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073. winwin 관계
* * *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싸늘하다. 그 한 마디에 민채령의 시선이 차가운 비수가 되어 날아와 꽂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살며시 쥔 손아귀에 식은땀이 진하게 흐른다. 그러나 표정만은 평온하게, 이쪽의 동요와 긴장을 들키지 않도록 평정을 가장한다.
평정을 가장하며, 온몸을 죄어오는 압박감에도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서선 안 되었다. 물러설 이유 따위 없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자 크게 심호흡 한 뒤,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지예원에게 내린 임무를 취소해주셨으면 합니다.”
“싫은데? 내가 왜?”
즉답. 민채령의 날카로운 시선이 날 훑었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뱀처럼 그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그 임무는 나랑 지예원 사이의 일이야. 너도 알고 있잖니? 내가 그 애를 풀어주는 대가로 그 애가 내 부하가 되었다는 거.”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팀장님께서 시키신 일을 보면 굳이 지예원이 아니어도 될 것 같던데요.”
“내 판단에 불만이라도?”
“예. 없을 리가 없죠.”
“하.”
아그작.
민채령의 연분홍빛 입술 사이에서 초콜릿 조각이 아그작 부서졌다. 그녀가 보란 듯이 내 앞에서 그것을 씹어댔다. 분명 스트레스가 쌓이면 단 것으로 푼다고 했나. 그럼 방금 내 질문이 그녀에게 스트레스를 주었다는 걸까.
아마도 그런 뜻이리라. 대충 그렇게 짐작하고 있으니 그녀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그래. 건방진 거야 차치하고 어디 들어나 보자. 우리 안수호 씨가 뭐가 그렇게 불만이시려나?”
“다 아시면서 뭘 굳이 물으십니까?”
“뭐…?”
민채령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명백하게 느낄 수 있는 살기가 그녀의 등 뒤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아니, 지금은 강하게 나가야 할 때다.’
순간 그 살기에 식겁했으나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내빼는 모습을 보여 봤자 얕보이기만 할 뿐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결코 그녀에게 얕보여서는 안 된다.
“그야 그렇잖습니까? 수많은 부하를 거느리고 계시면서 굳이 지예원에게 일을 맡기실 필요가 있습니까? 게다가 그게 하필이면 강하늘과 연관된 나주용 소장의 감시? 그 임무에 굳이 지예원이 투입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우연이라 치부하기엔 너무 공교롭고. 그렇다면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간 갈무리하고 있던 감정을 살며시 드러냈다.
“지예원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으로 제 반응을 떠보겠다. 그런 속셈 아니십니까?”
그 감정은 분노였다. 나는 노골적인 분노의 감정을 내 얼굴에 띄웠다. 결코 연기 따위가 아니었다. 실제로 나는 그녀의 결정에, 지예원을 위험으로 몰았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나 역시 지예원에게 그간 정이 많이 쌓였던 것인지. 혹은 고작 하룻밤의 관계로 없던 정이 생기기라도 한 것인지.
민채령을 노려보며 그렇게 물은 내 가슴 속에는, 어느새 잔불처럼 은은하게 타오르는 분노가 스멀스멀 차오르고 있었다.
“네 반응을 떠보려는 속셈이었냐고? 글쎄?”
그리고 그런 내 분노에 민채령이 보란 듯이 미소 지었다.
“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만약 그런 속셈이었다면 작전 성공이네?”
까득!
그 노골적인 비웃음에 이가 갈렸다. 허나 애써 마음을 다잡는다. 민채령의 의도는 역시 내 예상대로였다. 그렇다면 거래의 여지도 분명 있을 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진정시키며 내가 말했다.
”……제 요구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지예원에게 내린 임무를 취소해주세요. 저는 지예원이 쓸데없는 위험에 빠지는 걸 원치 않습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게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결정일 테니까요.”
“‘서로’에게?”
그 말에 민채령이 눈썹을 찌푸렸다. 너에게 이득이 되는 건 그렇다 치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건 무엇이냐고 묻는 것처럼.
