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062. 이방인들
* * *
괴수.
단어가 주는 이미지만 보면 지성이 없는 괴물만을 상상하기 쉬우나, 실제로 던전에서 등장하는 괴수들 중에는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가진 자들도 꽤 있는 편이었다.
애초에 괴수라는 명칭 자체가 영단어 Monster를 주먹구구식으로 번역해 공식 명칭으로 삼은 것이었다. 던전이나 게이트, 헌터는 영단어를 쓰면서 몬스터만 괴수로 번역한 건 기이한 일이었으나 사람들은 그러려니 했다. 이 나라의 정부가 쓸데없이 외래어의 한글화에 집착하는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었으니까.
각설하고.
괴수들 중에는 분명 인간 수준의, 혹은 그 이상의 지능을 가진 괴수가 존재했다. 강하늘의 앞에 자리한 순백의 기사, 서리기사 빌헬름 역시 그런 케이스 중 하나였다.
아니, 그의 경우엔 단순히 ‘지성이 있는 괴수’라고 치부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저, 저기. 혹시 저랑 잠깐 이야기 가능하실까요……?”
그때 느닷없이 나타난 낯선 이방인, 강하늘의 말에 그가 침음성을 흘렸다.
이야기라. 이야기다운 이야기를 해본 것이 벌써 몇 년 전인가. 그런 생각조차 의미가 없을 정도로 그는 오랫동안 홀로 이 묘소를 지키고 있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잠으로 보내며 이따금 방문자가 있을 때만 의식을 깨웠다. 허나 외딴 숲 속에 있는 잊혀진 묘에 방문자가 얼마나 오겠는가. 정확한 시간은 가늠할 수 없었으나, 기실 자신의 각성은 거의 수백 년만의 일이었으리라고 빌헬름이 짐작했다.
그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 마주친 방문자가 하필이면 ‘섞인 자’라는 건 과연 우연일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문득 그가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가 감각을 확장시켰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신경을 억지로 깨웠다. 새벽녘에 낀 성에가 녹아내리듯 그의 정신이, 감각이, 기억이 점차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그때, 그의 감각에 걸리는 수상한 움직임이 하나.
저 멀리서부터 일직선으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방문자의 기척에 그가 걸터앉았던 계단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
마른 나뭇가지가 바스러지는 소리에 강하늘이 고개를 돌렸다.
“강하늘!!”
“수, 수호 오빠?”
자신에게 팔을 벌리며 달려오는 안수호를 보며 강하늘이 얼떨결에 마주 팔을 벌렸다. 안수호가 자신을 안아주기라도 할 거라고 착각한 모양. 허나 안수호는 우악스럽게 강하늘의 팔을 붙잡곤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마치 누군가로부터 그녀를 지키려는 것처럼.
안수호가 강하늘을 바라본다. 하고 싶은 말은 무척이나 많았다. 섣불리 게이트에 발을 들인 그녀의 경솔한 행동에 대한 꾸짖음이라든가, 그래도 살아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의 말 같은.
허나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열 수 없었다. 입술을 꾹 닫은 채 긴장한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제단 앞에 우두커니 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순백의 기사를.
‘이런 미친…….’
그의 감각이 경종을 울린다.
앙상한 겨울 숲. 풍화된 흰색 제단. 그 한복판에 박힌 비석. 그리고 그 앞을 지키고 있는 순백의 기사.
안수호는 그 광경을 알고 있었다.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몇 번이고 글로 읽었으니까.
‘설마 빌헬름인가?’
서리기사 빌헬름.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외딴 숲 속에서 하염없이 죽은 주인의 묘를 지키는 묘지기이자 파수꾼.
그 정체는 원작 후반부에나 등장하는 S랭 던전의 주인 괴수이자, 후반부의 류태현조차 목숨을 걸고 싸워 겨우 동귀어진에 가깝게 승리한 강적 중의 강적.
본래라면 5년 뒤에야 나타나야 할 그 백기사의 모습에 안수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등을 돌리면 죽는다.’
