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70화 (71/266)

〈 70화 〉 069. 어리광(1)

* * *

두 사람은 안수호의 방으로 장소를 옮겼다. 벽에 기대어져 있던 탁자를 펼치고 두 사람이 마주 앉자, 지예원이 옆방에서 먹다 남은 술 한 병을 그 위에 올렸다.

“더 마실 생각이야?”

“그냥. 술이 더 들어가야 말이 나올 것 같아서.”

그 말에 안수호가 불안한 표정으로 지예원을 바라봤다.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한 그 얼굴은 도대체 무슨 고민을 품고 있는 것일까. 안수호는 조금 전 옆방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곤, 지예원이 꺼내고자 하는 말을 대강이나마 유추했다.

강하늘에게 좋아하는 이가 있느냐 물어보고. 그녀가 잠들자 할 이야기가 있다며 장소를 옮겼다. 게다가 그 이야기가 술이 들어가지 않고는 결코 꺼내지 못할 이야기란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이쯤 되면 눈치를 챌 수밖에 없다. 하물며 안수호는 나름 눈치가 좋은 편에 속했으니, 그녀의 속내를 짐작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리라.

“술 진짜 잘 마시네.”

그러나 안수호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지예원이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리며 묵묵히 술잔을 따랐다.

고요한 가운데. 안수호가 차분히 지예원을 바라봤다. 제 술잔을 내려다보던 그녀가 이내 고개를 들고 그와 눈을 마주친다. 지예원의 눈에는 고민하는 빛이 역력했다.

이미 그녀의 마음은 안수호에게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다만, 운을 어떻게 띄우느냐가 문제였다. 다짜고짜 고백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 서로간의 감정이 고조되었을 때 좋아하노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

그때 그녀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안수호에게 말해야만 하는 사실이 있었다고.

애초에 오늘 그와 자리를 마련한 것도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 아니었냐고.

그래. 설령 마음을 고백하더라도 일단 해야만 하는 이야기부터 먼저 하자.

그렇게 생각한 지예원이 착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민채령이 나한테 임무를 맡겼어.”

“뭐?”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서두에 안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사고가 멎은 그가 의문스러운 얼굴로 되묻는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저번에 설명했잖아. 내가 안전가옥에서 풀려나기 위해 그 팀장이랑 어떤 거래를 했는지.”

민채령은 범죄자 신분인 그녀를 보호를 빙자한 구금에서 해방시켜주었다. 남들을 속일 새로운 신분도 준비해줬다. 또한 그녀의 친구, 김민아의 수색에도 적극 협력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예원의 말처럼, 무조건적인 호의가 아니라 거래였다. 민채령의 도움에 대하여 지예원이 지불한 것은 첫째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여명단에 대한 모든 정보요, 둘째로는 여명단의 잠입 요원이었던 그녀 자신의 출중한 능력이요, 마지막으로는 그 목에 박아 넣은 마이크로칩을 통한 그녀의 생사여탈권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지예원은 민채령의 부하였다. 그것도 안수호나 채소연과 같은 합법적인 부하가 아닌, 음지에 숨어 음지의 일을 하는 부하.

“……무슨 임무인데?”

그런 지예원에게 민채령이 일을 맡겼다. 정상적인 일일 리가 없다. 안수호의 얼굴에 불안감이 서린다.

“별 거 없어. 누구를 좀 미행하면서 감시해달라나? 나름 내 적성에 맞는 일이지.애초에 나는 여명단에서도 첩보 역할을 맡고 있었으니까.”

“미행 상대는?”

“당연히 비밀이지……만, 너한테라면 말해도 되겠지. 용인에 있는 무슨 연구소 소장이야. 이름이 나주용이랬나?”

그 말에 안수호의 표정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나주용.

원작에 등장했던 매드 사이언티스트. 여명단과 쌍벽을 이뤄 극의 중후반부를 이끌어가던 빌런.

그리고, 저번 강하늘 납치 사건을 배후에서 획책한 자.

‘어째서?’

그런 그의 이름이 거론되자 안수호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어째서 지예원한테 그런 임무를…….’

단순히 나주용의 동태를 살피는 거라면 다른 부하도 얼마든지 있을 텐데. 왜 하필 지예원에게 그런 임무를 맡겼는가.

기실 이것은 민채령 나름대로 안수호를 떠보는 것이었다. 민채령은 현재 안수호에 대한 경계심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안수호가 강하늘 사건에서는 정보력에서, 그리고 이번 이중던전 사태에서는 무력에서 그녀의 예상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까.