“팀장님. 까놓고 말해서 저희 둘이서 굳이 이렇게 대립각을 세울 필요가 있습니까?”
그런 민채령에게 살며시 내 카드를 보여준다.
“저번 일 이후로 서로 상대 눈치만 보고 있는데 저희끼리 굳이 이럴 필요가 있느냔 말입니다. 팀장님은 능력 좋은 상사. 저는 유능한 부하. 서로의 비밀은 적당히 눈감아주며 그저 돕고 돕는 winwin 관계. 그런 관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굳이 서로 으르렁댈 필요가 어디 있냐고요.”
그건 거래라기보다는 휴전 제안이었다. 이쪽에서 그쪽을 들쑤시지 않을 테니 그쪽도 날 건드리지 마라. 말하자면 상호불가침 제안이었다.
“…….”
민채령도 내가 이렇게 대놓고 말해올 것은 예상치 못했는지, 그녀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날 빤히 바라봤다.
“……어지간히 그 애가 소중한가 보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떠보는 짓은 이제 그만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래.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그런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야 서로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말자고”
“예전이었다면 네 말대로 했겠지.”
“예?”
예전이었다면 그렇게 했을 거라고?
순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 그렇게 되묻자 민채령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내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하니? 네가 어떤 정체를 숨기고 있든 널 통제하고 마음대로 부릴 자신이 있다고 했던 거.”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자 민채령이 살며시 웃었다.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어. 그래서 네가 좀 수상쩍은 모습을 보여도 그냥 그러려니 했지. 풀어줄 때는 풀어주고 조일 때는 적당히 조이면서 내게 서서히 굴복하게 만들 생각이었어. 그런데…….”
이제는 아니라고.
그렇게 단언한 민채령의 눈은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처음에 네가 나한테 지예원에 관한 정보를 물어왔을 때는, 그저 정보력이 뛰어난 대원이 들어왔구나 싶었지. 여명단의 정보를 물어온 거 보면 얘가 여명단 내부에 커넥션이 있나보구나. 그럼 내가 이용할 수 있겠다. 그래서 곁에 두려고 한 거였어.”
“저는 나름대로 서로 거래를 한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래. 거래였지. 나도 그 거래 자체는 만족해. 실제로 지예원이 물어온 정보로 수많은 이득을 얻었으니까.”
국제적인 테러 조직의 내부 정보. 단순히 생각해도 충분히 값진 정보였지만 민채령에겐 그 정보를 200%, 300%로 활용할 능력과 연줄이 있었다. 그 거래는 분명 민채령에게도 만족스러웠을 터.
“……혹시 거래가 불만족스러우셨습니까?”
“아니. 거래 자체는 만족스러웠어. 문제가 있다면 네가 문제였지.”
“제가 말입니까?”
“그래. 그냥 정보력이 좀 쓸만한 애구나 싶었는데, 곁에 두고 가만히 보니 고작 그 정도가 아니더라고?”
지예원이 가느다란 손가락을 하나씩 펴며 그간 내 행적을 조목모족 짚어갔다.
“단순히 여명단 내부의 배신자에 대한 정보를 물어온 건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놈들의 핵심 프로젝트로 향하는 정보였지 않나.”
“분명 서류상으로는 E급 초인에 불과한데도 단기간만에 특책과에서도 통용될 정도로 강해져서 돌아와서는 여명단의 간부와 호각으로 싸우고.”
“어디 그뿐이야? 이 나라 대통령도 모르는 여일의 다중능력연구라는 깊숙한 음지에 대해서도 꾀고 있는 건 물론, 건방지게 내 뒷조사를 하고 약점을 잡으려고까지 시도했지.”
“심지어 이번에는 S급 길드조차 패퇴한 이중던전의 주인 괴수와 정면에서 맞붙어 살아남기까지…….”
“그냥 비밀이 많은 쓸만한 부하……로 치부하기에는 네 행적이 비범해도 워낙 비범해야지. 그래서 나도 나름 대비도 할 겸, 이래저래 네 뒷조사를 좀 해봤거든?”
예상하고 있는 바였다. 민채령의 성격 상 내 뒤를 캐보지 않으리라곤 도저히 생각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아무것도 안 나오더라?”
