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067. 술이 들어간다(2)
* * *
부디, 이 갑작스러운 전개의 결말이 파국만은 아니기를.
그렇게 빌었으나 내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나를 엿 먹이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었다.
“예원아 안녕!”
“……어?”
“이런 씨ㅂ”
원룸에 들어서자마자 채소연이 밝은 얼굴로 외쳤다. 눈치 없는 채소연의 행동에 욕지거리를 삼킨다. 채소연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끝에 있는 지예원은 한껏 당황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불린 것뿐인데 당황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이 순간, 지예원은 지예원이 아닌 예지원이라는 별개의 인물이었으므로.
“……예원?”
아니나 다를까 지예원을 예지원으로 알고 있는 강하늘이 고개를 갸웃했다. 가늘게 찢어진 그 눈이 의심스럽다는 듯 지예원을 훑는다.
“예……원! 예지원! 예지원을 줄여서 예원이라 부른 거지?! 그렇지 채소연?!”
“엉?”
그렇게 외치며 채소연의 어깨를 꽉 붙든다. 내 의사가 제대로 전달되도록.
“어, 어어어어! 맞아! 예지원이니까 예원이! 나, 나는 채소연이니까 채연이! 아, 안수호는 그러니까, 어, 아, 안호……?”
채소연의 눈이 뱅그르르 돌아간다. 어설픈 연기였지만 그녀치곤 괜찮은 대응이었다.
“그래! 그, 아무튼! 너 그 아무한테나 이상한 별명 붙이는 버릇 좀 고치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냐!”
“으, 으응! 고, 고쳐야지! 고칠게! 고치도록 노력할게! 에헷. 에헤헤헤…….”
“아하하하하!”
서로 마주선 채 웃기 시작한 우리 둘을 강하늘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래, 차라리 이쪽을 이상하게 여기는 게 지예원에 대해 의심하는 것보단 나았다.
“……얼른 들어와서 앉기나 해. 수호 너는 접시 두 개만 더 놔주고.”
지예원의 핀잔에 우리 새 사람이 원룸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가며 채소연에게 째릿 눈짓을 주자 그녀가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으며.
“에, 에헤헤?”
하고 웃었다.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웃음이었다.
딱콩!
“악! 왜 때려!”
“……정신 좀 차리라고.”
“이씌!”
채소연이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뭐라 불평하진 못하는 게 제 잘못을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불안하네.’
비단 채소연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이 상황 자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지예원, 강하늘, 채소연 이 세 사람이 한데 모인 이 상황이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무언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날 것 같다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며 나는 탁자 앞에 앉았다.
***
갑작스럽게 성사된 술자리.
먹음직스러운 안주와 술로 가득한 탁자를 중심으로 둘러앉은 네 명의 남녀는 각기 다른 생각과 목적을 품고 있었다.
‘분명 이번에도 안수호가 쟤를 구했다고 했지.’
먼저 지예원. 그녀가 두 눈을 게슴츠레 뜨며 강하늘을 흘겼다. 그녀는 채소연으로부터 안수호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번 사건의 대략적인 전개도 함께 들었다. 다른 건 다 생략하고 안수호에 대해서만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갑작스러운 위기 상황에, 안수호가 목숨을 걸고 강하늘을 또다시 구해냈다.
……그래. 또다시.
안수호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강하늘 때문에 죽을뻔했다. 한 번은 우연이라 쳐도 두 번이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지 않은가. 경비대원이 학생을 위해 제 목숨의 위기마저 불사한다.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적어도 지예원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생각하길, 안수호와 강하늘은 평범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남녀 간에 평범한 사이가 아니라는 건 즉,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뜻이리라.
‘오늘 이 자리에서 확실히 추궁해봐야겠어.’
지예원이 자신의 뒤편이 늘어서있는 술병들을 살짝 흘겼다. 하나같이 3, 40도를 가뿐히 넘기는 도수 높은 술들. 초인이 대체적으로 일반인보다 주량이 세긴 하다만 이 정도면 충분히 취하게 만들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그녀의 집에 있던 저 술들의 용도부터가 그녀 스스로 취하기 위함이었으니까.
