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 071. 어리광을 넘어서
* * *
정사는 날이 밝아올 때까지 이어졌다. 우리 두 사람은 필사적으로 서로의 몸을 탐했다. 마치 이 뒤가 없다는 듯,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듯.
필사적이고.
격정적이고.
격렬하게.
그렇게 새벽녘의 어스름이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할 즈음에서야, 우리는 끈적하게 달라붙은 살결을 떨어뜨렸다.
쏴아아아아아.
아련하게 들려오는 샤워기 소리를 들으며 나는 가만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살며시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공기가 밤새도록 흘린 땀을 식히고, 농염하게 차오른 야릇한 체취를 환기시켰다.
워낙 격렬했던 정사 탓인가 술기운은 진즉에 날아갔다. 술기운이 날아가고, 벅차오르던 감정이 가라앉고, 그 자리를 차가운 이성이 채우기 시작한다.
“하아.”
뒤늦게 밀려오는 복잡한 감정에 한숨을 내쉬었다. 담배라도 한 대 태울까 싶었으나 관뒀다. 씻고 있는 그녀를 두고 혼자 밖에 나가서 피고 오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그녀가 나왔을 때 방 안을 온통 담배 연기로 가득 채울 수도 없는 노릇이니.
하여 나는 진한 담배 연기 대신 짙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채 어젯밤의 뜨거운 정사를,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되짚어본다.
나는 어제 지예원에게 고백 받았다. 그리고 그녀와 사랑을 나눴다.
참으로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고백이요, 그 뒤에 이어진 정사도 갑작스러웠다. 우리 두 사람의 혈관을 가득 채운 알코올은 우리를 보다 감정적이게, 보다 감성적이게, 보다 충동적이게 만들었다. 그녀는 내게 감정적으로 달려들었고, 나는 그녀를 감성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우리 두 사람은 충동적으로 사랑을 나눴다.
허나 술기운이 만연하긴 했으나 오로지 술김에 저지른 일은 아니었다. 나도 그녀도 감정과 충동의 지배를 받았으되 이성이 마비되지는 않았으니까.
충분히 생각할 결과였고 충분히 판단한 결과였으리라. 술기운이 가라앉고 아침이 되었으나 나는 그녀의 어리광을 받아준 것에 후회하지 않으며, 아마 그녀 또한 제 감정을 내게 고백한 것을 후회하지 않으리라.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강하늘.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것뿐이었다.
어제 벌어진 진실게임 막바지. 강하늘은 직접적으로 말하지만 않았지 내게 고백이나 다름없는 암시를 보냈다. 그리고 나와 지예원은 분명히 그 암시를 알아차렸다. 알아차렸음에도 우리는 사랑을 나눴다. 그래서 미안했다. 지예원이야 그렇다 쳐도 나는, 적어도 나는 강하늘의 마음을 헤아려야 했을 텐데.
하여 말끔한 이성을 되찾은 내 뇌리는 미안함과 착잡함으로 가득했다. 그 감정을 토해내듯 깊은 한숨이 담배 연기처럼 연신 목구멍을 빠져나왔다.
끼익.
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사이로 지예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
수건으로 제 몸을 가린 채 수줍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지예원. 그녀를 보자 어젯밤의 장면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애정을 갈구하듯 내게 매달린 채 내 입술을 탐하던 그녀의 모습이.
어색한 몸짓으로 날 기쁘게 해주고자 열심히 노력하던 그녀의 모습이.
달뜬 신음을 흘리며 내 밑에 깔린 채 허리를 비틀어대던 그녀의 모습이.
연이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그 사랑스런 눈을 나와 맞추며 행복한 미소를 짓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 장면들에 가장 먼저 든 감정은 아이러니하게도 미안함이었다. 어느 정도는 눈앞의 지예원에 대한 미안함이었고, 나머지는 옆방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을 강하늘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뭘 그리 어색해 해?”
멋쩍게 시선을 돌린 내 곁으로 그녀가 다가왔다. 향긋한 샴푸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내가 어제 말했잖아. 다 큰 남자랑 여자랑 하룻밤 불장난 한 거로 생각하라고. 편하게 생각하라니까?”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그 말이 진심이 아닌 건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지예원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하룻밤 불장난이라.’
