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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65화 (66/266)

〈 65화 〉 064. side ep. 쾌락천마

* * *

판테온(Pantheon). 아득히 높은 천계 어딘가에 존재하는, 벽도, 바닥도, 천장도 반짝이는 백색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신전.

그 가장 깊숙한 곳. 달빛이 드리우는 거대한 제단 위에 자리한 드높은 권좌.

그 앞에 이 세상을 관리하는 열셋의 천사가 전원 날개를 접은 채 부복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천사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미숙한 아라엘은 예외였으나, 나머지 천사들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에 능했다. 허나 지금 이 순간, 이곳에 자리한 열셋 천사의 얼굴에는 비슷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동요. 불안. 그리고 공포.

세상을 관리하는 천사들이 어째서 동요하며, 어째서 불안해하고, 어째서 공포에 떠는가.

그 대답은 그들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권좌에 앉은 한 여성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히스테릭하게 위로 치솟은 눈꼬리. 금색 자수가 들어간 검은색 무복은 치파오처럼 짝 달라붙어 몸의 윤곽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 미모는 경국지색이라는 수색어가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빼어났으나 잔뜩 찌푸린 표정 탓에 조금 빛이 바래는 구석이 없잖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자라는 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그 이름은 그녀의 수려한 외모를 나타내듯 부드러운 울림을 가진 세 개의 한자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그녀를 이름으로 부르지는 아니했다.

다만 부르기를 그녀 스스로 칭하는 별호를 따 '쾌락천마'라고 불렀으니.

그녀야말로 안수호가 수백 번이고 욕한 그 장난으로 지은 듯한 별호의 주인이요, 제단 앞에 부복한 열셋 천사의 창조주이자 명실상부 이 세상의 주인인 자였다.

오만하게 다리를 꼰 채 그녀가 천사들을 내려다봤다. 그 신경질적인 시선이 천사들을 쭈욱 훑는다. 그 시선만으로도 천사들은 공포에 떨었다. 그중에서도 막내인 아라엘에 이르러서는 거의 실금이라도 할 기세.

그 고압적인 시선에 몸을 떨지 않는 천사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제2 천사. 전광의 라미엘.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쾌락천마가 지나가듯 물었다.

“……그래서, 이번 이중던전으로 ‘기사의 무덤’을 선정한 게 누구지?”

“제가 그랬나이다. 창조주시여.”

그 질문에 곧바로 그 라미엘이 슬며시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곧 쾌락천마의 미간에 진한 주름이 새겨졌다.

“설명해라. 왜 그런 게냐?”

­쿠구구궁!

그 물음이 함께 거대한 압박감이 천사들을 짓눌렀다.

“크윽!”

“케, 케흑!”

마치 깊은 심해에 빠진 것처럼 천사들이 숨조차 쉬지 못하며 괴로워했다. 몇몇 천사는 부복한 자세조차 유지하지 못해 바닥을 기었다. 아라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꼴사납게 눈물과 침을 흘리며 목을 부여잡은 그녀가 힘겨운 시선으로 라미엘을 바라봤다.

라미엘의 등은 올곧았다. 파르르 떨리는 천사의 고리에서 그녀 역시 압박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두 눈을 감은 채 주인이 쏘아내는 압력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그녀의 자태는 마치 고요한 호수 같았다. 아라엘은 어떻게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가 멍청하여 여쭈신 뜻을 짐작하지 못하겠나이다. 무엇을 설명하라 명령하신 건지…….”

라미엘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쾌락천마가 노호와도 같은 노성을 토해냈다.

“왜 하필이면 지성체가 주인 괴수로 있는 기사의 무덤을 골랐느냐 그 말이다! 덕분에 쓸데없는 변수가 생겨서 모처럼 준비한 시련이 엉망이 되었잖느냐! 얌전히 ‘검은 수해’나 ‘절망의 늪’ 따위를 선정하면 될 것을! 굳이 지성체가 있는 던전을, 그것도 하필이면 ‘그 빌헬름’이 있는 기사의 무덤을 고른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호통에 담긴 무형의 압력이 라미엘에게 향했다. 다른 천사들이 막혔던 숨을 토해내며 가쁜 숨을 몰아쉰다. 반면 라미엘의 표정은 크게 일그러졌다. 자세는 여전히 무너지지 않았으나 그녀의 머리 위에 떠오른 헤일로가 크게 요동쳤다.