“……일단 첫잔부터 돌릴게.”
술자리의 개시를 알리는 샴페인을 따르며 지예원이 그렇게 말했다. 그 눈은 일견 평온해보이나, 기실 끊임없이 강하늘과 안수호의 기색을 살피는 중이었다.
“감사합니다.”
지예원이 건넨 잔을 받으며 강하늘이 꾸벅 인사했다. 머릿속이 복잡한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여자 뭐야? 분명 그냥 옆집 사는 이웃이라 그러지 않았어?’
저번 데이트 날, 안수호가 했던 말을 곱씹는다. 눈앞의 여자, 예지원은 분명 그저 옆집에 사는 친절한 이웃에 불과할 터. 헌데 그런 상대와 퇴원하자마자 저녁 식사를 한다고? 게다가 술까지 마시면서? 그것도 여자 쪽 자취방에서 단 둘이?
이웃 간의 돈독한 정으로 치부할 상황이 아니었다. 강하늘이 감히 짐작하길, 두 사람은 보통 사이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남녀 간에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건 즉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뜻이리라.
‘분명 오빠가 저번에 자긴 여자친구 없다고 그랬는데? 설마 그 말이 거짓말이었나? 아니면 여자친구는 아니지만 긴밀한 관계라든가?’
그 순간 강하늘이 무언가 이상한 사실을 하나 눈치 챘다.
‘뭐야, 둘 다 방금 씻은 건가……?’
지예원으로부터 풍겨오는 은은한 샴푸 향. 그리고 아직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는 안수호의 머리카락.
그것들을 발견한 순간 불현듯, 강하늘의 뇌리에 새로운 가능성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둘 다 다 큰 성인인데 꼭 연인 사이라는 법은 없잖아. 예, 예를 들어서 섹스 프렌드라거나……?’
낯뜨거운 생각에 강하늘의 귀가 빠알갛게 익기 시작했다. 그녀가 불편한 얼굴로 다소곳하게 오므려진 허벅지를 살살 비볐다. 핫팬츠 아래로 딱 달라붙은 허벅지 사이에는 긴장감으로 인한 식은땀이 흥건했다.
‘……뭐가 됐든, 오늘 두 사람의 관계가 뭔지 기필코 알아내고야 말겠어.’
강하늘이 소리 없이 다짐했다. 그런 그의 안색을 살피던 안수호가 남 몰래 한숨을 내쉰다.
‘딱 보니 둘 다 서로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하군. 조금만 삐끗하는 순간 파국이다.’
파국이라고 해봐야 서로 죽자고 싸워대진 않겠지만, 머리채 정도 뜯는 상황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었다. 지예원의 뒤에 잔뜩 늘어선 술병들을 보며 그가 생각했다.
‘최악의 경우는 저 둘이 잔뜩 취해서 서로 싸워대는 거야. 고로 술자리가 너무 과열되지 않게 내가 조절해야 해. 여차하면 채소연한테 술을 몰아줘서라도 저 둘이 취하는 것만은 반드시 막는다.’
살얼음판 같은 긴장감 속, 이 위기를 반드시 극복해보이겠노라고 안수호가 주먹을 꽈악 쥐었다.
한편, 그의 맞은편에 앉은 채소연은.
“에헷. 소세지 맛있당.”
행복한 얼굴로 부대찌개 속 소세지를 욤뇸뇸 먹고 있었다. 말랑말랑한 볼이 보기 좋게 부풀어올랐다.
그 꼴을 보던 지예원이 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첫잔이니까 건배부터 하자. 안수호의 퇴원을 축하한다는 의미도 겸해서.”
그녀가 샴페인이 든 유리잔을 들자 안수호와 강하늘이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채소연도 눈을 땡그랗게 뜨며 잔을 들어올렸다.
“자, 짠!”
