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64화 (65/266)

〈 64화 〉 063. 두 번째 빙의자

* * *

……계기는 남동생이 보낸 카톡 메시지였다.

‘누나 요즘 웹소 읽는다면서? 이거 한 번 읽어볼래? 여기 누나랑 이름 똑같은 캐릭터 나온다ㅋㅋㅋ’

남동생은 어려서부터 만화니 애니메이션이니 하는 것에 열광하던, 흔히 말하는 오타쿠였다. 근래에는 웹소설에 빠졌는지, 하루가 멀다하고 작디작은 스마트폰 화면에 깨알 같은 글자들을 띄워두곤 실실 웃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 남동생이 내게 추천한 소설. 그것이 바로 <초인들의 시대="">였다.

남동생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만화는 좋아했다. 장르는 달랐지만 웹소설도 종종 읽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나는 <초인들의 시대="">라는 낯선 소설에 빠르게 빠져들었다.

……정작 나와 이름이 똑같은 강하늘이라는 캐릭터가 잠깐 등장했다 사라지는 찌질한 악역이었다는 걸 알았을 땐 뒤통수가 조금 얼얼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소설 자체는 평범하게 재미있었다.

딱, 전반부 200화 근처까지만.

마치 작가가 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갑작스레 이상하게 꼬여가는 스토리에 나는 결국 초인들의 시대를 읽는 것을 그만두었다. 흔히 말하는 하차라는 놈이다.

동생은 조금만 더 읽어보라 권유했지만 어쩌겠는가. 재미를 얻고자 읽는 소설에서 정작 재미를 느낄 수가 없게 되었는데.

시리즈물을 중간에서 하차하는 거야 흔히 있는 일 아닌가. 요즘은 즐길 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이었다. 굳이 웹소설이 아니더라도, 굳이 <초인들의 시대="">가 아니더라도 내 여가 시간을 투자할 즐길 거리는 차고 넘쳤다. 그래도 완결만은 보자는 심정으로 이따금 몰아보긴 했지만, 그마저도 한두 달 분량씩 묵히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중 갑작스레 정류장을 덮친 트럭에 치여 죽었다.

죽었다고, 생각했다.

===

[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초인들의 시대="">의 등장인물 <강하늘>에 빙의하였습니다! ]

[ 소설 속 등장인물이 되어 당신이 원하는 대로 이 세상의 이야기를 바꿔보세요! ]

===

갑자기 눈앞에 떠오른 정체불명의 메시지를 보기 전까지는.

그날, 나는 졸지에 아카데미 소설 속 엑스트라 빌런이 되었다.

당황스러웠다. 죽음의 운명에서 벗어난 건 분명 좋은 일이겠지. 하지만 나는 곧 이제부터 내게 펼쳐질 운명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히로인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죽어나가는 세상이었다. 하물며 엑스트라 빌런에게는 얼마나 가혹한 세상이겠는가. 원작 지식을 이용해 주인공과 친해져볼까, 그런 생각도 했지만 곧바로 기각했다. 내 한 몸을 온전히 건사하려면 아무튼 작품의 무대에서 멀어져야만 했다. <초인들의 시대="">는 아카데미물. 그래, 나는 살아남기 위해 아카데미에서 멀어지고자 했다.

다행히 강하늘의 초능력은 헌터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능력이었다. 아니, 오히려 내게 있어선 축복과도 같은 능력이었다.

내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원래 세상에서의 나는 그럭저럭 잘 나가는 스트리머였다. 그리고 강하늘의 아바타 능력은 방송에서 활용할 방법이 무궁무진한 능력이었다. 마침 인터넷 문화도 비슷하니 스트리머로 먹고 사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겠다 싶었다.

무엇보다 스트리머만큼 초인이니 싸움이니 하는 것들과 동떨어진 직업이 달리 또 뭐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아카데미를 자퇴하기로 마음먹고 인터넷 방송 스트리머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야말로 순풍만범이었다. 원래 세상에서의 방송 경험에 세심하게 조율한 아바타가 더해지니 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파르게 우상향하는 지표를 보며 나는 안온한 인생의 꿈을 꿨다.

