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078. 강하늘의 비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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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과의 대련이 끝난 다음날. 일요일 점심.
모처럼의 주말을 만끽하나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오늘도 일정이 있었다.
약속 시간이 가까워진 나는 외출할 채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4월에 접어든 날씨는 완연한 봄을 넘어서 슬슬 여름에 가까워지기 시작해, 나는 반팔 티셔츠 위에 얇은 재킷 하나만 걸친 채였다.
목적지는 속초역 앞.
역 근처는 저번에 강하늘과 약속을 잡았을 때 처음으로 가봤었는데, 우연찮게도 이번에 그곳으로 향하는 것 또한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역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 나는 창가에 기댄 채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했다.
‘강하늘의 그 능력……. 몇 번을 생각해도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 능력이다.’
대상의 잠재능력을 개방시키는 능력. 원작에서는 비단 강하늘뿐 아니라 그 누구도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나마 비슷한 걸 꼽자면 여인혁의 근골정렬 정도겠지.
도대체 어떠한 연유로 강하늘이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되었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이번에도 역시, 쾌락천마가 만들어낸 변경점 중 하나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놈은 도대체 강하늘을 통해 뭘 하고 싶은 거지?’
강하늘은 지금껏 만났던 원작의 등장인물들 중 가장 변화가 심한 인물이었다. 류태현도, 한겨울도, 오고가며 마주친 다른 등장인물들도 원작과 달라진 점은 거의 없었다. 이토록 차이가 심하게 변한 인물은 오직 강하늘이 유일했다.
쾌락천마가 날 이 세상에 빙의시키며 이것저것 잔뜩 건드린 것에는 다 이유가 있을 터.
그렇다면 도대체 강하늘은 왜, 왜 이렇게까지 원작과 동떨어진 인물이 된 것인가.
오늘의 만남에서 그 의문의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기를 나는 간절히 빌었다.
[ 이번 정류장은 속초역. 속초역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속초경찰서입니다. ]
정류장에 내린 나는 곧바로 역사 건물로 향했다. 그린하우스의 영향으로 서울역 못지않게 거대한 역 앞, 커다란 분수대 앞에 익숙한 얼굴의 여성이 서있었다.
“하늘아.”
다가가며 손을 흔들자 강하늘이 이쪽을 보며 살며시 웃었다. 강하늘은 어깨가 넓게 파인 크롭티 안에 흰색 민소매 나시를 레이어드하고 있었다. 하의는 밝은 색의 스키니진을 입었는데 크롭티 덕분에 허리선이 강조되어 쭉 뻗은 다리가 돋보였다.
“일찍 오셨네요. 아직 약속시간 15분 남았는데.”
“자기가 더 일찍 왔으면서.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던 거야?”
“얼마 안 됐어요. 한 삼십 분쯤?”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는 강하늘은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
“왜 그래?”
“네, 네? 뭐가요?”
“아니. 아까부터 계속 눈을 못 마주치길래.”
“아닌데요?”
그렇게 말하며 강하늘이 나와 눈을 맞췄다. 그러나 어색해 보이는 기색은 좀처럼 숨겨지지 않았다. 얘가 왜 이러지 싶었던 나는 곧 오늘 만남의 목적을 떠올리고 혼자 수긍했다.
‘긴장한 건가.'
강하늘의 새로운 능력은 척 봐도 수상했다. 그 능력에 얽힌 사정은 분명 남들에게 대놓고 밝힐만한 것은 아닐 터. 그녀가 긴장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근처에서 일단 밥이라도 먹을까? 점심 아직이지?”
“네? 아, 네.”
식사라도 하면서 이야길 나누다 보면 긴장도 자연스레 풀리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강하늘과 함께 근처에 있던 일식집에 들어갔다.
“두 분이시죠? 편하신 자리에 앉으셔서 주문하실 때 벨 눌러주세요.”
그 말에 나와 강하늘도 별다른 상의도 없이 제일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테이블 위에 입간판처럼 세워진 메뉴판을 보니 덮밥 종류가 메인이고 사이드로 라멘이나 튀김도 파는 모양이었다.
“먹고 싶은 걸로 골라. 오늘은 내가 살게.”
“네?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저번에는 네가 샀잖아. 오늘은 내가 불러서 나온 거니까 내가 계산할게.”
“그렇지만…….”
“별로 비싼 곳도 아니잖아. 그냥 내가 사게 해줘.”
우물쭈물 입술을 달싹이던 강하늘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나는 미니우동이 포함된 카츠동 세트를, 강하늘은 규동 단품을 주문했다.
“그러고 보니 곧 중간고사지?”
