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075. 한겨울의 약점(2)
* * *
한겨울에겐 재능이 있었다.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이었다. 또한 노력도 했다. 남들보다 배는 열심히 노력했다. 재능이 있는 자가 노력도 아끼지 않으니, 그 누구도 한겨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당연했으나, 세상이란 무릇 당연한 일만 벌어지는 곳이 아닌 법.
그린하우스에는 한겨울 같은 천재들이 잔뜩 있었다. 누구나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누구나 남들보다 더욱 노력했다. 허나 그럼에도 한겨울은 독보적이었다. 그녀의 재능은 수많은 천재들보다 더욱 뛰어났고, 노력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렇기에 만인지상. 한겨울은 명실상부 그린하우스 1학년 중 가장 뛰어난 학생이 되었다.
될 터였다.
재능과 노력을 넘어선 불합리함으로 점철된 주인공의 존재가 없었다면.
비록 입학은 1위로 했으나 류태현의 의해 한겨울은 곧바로 2위로 밀려났다. 어떻게든 넘어서려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차이가 더욱 벌어지는 것 같았다. 더욱 노력하고 더욱 정진했으나 그럼에도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불합리했다.
그러나 한겨울은 그 불합리를 누구에게 따질 수도 없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자신의 존재 역시 불합리함으로 비춰질 것이므로.
한겨울은 여전히 만인지상이었으되, 이제는 일인지하이기도 했다. 모두가 한겨울을 우러러보았으나 오직 류태현만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한겨울은 주변에 널리고 널린 패자에겐 관심조차 주지 않은 채, 오직 류태현이 앉은 왕좌만을 매섭게 노려볼 뿐이었다.
이기고 싶었다.
그를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다만 비겁한 술수를 벌이고 싶진 않았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재능으로,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실력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정면에서 정정당당하게 그를 넘어서고 싶었다. 안수호와의 대련도 그 일환이었다.
안수호.
처음에는 그저 별 볼 일 없는 경비대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작 요 한 달 사이, 그의 이름은 학생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퍼지다 이제는 누구나가 아는 이름이 되었다.
혹자는 그를 유명 길드 출신의 은퇴 헌터일 것이라 말했고 혹자는 그를 아카데미 경비대의 비밀 병기일 것이라 말했다. 그러나 한겨울은 그런 뜬소문 따위 믿지 않았다.
‘수호 형? 강하지. 아마 맞붙으면 나랑 얼추 비슷할걸?’
다만, 자신이 유일하게 인정한 남자의 말만은 믿을 수 있었다. 류태현이 말하길, 안수호는 그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강함을 지녔다고.
그렇다면 그 강함을 이용할 뿐이다. 마침 전투 스타일도 류태현과 비슷한 근접 격투 위주, 심지어 가진 초능력은 자신의 발화능력과 상극의 연무였다. 설령 류태현보다는 다소 떨어지더라도 훌륭한 연습 상대가 되어주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서로 실력도 확인할 겸 슬슬 시작하죠. 제가 먼저 갈까요? 아니면 그쪽이 먼저?”
“제가 먼저 공격하죠.”
눈앞의 남자를 발판삼아, 이번에야말로 류태현을 넘어서고야 말리라.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안수호의 몸에서 붉고 푸른 빛이 터져 나왔다.
‘온다!’
팡!
안수호가 있는 힘껏 지면을 박찼다. 샛별의 숨소리의 스택을 1회 소모한 2배 가속.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안수호의 모습에 한겨울이 숨을 삼켰다.
‘빠르긴 빠르네. 그렇지만…….’
분명 빠른 속도긴 하나 류태현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어렵지 않게 반응한 그녀의 손이 뜨거운 불길을 토해냈다.
화르르르륵!
짓쳐드는 불꽃에 안수호가 몸을 옆으로 피했다. 그러나 한겨울의 불꽃은 계속해서 그를 쫓았다. 한겨울은 이미 쏘아낸 불꽃을 조종할 수 있을 정도로 컨트롤이 뛰어나진 않았으나, 무식하게 불꽃을 계속 쏘아대는 것으로 그 부족함을 메꿨다.
수십 다발의 화염이 아가리를 벌려 안수호를 집어삼켰다.
