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072. 하얀 거짓말도 결국 거짓말이다
* * *
꿈을 꾸었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그 내용을 반추한다. 그러나 떠오르지 않는다. 꿈이란 으레 그런 법이다. 아무리 생생한 꿈도 깨어날 즈음이 되면 흐릿해지곤 한다. 다만 묘하게 뒷맛이 씁쓸한 것이, 결코 좋은 꿈은 아니었구나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그나마 기억나는 것은 단편적인 요소요소들. 달뜬 신음소리와, 바닥에 누운 뺨으로 전해지던 약한 진동과, 그리고 가슴에 사무치는 듯한 격한 감정 뿐.
허나 그것도 곧 의식의 저편으로 사라진다. 쉴 새 없이 떠올랐다 가라앉는 의식 속, 애매한 기억들은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처럼 흩어져 사라진다.
덧없이. 부질없이. 사라져 간다.
그것에 안타까움을 느낄 새도 없이 의식은 다시 수면 저 아래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새까만 세상 속, 나라는 의식의 경계가 차츰 허물어지고 완연한 정적만이 흐른다.
“……아. ……들어? ……봐.”
그 정적을 뚫고 문득 들려온 소음에 눈살을 찌푸린다.
“으으응.”
“……늘아? ……나라니까?”
외부의 자극에 차츰 의식이 다시 부상한다. 의식이 부상함과 함께 잠들었던 감각들이 깨어난다. 그러자 찾아온 것은 지끈거리는 두통.
“으, 으응…….”
몇 번 겪어본 익숙한 두통이었다. 이게 뭐더라. 그래, 술을 잔뜩 마신 다음 날의 숙취가 딱 이랬다.
‘……내가 술을 마셨던가?’
입으로 토해낸 숨결에서 진한 알코올 향이 느껴졌다. 그래. 술을 마시긴 했나 보지.
‘……내가 왜 술을 마셨지?’
지끈거리는 두통 속, 어지럽게 흩어진 기억의 퍼즐을 하나씩 맞춰나간다. 허나 두통 때문에 그 과정은 지지부진하기만 하다.
“하늘아. 괜찮아? 일어날 수 있겠어?”
“으응……?”
누군가 내 몸을 흔들며 시끄럽게 계속 내 이름을 불렀다. 스멀스멀 짜증이 올라온다. 가뜩이나 머리도 아파 죽겠는데, 집중 안 되게 시리.
“으, 조용히 좀 해봐아. 지금 일어날 테니까…….”
살짝 짜증을 내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밝은 빛이 눈부시게 내리쬔다. 그 빛 가운데 그늘진 얼굴로 날 내려다보는 남자가 있었다.
그 얼굴을 본 순간, 흐릿하던 정신이 조금 개었다.
“수, 수호 오빠?”
뭐야. 오빠가 왜 여기 있어?
“일어났네. 괜찮아? 어디 아프진 않고?”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피잉.
“으윽.”
직후 핑~하고 찾아온 어지러움에 미간을 찡그리자 수호 오빠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 그제야 이런저런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맞아. 나 어제 예지원네 집에 와서 술 마셨었지. 분명 이런저런 이야기 하다가 진실게임을 해서…….
“아으…….”
안 되겠다.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마치 뇌를 통째로 도려낸 듯 중간부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지?
“숙취가 심한가 보네. 편의점에서 숙취해소제 사왔는데 그거라도 줄까?”
“아뇨. 괜찮아요. 이깟 숙취 쯤 능력만 발동하면…….”
말끔히 사라질 거라고. 나는 곧바로 초능력을 발동했다. 시야를 가리는 까만 머리카락이 하늘색으로 물든다.
그러나.
“우읍!”
숙취는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이상했다. 분명 아바타의 상태와 본체의 상태는 공유되지 않을 텐데…….
‘아, 나 어제 아바타 상태로도 술 마셨지.’
뒤늦게 사정을 깨달았다. 아바타 능력은 변신이라기 보다는 치환이나 대체에 가까웠다. 현실이 아닌 어딘가에 존재하는 아바타라는 별개의 육체를 불러와 실제 몸과 교체하는 것. 내가, 이 강하늘이란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그런 것이었다.
때문에 아바타가 심각하게 손상되면 손상이 어느 정도 회복되기 전까지 능력을 발동하지 못한다. 손상이 회복되더라도 한동안은 아바타에 그 후유증이 남는다. 이 취기 또한 그런 것이리라. 다른 모습을 취한다 한들 이 취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른 모습이라 해도 결국 본체와 교체되는 아바타 신체는 하나 뿐이므로.
아바타의 회복력이 본체보다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숙취가 남아있는 게 조금 이상하긴 했으나, 단순히 아바타 상태에서 술을 훨씬 많이 마셨기 때문이겠지.
“저, 오빠. 역시 숙취해소제 필요할 것 같아요…….”
능력을 풀며 그렇게 말하자 수호 오빠가 씁쓸한 얼굴로 자그마한 병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그 병을 단숨에 비웠다.