“…….”
그리고 이것 역시 예상한 바였다.
안수호는 쾌락천마가 내 빙의를 위해 급조해낸 캐릭터. 뒷사정은커녕 기본적인 인간관계조차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내 뒤를 캐봤자 그녀가, 고작해야 소설 속 캐릭터인 그녀가 무얼 알아낼 수 있겠는가.
‘이 세상에서 안수호는 그저 평범한 태생의 E급 초인에 불과해. 민채령이 내 머리를 까보지 않는 이상 그녀가 나라는 인간을 파악하리란 불가능하다.’
“그러니 어쩌겠어. 본인에 대해 나오는 게 없으면 주변이라도 캐봐야지. 안 그래?”
그리고 그것이 민채령이 이번에 지예원을 건든 이유였다.
앞서 말했다시피 안수호의 인간관계는 전무. 기껏해야 해외에 출장 중인 부모 정도가 전부지만 그쪽은 말 그대로 수상한 점이라곤 하나도 없는 일반인에 불과했다. 고로 그녀는 안수호의 비밀에, 있지도 않은 그 근원을 파고들기 위해 지예원을 건드린 것이다. 당초 나는 지예원을 구하기 위해 민채령에 접근했었으니까.
‘그래봤자 민채령이 내 비밀을 알아챌 리는 없다. 그렇다곤 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건 이상하겠지.’
민채령을 보며 나는 노골적으로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분명 저번에 말씀드렸잖습니까. 팀장님께서 제게 신뢰를 보이신다면 저 또한 신뢰로 답하겠노라고. 이게 그 답입니까?”
“응. 그 답이야.”
즉답이었다. 한 팔로 턱을 괸 민채령이 초콜릿을 살짝 깨물었다.
“신뢰에 신뢰로 답한다. 좋은 말이긴 한데 난 불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서. 어떻게든 네 약점을 틀어쥐고 싶었거든. 기왕이면 신뢰보다는 굴복과 복종이 낫잖아. 안 그래?”
“지예원이 제 약점이라는 겁니까?”
“적어도 네게 있어서 꽤 중요한 존재겠지. 그러니까 네가 아침 댓바람부터 날 만나러 온 거 아닐까? 어때, 제대로 짚지 않았니?”
“아뇨. 제대로 잘못 짚으셨죠.”
‘여기서부터다.’
민채령과 시선을 맞추며 나는 노골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안타깝다는 듯이.
안쓰럽다는 듯이.
실망스럽다는 듯이.
유감스럽다는 듯이.
민채령이 동요하도록, 의아해하도록, 내 속내를 짐작하지 못하게 하도록. 지금 이 순간의 연기를 위해 전신의 감각을 모조리 끌어올린다.
“팀장님. 시도는 좋으셨지만 핀트를 잘못 잡으셨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니?”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고하자 민채령이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어왔다.
“지예원 말입니다. 예, 지예원이 제게 나름 중요한 사람이긴 하죠. 그렇지만 제 약점이랄 존재가 되지는 못합니다. 제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버리려면 얼마든지 버릴 수 있습니다. 아마 팀장님께선 그녀를 협박 재료로 쓰려 하신 것 같은데, 그러려면 제게 더 소중한 걸 볼모로 잡으셨어야죠.”
“…….”
“뭐, 그러고 싶어도 선택권이 없으셨겠죠. 그야 팀장님께선 저에 대해 알아내신 게 아무것도 없으시니까.”
그 말에 민채령이 이빨을 갈았다. 좋은 반응이다.
“팀장님께서 제 뒤를 캐고 다니신 거. 사실 다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었지만 그냥 내버려뒀죠. 어차피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을 거란 걸 알았으니까. 실제로 그렇게 되었고요. 안 그렇습니까?”
나는 의도적으로 민채령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간의 관계를 생각하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쥐뿔도 없는 내가 민채령의 심기를 건드려봤자 만용이고 객기를 부리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그녀 스스로 말했듯, 그녀에게 있어서 안수호라는 부하는 더 이상 방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신 팀장님께선 그나마 저와 연관이 있어 보이는 지예원을 통해 절 떠보려고 하셨죠. 그리고 그 결과…….”