직감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저 기사와 마주친 이상, 그의 허락 없이는 절대로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
멋대로 주인의 묘를 침범한 것으로 모자라 명예롭지 못하게 도망치는 자에게, 백기사의 서리검은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을 테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빌헬름이 다른 괴수랑 달리 말이 통하는 상대란 점이다.’
빌헬름은 전형적인 기사도 정신을 표방한 캐릭터였다. 명예를 알고 신의를 중시하며 충의를 지키는 자. 대화하기에 따라선 침입자인 우리를 살려서 돌려보내줄 지도 모른다.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불행이라 해야 할지…….’
굳이 따지자면 다행이면서 동시에 불행이었다. 던전의 주인 괴수가 빌헬름이었던 덕에 강하늘이 아직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던 거지만, 만약 싸우게 될 경우 빌헬름을 상대론 그가 무슨 수를 써도 절대 이길 수 없을 테니까.
자,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
안수호가 빌헬름에게 꺼낼 말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정면으로 자비를 요구하는 건 아마 효과가 없을 거다. 허세가 통할 상대도 아니고. 그렇다면 빌헬름의 설정과 관련해서 내가 그의 주인과 관련이 있는 사이라고 뻥카를 칠까? 그래. 이쪽에서 먼저 아는 체를 하면 적어도 문답무용으로 죽이지는 않겠…….’
……냄새가.
그때, 줄곧 입을 닫고 있던 빌헬름이 쇠가 갈리는 듯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냄새가 나는구나. 네놈에게서 지독한 악취가 풀풀 풍기는구나! 그래, 이 악취를 어찌 잊겠느냐! 주제넘게도 신을 자처하는 알량한 초월자의 냄새를 말이다……!
강하늘을 대할 때의 무미건조한 음성과 달리 은은한 분노가 서려있는 음성.
그 변화에 강하늘이 깜짝 놀라며 안수호의 옷깃을 꽉 붙잡았다.
‘……뭐라고?’
반면 안수호는 빌헬름의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의 뇌리에 조금 전 빌헬름이 뇌까린 단어가 깊숙이 박힌다.
주제넘게도 신을 자처하는 알량한 초월자.
그 단어의 나열에서 안수호는 본능적으로 한 존재를 떠올렸다.
쾌락천마. 자신을 이 세상에 빙의시킨 장본인. 아마도 이 세상의 신적인 존재일 테지만, 그런 주제에 치졸한 짓거리만 일삼는 신 같지도 않은 신.
‘설마 빌헬름은…….’
이 세상의 진실을 알고 있는 건가.
갑작스레 떠오른 의문에 안수호의 표정이 납빛으로 굳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빌헬름은 허공을 바라보며 끓어오르는 쇳소리를 토해냈다.
그래. 섞인 자가 둘씩이나 나타난 게 우연일 리가 없다. 우연이 아닌 운명이리라! 운명이자 의도된 안배이리라! 헌데어째서! 어째서! 어째서어어어!
빌헬름이 노도와 같은 기세로 포효했다. 하얗게 샌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가 분노의 외침을 토해냈다.
비루한 몰골로 신 놀음을 하는 가증스러운 초월자여! 고작 그런 존재를 따르는 미련하기 그지없는 어리석은 천사들이여! 네놈들의 의도가 무엇이냐! 어째서멋대로 나를 이 세상에 끌고 왔는가! 어째서저 냄새나는 이방인을 내 앞에 데려왔는가! 어째서나의 잠을 깨웠는가! 도대체 어떤 뜻을 품었기에 감히 주군의 안식을 방해하느냔 말이다!!!
빌헬름은 자신의 앞에 있는 두 사람 따위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그는 그저 하늘을 올려다보며, 보이지 않는 초월자에 대해 있는 힘껏 분노를 토해냈다.
그 외침에 담긴 짙은 감정에 두 사람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수백 년, 어쩌면 수천 년을 살아온 망령이 토해내는 귀곡성이었다. 듣는 이의 영혼을 뒤흔드는 듯한 포효에 강하늘이 눈물을 찔끔 흘렸다.