그렇게 치부하면 편하기야 하겠지. 하지만 하룻밤 불장난이라 스스로를 속이기엔 너무 많은 감정을 받았다.
‘…….쓰레기 같은 놈.’
그리고 그걸 앎에도 병신같이 우물쭈물 거리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부끄럽다는 걸 알면 옳은 일을 해라. 남자로서 책임을 져라. 그녀의 감정을 기만하지 마라. 나는 끊임없이 그렇게 자신에게 되뇌었다.
“지예원. 나는……..”
되뇌고 되뇐 끝에 입을 열었다.
그녀와 눈을 맞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러나.
“그만.”
내 진지한 각오와 결심을 지예원은 받아주려 하지 않았다.
“안수호. 그냥 편하게 대답해.”
물기로 촉촉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보라색 눈동자가 아련한 빛을 띠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살며시 내 귓가를 속삭인다.
“어제 별로였어?”
“…….그럴 리가.”
“좋았지?”
“응. 좋았어.”
“그래. 그럼 된 거야.”
됐긴 뭐가 되었느냐고. 그렇게 되묻고 싶었으나 지예원이 검지로 내 입술을 살며시 막았다.
“억지로 무리해서 날 책임지려 하지 않아도 돼. 어제 일은 내 어리광이고 이기심이었어. 피차 이래저래 복잡한 사정이 있잖아. 우리가 서로 묶고 묶이는 관계가 되는 건 득보다 실이 클 거야. 안 그래?”
그렇게 말하는 지예원은 더 이상 감정을 앞세우는 어제의 그녀가 아니었다. 이성과 합리를 추구하는 평소의 지예원이었다. 자신의 사정을, 그리고 내 사정을 고려한 그녀는 성공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죽였다.
‘득보단 실이 클 거라고.’
납득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납득이 되는 말이었다. 그녀나 나나 마음 놓고 사랑을 나누기엔 신경 쓸 게 너무 많았다. 만약 우리가 연인이 된다면 힘들 때 마음 편히 기댈 수는 있겠지만, 동시에 서로가 서로의 짐이 될 수도 있으리라.
지예원은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었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다.
그런 내 스스로에게 나는 환멸이 났다.
“그리고 내가 갑작스레 고백했으니 너도 이래저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거 아니야? 게다가 강하늘이 너 좋아한다는 거, 너도 눈치 챘지?”
“…….그래.”
“모처럼 이쁜 여자가 둘씩이나 널 좋아한다는데 천천히 고민해봐. 아니, 새삼 고민할 것도 없겠다. 나 같은 범죄자보다는 걔처럼 평범한 여자애랑 사귀는 편이 훨씬”
“그만해.”
지예원의 말을 끊는다. 그러자 그녀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그렇게 스스로를 낮춰 말하지 마.”
지예원은 나름 날 배려한다고 저렇게 말한 것이겠지만,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끼던 내게 그녀의 말은 차가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자신도 힘들고 괴로울 텐데도 날 신경 써주는 그녀의 모습에, 반대급부로 나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쓰레기 같은 남자인지 여실히 느껴졌다.
허나 동시에 안도하기도 했다. 지예원이 내 사정을 헤아려주는구나. 그 배려에 기대기만 하면, 이 불편한 상황을 어물쩡 넘어갈 수 있겠구나.
안심과 자조가 섞인 복잡한 표정으로 나는 지예원을 바라봤다. 그녀의 말마따나 내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지예원에 대해서도. 그리고 강하늘에 대해서도.
그런 스스로가 너무 미안하여 차마 지예원과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입술을 잘근 씹으며 내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꼬옥.
부드러운 손길이 내 목덜미를 감싸고, 살며시 내 얼굴을 그 품에 안았다.
포근한 감촉이 뺨에 전해진다. 갑자기 무슨 짓이냐고 고개를 들려고 하자, 그녀가 내 머리를 꽉 안으며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마치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게 하려는 듯.
“고마워.”
그렇게 내 머리를 꽉 쥔 채 그녀가 살며시 말했다.
“어제 내 고백을 들어줘서 고마워. 내 어리광을 받아줘서, 내 이기심에 어울려줘서 고마워. 그리고 방금 전에, 스스로 낮춰 말하지 말라고 말해줘서 고마워.”
고개를 저었다. 전혀 고마워할 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괜찮아. 난 이미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어. 그걸로 충분해.”