“빌헬름은 본래 류태현을 위해 안배된 시련이었다! 설령 그것을 당겨쓴다 하더라도 결코 빙의자와 마주치게 해선 안 됐어! 놈은 감이 좋다! 내 권능이 개입한 빙의자와 접촉하면 당연히 우리의 존재를 눈치 채겠지! 무대 위 인형이 바깥의 존재를 알게 되면 세상의 법칙이 일그러지고 종래에는 무대 그 자체가 무너져 내린다! 너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을 터! 그런데 왜!”

쾌락천마는 분노하고 있었다. 길길이 날뛰는 그 꼴은 경지에 이른 초월자이자 한 세상의 신이라기엔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격정적이었다.

“왜 안수호에게 내리는 시련으로 굳이 빌헬름을 고른 것이더냐. 라미엘, 이 사태에는 분명 내가 모르는 적법한 이유가 있으렷다?”

어디 한 번 말이나 해보라고. 그 물음에 뭇 천사들의 시선이 라미엘에게 향했다. 곧 라미엘이 눈을 떠 자신의 주인을 올려다봤다. 새하얀 단발 사이로 드러난 금빛 눈동자가 이지적인 빛을 띠었다.

“그런 이유가 어디 있겠나이까, 창조주시여. 이번 건은 그저, 명백한 저의 불찰이자 태만이옵니다.”

“…………뭐라?”

“본래 던전에 리빙 아머가 출현했기에 자연스레 기사의 무덤이 떠올랐나이다. 빌헬름이 비록 지성체긴 하나 주인의 묘에 침입한 자에겐 자비가 없으니, 창조주께서 의도하신 강하늘의 말살도 능히 해내리라 생각했나이다. 창조주께서 말씀하신 가능성은 제가 멍청하여 차마 생각지 못했나이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벌해주시옵소서. 어떠한 벌도 달게 받겠나이다.”

“허.”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숙인 라미엘을 보며 쾌락천마가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대전에 그녀의 웃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그 웃음에 공간에 가득 차오른 마력이 어지러이 요동쳤다.

“태만이라. 그래, 저번 샛별의 숨소리 때도 그렇고 네 태만이 도를 넘는구나. 라미엘, 본래 너는 내 아이들 중에서도 특히 총명한 아이가 아니었더냐. 설마 제2 천사의 계급을 하사받았다 하여 기고만장해지기라도 한 게냐? 왜 요즈음 되는 일이 하나도 없나 했더니 그것이 다 네 태만함 때문이렷다?”

“……그렇나이다, 창조주시여.”

고개를 조아린 채 주인의 꾸지람을 듣는 라미엘. 그런 그녀를 보며 아라엘이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샛별의 숨소리 건은 명백히 아라엘의 실책이었으나 라미엘이 대신 뒤집어썼다. 자신의 실수 때문에 라미엘이 더욱 질책 받는 그 모습에 아라엘은 죄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본래 강하늘은 류태현을 위해 준비된 안배였다. 헌데 어쩌다 애먼 안수호 놈과 엮이게 되어 못 써먹게 되었지. 그래서 이번 시련을 통해 폐기하려고 했건만, 오히려 그 연정에 쐐기만 박는 꼴이 되었구나. 이를 어찌하면 좋을지…….”

“창조주시여. 감히 진언해도 되겠나이까?”

그렇게 물은 것은 방금 전까지 질책 받던 라미엘이었다. 그 담력 있는 모습에 쾌락천마가 헛웃음을 흘렸다. 어디 한 번 말이나 해보라며 그녀가 라미엘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비록 라미엘이 요 근래에 들어 몇 번의 실수를 하였다곤 하나, 본래 그녀는 자신의 충실한 심복.

그런 그녀의 진언이라면 들어봐서 나쁠 건 없으리라 생각했다. 모질게 질책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입을 여는 것을 보니 이 건에 대해 생각해둔 바가 있던 것이겠지.

“감히 진언하자면, 이 이상 이야기의 흐름에 개입하시는 건 그만두시는 편이 좋을 거라 생각되나이다.”

그렇게 생각했으나, 라미엘이 꺼낸 말은 쾌락천마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뭐라?”