그래. 괴수니 여명단이니 노블레스니 하는 것들은 다 저리 꺼지라 해라. 나는 평화로운 인터넷 세상에서 한탕 제대로 땡겨서 평생 불로소득으로 평화롭게 살아줄 테니까.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건 반쯤 포기했다. 정체불명의 안내메시지는 첫날을 마지막으로 모습을 감췄다. 당연히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 따위 알 수가 없었다. 어렴풋이 원작의 사건을 해결해나가면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까 짐작은 했지만, 나는 그 과정이 결코 녹록치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뭐, 어차피 원래 세계엔 별다른 미련도 없었다. 기왕 죽었다가 살아난 거 이 세상을 제2의 고향삼아 평화로운 여생을 구가하자.

……그렇게 다짐했건만, 이놈의 세상은 내가 평화롭게 사는 걸 결코 용납하지 않는 듯 했다.

아카데미를 자퇴한다니 대뜸 다른 아카데미 장학사가 찾아오질 않나. 그 아카데미 관계자가 내 납치를 꾀하질 않나. 겨우 살았나 싶었더니 날 도와준 경비대 높은 사람도 날 노리고 있다고 하고.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날 괴롭히려는 듯 꼬여만 가는 상황에 나는 반 강제로 아카데미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일단 보험 삼아 주인공과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지만 불안한 마음이 가시는 건 아니었다.

낯선 세상에 낯선 사람들. 의지할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으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있기는 하지.

‘그린하우스 경비대 특수대책과 소속 안수호라고 합니다. 강하늘 학생 번호 맞습니까?’

안수호. 원작에는 없던 경비대 소속의, 어딘가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는 남자.

처음에는 그저 귀찮은 상대라고 생각했다. 멋대로 내 집에 쳐들어와서, 방송하는 장면을 들켰을 땐 고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청부업자들이 날 습격하고, 그가 날 구하기 위해 목숨까지 걸어가며 싸우는 모습을 보자.

그에 대해 가지고 있던 나쁜 감정은 눈 녹듯 사라지고, 어느새 나는 그에게 호감을 품게 되었다.

그 호감이 평범한 호감이 아니라 낯간지러운 연정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때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와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금세 사랑에 빠지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스물셋이나 먹고 동화 속 공주님을 동경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여자라면 자신의 인생에 찾아올 백마 탄 왕자님을, 아주 조금은 기대하는 법이니까.

비록 그는 백마를 타지도 않았고 왕자도 아니었지만.

의지할 사람 하나 없던 내게 있어서 그는 어둠 속에 드리운 한줄기 광명과도 같은 존재였다.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그런 그가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연막을 피워서 놈의 시야를 가릴 거야. 그때 게이트를, 향해 도망쳐……. 다리가 언 거는, 아바타를 해제하면 아마, 회복될 테니까…….’

또다시 나를 지키다가 만신창이로 다쳐,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는 내게 도망치라고 했다. 나 혼자서라도 살아남으라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야, 그가 이렇게 된 건 온전히 내 탓이었으니까.

내가 게이트를 착각하지 않았다면. 내가 낙반에 고립되지 않았다면. 애초에 내가 아카데미에 복학하지 않았다면.

그가 저 괴물 같은 기사와 싸우는 일도, 내 눈앞에서 싸늘하게 식어가는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럼에도 원망하는 말 한 마디 없이 나보고 도망치라고 하는 그를 보며.

도대체 뭐가 그리 미안한지 슬픈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그를 보며.

차마, 차마 도망칠 수 없었던 나는 덜덜 떨리는 무릎을 이끌고 창백한 죽음의 기사와 마주섰다.

두려웠다.

눈앞의 기사가 두려웠다. 그가 휘두를 검이 두려웠다. 검에 내 살을 가르고 찾아올 아픔이 두려웠다. 그 끝에 직면할 죽음이 두려웠다.