지금 민채령의 눈앞에 있는 안수호는 더 이상 예전의 나약하던 안수호가 아니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여명단 내부에 커넥션을 가지고 있고, 뛰어난 정보력으로 그녀의 약점조차 캐내려고 했으며, 그 빌헬름과 싸워 살아남은 정체불명의 강함을 가지고 있는 자.
그것이 지금의 안수호요, 그녀가 마땅히 경계심을 품어야 할 자였다.
“그 결과, 팀장님과 저의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야 말았죠. 이번 행동으로 얻은 결과는 그게 끝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이미 말했잖습니까. 예전으로 돌아가자고요.”
“예전?”
“예. 예전.”
민채령은 능력 좋은 상사로서. 안수호는 유능한 부하로서.
민채령은 안수호를 지원하고 안수호는 민채령을 위해 일한다. 서로 간의 비밀은 일절 터치하지 않는다. 그저 이익을 위해 협력하는 winwin 관계. 그런 예전의 관계로 돌아가자고.
“팀장님께서 절 잡아드시려 하지 않으신다면, 저 역시 팀장님을 물어뜯으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하.”
그 제안에 민채령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흘렸다. 다음 순간, 그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살기가 그녀로부터 휘몰아쳤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거니?”
“협박이 아니라 협상이죠. 그렇지만 협박으로 들린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그래도 이제는 제가 팀장님을 협박할 수 있는 상대로 보인다는 거니까.”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 살을 에는 듯한 저 살기를 애써 무시하며 필사적으로 평정을 가장한다. 먼저 약한 모습을 보인 자가 진다. 이 자리는 그런 자리였으니까.
아그작!
민채령이 신경질적으로 초콜릿을 씹었다. 그저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기 위한 보여주기식 소품인 줄 알았는데, 정말 스트레스를 단 것으로 풀기라도 하는 것인가.
아득! 아드득!
한참 동안 팀장실 내에 초콜릿 씹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지예원 건은…….”
그러다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널 떠보려는 이유도 있지만, 정말 이번 임무가 그 애한테 적합한 임무이기도 해. 여일에는 내 부하를 속속들이 꿰고 있는 골치 아픈 상대가 있거든. 그래서 그 상대가 모르는 인원을 통해 감시를 맡기고 싶었는데, 마침 지예원이 적임이다 싶었지.”
“원래 자기 부하가 아니니까 사지로 몰아도 된다 그겁니까?”
“넌 지예원이 무슨 목숨이 위태로운 임무에라도 가는 줄 아나본데, 그렇게까지 위험한 임무는 아니야. 연구소 내부에 잠입하란 것도 아니고, 그냥 나주용의 동태를 살펴달라는 것뿐이니까. 놈이 아직 강하늘을 노리고 있을 테니 어쨌든 감시의 눈을 붙여두긴 해야 하잖니? 안 그래?”
“…….”
내가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자, 그녀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 이어서 말했다.
“……하여튼, 무조건 널 떠보려는 목적만으로 걔한테 임무를 내린 게 아니라는 소리야. 가급적 위험한 일은 안 시킬 테니 좀 이해해줄 수 없겠니?”
“그 말씀은 명령입니까?”
“아니, 부탁이야. 네가 그랬잖니? 서로 돕고 돕는 winwin 관계 하자고.”
민채령이 비꼬듯이 말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크나큰 수확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내 의견을 고려하기는 한다는 소리니까.
“저로서는 가급적 지예원의 안전이 확실히 보장되었으면 합니다. 지예원의 임무를 취소하는 게 어렵다면, 최소한 행동의 자유라도 보장해주었으면 하는데요.”
“유사시에 알아서 도망칠 수 있도록?”
“바로 그겁니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니? 내가 목숨 걸고 임무를 수행하라 한들 그 애가 내 말을 들을 리가 없잖니?”
“목에 심은 마이크로칩이 있잖습니까. 팀장님께서 임의로 기폭시킬 수 있죠?”