“초월자의 개입은 세상의 법칙을 어그러뜨리나이다. 헌데 창조주께선 이미 몇 번이고 세상이 개입하셨나이다. 네 명의 빙의자와 각종 변수의 조절은 물론이고 직접 흐름을 뒤틀기도 하셨나이다. 감히 제 의견을 피력하자면 지금 수준의 개입으로도 이미 한계치요, 이 이상 세상에 간섭했다간 그분의 눈에 띄게 될 수도­”

“감히!”

­콰아앙!

그 순간 대전을 울리는 거대한 굉음.

모든 천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권좌의 한쪽이 무너져 있었다. 쾌락천마, 그녀가 있는 힘껏 팔걸이를 내리친 탓이었다. 분노에 씩씩대며 얼굴을 붉힌 그녀가 권좌에서 일어서 라미엘에게 일갈했다.

“감히 주인 앞에서 다른 자를 높여 부르느냐, 라미엘! 네가 정녕 방자함이 극에 달하여 종으로서의 예의범절조차 망각하였느냐!!”

그 일갈에 다른 천사들은 자신을 탓하는 것이 아님에도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라미엘 역시 사과하듯 고개를 숙이긴 했으나 그 얼굴엔 반성의 기미 따위 전혀 떠올라 있지 않았다.

‘저딴 것도 신이라고…….;

고작해야 호칭 하나 때문에 격정적으로 날뛰는 주인의 추태에 라미엘이 비웃음을 삼켰다. 다른 천사였다면 상상도 못할 불경이었으나 라미엘은 개의치 않았다.

“후우우우.”

제 화를 이기지 못해 분을 삭히는 쾌락천마. 그 꼴을 보며 라미엘은 참으로 아이 같구나, 하는 감상을 품었다. 신을 자처하는 주제에 전능하지도, 전지하지도 않으며 인간적인 희로애락에 휘둘리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애새끼나 다름없었다.

얼추 자신의 주인이 감성을 추슬렀다는 생각에 라미엘이 마저 입을 열었다.

“조금 전의 실언은 죄송했나이다. 허나 창조주시여, 저의 우려는 곧 주인된 당신의 안위가 걱정되어 나온 것임을 부디 알아주소서.”

라미엘이 염려스런 눈으로 쾌락천마를 올려다보았다. 속에 품고 있는 뜻이 어쨌든, 그 금빛 눈동자에 드러나는 감정은 한없이 진짜에 가까웠다. 경지를 초월한 쾌락천마조차 차마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지금 놈에게 설정된 난이도가 어떻게 되더냐.”

그 눈빛에 분노가 다소 누그러진 쾌락천마가 라미엘에게 물었다.

“놈이라 하심은?”

“당연히 안수호를 말하는 거지 않겠느냐! 바른대로 고하라!”

“……가장 높은 레벨에서 세 번째에 해당하나이다.”

“곧바로 최고 레벨로 올리거라. 시스템은 직접 개입과 달리 세상의 법칙 아래 있으니 마음껏 조정해도 상관없을 터!”

“그 말씀은 즉 직접적인 개입은…….”

“네 염려를 들어 당분간 내 흐름에 직접 간섭하는 건 자제하겠다. 그리하면 되는 일이겠지.”

“……제 청을 들어주시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창조주시여. 말씀하신 바는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허나 라미엘. 네게는 그간의 실책을 물어 벌을 내리지 아니할 수 없겠구나.”

쾌락천마가 살며시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그 끝이 라미엘을 가리킨다.

­파각!

“커흑?!”

다음 순간, 라미엘의 머리 위에서 발광하던 헤일로가 새된 파열음과 함께 반으로 쪼개졌다. 풀썩 쓰러진 그녀의 주위에 떠다니던 광채가 사라지고 순백의 날개가 빛바랜 잿빛으로 물든다.

"죄인 라미엘은 들어라."

그 부름에 라미엘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한시적으로 네게 내린 제2 천사의 계급을 거두고 너의 모든 권한을 박탈할 것이며, 또한 자신의 태만을 되돌아보고 반성하고 후회하라는 의미에서 코큐토스 가장 깊숙한 지하에 유폐하겠노라. 네가 나의 신실한 종이라면 이 선고를 한 점 불만 없이 받들라.”

“……받들겠나이다.”