그럼에도 내가 도망치지 않고 새하얀 기사를 막아선 것은.

아마 은인을 두고 갈 수 없다는 도덕심의 발로요, 공포에 마비된 이성으로 내지른 만용이요, 어차피 도망치는 건 불가능할 거라는 체념이요, 혹시라도 기적이 일어나진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이요.

허나 그 다채로운 이유 속에 그를 향한 애틋한 연심이 조금은 섞여 있었을 거라고.

­파아아아아앗!!

그 감정을 자각한 순간, 따스한 빛이 가슴으로부터 터져나왔다.

동시에.

­띠링!

===

[ 의지 능력치가 E에서 C로 상승합니다! ]

[ 의지 능력치의 상승에 따라 <스킬 :="" 슬로우="" 스타터="">의 제한이 완화됩니다! ]

[ 근력 능력치가 E에서 D로 상승합니다! ]

[ 민첩 능력치가 D에서 C로 상승합니다! ]

[ 내구 능력치가 E에서 D로 상승합니다! ]

[ 마력 능력치가 E에서 B로 상승합니다! ]

[ 보유 초능력 <아바타>의 등급이 E에서 C로 상승합니다! ]

[ <스킬 :="" 연심의="" 벚꽂="">의 개화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스킬의 정보를 개방합니다! ]

[ 보유 스킬 ]

1. 슬로우 스타터(유니크. S)

2. 연심의 벚꽃(레전더리. S)

­이쪽 세상에서 비롯된 일정 수치 이상의 연심을 자각하는 것으로 가슴에 벚꽃 모양의 성흔이 새겨졌습니다.

­하루 한 번 성흔을 소모하는 것으로 특정 대상의 잠재 능력을 일시적으로 완전히 개방할 수 있습니다. 스킬의 지속 시간은 대상에게 품은 연심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스킬의 효과가 지속되는 동안 대상은 대상이 이룩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와 동일한 수준의 신체, 정신, 기술적 성취를 이룹니다. 또한 대상이 입은 모든 부상 및 상태이상에 대하여 대상은 ‘만전’의 상태로 회복합니다.

­스킬의 효과가 끝날 경우 대상은 곧바로 기절하며, 최소 2시간에서 최대 48시간의 회복 기간을 거친 뒤 깨어납니다.

­또한 모든 성흔을 사용할 경우 페널티로써 당신은…….

===

길게 이어지는 시스템 메시지. 그 전부를 읽을 시간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창백한 기사는 시시각각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으니까.

‘……제한이니 페널티니 알 게 뭐야.’

이 자리에서 살아나갈 수 있다면, 등 뒤의 남자를 살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봐야 할 때였으니까.

===

[ <스킬 :="" 연심의="" 벚꽃="">을 발동하시겠습니까? ]

[ 발동을 원하실 경우 스킬 발동을 위한 시동어를 정한 뒤 해당 시동어를 읊어주시기 바랍니다. ]

===

연심의 벚꽃. 누군가를 사랑하는 만큼 그 사람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스킬.

……아무리 그런 스킬이라지만 굳이 시동어를 낯간지러운 말로 정할 필요는 없겠지? 여차할 때 바로바로 튀어나와야 할 테니까.

그래. 고민하지 말자. 여기선 그냥 심플하게…….

“……발동.”

그렇게 나지막하게 뇌까린 순간, 연분홍빛 벚꽃이 화사하게 피어올랐다.

***

­파아아아앗!

빛이 피어올랐다.

앙상한 겨울 숲을 화사하게 채우는 따듯한 봄날의 연분홍색 꽃잎처럼, 따스한 햇살처럼 포근한 빛이 온 사방을 가득 채웠다.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감마저 품게 하는 신비로운 풍경.

­……허어.

그 압도적인 빛 앞에선 빌헬름마저 할 말을 잊었다.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흘러나온다.

‘이건…….’

