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068. 한 개의 물음과 한 줌의 용기.
* * *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
문득 뇌리를 스친 속담에 안수호가 채소연을 바라봤다. 실로 이 상황에 적절한 말이었다. 눈앞에 있는 채소연은 딱히 얌전하지도, 고양이도 아니었다만. 가장 먼저 뻗을 것 같던 그녀가 약삭빠르게 이 술자리를 주도하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저 속담만큼 적절한 비유도 없구나 싶었다.
“으윽.”
안수호가 메스꺼운 속을 달래며 가슴께를 문질렀다. 그의 왼편에는 강하늘이 발개진 얼굴로 입을 가리고 있었고, 오른편에는 지예원이 반쯤 남은 술잔을 쥔 채 힘겨운 한숨을 푹 내쉬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안수호의 맞은편에 앉은 채소연이.
“뭐해? 얼른 마시지 않고? 원래 벌주는 원샷으로 마시는 건데 특별히 봐준 거다?”
하며 얄밉게 웃는다. 알싸하다 못해 역하기까지 한 알코올 향에 진저리를 치던 지예원이 결국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잔을 들이킨다.
꿀꺽.
그녀의 울대가 요염하게 맥동했다. 크으으, 하고 고통 섞인 신음을 뱉은 그녀가 채소연을 째릿 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채소연은 히히덕거리며 술병을 가리킬 뿐이었다.
“자, 그럼 다음 질문자 정하자! 이번엔 누가 돌릴래?”
“……제가 할게요.”
강하늘이 술병을 돌렸다. 탁자 위에서 덜덜덜 소리를 내며 뱅그르르 돌던 주둥이가 이내 멈춰 채소연을 가리킨다. 그러자 채소연의 입가에 진한 웃음이 떠올랐다.
반면, 다른 세 사람의 얼굴은 더욱 창백하게 물들었다. 술병을 돌린 강하늘이 그럼 그렇지 하며 한숨을 내쉰다.
“또 나야? 헤헤. 나만 질문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네. 그럼 이번엔 누가 걸리려나? 에헤헹.”
채소연이 술병을 잡고 다시 한 번 돌렸다. 남은 세 사람의 얼굴에 긴장감이 스친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그 순간 우연하게도 세 사람의 뇌리에 동일한 감상이 떠올랐다. 뱅그르르 돌아가는 술병을 보며 안수호가 조금 전의 일을 복기한다.
……30분 전. 질문자의 순번을 시계방향으로 하냐 반시계방향으로 하냐에 대해 의견을 좁히지 못하던 강하늘과 지예원은 결국 새로운 규칙을 제정했다. 바로 질문을 하는 질문자 역시 술병돌리기로 정한다는 규칙이었다.
거기까진 별 거 아닌 헤프닝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두 번째 질문자를 고르는 술병돌리기. 그 술병을 돌린 건 첫 질문자였던 채소연이었다. 그 결정엔 누구의 이견도 없었다. 채소연은 이곳에 자리한 모든 이의 암묵적 동의 하에 희희낙낙하며 술병을 돌렸다. 결과 그녀는 두 번째 질문자가 되었고, 지예원의 팬티 색깔을 물어 그녀에게 벌주를 먹였다.
거기까진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 헤프닝이었다. 허나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어지는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질문에 이르기까지. 질문자를 정하는 술병은 여지없이 채소연을 가리켰다. 그쯤 되자 나머지 세 사람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에 술병을 다른 사람이 돌려도 보고 술병을 바꿔도 보았으나, 기이하게도 질문자를 정하는 술병 주둥이는 계속해서 채소연만 가리켰다.
그것이 벌써 13번째.
수상할 정도로 운이 좋은 채소연의 주도 하에 그간 안수호에게 세 번, 지예원에게 네 번, 강하늘에게 여섯 번의 질문이 건네졌다. 그리고 세 사람은 그 대부분의 질문에 벌주를 마셨다.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채소연의 질문은 좋게 말하면 치명적이요, 나쁘게 말하면 잔인했다. 가령 그녀가 안수호에게 던진 질문 중 하나 꼽자면…….
‘강하늘은 예지원보다 가슴이 크고 예지원은 강하늘보다 엉덩이가 크네! 그럼 안수호! 넌 가슴파야 엉덩이파야?’