챙! 하고 울리는 네 개의 유리잔. 번거로운 건배사 따위 없었다. 지예원과 강하늘이 재빠르게 자신의 잔을 비웠다. 안수호의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린다.
“예기치 못한 자리지만 기왕 모인 거 즐기자고. 마침 술도 잔뜩 있겠다, 서로 허심탄회하게 그간 못했던 이야기들도 하고 말이야.”
새 술병을 연 지예원이 곧바로 강하늘의 잔을 채웠다. 갈색 럼주가 알싸한 알코올 향과 함께 꿀렁꿀렁 차오른다.
“그러니까, 강하늘 씨라고 했나요? 저번엔 미안했어요. 그날 제가 이래저래 안 좋은 일이 많았어서, 손님으로 온 그쪽한테 보여선 안 될 태도를 보였네요.”
“아뇨. 그날은 저도 성숙하지 못했는걸요. 서로 쌤쌤으로 쳐요.”
“그래요. 모처럼 이렇게 술자리를 가졌는데 지난날의 앙금은 술과 함께 털어버리도록 하죠. 아, 술은 좀 드시나?”
“조금?”
지예원으로부터 술병을 받은 강하늘이 반대로 지예원의 잔을 채워줬다. 샴페인이 담겼던 잔에 곧바로 럼주를 따르고 있었으나 둘 다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두 사람의 관심은 오로지 상대방을 취하게 해 그 틈을 타 진실을 들어내는 것뿐이었다.
“잘 됐네요. 그쪽이랑은 이래저래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많았는데.”
“어머, 정말요? 저도 그랬는데. 아,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수호 오빠랑 비슷한 나이시죠?”
“응. 맞아. 그럼 편하게 하늘이라고 부를게. 너도 나 편하게 언니라고 불러.”
“네, 지원이 언니. 자, 짜안!”
경쾌한 울림과 함께 유리잔이 부딪히고, 두 사람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럼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잔이 비자마자 곧바로 다시 잔을 채웠다.
“야, 니네 뭘 그리 급하게 마시냐. 쌩 럼주를 무슨 물 마시 듯 마시네?”
보다 못한 안수호가 중재에 나서려고 했으나 두 사람은 결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왜? 우리끼리만 마시니까 소외감 들어? 그럼 말을 하지. 자, 너도 따라줄게.”
“어차피 넷 다 초인이라 빨리 취하지도 않잖아요. 자, 오빠도 어서 드세요.”
꿀렁꿀렁 차오르는 자신의 잔을 보며 안수호가 식은땀을 흘렸다.
‘얘네들, 오늘 갈 데까지 갈 셈이다.’
두 사람의 속셈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고민하던 안수호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들어 올렸다.
‘일단 이 과열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식히자.’
“기왕 온더락 잔에 마시는 거 얼음도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별 차이는 없겠지만 그래도 얼음이 있으면 알코올이 조금은 희석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안수호가 반쯤 찬 자신의 술잔 위에 손을 올렸다.
카가가가각!
그러자 갑자기 주위에 한기가 몰아치며 그의 손아귀에 자그마한 얼음 구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신비로운 광경에 그 자리에 있던 세 사람이 단번에 시선을 빼앗겼다.
통!
이윽고 완성된 동그란 얼음이 안수호의 잔에 담겼다. 딱 알맞은 크기의 위스키 얼음이었다.
“어어어? 안수호 뭐야?! 너 이거 어떻게 한 거야??”
“진짜 어떻게 한 거래. 마술이야?”
“오빠. 이거 설마…….”
무언가 짐작가는 바가 있는 듯한 강하늘의 반응에 안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가 목에 걸어둔 목걸이, 서리정령의 증표를 꺼내들었다.
“맞아. 저번 이중던전에서 얻은 아티펙트야.”
“역시…….”