그래서 민채령은 안수호를 떠봤다. 어째서인지 그가 소중히 여기는 지예원에게 강하늘 사건의 배후인 나주용 감시 임무를 내렸다. 그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기 위해서.

안수호는 그런 속내를 대강이나마 짐작해냈다. 민채령이 자신을 일부러 자극하려는 것이라고. 그것을 위해 일부러 지예원에게 임무를 내린 것이라고.

“……꼭 그 일을 해야 하는 거야?”

“해야지. 그런 거래였으니까.”

“나주용은 평범한 연구자가 아니야. 온갖 불법적인 일에 연관된 범죄자라고. 저번 강하늘 납치 사건도 놈이 배후에서 꾸민 일이야. 그런 놈을 미행했다간, 네가 위험해질지도 몰라.”

“일부러 나 같은 범죄자한테 시키는 일인데. 그야 위험하겠지.”

“그럼 그만둬.”

그 걱정스러운 부탁에 지예원의 눈썹이 움찔했다.

“만약 네가 못하겠다고 하면 민채령도 무리해서 그런 일을 시키진 않을 거야.”

민채령이 지예원의 목에 심은 마이크로칩은 어디까지나 도주 방지용. 칩에 내장된 폭탄은 칩을 적출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이상 터지지 않는다. 적어도 민채령의 말에 따르면 그랬다.

그렇다면 최소한, 목에 심은 폭탄을 빌미로 지예원을 억지로 사지에 내몰 수는 없을 거라고.

“나도 알아.”

그런 의미를 담아 안수호가 말했고, 지예원 역시 그 뜻을 이해했다.

“그렇지만 내가 거절했다간 민채령도 날 도와주지 않겠지. 민아를 찾으려면 민채령의 도움이 필요해. 그래서 난 이번 일을 맡을 수밖에 없어.”

“…….”

“뭐, 그래 봤자 미행이잖아. 어디 잠입하라는 것도 아니고 멀리서 감시만 하는 일인데. 목숨이 위험할 일은 없겠지.”

“그건 모르는 일이잖아.”

‘만약 민채령의 목적이 날 떠보는 거라면…….’

필시 이 일은 위험한 일일 것이다. 어쩌면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르는.

그만둬라.

마음 같아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안수호는 그럴 수 없었다. 지예원에게 있어서 김민아를 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고 있었기에.

그가 답답하다는 듯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의 표정이 복잡한 감정으로 일그러진다.

“왜, 걱정 돼?”

“그야 걱정되는 게 당연하지.”

“어째서?”

그 순간 엄습한 묘한 기시감.

“왜 나를 그렇게 걱정해주는 거야?”

언젠가 그에게 물었던 의문.

그 물음을 다시 입에 담으며, 지예원이 넌지시 물었다.

“저번에 말했지? 나 이제 아카데미 학생 아니라고. 그러니까 경비원인 네가 날 걱정할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얼마 전까지는 지예원의 말대로였다. 그가 지예원의 안위를 걱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그녀가 아카데미 학생이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죽으면 경비원 스킬에 의한 페널티를 받게 될 테니까.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이제는 지예원을 진심으로 걱정했다.

아카데미에서 제적당했다 한들 페널티는 그대로인 게 아닌가. 어쨌든 주요 등장인물이니 그녀가 죽으면 무언가 불이익이 생기지 않을까. 그런 계산적이고 타산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그저 걱정됐다.

그저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걱정이고 우려였다.

지난 두 달 여간 그녀와 부대끼면서.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지내면서. 그 매 순간마다 그녀가 보여주었던 인간적인 감정들이.

웃긴 일에 웃고, 서러운 일에 울고, 기쁜 일에 기뻐하고, 슬픈 일에 슬퍼하고, 즐거운 일에 즐거워하고, 따분한 일에 따분해하고, 화가 나는 일에는 분노하고, 짜증나는 일에 짜증을 내며.

그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다양하게 반응하던, 도저히 만들어진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그 인간다운 모습에.

아마도 이 세계에 빙의한 그가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마주했을 그녀를, 안수호는 더 이상 단순한 소설 속 캐릭터로 치부할 수 없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면 뭔데?”

지예원이 묘한 기대와 함께 물었다. 그녀가 무엇을 기대하는지 안수호는 알고 있었다.

“그건…….”

다만 그 감정을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정확히는, 그 감정에 보답할 수 없는 스스로가 죄스러웠다. 지예원은 안수호를 사랑했지만, 안수호는 아직 자신의 감정에 확실히 정의내리지 못했으므로.

그런 주제에 입으로만 그녀가 원하는 답을 뱉는다 한들, 그것은 결국 그녀의 감정을 기만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했기에 대답을 망설였다.