……따위의 질문을 던지는데 두 여성진의 사이를 신경 쓰는 안수호가 어떻게 답변하겠는가. 채소연은 비록 멍청했으나 남을 곤란하게 만드는 데에는 도가 텄다. 그 결과 96도라는 미친 도수를 자랑하는 스피리터스는 진즉에 다 비워지고 지금은 남은 술을 적절히 섞어 벌주를 만들고 있는 지경이었다.
이쯤 되면 슬슬 그만두자고 하는 사람이 나올 법도 했으나 안수호를 제외하곤 이 상처뿐인 게임을 그만두고자 하는 이가 없었다. 채소연은 자신이 즐거우니 그만둘 리가 만무했고, 지예원과 강하늘은 각각 상대방에게서 안수호와의 관계에 대한 진실을 들어내겠다는 일념 하에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안수호 혼자 게임을 끝내자고 해봤자 들을 턱이 없었다.
“오케이! 이번엔 예지원이네! 잠깐만 있어봐! 지금 질문 생각할 테니까!”
다만 지예원이나 강하늘로서는 채소연의 독주가 마냥 달갑지 않을 뿐이었다. 이런 페이스로 벌주를 마셔대다간 자칫 상대보다 먼저 뻗어버릴 지도 모르니.
"헿."
그러나 그들의 우려는 곧 해결되었다. 계속해서 남들만 벌주에 걸리자 심심해진 채소연이 제 혼자 술잔을 꺾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아서 취해 쓰러진 것이다.
“으흐, 흐헹……. 또 내 차례지롱……. 헤헤헹…….”
눈동자가 뱅그르르 돌아간 채소연이 쓰러지듯 뒤로 누웠다. 용인 상태라면 어지간한 취기는 버틸 수 있었겠다만 변신은 진즉에 풀린 뒤였다. 그때가 딱 채소연이 스무 번째 질문 권한을 잡은 순간이었다.
벌렁 드러누운 채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는 채소연을 보며 안수호가 점잖게 말했다.
“소연이도 쓰러졌으니까 슬슬 이쯤에서 마무리”
“무슨 소리야. 이제 시작인데.”
“맞아요. 아직 밤은 길거든요?”
즉답이었다. 둘 다 아직 한 번도 질문자가 되어보지 못했는데 그만둘 리가 만무했다. 안수호의 의견을 가볍게 묵살한 두 사람이 동시에 술병을 잡으려 했다. 곧 눈이 마주쳐 서로 눈치를 보던 두 사람이 넌지시술병을 안수호에게 건넸다.
안수호가 불편한 얼굴로 신음을 흘렸다. 취기도 취기지만 방파제 역할을 하던 채소연이 뻗어버린 지금, 이 이상 진실게임 따윌 했다간 이 둘 사이에 사단이 나도 단단히 날 거라 생각했다. 하여 제 앞에 놓여진 술병을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자 두 사람이 눈을 있는대로 부라렸다. 이에 결국 마지못해 술병을 돌린다.
팽그르르르.
스물한 번째 질문자를 고르는 룰렛이 팽그르르 돌아가고.
이내 그 주둥이 끝이 지예원을 가리켰다.
“좋아. 돌린다.”
잠시 후 주둥이가 가리킨 것은 강하늘. 즉 지예원이 강하늘에게 질문을 할 권리를 얻은 것이었다. 드디어 이 순간이 왔다고. 크게 심호흡한 지예원이 강하늘을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강하늘."
그녀의 부름에 강하늘이 지예원과 눈을 맞췄다. 입술을 달싹이며 뜸을 들이는 것이 도대체 무슨 질문을 하려는 것인가 괜히 불안해졌다.
“혹시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좋아하는 사람 있어?”
그리고 이내 그 질문을 들은 순간 강하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놓고 안수호를 좋아하느냐 물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 질문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이 자리에 남자라곤 안수호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질문을 받은 강하늘이 긴장감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것은 지예원도 마찬가지였다. 한 명은 제 마음을 밝히는 것이 긴장되었고 다른 한 명은 그 마음을 알게 되는 것이 긴장되었다.그리고 그 두 사람 사이에 낀 안수호 역시, 점차 고조되는 분위기에 마른 침을 삼켰다.
“저는…….”
바알간 홍조를 띤 채 강하늘이 말끝을 흐렸다.
