주었다.

자신이 김민아의 소재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는 사실을.

그 말을 들은 순간 지예원에게 민채령의 명령을 거부한다는 선택지는 사라졌다. 그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자신의 삶을 바꿔준 절친을 위해 그녀는 불구덩이 속에라도 뛰어들 각오가 있었다.

하여 지예원은, 자신을 걱정해주는 안수호에게 미안한 감정을 품으면서도 임무를 포기하겠노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안수호 또한 일의 모든 전후 관계를 알지는 못했으나,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분위기로 어렴풋이 그러한 맥락을 짐작했다.

“……지예원.”

“응.”

“다치지 마. 조금이라도 위험하면 도망쳐. 그 어느 때라도 네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알겠지?”

“그래. 그렇게 할게.”

그래서 안수호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감수하면서도, 그저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따듯한 봄날의 오후. 반쯤 열린 창문 틈으로 싱그러운 봄바람이 들어와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연구소가 용인에 있어서 근처에 임시로 방을 구했어. 아마 당분간 거기서 살 것 같아.”

“떠나는 건 언젠데?”

“내일모레.”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는 그만두겠네.”

“응. 얼마 일하지도 못했는데 그만두기 미안하더라. 일도 나름 재미있고 점장님이나 다른 선배들도 나한테 참 잘해줬는데.”

“그만둔다니까 좀 아쉽네. 이럴 줄 알았으면 자주 찾아가볼걸.”

“왜.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찾아와서 괴롭히려고?”

“어. 그럴 때 아니면 내가 언제 너한테 존댓말 들어보겠냐.”

“칫. 그럴 줄 알았어.”

그렇게 말한 두 사람이 동시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까지의 심각한 분위기가 거짓말이라는 듯 가벼워진 분위기. 안수호는 지예원에게서 느낄 수 있는 이 편안함이 좋았다.

그래. 지예원은 안수호에게 있어 아무런 계산도 없이 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였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강하늘 또한 그랬으나. 오늘 일로 그의 안에는 강하늘에 대한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으니.

“안수호.”

그때, 지예원이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안수호를 불렀다.

“이번에 내가 용인으로 넘어가면 한 몇 주는 거기서 안 돌아올 거거든? 그러니까 그동안 너한테 숙제를 하나 줄게.”

“숙제?”

“응. 숙제.”

“갑자기 웬 숙제야. 뭔데 그래?”

“강하늘.”

그 이름에 안수호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강하늘과 관련된 문제를 전부 해결해놔. 우유부단하게 우물쭈물거리지 말고. 걔가 숨기는 게 있다면 밝혀내고 오해가 있다면 풀어.”

“알겠어. 그렇게 할게.”

“그리고. 마음을 확실히 정해줘.”

“뭐?”

지예원이 크게 숨을 골랐다. 그녀가 숨을 들이쉬고 내쉼에 따라 그녀의 어깨가 봉긋 올라갔다 다시 내려간다.

“난 널 좋아해. 그리고 강하늘도 널 좋아하고.”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붙잡으며 그녀가 덤덤히 말했다.

“그러니 제대로 마음을 정해달란 거야. 날 택하든, 걜 택하든, 아니면 양다리를 걸치든. 양다리를 걸칠 거면 몰래하지는 말고 그냥 대놓고 해. 그게 차라리 마음이 편하니까.”

참으로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지예원의 임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치정 이야기가 왜 나오는가. 안수호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예원에게는 자신의 임무만큼이나 세 사람의 관계 또한 중요한 일이었다.

자신이 안수호의 곁을 떠난 동안 그와 강하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녀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지예원은 오히려 먼저 나서서 세 사람의 관계를 제대로 정리하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는 편이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본래 그녀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안수호의 선택을 기다리고자 했다. 실제로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눴던 날, 지예원은 안수호에게 충분히 고민한 뒤에 대답해주어도 된다 말하기도 했다.

허나 막상 긴 시간 그의 곁을 떠나게 되자 그녀의 가슴에 사무치는 감정이 있었다.