반면 안수호는 힘겨운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사고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가 생각했다. 빌헬름은 저런 캐릭터가 아니었노라고.
그가 아는 빌헬름은 중세 기사의 스테레오타입이었다. 이미 죽은 주군에 대한 충성을 잃지 않고, 그럼에도 정정당당한 전투와 기사로서의 명예를 중시하고, 그렇기에 류태현과 일기토를 벌인 끝에 만족스럽게 죽는. 인상적인 캐릭터였지만 결코 특이한 캐릭터는 아니었다.
설마나로 하여금 저 이방인들을 죽이게 할 셈이냐! 나와 저들을 싸우게 할 셈이냐! 내가 저들에게 내려진 시련이란 뜻이더냐! 그것이 이 세상에 날 끌어들인 이유더냐! 정녕 그것이 네놈들의 의도더냐!!고작해야 그깟 알량한 이유로 나를 잠에서 깨운 것이더냐!!!
헌데 그 빌헬름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신에 대한 분노를 토해내고 있었다. 가증스러운 신과, 그를 따르는 어리석은 천사에게 따지듯 외치고 있었다.
참으로 가증스럽도다! 참으로 건방지도다! 참으로 증오스럽도다! 이 나를! 저 이방인들을! 이 드넓은 세상조차 한낱 유희거리로 치부하는 그 오만함이 참으로 증오스럽도다! 개탄스럽도다! 자애의 여신을 자칭하던 그 창녀조차 이렇게 오만하지는 않았거늘!
빌헬름은 적어도 쾌락천마와 그를 따르는 천사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안수호는 알 수 없었다. 또한 빌헬름이 신적 존재뿐 아니라 이 세상이 소설이라는 사실까지 깨달은 것인가의 여부 역시, 안수호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분노에 몸을 맡긴 빌헬름은 대화를 시도할만한 상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안수호가 무의식적으로 들고 있던 총을 꽉 쥐었다. 대괴수용 철갑탄을 발사하는 무반동 가우스 라이플. C급 이하의 괴수라면 능히 잡아낼 수 있는 강력한 무장이었으나 빌헬름 앞에선 비비탄 총보다 못할 것임이 자명했다.
곧 총을 내려둔 그가 허리춤에 채워진 안타레스의 발톱 단검 손잡이를 살며시 잡았다.
이 또한 빌헬름의 강함에 비하면 이쑤시개나 다름없는 무장이었으나 명색이 A급 괴수의 발톱으로 만든 무기였다.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낫겠지만, 그래봐야 빌헬름의 몸에는 생채기조차 낼 수 없을 것이다. 애초에 지금 안수호의 스펙으로는 샛별의 숨소리 스택을 전부 소모해도 빌헬름의 발끝조차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단검을 쥔 건 반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빌헬름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분노가, 명백한 악의가 천천히 자신들을 향하는 걸 느꼈기에.
……그래, 그렇지. 그렇고말고.
하늘을 올려다보던 빌헬름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향했다. 그 두 눈은 투구의 슬릿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으나 안수호는 그 시선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었다.
분노, 후회, 회한, 그리고 체념.
그곳에 더 이상 고풍스러운 백기사의 모습은 없었다. 겉모습은 전혀 변하지 않았으나 풍겨져오는 기세가 일변했다.
그래. 내가 저들의 시련으로써 저들을 막아서길 바란다면 좋다. 초월자의 축복을 받은 대전사들이여, 어디 한 번 겨뤄보자꾸나.그래. 애초에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다. 네놈들이 누구고 이 만남에 어떤 안배가 있든 결국 네놈들은 침입자. 주군의 안식을 방해하는 침입자를 남김없이 배제하는 것. 그것이 이 노구에게 내려진 묘지기로서의 사명이자 마지막 명령일지니. 그렇다면 그리 할 뿐이다.
빌헬름이 두 사람을 바라봤다. 보기 드문 ‘섞인 자’에 초월자가 개입한 악취가 짙게 묻어나오는 남녀. 허나 지닌 기량은 고작해야 삼류 수준이었다. 빈말로도 자신의 상대가 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약자들.