시원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흐르자 조금은 두통이 가시는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제 술판을 벌였던 방은 말끔히 청소된 뒤였고, 방의 주인인 예지원은 주방 쪽에서 분주하게 무언가를 만드는 중이었다. 채소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채소연……언니는 어디 갔어요?”
“지금 옆방에서 씻고 있어.”
“아, 맞다. 오빠랑 지원이 언니랑 이웃 사이라고…….”
그 순간, 문득 든 의문에 내가 수호 오빠에게 물었다.
“저 오빠. 혹시 오빠 어제 어디서 잤어요?”
“나? 나는 내 방에서 잤지.”
“그럼 지원이 언니는요?”
“걔야 뭐 너희랑 같이 여기서 잤지.”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즉답이었다. 바라마지않던 대답이었으나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게 조금 꺼림칙했다.
‘예지원이 우리랑 같이 잤다고?’
기억을 되짚어 봐도 그 부분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어떻게 잠들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데 남의 일을 어찌 기억하겠는가. 그나마 기억나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예지원과 서로 눈을 부라리며 벌주를 마셔대던 기억 밖에 없었다.
‘……잠깐. 그럼 내가 예지원보다 먼저 뻗은 건가?’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예지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딱 봐도 나보다 멀쩡해 보이는 것이 숙취 따윈 거의 느끼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만으로도 어제 술자리에서 누가 먼저 뻗었는지는 자명했다.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 마지막 기억과 내가 술기운에 지쳐 잠든 사이에는 분명 간극이 있을 터. 그 사이에 혹시 무언가 실수라도 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불안했다.
그래.
가령, 술기운에 나도 모르는 사이 오빠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다거나.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간단한 가정을 세워본다. 만약 진실게임 중 자신의 눈앞에서 예지원이 술기운에 인사불성이 됐다면? 나는 무조건 그녀에게 수호 오빠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녀를 추궁할 목적으로 어제 술자리에 참석한 거였으니까.
그리고 그건 아마 예지원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녀가 내 참석을 허락해준 건 분명, 수호 오빠와 나의 관계를 추궁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진실게임 도중 취한 내게 예지원이 오빠를 좋아하냐 물었고, 내가 거기에 그렇다고 대답했다면……?
‘설마…….’
제발 그런 상황만은 일어나지 않았기를 간절히 빌었다.
나는 이미 수호 오빠에게 내 마음을 어떻게 고백할지에 대해서 몇 개나 되는 계획을 세워 놨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그중에 술자리에서 술김에 고백한다는 계획은 없었다. 하다못해 단둘이 마시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남들 다 있는 앞에서 술김에 대뜸 좋아한다고 밝히는 것만큼 최악의 고백이 또 어디 있을까.
“저, 오빠……?”
그러나 상황을 미루어보면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내가 그 최악의 고백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충분해 보였다. 내가 불안한 얼굴로 수호 오빠를 올려다봤다.
“혹시 제가 어제 실수 같은 거 하지 않았나요?”
“실수? 글쎄? 딱히 실수랄 건 없었는데.”
이번에도 즉답. 나는 오빠의 표정 변화를 면밀히 살폈으나 오빠의 얼굴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정말로 실수 따위 없었다는 듯.
‘진짜야? 아니면 연기야?’
그러나 나는 더더욱 불안해졌다. 논리적인 불안이 아니었다. 그냥 불안했다. 무언가 중요한 걸 잊고 있는 듯한, 잊어선 안 될 것을 까먹은 듯한 불안이었다.
‘제발.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니어야만 해.’
나는 필사적으로 빌고 또 빌었다. 나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내 뇌리에 불안한 가정이 스친다.
어쩌면 나는 기억하지도 못하는 사이 내 마음을 고백하고, 거절당한 게 아닌가 하는.
그런 불안한 가정이 뇌리를 스치자 자연스레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저, 정말 아무 일도 없었나요?”
“……없었다니까 그러네.”
대답 직전 명백하게 느껴진 약간의 망설임.
그것은 똑같은 사실을 되풀이해서 말한 것에 대한 짜증이나 귀찮음으로 보이기도 했고, 내게 거짓말을 하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으로 보이기도 했다.
“하늘아. 옆에 가서 소연이 좀 불러와줄래?”
그때, 그간 잠자코 있던 예지원이 내게 말했다. 마치 내 물음을 중간에서 자르듯.
“슬슬 요리 다 돼가니까 이쪽으로 넘어오라고 좀 전해줘. 수호를 보낼 순 없으니까.”
“어어. 네, 네…….”
엉겁결에 대답한 나는 별 수 없이 현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머릿속은 여전히 불안과 의심으로 가득했다.
불안은 그 뒤로도 쭉 이어졌다. 넷이서 아침을 먹고, 예지원의 방에서 씻은 뒤 나와 수호 오빠, 그리고 채소연은 아카데미로 향했다. 두 사람은 출근이고 나는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나저나 하늘이 너. 어제 무단 외박한 거지? 그럼 이제 벌점 받겠네?”
“……아. 네, 그러네요.”