사방에서 모여드는 서리가 얼어붙은 형상을 이루는 모습이 어쩐지 빌헬름의 능력과 닮았다며. 혼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강하늘을 보며 다른 두 사람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둘이서만 아는 이야기로 납득하지 말고 설명 좀 해줘. 이중던전이라면 이번에 발생한 그 던전 말하는 거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맞아! 혼자만 알지 말고 나한테도 알려조!”
“지금부터 이야기해줄 참이었어.”
다른 사람들의 잔에도 얼음을 띄워준 안수호가 진한 미소를 지었다.
‘계획대로.’
신기한 아티펙트를 꺼내드는 것으로 과열된 분위기를 진정시키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하는 것. 둘 다 그의 계획대로였다. 이런 식으로 자리의 흐름을 주도한다면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했으나, 결과적으로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안수호 잔 비었다! 자, 새로 채워줄게! 이번엔 잭 다니엘이야!”
“야, 나 잠깐만 쉬었다가…….”
“에이, 오빠! 술자리에서 쉬는 게 어디 있어요? 마셔 마셔! 먹고 죽어! 술이 들어간다! 쭉! 쭉! 쭉쭉!”
“아니 나 오늘 퇴원한 환자라고……!”
“아하하핫! 어차피 상처는 팀장님 포션 덕분에 말끔히 나았으면서 엄살은!”
“채소연 넌 좀 닥쳐!”
“자, 쭉 들이켜! 쭈우욱! 아, 혼자 마시기 외로워? 그럼 짠!”
“에헤헤, 짜안!”
“나도 쨘!!”
지예원이 안수호의 고개를 붙잡고 반쯤 억지로 술을 먹였다. 그 긴밀한 스킨십에 강하늘이 눈살을 찌푸릴법도 했으나 강하늘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이 순간 두 사람은 무언의 동맹을 맺었다. 자기네들의 목적을(즉, 상대방을 취하게 만드려는) 방해하는 안수호를 무너뜨리기 위한 공동전선이었다.
‘시발.’
어질어질 돌아가는 시야에 안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서로 먹이려고 안달이 난 두 사람이 중간부터 갑자기 타깃을 자신으로 바꿨다. 심지어 채소연마저 좋다구나 하며 달려드는 탓에 주량 이상으로 술을 들이키고 말았다. 깊게 내뱉은 숨결에서 알싸한 알코올 향이 진하게 풍겨왔다.
‘이대로 가다간 내가 제일 먼저 뻗는다.’
그 사태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이에 안수호는 작전을 변경했다. 술자리의 과열을 막지 못한다면 오히려 부추기리라. 지예원이나 강하늘, 둘 중 한 명이 술에 떡이 되어 잠들면 둘이 드잡이질을 벌일 일도 없을 테니까.
‘그럼 누굴 자빠뜨리냐가 문제인데.’
안수호가 두 사람의 안색을 살폈다. 강하늘은 얼굴이 잔뜩 상기된 게 이미 한계가 가까워 보였다. 반면 지예원은 텐션은 올라갔지만 얼굴색은 평소와 동일하게 하얬다. 겉모습만 보면 강하늘의 주량이 더 약하게 보였다.
‘좋아, 강하늘을 집중 공략해서 재워버리자.’
“으으응…….”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강하늘이 풀린 눈으로 신음을 흘리다 번뜩 고개를 들며 외쳤다.
“으으, 안 되겠다. 변신!”
파앗!
그러자 흐릿한 빛과 함께 그녀의 외형이 변했다. 아바타 능력의 발동이었다.
“……어?”
강하늘의 머리칼이 파랗게 변함과 동시에 그녀의 얼굴이 본래의 색을 찾았다. 아바타 상태에서 입은 부상은 본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아바타와 본체의 상태는 별도였다. 즉, 아바타 능력을 발동하면 일시적으로 취기가 가신다는 뜻이었다.
“에헤헤헤. 자, 그럼 새로 잔을 채워볼까요?”
갑작스레 멀쩡해진 강하늘을 보며 지예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허나 그녀의 능력에 대해 파악하지 못한 그녀가 진실을 알아차릴 순 없었다. 그나마 안수호만이 강하늘의 의도를 짐작하고 낭패라며 입술을 씹을 뿐이었다.