콰아아아앙!!!
폭발. 그리고 자욱하게 퍼지는 시커먼 연기.
이윽고 연무를 헤치고 나온 안수호의 모습에 한겨울이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 정도도 막지 못하면 섭하죠!”
안수호는 있는 힘껏 연막을 터뜨려 한겨울의 불꽃을 밀어냈다. 형체가 없는 불꽃이기에 고작 그것만으로도 궤도가 비틀린 것이다. 일부 불꽃과 열기가 그에게 닿긴 했으나 서리정령의 증표로 몸에 얼음을 둘러 막아낼 수 있었다.
‘그래봤자 더 강하게 쏘면 그만이야!’
그렇다면 그 알량한 연막 따위론 막아낼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일격을 쏘아내면 그만이라고. 일순 하늘에 닿을 기세로 솟구친 불꽃이 한겨울의 오른손을 중심으로 빠르게 압축되기 시작했다.
‘슬슬 시동을 거나 보군.’
그 변화를 보고 안수호도 본격적으로 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의 탈리스만이 밝은 빛을 발했다.
파앙! 파앙! 파앙!
안수호의 손에서 시커먼 연기 덩어리가 쏘아졌다. 고밀도로 압축된 거의 액체나 다름없는 응집체. 그 연기 덩어리들이 아음속의 속도로 한겨울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화르륵!
그러나 한겨울이 가볍게 휘두른 손짓에 일어난 불꽃의 벽에 연기의 탄환이 힘없이 막혔다. 안수호의 연기가 한겨울의 불꽃을 쉽게 막아내듯, 그녀의 불꽃 또한 안수호의 연기를 손쉽게 막아냈다. 불꽃은 연기를 태울 수 없고 연기는 불꽃을 뚫을 수 없다. 두 사람의 능력은 그 특성만 보면 완벽하게 길항했다.
다만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비록 그 성질이 길항할지언정 압도적인 화력 앞에선 그 알량한 성질 따위 무용지물이라고.
화르르륵!
“흐읍!”
마침내 한겨울의 오른손에 압축되었던 화염이 해방되었다. 순식간에 시야를 가득 메우는 불꽃의 파도에 안수호 또한 있는 힘껏 연막을 쏘아냈다.
콰아아아앙!!
격돌. 그리고 찰나의 길항.
“이런.”
이윽고 자신이 쏘아낸 연막을 찢어발기며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는 화염을 보며 안수호가 있는 힘껏 몸을 뒤로 내뺐다. 직후 그가 있던 대지를 작열하는 불꽃이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크윽!”
그 여파에 휘말린 안수호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열기에 발갛게 익은 살을 정령의 힘으로 식혔다. 그러나 이미 데인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화력은 제 쪽이 위인 것 같네요.”
“그거야 뭐…….”
거만하게 이죽거리는 한겨울을 보며 안수호가 혀를 내둘렀다. 그녀의 말마따나 화력 싸움에선 한겨울이 우위였다. 비록 방금 자신의 일격이 전력이 아니었다곤 하나 그것은 한겨울 역시 마찬가지일 터. 설령 서로의 전력을 부딪친다 한들 결과는 지금과 같을 것이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야. 애초에 한겨울을 상대로 화력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자신이 그녀보다 뛰어난 건 화력 싸움이 아니라며. 얼추 한겨울의 전투 패턴을 파악한 안수호가 깊게 자세를 낮췄다.
“신체능력도 초능력도 그냥 평범한 수준이군요. 류태현 그 남자도 참 과장이 심하다니까요? 도대체 당신의 어디가 자신과 비슷한 실력이라는 건지…….”
“그건 저도 동감입니다. 다만…….”
안수호의 팔목에서 빛나던 샛별의 숨소리가 일순, 더욱 강한 빛을 뿜었다.
“이제부터 정신 바짝 안 차리면 큰코다칠 겁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그녀가 반문한 순간.
콰앙!
커다란 굉음이 한겨울의 귓가를 때렸다. 그것이 안수호가 지면을 박찬 소리라고 인식한 순간, 그는 어느새 한겨울의 품 깊숙한 곳에 다다른 뒤였다.
“어?”
조금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속도. 수치로 따지면 약 네 배 차이.