한편 놀란 것은 안수호도 마찬가지였다. 그 전까지 느끼던 격통이 사라지자 그가 의아한 얼굴로 눈을 떴다. 분명 이 따스한 빛이 원인이라고. 그 생각에 그가 빛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그를 돌아본 강하늘과, 그녀의 가슴에 핀 커다란 벚꽃 한 송이.

‘뭐지, 저건?’

원작에서 강하늘에게 저런 능력은 없었다. 아니, 아바타 능력의 응용인가.

‘잠깐, 벚꽃이라고? 벚꽃이라면 분명­’

­띠링!

그렇게 생각한 순간 청명한 알람이 그의 뇌리에 울려 퍼졌다.

===

[ <스킬 :="" 연심의="" 벚꽃="">의 대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

[ 모든 부상 및 상태이상이 일시적으로 회복됩니다! ]

[ ‘샛별의 숨소리’의 발동 가능 횟수가 3회로 초기화됩니다! ]

[ 잠재 능력이 완전히 개방되어 일시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

[ 근력 능력치가 D+에서 A+로 상승합니다! ]

[ 민첩 능력치가 C+에서 A+로 상승합니다! ]

[ 내구 능력치가 D에서 B로 상승합니다! ]

[ 마력 능력치가 C에서 A로 상승합니다! ]

[ 기교 능력치가 C에서 A+로 상승합니다! ]

[ 생사를 넘나드는 고난을 견딘 끝에 의지 능력치가 E에서 C로 상승합니다! 추가로 스킬 효과로 인해 C에서 A로 거듭 상승합니다! ]

[ <검은 연기="">의 등급이 일시적으로 A로 상승합니다! ]

[ <마력 흡수="">의 등급이 일시적으로 S로 상승합니다! ]

[ 남은 스킬 지속 시간 : 5분 07초 ]

===

시야를 가득 메우는 시스템 메시지.

그 너머에서 강하늘이 무어라 설명해야할지 모를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세요. 오빠는 지금­”

“아니, 설명할 것 없어.”

시스템 메시지를 통해 대강의 사정은 파악했다. 안수호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배에 박혀있던 서리검은 어느새 사라진 뒤였다. 몸은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고 부상의 흔적 따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몸에 차오르는 충만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전능감.

빠르게 회전하는 사고와 맑게 갠 시야.

이내 주먹을 꽉 쥐고 정면을 노려보자, 빌헬름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기이한 일이군. 상처가 사라진 것은 물론이고 풍겨오는 기세마저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편이였거늘 지금은 온갖 전장을 넘어온 역전의 전사의 눈을 하고 있군. 기이한 일이야.

빌헬름이 검을 휘둘렀다. 그가 아닌 게이트를 향해서.

­파가가가가가각!!

그러자 거대한 얼음벽이 솟아나 게이트를 감쌌다. 마치 도망치는 것 따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그렇다면 그 풍겨오는 기세가 진짜인지 허세인지 시험해보면 될 일. 자, 덤비거라.

검을 겨누는 빌헬름을 보며 그가 빠르게 생각했다.

시스템이 말했듯 그의 현 상태는 안수호라는 인간의 완성형 그 자체. 허나 그 능력치로도 빌헬름을 이기기란 요원했다. 애초에 안수호의 몸은 잠재능력이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둔재가 수십 년의 노력 끝에 이룩한 경지라 한들 진정한 달인에겐 미치지 못하는 법.

하지만 둔재라 해도 완성에 이른 그라면 어느 정도 맞상대는 가능할 터. 그렇다면 틈을 노려 도망치는 것 역시 불가능은 아닐 터였다.

“물러나 있어.”

­파파파파파앙!

양손의 아티펙트가 빛을 발한다.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빛을 뿜어내는 탈리스만과, 위협적인 붉은빛을 흩뿌리는 샛별의 숨소리.

지금 자신의 능력치로 무엇이 가능한지, 등급이 오른 초능력이 어떻게 변했는지 따위의 지식이 자연스레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연심의 벚꽃의 효과는 비단 육체능력만을 상승시키는 것이 아니다. 기술적 성취와 더불어 정신적 성숙도까지, 그는 지금 그야말로 완성에 다다른 상태였다.