“안수호. 네게 있어서 난 어떤 존재야?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슬쩍 몸을 일으킨 지예원이 그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 잔뜩 달아오른 취기에 반쯤 풀린,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가 그를 지긋이 올려다본다.

‘내게 있어서 지예원은…….’

어떤 존재인가. 오만 가지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친다.

“나는 있지.”

그러나 다음 순간. 지예원의 한 마디에 안수호의 뇌리에 차오른 상념들은 봄 눈 녹듯이 사라졌다.

안수호의 곁에 앉은 지예원이 무릎을 세워 제 팔로 감싸 안는다. 취기 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 발갛게 상기된 볼을 제 어깨에 기댄다. 비스듬해진 고개를 따라 애쉬그레이 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린다.

아찔한 샴푸향이 안수호의 코끝을 간질였다.

어색한 침묵 속 긴장감이 점차 고조된다. 안수호를 바라보며 입술만 달싹이던 지예원의 시선이 탁자 위로 향한다. 정확히는 자신의 잔에 채워진 투명한 술로.

­탓!

지예원이 술잔을 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독한 술에 가슴께가 뜨거워진다.

그 술 한 모금은 곧 한 줌의 용기가 되었다.

안수호와 마찬가지로 망설이고 있는 그녀의 등을 살며시 밀어주는.

그런, 한 줌의 용기가.

“나는…….”

그 한 줌 용기를 가슴에 품고.

지예원이 안수호를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나는, 너 좋아해.”

어떠한 비유도, 어떠한 은유도, 어떠한 암시도, 어떠한 숨김도, 어떠한 꾸밈도 없는 담백한 한 마디.

그 말에 안수호가 할 말을 잊었다. 아니, 할 말이 너무나도 많았다. 수많은 단어들이 그의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그러나 그 무엇도 입 밖으로 내어지지 않는다. 그저 하염없이 입 안을 맴돌기만 할뿐.

그런 그의 모습이 기쁘면서도 어딘가 안쓰러워, 지예원이 넌지시 그에게 물었다.

“내가 왜 널 좋아하는지 알아?”

“……내가 널 구해줬으니까?”

겨우 꺼낸 그 대답에 지예원이 배시시 웃는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 어떻게 사람이 목숨 한 번 구해줬다고 사랑에 빠져?”

술 한 모금이 화한 용기는 다만 그녀에게서 절제 또한 앗아갔다. 이 순간 지예원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들을 아무런 필터링 없이 내뱉었다. 그녀의 대답에 무안해하는 안수호를 보며 지예원은 다만 홀가분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있지. 너 자신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괜찮은 남자야. 주변에서 그런 말 안 해?”

“……전혀.”

안수호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러나 지예원은 안수호의 그 답변이 만족스러웠다.

“그럼 내가 첫 번째네. 네가 이렇게나 괜찮은 남자라는 걸, 내가 첫 번째로 발견한 거야.”

마치 대단한 업적이라도 이뤘다는 듯 지예원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꾸밈없는 웃음에. 그녀답지 않게 순진무구한 그 미소에.

­두근.

안수호의 가슴이 한 차례 크게 뛰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네가 내 질문에 답해줘.”

크게 심호흡한 지예원이 안수호에게 물었다.

“너는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너는 나를…….”

좋아하느냐고.

그렇게 물으려 했으나, 최후의 최후에 조금 전에 들이킨 용기가 다한 것인지.

“나를, 소중하게 생각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다소 애매한 물음이었다. 술김에 차올랐던 용기가 꺼지고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두려움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비록 안수호가 날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소중하게 여기고는 있겠지.

그런 안일한 생각에서 무심코 튀어나온 물음이었다.

“그래.”

그 안일한 물음에 안수호가 답했다.

“지예원. 너는 내게 소중한 존재야.”

질문이 애매했기에 답변도 애매했다. 해석하기에 따라선 인정으로도, 연정으로도 들리는 애매한 대답.

허나 그 애매한 대답에도 지예원은 방긋 웃었다.

‘……그래, 지금은 이걸로 됐어.’

그녀의 가슴을 죄던 긴장감이 풀리자 그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을 닦아주고자 안수호가 팔을 뻗은 순간, 그녀가 기습적으로 안수호의 품에 안겼다.

“지예원?”

“고마워.”

그리고 그 가슴에 고개를 묻은 채 그렇게 말했다.

“……내 인생에서 날 소중하다고 말해준 사람은 민아 말고는 네가 처음이야.”

안수호라면 그렇게 말해줄 거라 생각했다고. 역시 자신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고.