단숨에 샛별의 숨소리의 모든 스택을 해방한 안수호의 움직임에 한겨울이 작게 탄성을 뱉었고.
“흐읍!”
다음 순간, 있는 힘껏 내질러진 주먹이 그녀의 명치를 강타했다.
“커흑?!”
한겨울의 몸이 기역자로 꺾였다. 그 위로 안수호의 무자비한 연격이 쏟아진다. 그러나 한겨울은 곧바로 중심을 회복해 그의 공격을 피하고 흘려냈다.
비록 한겨울이 초능력 위주의 전투 방식을 구사한다곤 하나 신체능력이나 반사신경이 뒤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그 류태현’과 전투가 성립한다는 건 즉, 그녀 역시 근접전에 어느 정도 소양이 있다는 뜻이었다.
팡! 팡! 파앙!
“흐윽!”
그러나 안수호의 진심을 다한 연격에 대응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단순 속도만 비교했을 때 현재 안수호의 속도는 랭킹전 당시의 류태현보다 빨랐다. 한겨울은 최대한 분투했으나 세 번에 한 번꼴로 안수호에게 유효타를 허용했다.
‘이대로는 안 돼. 일단 거리를 벌려야!’
화르르르륵!
한겨울이 지면을 훑든 팔을 휘두르자 그 궤적을 따라 시뻘건 화염의 벽이 솟아올랐다. 순식간에 좌우로 넓어지는 화염의 벽을 보며 안수호가 감탄했다.
‘급하게 쏜 불꽃임에도 이 정도라. 확실히 화력 하나는 이미 학생 수준을 넘었다.’
아마 발화능력자 중 화력만 치면 국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리라. 후끈 달아오른 열기에 피부 위에 얼음을 얇게 두른 그가 화염의 벽을 크게 우회했다.
그렇게 그가 벽을 완전히 우회한 순간.
콰앙!
그의 전진로 상의 대지에 시뻘건 불꽃이 작렬했다.
쾅! 쾅! 콰앙! 콰앙! 콰아앙!
안수호가 튀어나오길 기다렸던 한겨울이 연속해서 불길을 쏘아냈다. 그러나 8배속으로 가속한 안수호의 속도를 따라잡기란 요원했다. 하다못해 다양한 궤도를 이용하거나 페이크라도 걸면 모를까, 그녀는 우직하게 직선적인 궤도로만 화염을 쏘았다.
‘슬슬 이쯤에서!’
그 화염을 손쉽게 피해낸 안수호가 지면을 박차며 사방으로 연막을 터뜨렸다. 한겨울의 시야가 순식간에 새까맣게 물든다.
“이까짓 눈속임!”
한겨울이 일으킨 불꽃이 곧바로 그 연막을 밀어냈다. 그러나 안수호는 이미 그녀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뒤였다. 그의 접근을 막기 위해, 다시 한 번 거리를 벌리기 위해 한겨울이 안수호를 향해 불꽃을 쏘려 했다.
파앙!
“큭?!”
그러나 한발 먼저 안수호가 쏜 연막 탄환이 그녀의 팔을 튕겨냈다. 충격량은 별 거 아니었으나 팔의 궤도가 흔들린 탓에 쏘아낸 불꽃이 애먼 방향으로 날아갔다. 한겨울이 입술을 잘근 씹으며 뒤로 몸을 내빼는 한편, 다시 손아귀에 불꽃을 모아 쏘아냈다.
파앙!
“크윽!”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반 박자 빠르게 날아온 연기 덩이리가 이번에도 그녀의 팔을 튕겨냈다. 쏘아낸 불꽃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로질렀다.
한겨울은 뒤로 물러서며 몇 번이나 불꽃을 쏘아내려 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안수호의 방해에 가로막혔다. 안수호는 농락하듯 핀포인트로 한겨울의 팔만 맞추었다. 마치 그녀보다 뛰어난 자신의 컨트롤 능력을 과시하는 것처럼.
이내 한겨울도 안수호의 의도를 어렴풋이 눈치 챘다. 부아가 치민 그녀가 입술을 잘근 씹으며 무리하게 불꽃을 일으켰다.
화르르르륵!