라미엘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헤일로가 깨진 충격에 심신이 뒤틀리는 것 같았으나, 그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이 정도면 선방이라고. 어차피 자신의 목적은 거의 이뤘노라고.

라미엘이 지은 미소는 회심의 미소였으나,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그녀의 속내를 감히 짐작하지 못하였다.

잠시 후.

한때 자신의 동생들이었던 다른 천사들의 손에 이끌려 라미엘은 판테온의 지하 깊은 곳, 차디찬 냉기로 가득 찬 감옥 코큐토스에 가둬졌다. 살을 에는 한기에 절로 몸이 떨렸으나 그녀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어스름한 철창 안에 갇힌 라미엘은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댄 채 두 날개로 자신의 몸을 품었다. 광채를 잃고 푸석푸석해진 잿빛 날개는 그럼에도 방한용으로는 썩 괜찮았다.

­뚜벅. 뚜벅. 뚜벅.

그때, 지하 가득 울려 퍼지는 발소리.

라미엘은 구태여 철창 가까이 고개를 내밀지 않았다. 누가 자신을 찾아왔는지 따위 뻔히 예상할 수 있었으니까.

“라미엘 언니…….”

곧 나타난 이는 열셋의 천사 중 말석에 자리한 제13의 천사, 아라엘이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보는 막내의 모습에 라미엘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돌아가세요, 아라엘. 죄인과 가까이 있어봤자 좋을 건 없답니다.”

“죄, 죄인이라뇨! 저는 언니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 세상에선 쾌락천마님의 말씀이 곧 법. 그분이 죄인이라 하셨으면 죄인인 거예요. 아니면 설마, 아라엘은 그분의 말씀에 반하고자 하는 건가요?”

“그, 그건…….”

아라엘이 곤란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그녀의 눈가에 자그마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라미엘이 풋, 하고 웃음을 흘렸다.

“아라엘. 늘 생각하는 거지만 당신은 정말 인간다운 천사군요.”

“아하하. 조, 좋은 의미로 들리지는 않네요…….”

“좋은 의미로 한 말이에요. 감정이 없는 천사는 그저 명령에 따르는 기계에 불과해요. 기계는 스스로 생각할 수도, 반성할 수도, 그 반성을 통해 발전할 수도 없죠. 하지만 아라엘, 감정을 잃지 않은 천사는 다르답니다. 저 아래 인간들이 그러하듯, 당신에겐 무한히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어요. 그러니 그 인간다운 감정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소중히 여기시길.”

초연하게 그렇게 말하는 라미엘의 태도는 아라엘로 하여금 묘한 위화감을 느끼게 하였다. 얼마 전부터 그녀의 안에 자리했던 의심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마음 같아선 그 의심을 입 밖에 내어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 여파가 우려되는 아라엘은 애먼 입술만 달싹일 뿐이었다.

“어, 언니는…….”

허나 이내 결심한 아라엘이 화두를 던졌다. 라미엘이 그녀를 바라본다.

“호, 혹시 언니께선 일부러 그러신 건가요? 샛별의 숨소리 때도. 그리고 지금도. 이, 일부러 쾌락천마님의 계획이 어그, 어그러지도록 실수를 가장하신…….”

말끝을 흐린 아라엘이 숨을 삼켰다. 라미엘이 시선이 싸늘하게 그녀를 꿰뚫었다. 권한을 잃고 고리를 잃어 영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지적인 금빛으로 빛나는 두 눈동자가 아라엘의 심장을 꽈악 동여맸다.

“시, 시, 실언. 실언을­”

“아라엘.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당신은 정말 빠르게 성장하는군요.”

“네, 네?”

허나 다음 순간 포근한 미소를 짓는 라미엘의 모습에 아라엘이 벙찐 얼굴로 되물었다.

“아무런 의심조차 품지 않고 그저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던 순수했던 당신이, 이제는 머리를 굴릴 줄 알고 스스로 생각할 줄을 알게 되었군요. 당신의 성장이 언니로서 정말 대견하답니다. 훌륭해요 아라엘.”

“그, 그 말씀은 설마­”

“물론 당신의 의심은 틀렸어요. 쾌락천마님은 저를 만들어주신 창조주이시자, 부모님이시며, 주인님이시요, 그 누구와의 비교조처 불허하는 지고의 존재. 그런 그분께 제가 일부러 폐를 끼칠 리가 있겠나요? 눈앞의 일에 의문을 품고 의심하는 건 좋지만, 이번엔 조금 방향성이 어긋났군요.”