채소연의 물음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벌점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건 기억나지 않는 어제 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뿐이었다.
나는 말없이 수호 오빠를 올려다봤다. 마찬가지로 말없이 걷던 그가 슬쩍 내 쪽을 내려다본다. 그의 입가에 상냥한 미소가 새겨졌다.
“왜 그래? 할 말 있어? 나 왜 작아졌냐고?”
"아뇨 그건 아닌데……."
확실히 채소연은 어제보다 족히 20cm는 작아져 있는 상태였다. 물론 난 이미 수호 오빠로부터 그게 초능력의 부작용이란 걸 들어서 알고 있었다.
다만 내가 궁금한 건…….
“그 혹시…….”
“혹시?”
“혹시 어제 제가 잠들 때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아무것도 기억 안 나?”
“네. 기억이 잘…….”
“……그래?”
내 대답에 수호 오빠가 흐음, 하고 침음성을 흘렸다. 가만히 먼 산을 바라보는 그 표정이 어딘가 아련해 보였다.
“별 일 없었어. 채소연이 계속 질문자 잡다가 자기 혼자 마신 술에 취해서 잠들었고, 곧바로 너도 벌주 때문에 취해서 잠들었어. 아마 긴장이 풀려서 잠들었던 거 아닐까? 너도 꽤 많이 마시기도 했고.”
“그 다음은요?”
“둘이나 잠들어서 술자리는 그대로 정리했지. 나랑 예지원 둘이서 대충 테이블만 정리한 뒤에 각자 방에서 잤어.”
정말 그게 끝인가. 그렇게 되묻고 싶었지만 수호 오빠는 내게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 앞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 정말 그게 끝인가 보지 뭐.’
아무래도 우려했던 사태는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고. 정말 자신은 별일 없이 그저 잠들기만 한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은 가슴이 홀가분해지는 것 같았다.
……조금 찝찝하긴 하지만.
“맞다. 하늘아. 조만간 시간 한 번 내줄 수 있어?”
그런 내게 수호 오빠가 돌연 그렇게 말해왔다. 마치 내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듯.
“시간이요? 언제가 편하신데요?”
“그냥 저녁이나 주말 중에 너 편할 때? 할 이야기가 있어서.”
“이야, 기요……?”
“응. 저번에 이중던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묻고 싶어서. 네 능력 말이야. 그,아바타 능력 말고, 다른 능력.”
“아.”
그러고 보니 연심의 벚꽃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하는구나. 뒤늦게 떠오른 사실에 내가 되물었다.
“그럼 이번 주말은 어떠세요?”
“주말이면 토요일?”
“오빠 언제 편하신데요?”
“……토요일은 내가 아마 일이 있을 것 같고. 일요일에 만나자. 어디 조용한 곳에서.”
“네. 그럼 장소는 차차 정하는 걸로 하고. 일단 일요일로 알고 있을게요.”
“그래.”
그 대화가 끝날 때까지 수호 오빠는 단 한 번도 이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일부러 내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무언가 미안한 것이라도 있다는 듯이.
“…….”
그 태도에, 애써 눌러 담은 불안감이 스멀스멀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
“안녕하세요! 다들 좋은 아침입니닷!”
사무실에 들어서며 채소연이 발랄하게 외쳤다. 숙취 따위는 전혀 없는 모습.
벽 한쪽에 걸려있는 그날 근무표를 확인한 채소연이 들뜬 걸음으로 탕비실로 향했다. 출근하자마자 커피랑 쿠키부터 조지겠다더니 정말 그러려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이태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근무표는 확인하는 걸 보면 장족의 발전인가.”
그의 허무한 중얼거림이 사무실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그런 그를 뒤로하고 나는 곧바로 팀장실로 향했다.
똑똑.
“들어가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민채령이 제 자리에 앉은 채 날 기다리고 있었다.
오독.
그 손에는 포장지가 반쯤 뜯긴 사각형 모양의 초콜릿이 쥐어져 있었다. 오도독. 그녀의 입 안에서 초콭릿이 부서지는 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웬 초콜릿입니까?”
“난 스트레스를 단 거로 푸는 타입이거든.”
“무언가 스트레스를 받으실 일이라도?”
“아직은 없는데 이제부터 생길 것 같아서.”
두 눈을 가늘게 흘긴 민채령이 슬쩍 초콜릿을 내밀었다.
“너도 먹을래?”
“전 괜찮습니다.”
즉답한 나는 팀장실 한 켠에 놓인 응접용 소파에 걸터앉았다. 민채령에게 오른쪽 측면을 향하는 자세였다.그 상태로 몸을 비스듬히 돌리며, 두 팔꿈치를 무릎에 얹은 채 두 손을 살며시 깍지 꼈다. 빈말로도 예의 바른 자세라 할 수 없는 모양새.
그러나 그런 사소한 예의범절 따위, 나도 민채령도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팀장님. 저희 이야기 좀 합시다.”
“……그래.”
오독.
그녀의 입에서 다시 한 번, 초콜릿이 잘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