그냥 말해버릴까. 이 자리를 빌어 안수호 당신을 좋아하고 있노라고. 그렇게 눈앞에서 밝혀버릴까. 그리하면 그는 자신의 마음을 받아줄까. 그리하면 눈앞의 이 여자는 더 이상 그에게 접근하지 아니할까. 오만가지 생각이 강하늘의 뇌리를 스쳤다.
강하늘이 제 앞에 놓인 술잔을 바라봤다. 거짓말로라도차마 좋아하는 이가 없다고 대답하기는 꺼려졌다. 그렇다면 남은 건 있다고 대답하거나 벌주를 마시는 건데, 그 둘에 무슨 차이가 있나 싶었다. 자신이 답변을 회피하여 벌주를 들이킨다 한들 안수호든 지예원이든 자신의 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차라리 깔끔하게 밝히자. 당당하게 안수호를 좋아하고 있노라고 대답하자. 그렇게 생각했으나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목소리가 나오지를 않았다. 불안 때문이었다.
그래. 불안.
자신이 안수호를 좋아한다고 밝혔을 때, 그가 혹 자신을 거절하지는 않을까 하는.
어쩌면 안수호는 이미 눈앞의 여자와 그렇고 그런 사이고, 자신은 그저 친한 여자 후배 내지는 동생이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고.
스멀스멀 올라와 가슴을 옥죄어오는 이 불안감에 차마 그를 좋아한다고 당당히 말할 수가 없었다. 기실 한 마디 내뱉고 한 걸음 내딛을 한 줌의 용기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 그녀에겐 그 한 줌 용기가 없었다.
벌컥!
결국 강하늘은 벌주를 들이켰다. 현실 도피였다.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질문에 부정하지 않은 시점에서 안수호든 지예원이든 이미 그녀의 속뜻을 짐작했으리라. 다만 그녀가 직접 밝히지 아니했으니 저들도 입 밖으로 꺼내기가 무안하리라. 강하늘이 노린 게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명백하게 밝히지만 않는다면 행여 안수호로부터 거절을 당할 일도 없다.적어도 최악의 경우는 면할 수 있다. 그러한 현실 도피였다.
“…….”
그 신중하면서도 미련한 결단에, 지예원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제가 돌릴게요.”
잔을 비운 강하늘이 비틀거리는 손놀림으로 술병을 돌렸다. 그녀의 눈은 이미 흐릿하게 풀려 있었다.그간 마신 벌주에 더해 방금 그 한 잔이 결정타였다. 아바타 능력을 사용해 한 번 취기를 리셋했음에도 강하늘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다다랐으나, 무겁기만 한 머리를 한 손으로 받친 채 술병을 돌렸다. 느릿느릿하되 필사적인 움직임이었다.
술병의 주둥이는 그녀 자신을 가리켰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돌리자 공교롭게도 지예원을 가리켰다.
강하늘은 지예원에게 질문할 권리를 얻었다. 지예원은 그 질문을 결코 피해선 안 됐다. 그렇게 합의된 자리였다. 적어도 강하늘이 조금 전 지예원의 질문을 받아준 이상, 지예원 또한 그리 해야만 도리에 맞았다.
“지원 언니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이 하염없이 입안을 맴돈다. 이번에도 그녀에겐 한 줌 용기가 부족했다. 부족했으나, 다만 취기를 빌어 툭 내던지듯이 그녀에게 물었다.
“지원 언니야말로, 이중에 좋아하는 사람 있으세요?”
그 물음에 지예원이 고개를 숙였다. 고민했다. 고민하다 고개를 들고는 애먼 천장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려 강하늘을 바라보다, 탁자 옆에 즐비하게 늘어선 술병을 바라보다, 헤벌레한 얼굴로 뻗은 채소연을 바라보다, 이내 곤란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안수호를 바라봤다.
오만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반면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아니. 나는 없어.”
지예원이 방긋 웃었다. 웃긴 웃었다만 씁쓸한 웃음이었다. 안수호는 그 대답이 과연 진실인가 의심했다.
당연히 거짓이었다. 지예원은 안수호에 대한 연심을, 비록 작디 작은 연심일지언정 자신이 그를 이성으로서 좋아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거짓을 읊었다.