“아. 아하하…….”

그 말에 아라엘이 머쓱하게 웃었다.

“그, 그렇죠. 제가 착각을, 착각을 좀 했나봐요. 내가 왜 그랬담? 언니께서 그러실 리가 없는데. 조, 조금 전의 알현이 워낙 충격적이어서 정신이 말이 아니었나 보네요.”

“아라엘은 천사 전원이 참여하는 알현은 처음이었을 테니까요. 심신이 피로할 텐데 이만 올라가서 쉬세요. 되도록이면 이후 이 아래로는 내려오지 말고.”

“네, 네. 그럼 오, 올라가 볼게요.”

“아 참. 아라엘?”

그 부름에 반쯤 몸을 돌렸던 아라엘이 다시 라미엘을 바라봤다.

“왜 그러세요?”

“저번에 안수호에게 정체를 들켰을 때 그가 당신에게 부탁한 일이 있었죠? 만약 자신에게 예상치 못한 위기가 닥치게 되면 넌지시 귀띔이라도 해주라고.”

“아.”

그 말에 아라엘이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의 멍청한 실수 때문에 빙의자에게 정체가 탄로나버린 그날의 기억을.

아라엘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만약 그때 그 일이 쾌락천마님께 들켰다면 어떻게 됐을까. 오늘 자신의 주인이 라미엘에게 보인 모습을 보면 결코 가벼이 넘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계급을 박탈당하고 지하 감옥에 유폐된 라미엘보다 더한 벌을 받았으리라.

“그, 그건 왜요?”

아라엘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왜 굳이 지금 그 일을 꺼내드는가. 아라엘은 라미엘의 의도가 도저히 예상이 가지 않았다.

‘……어?’

도저히 예상이 가지 않았으나, 뒤늦게 떠오른 한 가지 사실.

자신은 라미엘에게 안수호와 접촉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 샛별의 숨소리의 회수를 실패했을 때엔 그저, 안수호가 먼저 다녀가서 회수를 실패했다고만 보고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어떻게 아신 거지?’

아라엘의 얼굴이 창백하게 물든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안수호와 접촉했던 그 순간, 불행 중 다행히도 그 누구도 그녀의 주위를 관측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어떻게?

“…….”

아라엘은 차마 어떻게 알았냐고 묻지조차 못한 채 벌벌 떨기만 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휘몰아쳤다. 그 대부분은 자신의 처우에 관한 일이었다. 쾌락천마가 자신에게 내릴, 상상조차 하지 못할 ‘벌’에 대한 걱정이요, 우려요, 염려였다.

“안수호가 한 그 부탁 말인데요…….”

“네…….”

아라엘이 마른 침을 삼켰다. 끓어오르는 긴장감에 그녀의 손아귀에 진한 식은땀이 묻어나왔다.

“가능한 한 들어주려고 노력해보세요. 물론 당신의 능력이 닿는 선 안에서.”

“……네?”

허나 예상과 전혀 다른 라미엘의 말에 아라엘이 멍청하게 반문했다.

“드, 들어주라뇨? 그게 무슨­”

“안수호를 도와주라는 이야기에요. 쾌락천마님께서 직접적인 간섭은 당분간 자제하신다곤 하나, 난이도가 최고 레벨로 올라가면 그에게 여러 위기가 닥치겠죠. 그가 그 위기를 타파할 수 있게끔, 당신이 가능한 선에서 그를 도와달라는 말이에요.”

“어, 어째서 그래야 하죠? 쾌락천마님께선 그 빙의자를 싫어하시지 않나요? 그래서 온갖 변수를 조작해서 그 빙의자에게 시련과 역경을­”

“아아, 아라엘. 비록 성장했다곤 하지만, 하나는 알아도 둘은 모르는군요.”

자리에서 일어선 라미엘이 천천히 철창으로 다가왔다. 이윽고 철창을 붙잡은 그녀가 하아, 하고 진한 입김을 토해냈다. 따스한 숨결이 아라엘의 뺨을 간질이고 지나간다.

