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065. 막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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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급 퀘스트 클리어! ]
[ 전세계 최초로 발생한 이중던전은 긍지 높은 기사 빌헬름이 지키는 ‘기사의 무덤’이었습니다! 기사의 무덤은 S급에 해당하는 초 고위험 던전이었지만, 당신의 발 빠른 대처 덕분에 던전 내부에 고립되었던 학생들은 전원 무사히 생환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꼴사납게 도망쳤다곤 하지만, 아무튼 살아남은 게 중요한 거니까요!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도 있잖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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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시야를 가득 메우는 시스템 메시지와, 이제는 낯선 천장이라고 부르기도 뭐할 정도로 익숙해진 그린하우스 의무대 천장이었다.
여전히 비꼬는 듯한 시스템 메시지를 비활성화하고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저번에 깨어났을 땐 강하늘이 옆에 있었지만 이번엔 아무도 곁에 없었다. 평일 낮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곧 간호사 한 명이 날 발견하고, 이어서 온 의사와 나는 건강 상태에 대한 형식적인 문답을 주고받았다.
결과, 현재 내 건강엔 아무런 이상도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예상했던 바였다.
어제. 빌헬름에게서 도망쳐 게이트를 나선 나는 스킬 효과가 풀리자마자 곧바로 쓰러졌다. 강하늘의 스킬 덕에 일시적으로 회복했던 상처가 다시 벌어진 탓이었다.
쓰러진 나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그 순간에는 꼼짝없이 죽을 줄 알았으나, 의사가 말하길 내 뒤를 쫓아온 마르코 팀장의 응급처치 덕에 살았다고 한다. 외부 파견 시 팀장급이 지참하는 중급 포션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나.
하여튼. 그 비싼 포션을 퍼부은 덕에 내 건강 상태는 아주 양호했다. 의사가 말하길 바로 내일 퇴원해도 된다고 할 정도.
의식을 차리고 바로 다음 날 퇴원이라 아무도 병문안을 오지 않을 줄 알았으나,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의외로 많은 사람이 날 찾아왔다.
우선 가장 먼저 류태현이 내 안부를 물으러 왔고, 이어서 도소영이 자기 학생을 구해줘서 고맙다며 감사인사 겸 찾아왔다. 새로 발생한 던전에 대해 묻기 위해 협회 직원이 방문하기도 했고 중간에 채소연과 이태호, 조유리가 잠깐 들렀다 가기도 했다.
또 조금 전에는 9팀의 마르코 팀장과 김하나가 들렀는데, 마르코는 묘하게 내게 살가운 태도였다. 그와는 이야기조차 거의 나눠본 적 없는데 기이한 일이었다.
하여튼. 많은 사람이 오고 갔고 다행히 이번에는 병문안 선물로 수박 따윌 사오는 사람은 없었다. 참고로 지예원은 아르바이트 때문에 오지 못했고, 강하늘은 어째서인지 연락을 받지 않았다.
그렇게 얼추 올 사람은 다 왔구나 하고, 의외로 인복이 많은 내 처지에 감탄하며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던 중.
“몸은 좀 괜찮아요?”
면회 시간이 끝나기 아슬아슬한 시각, 결코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여자가 병실로 들어섰다.
“……한겨울 학생?”
늦은 저녁. 한겨울이 단정한 셔츠에 여성용 슬렉스 차림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꼭 어디 공적인 자리에라도 나가는 듯한 복장이었다. 내가 이에 대해서 묻자 그녀가 말하길.
“맞아요. 회사에 일이 있어서 나가던 차에 잠깐 들러 봤어요.”
말하자면 지금 복장은 그녀의 오피스룩인 셈이었다.
그나저나 회사에 가던 차에 잠깐 들렀다라…….
“감사합니다. 설마 한겨울 학생이 찾아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하긴, 재벌 3세가 남 병문안 오는 게 쉽게 구경할 수 있는 일은 아니죠.”