이내 그가 주먹을 꽉 쥐자, 대량의 연기가 한데 모여 칠흑빛 검으로 화했다.

===

[ 남은 스킬 지속 시간 : 3분 59초 ]

===

남은 시간 약 4분.

그냥 도망친다면 놈은 능히 그의 등을 벨 것이다. 살아나가기 위해선 저 4분 안에 어떻게든 놈의 틈을 만들어내, 그 틈을 노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는 주인공처럼 놈을 정면으로 이기겠다는 건방진 소리 따위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그에게 어울리는 방식이 있는 법.

지금 이 순간, 그는 가지고 있는 모든 패를 활용해 전력으로 놈에게서 도망치려 했다.

­투콰앙!

안수호가 지면을 박찼다. 그것만으로 지면이 폭발하듯 튀어 올랐다.

순식간에 접근한 그가 검을 휘두른다. 그것은 빌헬름도 마찬가지. 백과 흑의 두 자루의 검이 저마다의 궤적을 흩뿌리며 격돌한다.

­카아앙!!!

울려퍼지는 것은 새된 금속음.

빌헬름이 숨을 삼켰다. 맞부딪힌 검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존재감. A+에 달하는 마력과 A랭크의 검은 연기, 그리고 S랭크로 오른 탈리스만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검은 칼날은 놈의 서리검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A+에 달하는 민첩 능력치는 샛별의 숨소리에 의해 8배로 가속하여, 그 속도는 빌헬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

허나 검의 달인인 빌헬름에 비해 안수호는 문외한 그 자체. 정면에서 검술로 승부한다면 절대 이기지 못하겠지.

­키이이이잉!

하지만 정면에서 검술로 승부해줄 이유 따위 어디에도 없었다.

­콰아아아아앙!

안수호가 휘두른 검이 그대로 폭발했다. 지금까지의 그 어떤 일격보다도 강력한 폭발. 거대하게 휘몰아치는 검은 폭풍이 종횡무진 겨울 숲을 질주한다.

허나 전과 다른 것은 그 모든 연기의 흐름이 소상히 느껴지고, 또한 그것들을 안수호가 온전히 조종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가 모든 폭발의 기세를 정면의 빌헬름에게 향했다. 성형작약탄처럼 일점에 집중된 연기가 빌헬름의 몸을 주르륵 미끄러뜨린다.

­키이이이이잉!

탈리스만이 맹렬히 빛을 발한다. 안수호도 알고 있었다. 고작 한 방으론 그에게 타격을 줄 수 없다고.

'그렇다면 숫자를 늘리면 그만!'

­투화아아아악!

그의 오른손에서 수십 가닥의 검은 촉수가 튀어나왔다. 그 촉수 전부가 고도로 압축된 연기 덩어리였다. 하나하나에 담긴 위력은 좀 전의 일격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

상하좌우 모든 곳을 메우며 사방으로 뻗어나간 촉수가, 일제히 빌헬름의 몸 위로 쇄도했다.

­이까짓 잔꾀에 내가 당할 것 같나!

­콰드득!

빌헬름이 검을 지면에 꽂았다. 다음 순간, 수십 개의 얼음송곳이 지면을 뚫고 나와 안수호의 촉수와 격돌했다.

­투콰앙! 콰앙! 콰아아아아앙!

천지를 울리는 굉음. 청명한 얼음과 끈적한 촉수가 사방에서 얽혀든다. 그때마다 일어나는 폭발에 온 사방이 차가운 얼음조각과 시커먼 연기로 뒤덮인다.

­휘오오오오오오!

직후 안수호가 주먹을 쥐자 사방으로 퍼진 연기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압축이 풀려 팽창한 뒤에도 검은 연기는 여전히 그의 능력의 일부. 모든 잠재 능력이 개방된 지금의 안수호라면 이 대량의 연기마저 능히 조종해낼 수 있었다. 사방으로 퍼진 연기가 빌헬름을 중심으로 압축되며 거대한 회오리바람을 만든다.