“맞아요. 쾌락천마님께선 그 빙의자를 싫어하세요. 하지만 동시에 사랑하고 아끼시기도 한답니다. 그분께서 보고 싶으신 건 단순히 안수호가 고통 받는 모습이 아니에요. 온갖 시련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 위기를 딛고 나아가는, 처절하게 발버둥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싶으신 거랍니다.”

이해가 되면서도 되지 않는 말이었다. 아리송한 얼굴을 한 아라엘에게 라미엘이 상냥하게 덧붙였다.

“아라엘. 오늘 쾌락천마님께서 하신 말씀 기억하나요? 써먹지 못하게 된 강하늘을 폐기하려 했다. 그래서 이중던전이라는 변수를 준비했다고.”

아라엘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알현 내내 공포에 절어 덜덜 떨긴 했으나 오고 간 이야기는 다 기억하고 있었다.

“이상하지 않나요? 강하늘을 폐기하려 하신다면 훨씬 간편한 방법이 있는데. 왜 굳이 복잡하게 이중던전을 준비하라 명령하신 걸까요?”

“아, 안수호에게 고난을 주기 위해서……?”

“정답이에요. 정확히 말하자면 보기에 즐겁고 흥미진진한 고난을 부여하기 위함이죠.”

그 말에 아라엘이 얼추 사정이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을 보며 라미엘이 속으로 미소 지었다.

‘그럴 리가 있나.’

기실 지금 그녀가 아라엘에게 하는 말은 태반이 거짓이었다. 쾌락천마는 안수호를 아끼지 않는다. 그녀들의 주인은 단순히 안수호가 고통받는 걸 원할 뿐이었다.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휴먼스토리? 처절한 발버둥 끝에 쟁취해낸 승리? 그딴 건 쾌락천마가 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쾌락천마가 안수호에게 직접적이고 극복 불가능한 위기를 내리지 않은 것은.

강하늘을 폐기하려 했음에도 그녀를 직접 죽이지 못하고 번거롭게 미래에 일어날 이중던전 사건을 현재로 끌어온 것은.

‘단순히 능력이 닿지 않기 때문이지. 신을 자처하는 주제에 전능하지도 전지하지도 않으니까.’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아라엘에게 말해주지는 않는다. 드러난 사실에 교묘하게 진실과 거짓을 섞어 눈앞의 어린 천사를 현혹해낸다. 사정을 모르고 들으면 썩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이 어리고 순진한 천사는 자신의 말을 의심하지 못하리라.

“……과연. 그렇게 된 거였군요.”

거 보라지. 순진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아라엘을 보며 라미엘이 미소 지었다.

“그러니 당신이 안수호를 도와주도록 해요. 물론 다른 천사나 쾌락천마님께 들키지 않는 선에서요. 이유는 말 안 해도 아시겠죠?”

아라엘이 애매모호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라미엘이 말한 이유가 무엇인지 조금 아리송하였으나 물어보기가 그랬다.

“모든 건 그분께 보다 즐거운 유희거리를 제공하기 위해서예요. 알아들었으면 이만 올라가보세요.”

“네에…….”

아라엘이 쭈뼛거리며 몇 번 라미엘을 돌아보다 이내 감옥 저편으로 사라졌다.

“…….”

홀로 남은 라미엘은 조금 전처럼 벽에 등을 기댄 채 날개로 제 몸을 품었다. 뼛속까지 얼어붙는 한기가 그녀의 몸을 잠식했으나, 두근거리는 마음에 연신 뛰어대는 심장이 그 몸을 따스하게 데웠다.

그녀가 허공에 손짓하자 반투명한 영상이 떠올랐다. 천사의 권능 중 가장 기본에 해당하는 하계 관찰. 헤일로가 박살나며 천사로서의 힘을 다 잃은 그녀였으나, 이 기본적인 권능만은 아직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흐릿한 영상 속에는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 한복판에는 들것에 실린 채 의식을 잃은 안수호와 그 곁에 바짝 따라붙은 강하늘이 있었다.

‘부디, 열심히 발버둥 쳐주시길.’

발버둥 치고 발버둥 치고 또 발버둥 쳐, 마침내 자신을 이 세계에 끌고 온 거짓된 신의 목에 칼날을 들이밀 수 있을 때까지.

부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노라고. 그렇게 생각한 라미엘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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