“…….”
“지예원을 임무에 투입하기 전 그 마이크로칩을 제거해주셨으면 합니다. 단순히 위치 추적을 위한 거라면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지예원을 위험한 임무에서 제외시킨다. 그리고 그녀의 목에 심어진 폭탄을 제거한다. 당초 내 목적은 그 두 가지였다. 그 둘을 제외하면 당장 지예원의 목숨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요소는 없어지는 셈이니까.
내 제안에 민채령의 얼굴에 갈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선 지금쯤 지예원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과 나라는 적을 만드는 것. 둘 중 어느 쪽의 리스크가 클지 계산하고 있으리라.
실제로 내가 민채령과 정면으로 적대해봤자 난 그녀의 털끝조차 건드리지 못하겠지. 그러나 중요한 건 내 실제 능력이 아닌 민채령의 인식이었다. 민채령이 날 위험하다고 판단한다면 이 제안도 충분히 고려해볼 가치가 있을 터.
“……한 번 심은 칩을 곧바로 빼내는 건 불가능해. 나름대로 준비가 필요하니까. 대신 준비가 끝날 때까지 칩을 원격 기폭할 수 있는 기폭 스위치를 네게 넘길게. 컨트롤러는 하나밖에 없어. 그걸 네게 넘기면 내 쪽에서 칩을 임의로 터뜨릴 방법은 존재하지 않아.”
“스위치가 하나밖에 없다는 보장은?”
“원래 그런 장비는 이런저런 기술적 문제 때문에 스위치는 하나만 만든다……고 해도 설득력이 없겠지. 그냥 믿어달라는 수밖에 없겠는데?”
“그걸 지금 말이라고…….”
“네가 분명 그러지 않았니? 내가 신뢰를 보이면 너 또한 신뢰로 답하겠다고. 지금이야말로 그 신뢰를 보여줄 때 아닐까?”
무슨 말장난 같은 소리냐며 따지려던 나를 민채령이 제지했다.
“나로서는 최대한 양보한 건데? 목에 심은 칩도 빼주겠다 했고 그 준비 기간 동안 스위치도 네게 넘긴다고 했는데, 이 이상 뭘 바라는 거야?”
확실히 그녀의 말이 진실이라는 전제 하에, 그녀는 내 요구를 최대한 들어주고자 한 것이었다. 문제는 민채령의 말이 진실이라는 보장이 어디에도 없다는 거겠지.
‘하지만 이 이상 거짓말 치지 말라며 따지고 들어봤자 물증도 없다. 민채령이 끝가지 발뺌하면 좋든 싫든 난 믿을 수밖에 없어.’
“……좋습니다. 준비가 되는 대로 그녀의 목에서 칩을 제거하고 그 전까지 기폭 스위치는 제가 가지고 있는 걸로. 그 정도로 만족하겠습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날 보며 민채령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 태도가 심히 거슬렸으나, 민채령을 상대로 이 정도까지 이익을 이끌어낸 것만으로 만족해야겠지.
“내가 이렇게 먼저 양보를 해줬으니 너도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렴. 내가 널 짓밟지 못해서 밟지 않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민채령이 정말 모든 것을 동원해 날 처리하려 한다면 진즉에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경우에 그녀가 감수하게 될 리스크와, 나와 협력함으로써 얻는 이익을 고려하여 지금은 일시적으로 내게 굽혀주는 것뿐이다.
‘……만약 내 밑천이 드러나기라도 한다면 그 날이 내 제삿날이겠군.’
밑천이 드러나기 전에 민채령을 처리하든, 아니면 정말 그녀가 위협으로 느낄 정도의 무력과 세력을 구축하든. 뭐가 되었든 지금부터 계획을 차근차근 세워나가야 할 것 같았다.
“스위치는 퇴근할 때 건네줄게. 그럼 용건은 이제 끝이지? 끝났으면 이제 가서 일 봐. 오후에 임무 배정된 거 있으니까 확인하고.”
“알겠습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팀장실을 나섰다.
이 날, 나는 처음으로 민채령에게서 우위를 점했다.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