“어? 변신해도 되는 거야? 그럼 나도 할래!”
그 순간 옆에서 들려온 불길한 외침.
안수호가 고개를 돌리자 채소연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끄으으응! 하며 힘을 주기 시작했다.
뿌득! 뿌드드득!
곧 그녀의 몸이 변모하기 시작했다. 골격이 자라며 팔다리가 길어지고 피부 곳곳에 붉은 비늘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안수호가 말릴 새도 없이, 어느새 성숙한 용인의 모습이 된 채소연이 해맑게 웃었다.
“짠! 어른 소연!”
그러나 강하늘과 달리 취기는 그대로였다. 연신 웃음을 흘리는 그녀의 입술 사이로 주홍색 불꽃이 화르륵 피어올랐다.
"미친 너 그 능력 며칠에 한 번밖에 못 쓴다며!? 근데 그걸 왜 지금 쓰는데?!"
"격하게 움직이지만 않으면 하루만에 충전되지롱~"
안수호의 우려에 채소연이 혀를 베에에 내밀며 메롱했다. 몸이 성숙해졌다 한들 정신은 그대로였다.
“…….”
“…….”
한편 강하늘과 지예원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 곳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은 앙증맞게 내밀어진 채소연의 혀보다 조금 더 밑, 변신에 의해 압도적인 성장을 이룩한 그 가슴에 고정되어 있었다. 두 여성진조차 무심코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경이적인 크기였다. 그 얼굴들에 복잡한 감정이 떠오른다.
“아핫.”
곧 강하늘이 높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지예원이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자, 입을 가린 채 두 눈을 초승달처럼 휜 강하늘이 넌지시 그녀에게 말했다.
“이를 어쩐담. 원래 소연이 언니가 꼴찌였는데 이제 언니가 꼴찌네요?”
“……뭐?”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지예원이 곧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너, 너너너 그게 지금 무슨”
“술도 적당히 마셨고 슬슬 분위기도 무르익었겠다, 우리 다 같이 게임이나 할까요?”
혀가 살짝 꼬인 발음으로 무어라 외치려던 지예원을 무시한 채 강하늘이 탁자 위를 치우기 시작했다.
“께임?”
“네. 술게임이요. 원래 젊은 남녀끼리 모이면 술게임이 국룰이죠. 예를 들어서…….”
곧 텅 빈 탁자 위에 강하늘이 빈 병 하나를 눕히며 말했다.
“진실게임, 이라든가?”
그 시선이 날카롭게 지예원을 쏘아붙였다. 아바타 능력이란 비장의 수를 꺼내든 이상 더 이상 뒤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정신이 멀쩡할 때 지예원을 무너뜨리고 진실을 들어내리라. 강하늘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진실게임?”
그 미소를 바라보던 지예원의 입가에도 곧 진한 웃음이 걸렸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 도전 흔쾌히 받아주겠노라고. 반쯤 일으킨 몸을 도로 앉히며 지예원이 싸늘한 시선으로 강하늘을 바라봤다.
“룰은 아시죠? 서로 돌아가면서 술병을 돌려서 지목당한 사람한테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벌주를 마시는 거예요.”
“알고 있어. 재미있겠네. 아주 재미있겠어.”
“그쵸? 저도 언니가 좋아할 거라 생각했어요. 다른 사람들도 괜찮죠?”
“응! 난 할래! 재밌어 보여!”
“아니, 시간도 늦었는데 슬슬…….”
“그럼 시작할게요! 첫 순서는 누가 좋으려나……”
안수호의 말은 가뿐히 무시한 채 강하늘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채소연이 번쩍 손을 들었다.
“나! 나 먼저 할래! 나! 나! 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채소연이 술병을 잡고 돌렸다. 빙그르르 돌아가던 술병의 주둥이가 멈춰선 방향에는 안수호가 있었다.