애초에 고작 이런 술게임에 강제성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거짓으로 답하고자 한다면 거짓을 말하지 못할 게 무엇인가.
그러나.
“헷. 그래요?”
강하늘은 그 거짓된 답변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강하늘이 헤벌죽 웃었다. 그것이 취기가 올라 사리분별조차 못한 끝에 나온 어리석은 웃음인지, 혹은 지예원의 고민과 속내를 짐작한 끝에 지은 승리의 미소인지. 지예원도, 안수호도, 강하늘 본인조차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웃음에 지예원은 더욱 낯빛이 썩어들어 갔다.
털썩.
곧 강하늘이 만족했다는 얼굴로 풀썩 탁자 위에 고개를 박았다. 팟! 하고 옅은 빛이 터지며 그녀의 능력이 풀렸다. 허나 깨어날 기미는 없었다.마치 잠에 든 것처럼 고른 숨소리가 작게 새어나온다. 곧 두 사람은 강하늘이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곯아떨어졌음을 알아차렸다.
…….
갑작스레 소강상태에 접어든 술자리에 적막이 흐른다. 지예원과 안수호는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애먼 탁자니 바닥만 볼 뿐이었다.
“……축하해.”
이내 먼저 입을 연 것은 지예원이었다. 여전히 안수호에게 눈은 마주치지 않으면서, 제 술잔 밑에 깔린 약간의 술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안수호가 물었다.
“뭐가?”
“방금 내가 던진 질문. 아니라면 아니라고 하면 될 거 굳이 벌주를 마신 이유가 뭐겠어. 제 입으로 너 좋아한다 말하기 부끄러우니까 마신 거겠지. 뻔한 이야기잖아?”
“…….”
“네 살 차이는 궁합도 안 본다던데, 잘 됐다, 잘 됐어.”
그렇게 말하는 지예원의 목소리는 어딘가 힘이 없었다. 서글퍼하는 것 같기도 했고 무언가 체념한 듯도 하였다. 안수호가 그 안색을 살피려 했으나 지예원은 고개를 반대로 돌린 채 한사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지예원. 나는”
“그나저나 얘네는 어쩌냐. 오늘 우리 집에서 누구 재울 계획은 없었는데. 일반 이부자리부터 펴야겠다.”
지예원이 안수호의 말을 일부러 끊었다. 애써 안수호에게 시선을 향하지 않으려 하며,그녀가 붙박이장에서 이불을 꺼내 바닥에 깔았다. 그리고 그 위로 반쯤 잠이 든 강하늘과 채소연을 옮겼다.
“나도 도와줄게.”
“됐어. 아무리 취해서 잠들었어도 여자애들인데 네가 손대긴 그렇잖아.”
그 말에 안수호는 문득 지난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지예원과 처음 만났던 날. 채소연의 테이저 건에 기절한 그녀를 자신이 손수 옆방까지 옮겼었다. 어디 그뿐인가. 소변으로 범벅이 된 옷을 갈아입히고 직접 씻기기까지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찐득하게 말라 찌든 내가 나는 옷을 그대로 입혀둘 순 없잖은가. 하필이면 동성인 채소연이 옷가지를 가지러 간다며 떠나기도 했고.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낯이 뜨거워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기절했을 때 네가 날 여기까지 옮겨줬었지.”
무슨 우연인지 때마침 지예원도 같은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기절했다 깨어났더니 낯선 방에, 하의는 다 벗겨진 채 이불 한 장만 덮고 있었을 땐 얼마나 당황했는지. 그녀가 슬쩍 안수호에게 시선을 향하자 그가 멋쩍은 듯 고개를 살짝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게 벌써 거의 두 달 전이네."
‘그 때만 해도 이런 사이가 될 줄은 몰랐는데.’
그는 아카데미 경비원이고 자신은 극악무도한 범죄조직의 일원. 이해득실이 맞아 일시적으로 협력하긴 한다만 결코 친한 사이가 되리라곤 생각지 아니했다.
헌데 지금 상황을 보라. 두 사람은 자취방에서 허물없이 술잔을 기울일 정도로 친해지지 않았는가.