기사도를 따른다면 자비를 베푸는 것이 맞을 지도 모르나 그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멋대로 자신을 낯선 땅에 끌고 온 가증스러운 초월자의 앞잡이들을 뭐가 이쁘다고 살려주겠는가.
전투를 결심한 그의 주위에 반짝이는 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카라라라라락!
이내 그 눈꽃이 그의 오른손에 모여 검의 형상을 이루었다. 이렇다 할 장식조차 없는 투박한 검. 허나 그에겐 이것으로 충분했다. 그가 목숨처럼 소중히 여겼던 애검은 주군이 죽은 그날 두 손으로 직접 부러뜨려 다시는 쓰지 않겠다 다짐했으니.
철컹.
삼척에 달하는 대검을 한 손으로 쥔 채, 제단을 가로막듯 비스듬히 선 그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레온하르트의 마지막 검. 서리기사단 단장 빌헬름 폰 베른슈타인이다.
검을 겨눈 채 이름을 밝히는 것. 제아무리 현대인인 안수호라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잘 알고 있었다.
안수호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빌헬름이 꺼낸 의미심장한 말들에 쓸데없이 생각이 많아져 대화를 시도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어쩔 수 없다. 도망치는 수밖에.’
키이이이이잉!
오른손의 탈리스만과 왼손의 샛별의 숨소리가 맹렬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붉고 푸른 두 개의 빛이 어우러져 안수호의 몸을 감싼다. 한 손은 허리춤에 찬 단검 손잡이에 갖다 댄 채, 반대 손으로 그가 강하늘의 몸을 깊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떨림이 그의 가슴에 여실히 전해졌다.
안수호가 강하늘을 내려다보았다. 강하늘이 경솔하게 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빌헬름과 마주치지도 않았을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원망은 전혀 되지 않았다. 강하늘이 무슨 잘못이겠는가.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불합리한 상황은, 빌헬름의 말마따나 가증스러운 쾌락천마놈의 탓일 테니.
무엇하고 있나. 어서 뽑지 않고.
단검 손잡이를 쥐기만 한 채 망설이고 있던 안수호에게 빌헬름이 나지막하게 고했다.
나지막하게 고해지는 사형 선고.
다음 순간, 안수호가 출수함과 동시에 시커먼 폭발이 일어났다.
투콰아아아아아앙!!!
발도와 동시에 발동한 검은 연기. 탈리스만의 마력을 있는 대로 끌어 쓴 그의 초능력이 거센 폭풍을 일으켰다. 청명한 겨울 하늘이 새까만 밤의 색으로 물든다.
“꽉 잡아!”
그 결과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안수호가 강하늘은 안아들었다. 팡! 지면을 박찬 그의 속도는 약 300km/h. 샛별의 숨소리의 모든 스택을 소모해 8배로 가속된 그의 속도는 가히 고속 열차를 방불케 했다.
명실상부 그가 낼 수 있는 최강의 일격과, 그가 낼 수 있는 최속의 속도.
허나 안수호의 표정엔 다급함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빌헬름 에피소드를 몇 번이나 읽어댔기에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가진 최강의 창조차 빌헬름에겐 한낱 이쑤시개에 불과할 것이며, 최속의 도주조차 그가 보기엔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기의 재롱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거라는 걸.
‘게이트에서 여기까지 내 속도로 뛰어서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지금 속도라면 6초면 충분해!’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 속에서 그가 생각했다. 6초. 6초만 있으면 게이트에 도달할 수 있다. 게이트 밖으로만 나가면, 침식형 던전의 주인인 빌헬름은 자신들을 쫓아오지 못하리라.
어딜!
허나 그 6초의 채 반의 반도 지나지 않았을 때, 연기를 뚫고 나온 빌헬름이 그에게 검을 휘둘렀다.
콰앙!
둔중한 충격이 그의 왼쪽 어깨를 때린다. 검날이 아닌 검면으로 행한 일격. 아슬아슬하게 단검으로 막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실린 위력은 그가 지금껏 겪은 어떤 공격보다도 강력했다.