“좋아! 그럼 내가 질문한다! 질문에 답 못하면 안수호가 벌주 마시기 맞지? 근데 벌주는 어딨어?”
“이걸로 하자.”
쿠웅.
지예원이 흰색 라벨의 투명한 술병을 꺼내어 테이블에 올렸다. 이 자리에선 한 번도 마시지 않은 술이었으나 그 양은 이미 반절 가까이 줄어 있었다.
“스피리터스 렉티피코와니. 도수 96도, 명실상부 식용 가능한 알코올의 끝판왕이야. 이거 한 잔이면 소주 한 병에 맞먹지. 벌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어?”
그 말에 강하늘이 마른 침을 삼켰다. 강하늘은 이 자리에서 가장 주량이 약했다. 제아무리 아바타 능력이란 편법을 썼다 한들 저런 괴물을 들이켰다간 머지않아 다시 취해버리고 마리라.
‘괜찮아. 그건 반대도 마찬가지니까.’
진실게임에서 누가 지목당하냐는 결국 운에 달린 문제. 자신이 취하게 되더라도 그 전에 지예원이 먼저 한계에 다다르리라.
“좋아! 그럼 질문한다!”
두 사람이 서로 눈에서 불꽃을 튀기며 신경전을 벌이는 한편, 채소연이 천진난만한 미소와 함께 안수호를 가리켰다. 그녀가 생각했다. 진실게임이란 결국 상대방에게 벌주를 마시게 하는 게임. 그렇다면 안수호가 술을 마실 수밖에 없을 정도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그 순간, 채소연의 사고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남을 놀리고 장난치는 데에만큼은 늘 진심인 그녀였다. 한참이나 뜸을 들이는 그 모습에 지예원과 강하늘의 시선도 채소연에게 향했다. 그 얼굴들엔 묘한 불안감과 기대감이 공존하고 있었다.
“안수호.”
마침내 채소연이 입을 열었다.
“오늘 팬티 무슨 색이야?”
“이런 씨발.”
그딴 것도 질문이라고. 있는 대로 얼굴을 찡그린 안수호에게 채소연이 풉! 하고 웃으며 술병을 기울이려고 했다.
‘이거 마셨다간 진짜 골로 간다.’
이 위태로운 상황에 자신이 가장 먼저 뻗을 순 없었다. 안수호가 입술을 잘근 씹으며 채소연을 노려봤다. 채소연은 그런 안수호의 심정은 하나도 모른 채 ‘풉키키키’ 하며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시발.”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 부끄러운 선택은 어디까지나 이 자리의 파국을 막기 위해서. 머릿속으로 수십 번이나 그렇게 되뇐 안수호가 자신에게 향한 술병을 슬쩍 밀어내며 나지막하게 뇌까렸다.
“파란색.”
그 대답에 세 여성의 시선이 안수호의 바지춤으로 향했다.
지예원의 뺨에 빨간 홍조가 떠올랐다. 강하늘은 부끄럽다는 듯 슬쩍 고개를 돌리면서도 그 시선만은 안수호에게 고정한 채였다. 한편 질문을 꺼낸 채소연은 ‘으에엑’하고 매스꺼운 시늉을 하며 설마 정말 대답할 줄은 몰랐다고 진저리쳤다.
“……이딴 게임을 꼭 해야겠어?”
그 가운데 안수호가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하소연했으나.
“응. 재미있는데?”
“첫 질문이 좀 그렇긴 했지만, 원래 진실게임이란 게 그런 게임이잖아요. 자, 이제 제 차례죠?”
“무슨 소리야? 왜 다음이 네 차례야? 내 차례지! 원래 이런 건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는 거잖아!”
“어라, 그래요? 저는 늘 반시계방향으로 했는데요. 제가 제안한 게임이니까 제 규칙대로 하죠?”
“누구 마음대로 그렇게 해? 이런 건 다수결로 정해야지!”
두 사람은 결코 게임을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안수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밤이 깊었으나 그들의 술자리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