더욱 더 깊이 고개를 파묻는 지예원을 내려다보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안수호는 곧 그녀의 등에 살포시 손을 포개었다. 그러고는 우는 아이를 달래듯 그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따듯해.’

그 기분 좋은 감촉에 지예원의 표정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누군가의 품에 이렇게 마음 놓고 안겨본 게 얼마만인가. 그녀를 소중히 여겨준 자가 김민아 밖에 없었듯, 그녀에게 품을 내어준 자 역시 김민아 밖에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하염없이 풀어졌던 그 얼굴에 그늘이 진다.

“왜 그래?”

그 기색을 느낀 안수호가 묻자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해서.”

자신과 함께 여명단을 배신하고, 그러나 자신과 달리 놈들의 손에 붙잡혀 지금도 고통받고 있을, 어쩌면 죽었을 지도 모를 민아에게 너무나도 미안해서.

유일하게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었던 민아는 고통에 빠져 있는데 자기 혼자 마음 편히 행복해지려는 것이 너무나도 미안해서.

민아를 생각하면 자신은 결코 행복해져선 안 된다고. 민아를 찾기까지 자신은 결코 행복을 쫓아선 안 된다고. 하루에도 수십 번을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지금 너의 품에 안긴 것이. 너에게 기댄 것이. 민아에게 너무나도 미안하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절절하게 토해낸 그 고해성사에 안수호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쓰다듬으며, 담담히 그녀를 위로하는 말을 천천히 읊어나갔다.

그녀가 여명단에 붙잡힌 건 네 탓이 아니라고.

그녀에게 닥친 불행이 너 자신의 행복을 마다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고.

아마 그녀도 너의 행복을 바라고 있을 거라고.

그럼에도 마음이 편치 않다면 반드시 구해내자고.

자신이 도와주겠노라고.

그러니 지금은 마음 편히, 마음껏 자신에게 기대라고.

뻔하디 뻔한 위로였으나 진심이 담겨있기에 마음을 울리는 위로였다. 특히 마지막에 안수호가 말한, 마음껏 자신에게 기대라는 그 말에 지예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을 느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그녀의 심장이 재빠르게 뛰었다.

지예원은 여전히 안수호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은 채였다. 은은한 비누향이 그녀의 코끝을 간질인다. 살며시 고개를 돌려 뺨을 그 가슴에 대자 생각보다 탄탄한 감촉이 느껴진다.

문득 지예원이 고개를 들자 그녀를 내려다보던 안수호와 눈이 마주쳤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이 심장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두 사람 다 분간이 가지 않았다.

점차 고조되어 가는 분위기에 지예원이 살며시 물었다.

“……조금 더 기대도 돼?”

그 물음에 안수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꽈악.

안수호의 목에 지예원이 팔을 휘감는다. 빈틈없이 밀착한 두 사람의 숨결이 따스하게 섞인다. 너나 할 것 없이 알싸한 알코올 향이 가득한 숨결.

그 숨결을 삼키려는 듯, 살며시 입을 벌린 지예원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 입술을 안수호에게 포개었다.

“아.”

입술과 입술은 채 1초도 지나지 않아 떨어졌다. 고개를 뒤로 물린 지예원의 뺨이 사과처럼 달아올랐다. 자신이 먼저 입술을 내밀었으면서, 당황하기로는 안수호보다 더욱 당황한 모습이었다.

‘……첫 키스였는데.’

몽롱한 와중에 무심코 내지른 첫 키스는, 쓰디 쓴 위스키 맛이었다. 입술에 남은 여운을 혀로 핥으며 그녀가 살며시 이마를 안수호의 가슴에 대었다.

“지예원. 너…….”

안수호의 당황섞인 말에 지예원은 첫 키스의 여운을 즐길 새도 없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혹 자신의 돌발 행동에 불쾌해하지는 않았을까 하며.

“싫었어?”

라고 당돌하게 물었다. 그 당돌함에 당황한 안수호는, 이내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싫지 않았어.”

“응. 다행이다.”

그 대답에 지예원이 웃었다. 그녀의 가슴에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그것은 기쁨이요, 만족감이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안이기도 했다. 지금 이 행복한 순간이 그저 술기운에 의해 만들어진 신기루가 아닌가 하는 불안.

“있지. 오늘 하루만 너한테 어리광부려도 될까?”

그래서 지예원은 그 신기루를 붙잡으려는 듯, 더욱 안수호에게 매달렸다.

"어리광?"

"응. 오늘 하루만큼은 마음 편히 다 잊고 싶어."

김민아에 대해서. 여명단에 대해서. 민채령에 대해서. 그 외 온갖 문제들에 대해서.