한겨울의 주위가 일제히 불타올랐다. 서리정령의 힘으로 피해를 최소화하며 물러난 안수호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허억. 허억. 허억.”
겨우 거리를 벌린 한겨울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체력이 아닌 정신적인 압박감의 문제였다. 본래 그녀는 강력한 화력으로 적의 접근 자체를 불허하며 싸우는 걸 선호한다. 허나 안수호가 몇 번이고 그녀의 화망을 피해 접근해대는 통에 정신적 압박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겨울은 그런 안수호에게서 묘한 익숙함을 느꼈다. 익숙한 압박감이요 익숙한 짜증이었다.
그래, 있는 대로 불꽃을 쏘아댐에도 아득바득 접근해서 근접전을 강요해대는 꼴이 류태현과 판에 박은 듯이 닮았다고.
그렇게 생각한 한겨울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이제야 류태현이 한 말을 알 것 같네요. 당신, 그 남자만큼 세지는 않지만 그 남자만큼 귀찮긴 하군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안수호보다는 류태현이 훨씬 강했다. 비록 속도에선 안수호가 잠시 앞섰다고 하나 류태현이 전력을 발휘하면 그 또한 금방 추월하리라. 하물며 속도를 제외한 다른 신체능력이나 총체적인 전투 센스는 안수호가 류태현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리라.
다만 안수호는 신체 능력을 앞세워 우직하게 돌격하는 류태현과 달리, 자신의 초능력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며 한겨울을 괴롭혔다. 때문에 한겨울은 눈앞의 상대가 류태현보다 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상대할 때와 비슷한 귀찮음을, 압박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결국 귀찮을 뿐이에요. 아무리 후하게 쳐주려 해도 류태현에 견줄 수준은 아니네요.”
“일방적으로 휘둘린 주제에 말은 잘 하는군요.”
“사실을 말했을 뿐인걸요?”
화륵!
한겨울의 양손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매섭게 솟구치던 불꽃이 점차 그녀의 손아귀 안으로 압축되기 시작한다.
“제 말에 불만이 있으시면, 어디 한 번 그 남자처럼 이 일격도 정면에서 받아내 보시던가요.”
뻔한 도발이었다. 그러나 안수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 도발을 받아들였다. 본래라면 그녀가 불꽃을 다 모으기 전에 빠르게 접근해야 했으나, 안수호는 그녀와 마주 선 채 자세를 한껏 낮추고 연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한겨울과 안수호의 능력은 둘 다 방출계로서 비슷한 성질을 가진다. 가령 두 사람 다 순간적으로 쏘아낼 수 있는 화력에는 한계가 있고, 그 이상의 화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원소를 압축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점이라든가.
그렇기에 한겨울은 안수호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불꽃을 모으는 자신의 앞에서 마찬가지로 연기를 모으는 그 모습이 뜻하는 바는 지극히 간단했다.
정면승부.
한겨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안수호의 그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그녀가 어이가 없다며 이죽거렸다.
“……의외네요. 설마 이런 뻔한 도발에 넘어가실 줄은 몰랐는데.”
“일부러 넘어가준 겁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건 목숨을 건 싸움이 아니라, 한겨울 학생을 위한 대련이니까요.”
“그게 무슨 말이죠?”
“질 땐 지더라도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보고 져야 안 억울하지 않겠어요?”
“허.”
마치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한 그 말투에 한겨울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그녀의 손아귀에 모이는 불꽃이 붉은색에서 차츰 푸른색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한겨울은 자신의 최대 화력을 쏘아낼 작정이었다. 일전 이중던전에서 사용했던, 드래곤의 브레스에 버금가는 작열의 파도. 안수호 또한 그 사실을 진즉에 눈치 챘다.
본래라면 불꽃이 다 모이기 전에 달려들어 그녀를 방해해야 했다. 그럼에도 안수호가 굳이 정면승부를 택한 건, 순전히 그녀에게 압도적인 패배를 선사해주기 위해서.
‘한겨울 같은 타입은 꾸준한 수련보다 실패에서 더욱 많은 걸 배우는 타입이다. 류태현은 한겨울이 내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알아서 자기 약점을 알아차리고 고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만, 저 콧대 높은 한겨울이 그럴 리 만무하지.’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그녀가 남에게서 무언가 배우려고 할 리가 없다. 그런 그녀의 태도를 고치려면 먼저 패배를 통해 그 자존심을 무너뜨려야 했다.