“그것도 그렇지만, 한겨울 학생이랑 제 사이가 병문안을 올 정도 사이는 아니라 생각했거든요.”
“그런가요? 전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한겨울이 어깨를 으쓱이며 침대 옆에 앉았다. 고압적이기만 하던 전과 달리, 조금은 부드러워진 듯한 시선이 내게 향했다.
“그래도 그간 이래저래 몇 번 마주친 사이잖아요. 잠깐 안부나 물을 겸 들를 사이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의외였다. 그간 내가 그녀와 몇 번 마주친 건 사실이지만, 한겨울은 그렇게 마주칠 때마다 불쾌해하지 않았던가.
“…….”
한겨울은 칼같이 이해득실을 따지는 자였다. 그녀는 결코 이유 없는 호의를 보내지 않는다. 그녀가 호의를 표하는 상대는 모두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뿐.
그간 그녀가 내게 쌀쌀맞았던 건 아마 나라는 인간이 그녀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이제는 부합했다는 건가?’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나 고민하던 나는 곧 한겨울의 입을 통해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 이번에 저희 실습 장소에서 발생한 이중던전, 오늘 아침에 랭크가 S에서 OVER로 격상됐어요.”
오버랭크. 문자 그대로 E에서 S에 이르는 기존의 척도에서 벗어난 규격 외의 던전이란 뜻이었다. 물론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원작에서도 빌헬름이 출현한 ‘기사의 무덤’ 던전은 발생 직후 A에서 S로, 그리고 오버랭크로 격상됐으니까.
“……어째 별로 놀라지 않으시네요?”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일단 그 던전의 주인 괴수랑 직접 싸워봤으니까요.”
“그래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예요.”
한겨울이 스마트폰을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어느 S급 길드의 던전 공략 실패에 관한 인터넷 뉴스 기사가 표시되어 있었다.
“어제 흑룡회가 던전 공략에 앞서 보낸 탐사대가 그 이중던전에 돌입했어요. 그리고 보란 듯이 괴멸 당했죠. A급 초인 하나가 죽고 넷이 중상, 탐사대장을 맡은 S급 초인조차 의식 불명이래요. 이래서야 오버랭크 던전으로 책정되지 않는 게 이상하죠.”
당신은 그런 던전의 주인 괴수와 싸우고 살아남은 거예요.
한겨울이 또렷한 시선으로 내게 덧붙였다. 놀라움, 의문, 의심. 그 얼굴에 다채로운 감정이 떠오른다.
“당신에 대해 조사해봤어요. 몰랐는데 E급 초인이더라고요? 고작 E급 주제에 특수대책과에 들어간 건 그렇다 쳐도, S급 초인마저 의식 불명으로 만드는 괴물과 마주치고도 살아 남았다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할 건 없죠. 제가 한 일은 강하늘 학생을 데리고 놈에게서 도망친 것뿐이니까.”
“그 도망조차 못 쳐서 탐사대가 궤멸당한 거예요. S급 길드의 탐사대가 말이죠.”
“제 초능력은 도망이나 교란에 특화되어 있거든요.”
이것 보라고 한 손에서 연기를 피워 올리며 그녀에게 들이댔다. 그러자 한겨울이 고개를 저었다.
“겸양인지 시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쯤 하세요. 고작 연막 따위로 도망칠 수 있는 상대였다면 탐사대가 그렇게 궤멸당하지도 않았겠죠.”
“겸양이니 뭐니 해도 사실이 그런 걸”
“당신. 일부러 힘을 숨기고 있죠?”
“……예?”
무심코 되물은 나는 무의식적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어이가 없어서 나온 헛웃음이었다.
힘을 숨긴다고? 숨길 힘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내가 매번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 약해빠진 몸뚱이로 죽기살기로 구르고 있다는 걸 그녀가 알기는 알까?