­콰가가가각!

금속끼리 서로 불똥을 튀기며 격돌하는 소리. 완벽하게 그의 지배 하에 놓인 연기가 수천 개의 칼날을 형성해 빌헬름의 몸을 유린했다. 어지간한 괴수라면 뼈조차 추리지 못할 공격.

허나 상대는 그 류태현조차 고전한 역전의 강자였다.

­파바바바바밧!

빌헬름이 온 사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 궤적이 지나는 곳에 연기가 갈라지고, 퍼지고, 이내 흩어졌다. 1초도 채 지나지 않아 수십 번의 검격을 날린 그의 주위를 휘몰아치던 연기가 힘을 잃고 사방으로 비산했다.그 안에서 튀어나온 빌헬름의 몸은 생채기가 조금 생겼을지언정 여전히 건재. 그는 완벽하게 안수호의 기술을 파훼해냈다.

­투콰아앙!

허나 사방으로 비산한 연기는 그대로 그의 시야를 가리는 연막이 되었다. 그 틈을 노려 안수호가 만들어낸 창이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콰앙!

­커헉!

그의 입에서 처음으로 튀어나온 신음소리.

부지불식간의 일격에 빌헬름이 신음을 삼켰다. 모든 무기가 능력의 산물인 안수호에게 있어 거리의 제한은 존재하지 않았다. 십 미터나 넘게 뻗어진 창. 안수호가 그 창을 쥔 손을 휘릭 돌렸다.

­투화악!

그러자 옆구리에 파고든 창이 갈라지며 네 가닥의 촉수로 변했다. 휘리릭 휘감긴 촉수다발이 그의 팔과 다리를 꽈악 동여맸다.

­이까짓 걸로 날 막을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외친 순간 빌헬름의 몸이 주욱 당겨졌다. 동시에 정면에서 다가오는 기척.

자신을 끌어당김과 동시에 공격하려고 한 것인가. 뻔하디 뻔한 수였다. 나지막한 웃음을 흘린 그가 흐릿한 연막 너머로 보이는 인영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서걱!

베었다. 분명히 베는 감촉이 느껴졌다.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옆구리를 빠져나가며 깔끔하게. 연막 너머로 보이는 인영이 주르륵 갈라지며 정확히 둘로 양분됐다.

­찌릿.

허나 그 순간 그의 감각이 경종을 울렸다. 등 뒤에서 접근하는 또 하나의 기척.

­쐐액!

이번에도 베었다. 마찬가지로 베는 감촉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정수리부터 시작해 가랑이까지 일도양단. 깔끔한 내려베기였다.

­찌릿!

그러나 기척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늘어만 갔다. 온 사방을 메우는 기척에, 흐릿하게 보이는 사람의 형상에 그는 전쟁 도중 적진에 홀로 떨어졌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기척은 분명하게 느껴지나 적은 한 명. 그렇다는 건……!’

짙은 연막 속. 그가 감각을 있는 대로 끌어올렸다. 반경 수십 미터에 달하는 공간의 모든 기척이 소상히 느껴졌다.

과연, 분신을 만들어낸 것인가. 크기도 모양도 담긴 무게감도 본체와 완벽하게 동일한 분신들. 시야가 제한된 이 상황에선 착각할 법도 했다. 그래, 분신으로 자신의 주위를 돌린 틈을 타 도망치려 한 것일 테지.

그가 비릿한 조소를 흘렸다. 시도는 좋았지만 결국 얄팍한 꼼수. 그래 봐야 삼류의 술책에 불과했다.

­파앙!

빌헬름이 지면을 박찼다. 주위를 스치는 수십 개의 기척은 전부 무시했다. 이따금 그들이 뻗어내는 칼날은 전부 몸으로 받아냈다. 순백의 갑옷에 생채기가 조금 났지만 그뿐. 어느 하나 그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는 되지 못하였다.

그 전부를 무시한 채 그가 게이트가 있는 방향으로 내달렸다. 이윽고 게이트에 다다르기 직전, 사방을 메우고 있던 연막이 사라지며 밝은 겨울 숲의 풍경이 드러난다.