지예원이 가만히 안수호를 바라봤다. 여명단을 떠나고 가장 친했던 친구의 행방마저 묘연한 지금, 안수호는 그녀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상대요, 가장 친하다 자부할 수 있는 이였다. 친구라 하면 아카데미에 잠입했을 적 의례적으로 사귄 동기들이 있긴 하였으나 그 누구에게도 그녀는 마음을 터놓지 아니했다. 반면 눈앞의 남자에게는 어쩌다 보니 속에 품고 있던 온갖 감정을 다 털어놓게 되었다. 물론 전부 털어놓은 것은 아니었다만…….
‘만약 지금 털어놓는다면…….’
넌지시 안수호를 바라보며 지예원이 생각했다.
강하늘이 잠든 지금, 만약 자신이 그에 대한 마음을 고백한다면.
강하늘이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하지 못한, 내가 너를 좋아하고 있다는 그 말을 지금 입에 담는다면.
만약 그리 한다면 눈앞의 남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의 고백을 받아줄까. 아니면 거절할까. 조금 전 강하늘이 벌주를 마셨을 때 안수호의 반응을 생각해본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안수호는 강하늘에게 어느 정도 마음이 있어 보였다. 반면 그녀 자신에 대해서는?
‘자기 목숨을 남의 손에 맡기다니, 지금 제정신입니까? 그깟 자유가 뭐라고!’
지예원은 이 원룸에 이사 온 첫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민채령에게 목숨이 저당 잡힌 자신의 처지에 마치 제 일처럼 분노하고 우려를 표하던 안수호의 모습을. 그답지 않게 격한 감정으로 일그러진 그의 표정을 떠올렸다.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그 모습이 기뻤다. 그러나 그 이유를 물었을 때 대답을 망설인 그의 태도가 서글펐다. 네가 경비원이고 내가 학생이기 때문에 날 걱정해주냐는 비아냥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것이 아쉬웠다. 물론 이유가 비단 그것만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그가 자신을 걱정하는 이유에 대해 달리 대답해주었으면 했다.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으나 지금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당시 자신은 그에게서 연정만을 갈구한 게 아니었다. 자신은 그를 통해 정신적인 안식처를 찾고자 했다. 평생 몸담았던 조직을 배신하고, 가장 친했던 친구마저 잃어, 의탁할 이 하나 없던 당시의 그녀는 안수호에게 기대는 것으로, 어리광부리는 것으로 심신의 안정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감정, 자신의 요구.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무릇 일방적이면 안 되는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이에게 무작정 기대고 감정을 쏟는다 한들 그것이 짐밖에 되지 않으리란 걸 지예원은 잘 알고 있었다. 즉 중요한 건 그녀의 감정이 아닌, 눈앞의 남자가 그녀에게 어떠한 감정을 품고 있느냐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안수호는.’
눈앞의 남자는, 내가 힘들어 기대고자 하면 마땅히 그 가슴을 내어줄 것인가.
아마 기꺼이 그 가슴을 내어줄 테지. 힘들다 하면 위로해주고 괴롭다 하면 보듬어줄 테지. 겉으로는 늘상 틱틱 대지만 안수호란 그런 남자였으니까.
다만, 그 친절이 연정이 아닌 동정에서 비롯된 것일까봐 겁이 났다. 그저 인간된 도리로써 자신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아닌가 두려웠다. 동정에서 비롯된 친절과, 인내와, 배려에는 한계가 있을 테니. 이를 깨닫지 못하고 하염없이 안수호에게 의지하고 그에게 기대고자 하면, 결국 자신은 그에게 귀찮은 존재로 여겨지지 않을까.
그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그 두려움도 술기운이 오른 지금이라면 무시할 수 있을 듯 했다. 취기에 못 이긴 척, 무심코 말해버린 척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고자 한다면, 못할 것도 없다 생각했다.
“안수호.”
지예원이 안수호를 불렀다. 붉게 달아오른 뺨과 달리 착 가라앉은 그 음성에 안수호가 표정을 가다듬는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네 방으로 가도 될까?”
정적.
“……그래.”
곧 안수호가 반쯤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긍정에 지예원은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되었다. 그녀가 고개를 홱홱 가로저으며 애써 근심을 지우려 노력했다.
술자리의 흔적을 대충 정리한 두 사람은 자고 있는 이들을 배려하여 불을 꺼준 뒤 조용히 옆방으로 넘어갔다.
불이 꺼진 원룸 안, 잠에 취한 두 여성의 숨소리만이 곤히 울려 퍼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