그런 복잡한 사정들, 오늘 하루만이라도 전부 잊고 싶다고. 잊을 수 있게 해달라고.

안수호에게 안긴 채 달뜬 숨을 토해내며 지예원이 그를 올려다봤다. 뿌리치려면 진즉에 뿌리칠 수 있고 밀어낼 테면 진즉에 밀어낼 수 있었을 텐데도 안수호는 그러지 않았다.

그 태도가 지예원에게 자그마한 용기를 불어넣어줬다.

"그러니까……."

그와 일선을 넘을 수 있는 자그마한 용기를.

“…………나랑,할래?”

조심스럽게 뱉은 그 제안에 안수호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그야 갑작스럽겠지. 그야 당황스럽겠지. 그야 놀랄 수밖에 없겠지.

자신의 제안이 갑작스럽고 충동적이라는 것쯤 지예원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그렇게 말했다. 기왕 그에게 마음을 고백한 거, 이 술 기운이 날아가기 전에 그와 일선을 넘고 싶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불안했다.

불안.

그래, 이 갑작스런 제안은 순전히 그녀가 느끼는 불안 때문이었다.

지예원도 눈치가 있었다. 안수호가 자신의 고백에 당황하고고민하고 있다는 것쯤 뻔히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대답을 재촉할 때자신을 사랑하느냐 묻지 않고, 애매하게 자신이 소중하냐고 물었다. 행여나 거절당할까 두려워서.

그 결과 애매한 질문이었기에 애매한 답을 들었다. 그렇기에 비록 말로는 확답을 들어내지 못했을지언정, 몸으로나마 확신을 채우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런 자신의 행동이 그에게 부담을 지우는 행위라는 건 알고 있었다.

단순히 좋아하노라고 고백하는 것과 몸을 겹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으니까. 게다가 자신은 곧 민채령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그의 곁을 떠난다. 행여 자신이 그 임무에서 죽기라도 한다면? 오늘 자신과 일선을 넘었던 그는 자신의 죽음에 더더욱 괴로워할 것이다. 오늘 자신이 그에게 쏟은 사랑의 무게가 온전히 후회와 죄책감으로 화하여 그의 어깨를 짓누를 것이다. 안수호라면 그럴 것이다. 안수호는 그런 남자였으니까.

그렇기에 어리광이었다.

한없이 고조된 감정에 의한 충동적인 결정이자, 오래도록 받지 못했던 애정에 대한 필사적인 갈구였다. 그렇기에 어리광, 그야말로 이기적인 결정이었다. 안수호의 감정 따위 고려치 않고, 그저 그녀 자신이 원하기에 내린 이기적인 결정.

이기적인.

어리광.

“……그냥 가볍게 생각해.”

설령 내일 아침 그가 자신의 고백을 거절하더라도.

“젊은 남녀 둘이 술에 취해 한 방에 있는데, 몸을 겹치는 게 이상한 건 아니잖아.”

술기운을 핑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발뺌하더라도. 오늘 밤의 일을 취기에 의한 단순한 헤프닝으로 치부한다 하더라도.

“피차 술에 떡이 되도록 마셨으니, 어차피 내일이면 기억하지 못할 거야.”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확실하게 뇌리에, 이 몸에 남을 흔적을 새기고 싶어서.

“응.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괜찮아. 오히려 기억하지 못하는 게 좋을 지도.”

설령 거절당한다 해도 오늘 하루만큼은 그의 품에 안기고 싶어서. 오늘 하루만큼은 이 연정에 보답 받고 싶어서.

“기억하지 못한다면, 후회도 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기에 내린 이기적인 결정이었다. 순전히 자기만족을 위한 충동적인 어리광이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안수호가 조금이나마 부담을 덜 수 있도록. 네가 내 고백을 진지하게 받아주는 게 어렵다면, 그저 하룻밤의 어리광, 하룻밤의 불장난으로 치부해도 된다고. 만약 네가 그런다면 나 역시 오늘 밤의 일을 깔끔히 잊겠노라고.

“그러니까 오늘 하루만. 내 어리광을 받아줄래?”

간절한 물음.

기대감과 죄책감을 함께 지닌 채 던진 그 간절한 물음에 안수호가 잠시 고민했고.

“……기억을 못할 리가 없잖아.”

이내 안수호가 담담히 그렇게 대답했다. 그의 손이 살며시 지예원의 등과 목덜미를 받친다.

“이렇게 강렬한 기억을 어떻게 잊겠어.”

이내 두 사람의 입술이 부드럽게 포개어질 때, 지예원의 얼굴엔 안도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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