게이트를 감싸고 있는 얼음은 그대로. 적은 아직 이곳을 넘어가지 못했다.

그렇다면 어디냐. 그가 푸른 안광을 뿜어내며 사방을 살폈다.

허나, 보이지 않는다.

분명 게이트를 향해 도망쳤으리라 생각한 적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그의 등 뒤에 자리했던 거대한 연무가 일제히 그에게 쇄도했다.

­이런!

가히 수천 가닥은 되는 검은 채찍들. 자신의 몸을 노리고 쏘아지는 그 검은 파도에 빌헬름이 검을 휘둘렀다. 연기는 전후좌우 모든 곳에서 날아왔으나 빌헬름은 검 한 자루 만으로 능히 그 전부를 쳐냈다. 신기에 다다른 검술이었다.

허나 능히 쳐낼 수 있다 하더라도 수천이었다. 빌헬름이 인간의 형태를 한 검사인 이상 빈틈은 반드시 생길 수밖에 없었다. 곧 칼날로 화한 채찍이 하나둘 그의 갑옷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담긴 위력은 고작해야 생채기나 낼 수준이지만, 앞서 말했듯 그 숫자가 수천이었다.

­까가가가강!

밝은 불꽃이 튀며 그의 몸에 잔 상처가 새겨진다. 불쾌했다. 주군에게서 받은 갑옷에 상처가 생기는 것이 짜증났다. 정당한 1대1의 결투에서 생긴 상흔이라면 모를까, 이런 기이한 사술 같은 공격에 당한 상처는 명예도 뭣도 아니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짜증에 있지도 않은 입술을 잘근 씹으며 빌헬름이 안수호의 위치를 살폈다. 여전히 연막 속에 존재하는 분신들 탓에 그의 위치를 파악하기란 어려웠지만 무얼, 이 게이트를 지키고 있는 이상 그는 도망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우직하게 이 앞을 지키면 될 뿐.

그렇게 짓쳐드는 채찍들을 상대로 얼마나 검을 휘둘렀을까.

­!!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느껴진 이질적인 기척에 그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가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나무 뒤에 숨어서 그를 노리던 안수호가 부리나케 달아났다. 위치를 알아낸 이상 주도권은 빌헬름에게 있었다. 짓쳐드는 채찍들을 무시하며 그가 검을 꼬나쥔 채 안수호에게로 달려들었다.

안수호는 겁에 질린 얼굴로 꼴사납게 도망쳤다. 연막 속에 숨어서 치졸하게 간이나 보던 놈 다웠다. 빌헬름이 검을 위로 치켜든다. 이 거리라면 다음 도움닫기를 통해 능히 저 남자를 벨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순간, 다시 한 번 등 뒤에서 느껴진 이질적인 기척.

눈앞에 뻔히 본체가 있으면서 분신으로 날 속이려 드는가. 그렇게 생각했으나 느껴지는 기척이, 살기가 너무나도 분명했다. 그 순간 꼴사납게 도망치던 안수호의 형상이 크게 일렁였다. 마치 신기루가 걷히듯, 다리가 풀린 채 주저앉은 안수호의 모습이 강하늘로 변했다.

­허?

빌헬름이 나지막히 탄성을 흘렸다. 그 순간에도 등 뒤에서 짓쳐드는 날카로운 살기. 뒤늦게 그가 몸을 돌리려 했으나­

­카드드득!

그가 몸을 채 반도 돌리기 전에 안수호의 칼날이 그의 갑옷 틈새를 파고든 뒤였다.

'이런!'

빌헬름이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저 소녀가 변신 능력을 가졌구나. 그 능력을 통해 자신의 앞에 미끼로 나선 것이구나. 놀랍다면 놀라운 일이었다. 변신 능력은 그렇다쳐도 설마 이 남자가, 저 소녀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걸었던 이 남자가 지키고자 하는 소녀를 미끼로 쓸 줄은 예상조차 못했으니까.