안 그래도 이미 몇 번이나 류태현에게 패해서 무너지기 직전인 자존심. 안수호가 선사해주는 패배는 그 자존심을 완벽하게 무너뜨리고 그녀로 하여금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키이이이이잉!
마침내 불꽃을 다 모은 한겨울의 손아귀에서 새파랗게 빛나는 광구가 생겨났다. 그녀의 불꽃을 극한으로 압축한 끝에 태어난 초고열의 에너지 덩어리.
그 광구에 담긴 에너지량은 안수호의 최대 화력 검은 연기로 상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탈리스만을 있는 대로 혹사시키며 연기를 쏘아낸다 한들 궤도를 비트는 것조차 무리겠지.
“…….”
그 당연한 사실을 짐작한 한겨울이 광구를 거머쥔 채 잠시 망설였다. 홧김에 광구를 만들어내긴 했으나 이걸 쏘았다간 눈앞의 남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하고.
“뭐합니까? 쏘지 않고.”
그러나 안수호는 그까짓 거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는 듯. 찬란한 푸른 섬광을 뿜어내는 오른손을 늘어뜨린 채 그렇게 말했다.
“알아서 잘 살아남을 테니 얼른 쏘기나 하시죠.”
“……당신이 자초한 일이니 원망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한 한겨울이 마침내 광구를 해방했다.
투콰아아아아아아앙!!!!!!!
압축에서 해방된 거대한 에너지가 단번에 폭발했다. 삽시간에 번진 푸른 불길이 거대한 해일처럼 드넓은 벌판을 휩쓸었다. 그 강렬한 섬광에, 뺨을 강타하는 뜨거운 열풍에 한겨울이 질끈 눈을 감았다.
광구를 해방하기 직전 그녀는 일부러 공격의 방향을 옆으로 틀었다. 안수호가 정면에서 이 일격을 결코 받아낼 수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해방된 불길은 그녀의 전방에 있던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일소했다.
‘그래도 방향을 옆으로 틀었으니 죽지는 않았겠지.’
한겨울이 생각했다. 안수호의 초능력과 더불어 그 불가사의한 얼음을 다루는 능력. 거기에 더해 강화형 디펜시브 코트까지 걸치고 있었으니 죽지는 않았을 거라고.
다만 죽지는 않았어도 심각한 부상을 입었을 테니 곧바로 의료진을 호출하도록 하자고.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한겨울이 마침내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그 순간.
“라이더 킥!”
“케흡?!”
불시에 그녀의 가슴을 강타한 안수호의 발차기에 그녀의 몸이 우당탕탕 지면에 쓰러졌다.
“커, 커흑?”
“제가 말했잖습니까. 알아서 잘 살아남겠다고.”
둔탁한 충격에 당황한 한겨울을 보며 안수호가 이죽거렸다. 지면에 쓰러진 한겨울이 놀라움을 금치 못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어떻게?’
그 눈에 진한 당혹감이 스친다.
한겨울이 생각했다. 설마 자신의 필살기를 정면에서 받아내어 버틴 것인가. 허나 희희낙락 웃으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안수호의 몸에는 화상은커녕 자그마한 그을음 하나 없었다. 아무리 자신의 공격을 버텨냈다고 해도 저리 멀쩡할 수가 있는 것인가.그녀의 당혹감이 더욱 짙어진다.
“어, 어떻게 살아남은. 그, 멀쩡하실 수? 아니, 상처가? 왜, 왜 없어요?”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말이 이리저리 꼬였다. 하도 당황스러워서 일어서는 것조차 잊은 한겨울을 보며 안수호가 씨익 웃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차차 설명하기로 하고. 일단 첫 대련은 제가 이긴 걸로 하겠습니다.”
“네? 아, 네에…….”
그 말에 한겨울이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안수호와 한겨울의 첫 대련은 그녀의 패배로 막을 내렸으나.
정작 패배한 그녀의 머릿속은 분함이 아닌 당혹감으로 가득 차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