“당신은 일반과 대원이면서 이례적으로 특수대책과로 전과했죠. 직후 발생한 사건에서 여명단 간부를 죽였고. 강하늘을 납치하려한 청부업자들을 격파했으며. 이번에는 오버랭크 던전의 주인괴수와 싸우고도 살아남았죠. 마지막 거야 당신 말대로 도망친 것뿐이라고 해도, 그 전에 있었던 일들은 다 사실이잖아요?”
허나 한겨울이 하는 말을 곰곰이 들어보니 그녀의 반응이 이해가 갔다. 그녀가 늘어놓은 이력은 겨우 E급 초인이 이뤘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화려했으니까.
‘본의 아니게 힘숨찐 짓을 했네.’
기실 힘 따위 숨길 생각조차 없었고 매번 마주치는 난관에 맞춰 아득바득 발악한 결과였으나,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보면 일부러 힘을 숨기고 있었던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겠지.
“저는 당신의 본 실력이 최소 A급 초인에 준하다고 보고 있어요. 그리고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죠.”
“다른 사람들……이 누굽니까?”
“저처럼 이번 일로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겠죠.”
한겨울이 설명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흑룡회의 탐사대마저 궤멸된 상황에서, 단신으로 주인괴수와 마주치고도 살아남은 내게 주목하는 이가 잔뜩 있을 거라고.
“이미 몇몇 길드에선 당신을 스카우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요. 협회도 당신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상황이고, 냄새를 맡은 언론에서도 슬슬 움직이기 시작할 거예요. 아, 퇴원이 언제라고 했죠?”
“내일입니다.”
“여기가 민간 병원이 아니라 다행이네요. 적어도 건물을 나서자마자 기자들과 마주칠 일은 없을 테니. 뭐, 그래봤자 그쪽 집 앞에서 진을 치고 있겠지만요.”
“허어…….”
그녀의 말에 따르면 당분간 내 집 앞은 기자들과 각 길드의 스카우터들로 문전성시를 이룰 거란다. 곤란한 일이었다.
‘나야 그렇다 쳐도 지예원은 사람들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는데.’
그녀가 있는 곳에 세간의 이목이 쏠리는 상황은 가급적 피해야만 했다. 모처럼 신분을 세탁했건만 행여 그녀의 모습이 방송 전파라도 타는 날에는 곧바로 여명단이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릴 테니.
이사라도 가야 하나? 아니면 잠잠해질 때까지 당분간 경비대 숙직실에서 버텨? 온갖 방법을 고민하고 있던 내게 한겨울이 넌지시 말했다.
“기자들이나 스카우터에 관해선 제가 도와줄 수 있어요.”
한겨울이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한성 그룹의 힘을 쓰면 어지간한 기자나 스카우터는 당신에게 접근조차 못하게 막을 수 있어요. 원한다면 그렇게 해드릴게요. 당신도 이 일로 쓸데없이 소란이 커지는 건 원치 않잖아요?”
“……맨 입으로 말입니까?”
“물론 아니죠. 제가 당신을 도와주는 대신, 당신도 저를 좀 도와줬으면 해요. 그쪽한테 결코 손해되는 이야긴 아니에요.”
“이야기의 내용을 듣고 결정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그럼 묻겠습니다. 제가 한겨울 학생을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 겁니까?”
“그건…….”
그 물음에 그간 막힘없이 말하던 한겨울이 말끝을 흐렸다. 가슴을 받치듯 팔짱을 낀 채 시선을 살짝 피한 그녀가 이내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제 수련을 도와줬으면 해요. 제가 류태현에게 이길 수 있도록.”
“예?”
그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부탁에 내가 벙 찐 얼굴로 그렇게 되물었다.
***
안전가옥 지하실.
어두은 방 안, 흐릿한 조명 아래 놓인 소파에 민채령이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 얼굴에는 고민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의 손에는 이번 이중던전 사태에 대한 강하늘의 조서가 들려 있었다. 다만 그 내용은 공식적으로 올라간 내용과 상이했다. 강하늘이 진술한 내용의 일부를 그녀가 검열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조서는 유일하게 남은 검열 전 원본이었다. 그 내용에 대해 아는 자는 경비대 안에서 그녀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고민은 바로 그 조서의 내용 때문이었다.