충분할 리가 없지 않느냐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충분히 생각하고, 충분히 고민한 뒤에 대답해줘도 늦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날 배려하여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그녀의 친절에, 나는 차마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문득 든 생각에 살며시 그녀를 밀어낸 나는 침대 옆 서랍장에서 자그마한 장신구를 하나 꺼냈다.
붉은 보석이 박힌 얼음처럼 투명한 십자가.
그것을 말없이 건네자 지예원이 의아하단 눈으로 나와 십자가를 번갈아 쳐다봤다.
“이게 뭔데?”
“저번에 이중던전에서 얻은 아티펙트야.”
“아티펙트?”
“응. 몸에 지니고 있으면 하루에 한 번, 목숨이 위험한 공격을 자동으로 감지하고 얼음으로 만들어진 보호막이 발동 돼. 오버랭크 던전에서 나온 아티펙트니까 어지간한 공격은 다 막을 수 있을 거야.”
그 정체는 바로 냉염의 십자가였다. 원작에선 류태현이 가졌어야 할, 어떠한 공격이라도 단 한 번 막아내는 절대 방어의 아티펙트.
본래 내가 가지고 있으려 한 그 아티펙트를 나는 미련 없이 지예원에게 넘겼다. 나보단 그녀가 가지고 있는 편이 나을 거다. 그녀는 곧 민채령이 내린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러 가야 할 테니까.
“이거 엄청 귀한 거 아니야? 이런 걸 왜 나한테”
“어차피 난 가지고 있어봤자 쓸 일도 없을 텐데 뭘. 위험한 일 하러 가는 네가 가지고 있는 편이 낫겠지.”
“그렇지만”
“그냥 받아. 좀.”
나는 반쯤 떠넘기듯 십자가를 그녀에게 넘겼다. 마치 그 아티펙트로 그녀에 대한 면죄부를 대신하려는 듯.
엄지손가락보다 조금 긴 얇은 십자가를 쥔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고마워.”
그렇게 말하며 소중하다는 듯 냉염의 십자가를 꼬옥 두 손으로 쥐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비친 그 얼굴에 살짝 붉은 기가 돌았다.
“앞으로 늘 몸에 지니고 다녀. 안주머니 같은 곳에 넣어두거나 아니면 목걸이로 만들어서……. 아, 그런데 구멍을 뚫을 수가 없으려나.”
“으음. 그럼 이렇게 할래.”
까드득!
지예원의 손가락 끝에서 자주빛 칼날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을 칼날이라고 불러도 될까. 그녀가 만들어낸 보라색 수정이 그녀의 의지대로 자유자재로 모양을 바꾸어 십자가를 천천히 감쌌다.
“됐다.”
이윽고 지예원이 손을 뗐을 때, 냉염의 십자가는 아름다운 귀걸이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십자가 가운데의 붉은 보석을 중심으로 보라빛 수정이 십자가를 꽉 붙들고 있었으며, 그 위로 쭈욱 늘어진 사슬 끝에는 얇은 고리가 달려 있었다. 엄청 정교한 능력 사용이었다.
딸깍.
지예원이 머리카락을 넘겨 드러난 왼쪽 귀에 냉염의 십자가를 찼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것처럼, 그녀가 만들어낸 귀걸이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흔들렸다.
“어때? 이러면 되지?”
“응. 예쁘다.”
“당연하지. 모델이 누군데.”
장난스럽게 웃은 지예원이 벽에 걸린 시계를 봤다. 이제 막 오전 7시를 넘긴 시점이었다.
“일단 난 옆방으로 넘어가 있을게. 쟤네가 깰 때까지 같이 있으면 들킬 수도 있으니까. 어쩌면 이미 들켰을 수도 있지만…….”
그 말에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어젯밤 그녀의 신음소리가 커도 너무 크긴 했지.
“하여튼. 난 넘어가서 애들 깨우고 아침 준비할 테니까. 너도 씻고 별 일 없으면 이쪽으로 넘어와서 아침이나 먹어.”
“그래.”
“어째 아쉬운 표정이다? 왜, 아침 됐다고 또 한 판 뛰고 싶어서 그래?”
“옷이나 입고 옆방으로 얼른 가.”
“치. 농담도 못 하나.”