그것은 초조함이요.

불안함이요.

그리고, 이기심이었다.

사실 지예원은 안수호가 이번 기회에 강하늘을 버리고 자신을 택해주길 원했다. 안수호가 강하늘을 의심한다는 걸 알았을 때. 그 문제에 관해 자신에게 상담을 요구해왔을 때. 그 순간 지예원의 뇌리에 아주 잠깐 나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번 일을 기회로 삼아 안수호와 강하늘의 사이를 이간질한다면.

안수호가 강하늘을 믿지 못하게 만든다면.

그렇게 두 사람이 어색한 사이가 되어 서로 멀어지게 된다면.

그러면 안수호는 자신만을 바라봐주지 않을까, 하고.

그러나 지예원은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그 이기적인 마음을 털어냈다. 그리고 곧 그 자리를 죄책감이 대신했다.

치정 관계에서 상대에게 죄책감을 가진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지예원이 강하늘에게 약간이나마 죄책감을 가지게 된 건, 전적으로 ‘그날’의 일 때문이었다.

‘그날’. 안수호와 강하늘, 지예원, 그리고 채소연. 이렇게 네 사람이 술자리를 가졌던 날. 지예원은 강하늘이 품고 있는 안수호에 대한 연정을 확실하게 알아차렸다.

알아차렸기에, 초조한 마음에 술기운을 빌미로 강하늘을 따돌린 채 안수호와 사랑을 나눴다.

이기적인 짓이었지만 본래 사랑이란 이기적인 것이었다. 그 일을 가지고 행여 강하늘에게 사과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아주 약간의 미안함이 드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하여, 지예원은 안수호가 명확하게 선택을 내려줬으면 했다.

그가 자신을 택하든, 강하늘을 택하든, 혹은 둘 다 택하거나 둘 다 택하지 않든.

어떠한 형태로든 안수호 본인이 선택을 내린다면 그 결과에 납득할 수 있을 거라고 지예원은 생각했다.

……납득할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 간절하게 믿었다.

“……그래. 알겠어.”

지예원의 청을 들은 안수호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이내 그렇게 대답했다.

강하늘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과 별개로 그녀의 마음에 제대로 대답해주는 것 또한 안수호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지예원은 그저 그 사실을 상기시켜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번에 강하늘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면서, 그녀가 내게 품고 있는 마음에 대해서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도록 하자.

그렇게 생각한 안수호에게 지예원이 슬픈듯 기쁜듯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잘 생각했어.”

***

은은한 조명이 감도는 사무실.

‘상무이사 한여름’이라는 명패가 올려진 고급스런 책상 앞, 권태로운 표정을 지은 한여름이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흰색 태블릿 화면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 화면에는 어제 ‘기사의 무덤’ 던전에 대해 회의한 내용이 떠올라 있었다.

한여름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중에서도 탐사대의 리더였던 S급 초인이 진술한 던전의 주인 괴수에 관한 내용이었다.

탐사대가 탈출할 때 후열을 지키며 가장 마지막까지 빌헬름과 싸운 S급 초인 한용수.

얼마 전까지 의식을 차리지 못하던 그가 깨어난 덕에 이번 회의에서는 그전까지 알지 못했던 여러 사실들을 새롭게 알 수 있었다.

가령, 스스로 빌헬름이라 칭하는 그 주인 괴수가 ‘도망자’라 일컫는 누군가를 맹렬하게 찾고 있으며, 그 누군가란 탐사대보다 먼저 던전에 진입해 빌헬름과 싸우다 도망친 한 남성을 뜻하는 것이라든가.

한여름이 화면 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현재 시점에서 빌헬름이 그토록 찾던 ‘도망자’로 여겨지는 남자의 사진이 떠올라 있었다.

[ 그린하우스 경비대 특수대책과 2팀 소속 경비대원. 안수호. ]

바로 안수호의 사진이.

“…….”

그 사진을 보던 한여름의 무표정한 얼굴에 아주 살짝 생기가 돌았다.

그녀의 흥미를 끄는 자가 나타난 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