‘……말도 안 돼.’
조서 내용을 곱씹으며 민채령이 식은땀을 흘렸다.
당초 안수호가 이번 탐사 실습에 대해 불안을 표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사건이 발생하여 그 우려는 사실이 되었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연이 아니라면? 만약 안수호가 모종의 방법으로 이중던전의 발생을 예견한 것이라면?
그 단서를 찾기 위해 민채령은 강하늘에게서 직접 진술을 들어냈다. 들어낸 내용을 토대로 조서를 썼고, 마침내 진술이 끝났을 때엔 그 내용을 검열할 수밖에 없었다.
검열한 내용은 안수호와 빌헬름의 전투에 관한 부분이었다. 본래 강하늘은 그 둘의 전투에 관한 사실을 숨길 생각이었으나, 빌헬름과의 전투에서 안수호가 중상을 입은 탓에 숨길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스킬이나 몇몇 사실에 대한 내용만 감춘 채 전투의 양상을 곧이곧대로 진술할 수밖에 없었다. 민채령이 검열한 내용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이게 말이 돼?’
그 이유는 간단했다. 안수호가 보인 규격 외의 강함에 대해 다른 사람이 알기를 원치 않았으니까.
세계 최초로 발생한 이중던전. 그 등급은 오버랭크. 당연히 던전의 주인 괴수 역시 규격 외의 괴물일 터.
헌데 안수호는 그런 괴물을 상대로 살아남았다. 어디 살아남았다뿐인가, 강하늘의 진술에 따르면 맞서 싸워 일시적으로나마 우위를 점했다고 한다.
강하늘은 자신의 스킬에 대한 사실은 숨기고 그저 안수호가 능력을 적재적소에 활용해 빌헬름의 틈을 만들어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민채령을 경악케 하기엔 충분했다.
빠드득.
민채령이 어금니를 세게 다물었다. 그녀가 입술을 잘근 씹는다.
앞서 말했듯 그녀가 진술 내용을 검열한 건 안수호의 무력을 남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안수호는 어찌 되었든 그녀의 부하였다. 다른 놈들이 쓸데없이 눈독 들이는 상황은 결코 달갑지 않았다.
실상 주인괴수와 마주친 학생을 무사히 구해냈다는 시점에서 이미 온갖 놈들이 침을 흘리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적어도 주인괴수와 맞상대가 가능하다고 알려지는 것보단 낫지 않겠는가.
그런 측면에서 보면 민채령의 은폐 시도는 나름 성공적이었다. 성공적이었으나, 그녀의 표정은 한없이 어둡기만 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지금까지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아니면 그 사이에 급격하게 강해졌나?’
떠올려보면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안수호가 특수대책과 전과 시험을 봤을 때, E급 초인에 불과하던 그는 고작 며칠 만에 몇 배나 강해져서 돌아왔다. 특책과 대원으로서 손색이 없을 만큼.
그렇다면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모종의 방법으로 급격하게 강해진 것인가.
민채령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E급 초인이 두 달도 안 되어서 A급 초인에 준할 정도로 강해진다? 아무리 탈리스만에 온갖 아티펙트를 떡칠한다 해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로 민채령은 후자보다 전자의 가능성에 집중했다. 안수호가 급격히 강해진 것이 아닌, 처음부터 강했으나 그 힘을 숨기고 있었을 가능성.
안수호가 자신에게 숨기고 있는 게 많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 내용 중에 자신의 무력이 들어간다 한들 새삼 놀랄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무력이 이정도일 줄은 차마 예상치 못했다.
강하늘의 진술을 토대로 분석한 안수호의 강함은 A급 초인에 준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 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빌헬름과 마주쳤을 때 안수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빌헬름과 싸우면서 동시에 강하늘을 지켜내야만 했다. 당연히 혼자 싸우는 것과 누군가를 지키며 싸우는 것의 난이도는 천지차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만약 안수호가 A급 초인 이상의 무력을 지니고 있다면?