애써 멀쩡한 척 볼멘소리를 툭 뱉은 지예원이 바닥에 널브러진 자기 옷을 집어 들더니 과장된 몸짓으로 진저리쳤다.
“어으, 냄새. 이거 그대로 입고 갔다간 바로 들키겠는데? 혹시 옷 좀 빌려줄 수 있어?”
지예원이 입고 왔던 옷은 그녀가 흘린 온갖 체액으로 엉망진창이었다.
“어. 거기 서랍장에서 대충 아무거나 골라서 입어.”
“고마워. 가서 바로 갈아입고 돌려주러 올게.”
서랍장을 이리저리 뒤지던 지예원이 흰색 런닝 셔츠를 한 장 꺼내 입었다. 체격 차이가 있어서 그런가 런닝 자락이 그녀의 허벅지 중간까지 살포시 내려왔다.
“야 잠깐. 설마 그러고 나가게?”
“뭐 어때. 가릴 곳만 가려지면 됐지.”
가릴 곳만 가린다. 지예원의 복장은 딱 그 말에 부합했으나, 정말로 딱 부합하기만 했다.
얇은 런닝은 안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윤곽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나마 가릴 곳은 가린다지만, 사이즈 자체가 워낙 큰 터라 앞섬이나 겨드랑이가 깊게 파여 있었고, 그마저도 어깨끈이 수시로 흘러내려 옆에서 보고 있자니 괜히 조마조마했다.
허나 지예원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마 바로 옆에 자기 방으로만 가면 끝이니 굳이 바리바리 차려 입을 필요가 없다 생각하는 것이리라.
끼이이익.
지예원이 녹슨 현관문을 열자 밝은 아침 햇살이 방 안으로 드리웠다.
헌데 다음 순간, 지예원은 반쯤 열린 문고리를 쥔 채 가만히 멈춰 섰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녀를 부르려던 순간, 지예원이 이쪽을 살짝 돌아보았다.
눈부신 햇살 속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지예원과 눈이 마주친다.
그녀의 얼굴엔 복잡하고도 오묘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기쁜 것 같기도, 슬픈 것 같기도, 홀가분한 것 같기도, 답답한 것 같기도 한 복잡하고, 애매하고, 오묘하고, 어딘가 아련해 보이는 표정.
“……그럼, 조금 있다 보자.”
문득, 그 복잡한 표정에 압도된 나는 차마 그녀의 말에 무어라 대답하지 못했고,
끼익. 쿵.
이내 그녀가 나간 뒤, 녹슨 철문이 둔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하아.”
홀로 남겨진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예원과 강하늘. 두 여성 사이에서 고민하는 내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설마 살면서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지금 내 입장에선 어느 쪽도 포기하기 어려워.’
둘 다 사랑하고 있다느니, 양다리니 하는 감정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두 여성은 모두 내게 있어 ‘필요한’ 존재였으니까.
지예원. 그녀는 시스템으로 설정된 주요 등장인물이자 이 세상에서 내가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료였다. 그런 그녀와 소원해질 수는 없었다.
반면 강하늘. 그녀는 강력한 스킬을 지닌 이레귤러이자 시스템이 대놓고 친하게 지내라고 추천하는 인물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녀와의 관계 역시 원만하게 유지해야 했다.
물론 그런 이성적인 측면을 떠나서 감정적인 부분에서도 나는 두 사람을 포기하기 어려웠다. 꾸며진 거짓으로 점철된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두 사람은 모두 내 안에서 소설 속 캐릭터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시작했으니까.
다만 감정적인 문제는 가만히 앉아서 고민해봤자 해결될 일이 아니기에, 홀로 남겨진 나는 이성적인 측면에서만 우리 세 사람의 관계에 대해 고민했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어떤 방침을 취해야 할지 말이다.
‘……그래.’
길게 이어진 고민 끝에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두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하겠다는 큰 차원의 결론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일을 하자고. 그런 자그마한 결론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내가 해야 하는 일.
‘일단 지예원의 안전부터 확보한다.’
냉염의 십자가를 넘겼지만 안심할 순 없다. 그리하여 나는 민채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르르.
얼마간의 신호음이 흐르다 이내 멈추고.
안수호? 아침부터 무슨 일이니?
이윽고 들린 그 요염한 목소리에,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팀장님. 저희 이야기 좀 합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