점원이 주문을 받고 간 뒤, 나는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도록 곧바로 입을 열었다.
“네. 1, 2학년이 다음 주고 3, 4학년이 그 다음 주예요.”
“시험 준비는 어때? 힘들지 않아?”
“말도 마세요. 이론은 이론대로, 실기야 몸으로 때우는 거니 그렇다 쳐도 이론이 진짜 미쳤다니까요? 특히 필수 과목 중에 초인역사학이라고 근현대 세계사 비슷한 과목이 있는데”
시험 준비가 어지간히 힘들었는지 강하늘은 봇물 터지듯 우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 꼴이 영락없는 저쪽 세상의 대학생 같았다.
“……하여튼. 지금도 엄청 빡센데 2학년 3학년 올라가면 더 빡세진다는 거 있죠? 그때 가서 제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하아, 차라리 그냥 자퇴할걸.”
“내가 다 미안하네. 내가 자퇴하지 말래서 자퇴하지 않은 거잖아.”
“맞아요. 다 오빠 탓이에요.”
조금 전에 나온 규동을 젓가락으로 뒤적이며 강하늘이 장난스럽게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녀에게 감돌던 어색한 긴장감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뭐, 그 덕에 오빠랑 이렇게 친해졌으니까 됐죠. 게다가 제가 자퇴하면 절 납치하려는 놈들이 움직이기 편해지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 뒤론 별 일 없지? 수상한 사람이 주변에 서성인다거나.”
“그런 일이 있었으면 오빠한테 제일 먼저 말했겠죠. 다행히 미행이 붙었다거나 하는 일은 안 일어났어요.”
어쩌면 단순히 제가 눈치 채지 못한 걸 수도 있지만요.
그렇게 덧붙인 강하늘이 넌지시 가게 안을 둘러봤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다른 손님들을 살폈다.
‘나주용이나 여일쪽은 몰라도, 적어도 민채령의 감시는 확실히 붙어있겠지.’
납치 위험은 물론이고 강하늘은 민채령의 약점과 관련된 존재. 그 철두철미한 민채령이 감시를 붙이지 않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경비대에선 강하늘에 대한 별도의 경호나 감시 인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채령에겐 개인적인 부하가 잔뜩 있었다.
‘어쩌면 지금 우리처럼 식사를 하고 있는 손님들 중에 민채령의 부하가 있을 지도 모르지.’
회사원으로 보이는 풍채 좋은 중년 남성. 아카데미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 아이들과 함께 온 젊은 엄마들.
겉으로 보기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그들이 어쩌면 민채령의 눈과 귀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오싹한 오한이 일었다.
“……아무래도 오늘 이야기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하는 게 좋겠지?”
“저는 원래 그럴 생각이었어요. 듣는 귀가 많은 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라서.”
그 말은 즉 강하늘의 ‘그 능력’에는 무언가 껄끄러운 사정이 얽혀있다는 소리였다. 내 예상대로였다.
“생각해둔 장소 있어?”
“있기는 한데…….”
말끝을 흐린 강하늘이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날 바라봤다. 그 뺨에 옅은 홍조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어딘데?”
“……제 말 듣고 이상한 생각하지 마세요? 진짜 그냥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장소라서 고른 거니까.”
“뭐 모텔이라도 대실할 생각이었어?”
“모, 모텔은 아니에요! 대, 대낮부터 남녀 둘이서 모텔 들어가면 너무 눈치 보이잖아요…….”
“그거야 뭐…….”
막차가 끊긴 한밤중이라면 모를까, 벌건 대낮에 남녀가 모텔을 대실할 의도야 뻔했다. 우리 둘이 안에서 대화만 나눌 생각이라고 해도 직원이나 마주치는 사람들은 다 그렇고 그런 사이라 생각하겠지.
‘그렇게까지 남들 눈을 신경 쓸 필요가 있나 싶지만…….’
나야 별 생각 없지만 강하늘에겐 민감한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 적당히 납득하며 고개를 주억거린 내가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근데 모텔이 아니면 어딘데?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장소라고 해도 모텔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는데.”
“……그, ……방요.”
“뭐?”
“DVD 방이요! 거, 거긴 남녀 둘이서 가도 영, 영화 보러 왔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럴 리가.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와서 간신히 삼켰다.
‘모텔이나 DVD 방이나 거기서 거기 아닌가?’
내가 머리에 마구니가 씌인 걸 수도 있겠지만 보통 DVD 방이라 하면 건전한 영화 관람보다는 그렇고 그런 목적으로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나 싶었다. 상식적으로 커플끼리 영화를 보고 싶다면 영화관을 가면 되지 뭣하러 DVD 방을 가겠는가.