“……하.”
민채령이 헛웃음을 흘렸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를 대하는 방식을 전면 수정해야만 했다. 민채령의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도대체 정체가 뭔지…….’
민채령은 새삼 안수호의 정체에 대해 고민했다. 안수호를 대할 때 늘 주도적인 위치에 서있긴 했으나, 기실 민채령은 안수호에 대해 확실하게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기본적인 인적사항이나 경력에 대해선 알고 있었지만 그의 ‘진짜 모습’에 대해선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민채령은 안수호의 그 이면을 캐내고자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지금까지 수확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나마 알아낸 거라고 해봐야 여명단과 모종의 관계가 있을 거라는 심증 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안수호의 본질은 다른 세계에서 온 빙의자이며, 그 껍데기는 쾌락천마가 그를 빙의시키기 위해 급조한 것. 사정을 모르는 민채령이 백날 뒤를 캐봤자 뭐가 나올 리가 없었다.
민채령은 그러한 사정을 몰랐다. 사정을 몰랐기에 불안했다. 안수호라는 놈의 정체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으므로.
‘안수호의 이면에 대해 알만한 사람은 현재로선 두 사람이야. 한 명은 지예원.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민채령이 슬쩍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어두운 방 한복판에 자리한 침대 위에는 팔다리가 잘린 채 축 늘어져 있는 박지현이 있었다.
“우. 우우. 으. 으으…….”
이지를 상실한 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는 박지현.
민채령이 처음 그녀를 살리고자 했을 땐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단순히 여명단 간부니까 살려낼 수 있으면 도움이 되겠다, 정도의 인식이었다.
허나 이제는 달랐다.
그녀가 짐작하기를, 눈앞의 박지현은 안수호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 판단의 근거는 안수호의 행동이었다.
그날 밤, 안수호는 이미 제압한 박지현을 일부러 죽였다. 본인은 실수라 했지만 그런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민채령이 아니었다. 그날, 안수호는 분명히 의도적으로 박지현을 죽였다.
마치 그녀의 입을 막으려는 것처럼.
지레짐작일지도 모르지만 민채령은 박지현이 안수호의 이면을 밝혀낼 열쇠라 생각했다. 물론 지예원도 마찬가지였다.
‘박지현 쪽은 기껏 살려냈건만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차라리 지예원을 고문해봐?’
문득 든 생각에 민채령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안수호 건과는 별개로 지예원에게는 아직 이용가치가 있었다. 여명단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라는 이용가치가.
‘박지현이 이성만 회복해준다면 뭔가 실마리가 보일 텐데…….’
민채령이 뚜벅뚜벅 침대 곁으로 향했다. 죽은 눈으로 천장만 바라보는 박지현은 그녀가 곁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탁한 눈동자와 침이 질질 흐르는 입가. 간헐적으로 ‘우, 우우’하는 신음만 뱉는 그 모습에선 이성의 편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애초에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것 자체가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운 시도였다. 온갖 억지를 부려 어떻게든 살려내긴 했지만 이래서야 뇌사 상태나 다름없었다. 민채령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언제쯤 정신을 차리려고 그러니 정말…….”
그녀 한 명을 살리는 데 들인 돈과 수고를 생각하면 절로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포션도 써봤고 회복 능력자도 초빙해봤지만 다 허사였다. 그녀의 이성은 여전히 돌아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희망이 남아있다면 박지현이 선천적인 재생능력 보유자란 점이었다. 지금으로선 그 일말의 가능성에 기대어 그녀가 알아서 회복하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 민채령이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내일 안수호가 퇴원하면 호출해서 한 번 떠봐야겠어.’
그렇게 생각한 민채령이 방을 나섰다. 육중한 철문이 쿠웅, 소리를 내며 굳게 닫힌다.
홀로 남은 박지현은 여전히 천장만 올려다본 채 간헐적인 신음만 흘려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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