승리를 위해 무엇이든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던 것인가.

'……아니, 저 소녀가 다치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던 거겠지.'

­뭉클!

그 순간 안수호의 검이 크게 팽창한다. 좀 전에도 한 번 당했던 술수. 빌헬름이 안수호를 노려봤다.

“……이번엔 조금 다를 거다.”

­다르기는 무슨!

빌헬름이 안수호를 향해 검을 휘두르려 했다. 허나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이, 이건……?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꽉 맞물려 움직이지 않는 관절부.

그 사이사이에서 스멀스멀 새어나오는 검은 연기를 보며 빌헬름이 뒤늦게 안수호가 저지른 짓을 알아차렸다.

­까득! 까드득!

안수호가 찔러 넣은 칼날에서 가시처럼 뻗어 나온 가지들이 그의 관절을 안쪽에서 꽈악 붙들었다. 그가 리빙 아머였기에 가능했던 비책.

관절을 동여맨 채 천천히 크기를 키워가는 연기를 보며 빌헬름이 침음성을 흘렸다. 부상의 회복과 더불어 갑작스러운 육체적, 기량적 성장. 거기에 더해 지키고자 한 대상마저 승리를 위해 아낌없이 이용하는 담력까지. 눈앞의 남자가 조금 전 그 약해빠졌던 그 놈이 맞나 싶었다.

삐걱이는 관절로 어떻게든 검을 휘두르려던 빌헬름이,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졌군.

“아니. 네 승리다.”

안수호가 생각했다. 결정력이 부족한 자신으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빌헬름을 쓰러뜨릴 수 없다. 만약 이것이 결투였다면 이제부터 등을 돌리고 도망칠 자신의 패배이리라.

이내 안수호의 탈리스만이 크게 빛을 발하며, 빌헬름의 내부에 자리한 연기가 일제히 폭발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거센 폭발음과 함께 빌헬름의 몸체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부서진 게 아니었다. 그저 고정이 약한 관절부가 폭발력을 이기지 못하고 흩어졌을 뿐. 리빙 아머인 그라면 채 30초도 지나지 않아 원상복구 될 것이다.

허나 그만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안수호의 목적은 승리가 아닌 도주였으니까.

검을 휘둘러 게이트를 감싼 얼음을 걷어낸 그가 강하늘을 불렀다.

“하늘아!”

그 부름에 나무 뒤편에 숨어있던 강하늘이 빠르게 달려왔다. 그 가슴에 피어오른 벚꽃은 어느새 거의 빛을 잃은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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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은 스킬 지속 시간 : 37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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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아슬아슬했다. 그렇게 생각한 안수호가 바닥에 널브러진 잔해를 멀리 치우며 강하늘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어?”

마치 그가 발견해주길 기다리듯, 그의 앞 지면에 자리한 두 개의 광원.

주위에 서리를 흩뿌리며 빛나는 푸른 목걸이와 붉은 보석이 박힌 손바닥 정도 크기의 투명한 십자가.

안수호는 그 두 개가 퀘스트에서 말한 추가 보상임을 짐작했다. 분명 냉염의 십자가와 서리정령의 증표라는 이름이었던가.

빌헬름의 몸이 분해되면서 놈이 가지고 있던 아티펙트가 흘러나온 것인가. 정확한 경위는 몰랐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바닥에 떨어진 두 개의 추가보상을 회수한 그의 곁에 강하늘이 바싹 붙었다.

“오빠, 모, 몸은 괜찮으세요?”

“괜찮아. 얼른 나가자.”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강하늘을 안수호가 다독였다. 곧 두 사람이 도망치듯 게이트로 몸을 던졌다. 그 직전 안수호가 뒤를 돌아보자, 천천히 형체를 이뤄가는 빌헬름이 우두커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슬릿 너머의 시선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안수호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으나.

다만, 어딘가 만족한 것 같은 시선이었다고. 안수호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 시선의 작별을 받으며 두 사람이 몸이 게이트 건너편으로 사라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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