그야 건전하게 영화만 보고 나오는 남녀도 분명 있기는 하겠다만, 아마 대부분의 커플은 영화 따위 뒷전일 것이다. 일하는 직원도 그렇게 생각할 테고.
“…….”
그렇게 생각하여 강하늘에게 되물을까 싶었으나, 어느새 귀까지 빨개진 채 불안불안한 표정으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그녀를 보자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강하늘도 DVD 방의 다른 용도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DVD 방을 가자고 한 건 그나마 모텔 보다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여기서 공연히 내가 ‘DVD 방도 커플들이 그렇고 그런 용도로 쓰는데?’ 하고 말해봤자 쓸데없이 그녀를 부끄럽게 만들 뿐이다. 달리 생각나는 장소도 없으니 굳이 지적할 필요는 없을 터.
“……호, 혹시 좋아하는 영화 장르가 어떻게 되세요?”
마치 정말 영화를 보기 위해 DVD 방에 간다는 듯, 쭈뼛거리며 그렇게 묻는 강하늘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어차피 영화는 뒷전일 텐데.’
다른 커플들이 빌린 영화에 집중하지 않듯 나와 강하늘 또한 그럴 것이다.
물론, 그 이유는 조금 다르겠지만 말이다.
***
술집이나 노래방이 잔뜩 있는 번화가라 그런가, 적당한 DVD 방을 찾는 데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노래방과 술집이 잔뜩 들어선 건물 지하로 내려가자 ‘크래프트DVD’라는 묘하게 옛날 느낌 나는 상호가 우릴 반겨주었다.
무기력하게 카운터에 앉아 있던 직원의 응대를 받은 우리는 적당히 조용할 것 같은 멜로 영화를 골라 직원의 안내에 따라 07번 룸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DVD 방은 살면서 처음 와보네.’
설마 인생 첫 DVD 방을 소설 속 세상에서 찾아오게 될 줄은 몰랐다. 과연 안쪽이 어떤 구조일까 궁금해 하며 문을 연 순간, 나는 멋쩍은 탄성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크흠.”
내가 아는 DVD 방은 커다란 스크린에 침대 겸용의 소파가 놓인 자그마한 공간……정도였으나 눈앞의 풍경은 거의 모텔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소파도 말이 소파지 거의 침대나 다름없었고 실제로 한쪽 구석에는 얇은 담요와 베개가 비치되어 있었다. 심지어 들어가는 입구 옆에는 화장실이 딸려 있었는데, 안쪽을 보자 변기뿐만 아니라 샤워기까지 달려있는 게 그야말로 숙박시설이나 다름없었다.
“이, 일단 앉을까……요?”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간 강하늘이 소파……비슷한 침대 앞에서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내부 구조에 당황한 건 강하늘도 마찬가지인 모양.
“…….”
이내 침대 위로 올라선 강하늘이 다소곳하게 앉은 채 날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나는 고개를 그녀에게 향한 채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영화 틀게.”
가지고 온 DVD를 플레이어에 넣자 곧 영화가 시작되었다. 이름 모를 감독이 찍은 이름 모를 배우들이 나온 외국 영화. 잔잔한 호수의 풍경을 비추는 화면을 보던 나는 이내 강하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
강하늘은 영화 따위 관심 없다는 듯 줄곧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 또한 영화가 뒷전인 건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여기 온 것은 그저 대화를 하기 위한 조용한 장소가 필요했던 것뿐이니까.
‘민채령이 붙인 감시자가 있었다면 지금쯤 민채령한테 뭐라고 보고하려나.’
‘강하늘과 안수호가 사이좋게 손잡고 DVD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같은 보고를 받으면 민채령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조금은 궁금했으나, 지금은 우선 강하늘과의 문답이 먼저였다.
“하늘아.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내 말에 강하늘이 긴장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이곳에 들어왔을 때의 부끄러움은 어느새 사라진 채였다.
“저번에 이중던전에서 네가 나한테 쓴 능력. 도대체 무슨 능력이야?”
아무리 좋게 쳐줘도 B급에 준하거나 그 이하밖에 되지 않는 나로 하여금 오버랭크 던전의 보스와 맞설 수 있게 해준 정체불명의 능력.
이중던전으로부터 나온 뒤 줄곧 가슴 한 켠에 자리했던 의문점을 나는 강하늘에게 있는 그대로 전했다.
“…….”
그리고 돌아오는 답은 침묵.
나는 구태여 그녀를 재촉하지 않고 그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아마 쉽게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겠지.
착 가라앉은 정적 속, 프랑스어인지 이탈리어인지 모를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대사만이 작게 울려 퍼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 능력은”
마침내 강하늘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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