콰드드드드득!
안수호의 몸이 거세게 지면을 구른다. 안고 있던 강하늘은 진즉에 튕겨져 나간 뒤였다. 어쩔 수 없었다. 그녀를 안고 있던 왼팔은 기괴한 방향으로 뒤틀려 부러져 있었다. 극심한 격통이 어깨를 타고 그의 척추를 달렸다.
“크으으으으으윽!!!”
터져 나오는 비명을 집어삼킨다. 이 세상에 온 뒤로 몇 번이나 싸웠지만 고통에 익숙해지기란 요원했다. 그저 가까스로 참아낼 뿐이었다. 참아내던 와중, 돌연 그의 뇌리에 의문이 떠올랐다.
아무리 단검으로 막아냈다 한들 그 빌헬름의 일격이다. 원작 후반부의 류태현조차 고전한 강적이었다. 아무리 검날이 아닌 검면이었다고 해도 자신의 비루한 능력치로는 일격을 받아낸 순간 몸이 터져나갔어야 할 터.
헌데 왜 자신은 아직 살아있는가. 기묘한 위화감이 그의 뇌리에 엄습했다.
“꺄아아아아악!”
그렇게 생각한 순간 새된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강하늘!!”
안수호가 강하늘을 살폈다. 멀찌감치 떨어진 그녀는 두 다리가 꽁꽁 얼어붙어있었다. 빌헬름이 가진 서리검의 권능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죽이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을 텐데도 빌헬름은 강하늘을 죽이지 않았다. 그 순간, 그제야 안수호는 빌헬름이 자신을 봐주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봐준다? 아니, 시험하는 거겠지.’
빌헬름은 원작에서도 그랬다. 류태현과 전투에 돌입한 빌헬름은 시종일관 위에서 내려다보듯 류태현의 강함을 시험했다. 결국에는 류태현의 강함과 그 올곧은 성격에 감화되어 진심을 다해 싸운 끝에 전사다운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그런 일이 안수호에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안수호가 아픈 어깨를 부여잡고 가까스로 일어났다. 극심한 격통에 그 무릎이 당장이라도 꺾일 기세였다.
하.
그 모습을 본 빌헬름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약해빠졌구나 이방인이여! 명색이 신의 대전사라는 자가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참으로 꼴사납도다! 우리 기사단의 수습 기사조차 네놈보다 갑절은 강할 것이다!
빠득.
그 말에 안수호가 어금니를 강하게 깨물었다.
“……신의 대전사? 지랄하고 자빠졌네. 누가 그딴 새끼를 위해서 싸운다고…….”
오해도 그렇게 기분 나쁜 오해가 있을 수 없었다. 가까스로 자세를 가다듬은 그가 숨을 크게 들이쉰다. 곧 자세를 잡고 결연한 눈으로 빌헬름을 노려봤다.
“……난 그냥 살기 위해서 싸우는 거야. 네가 말하는 빌어먹을 신이 날 가만히 놔두지를 않거든.”
대전사가 아니라 장난감이었나. 그러니 약할 수밖에. 대의가 없는 전사는 강함을 품지 못하는 법이니.
빌헬름이 검을 치켜들어 안수호를 겨눴다.
그래. 좋은 생각이 났다.네놈을 죽이고 저 소녀도 죽여 그 목을 제단의 기둥 앞에 효수하겠다. 보란 듯이 제 장난감을 망가뜨리고 욕보이면 네놈들 뒤에 있을 초월자도 무언가 느끼는 바가 있겠지. 아아,그 일그러질 표정을 못 보는 게 한이구나.
“뭐?”
그 기사답지 않은 언행에 안수호가 이를 갈았다. 그 얼굴에 명백한 분노의 감정이 떠오른다.
“누가 그렇게 하게 둘 것 같아?”
일천한 실력에 비해입은 살았군. 그럼 어디 필사적으로 발버둥쳐봐라.
카드드드드드등!
다음 순간, 빌헬름이 휘두른 검의 궤적을 따라 거대한 얼음송곳이 솟아났다.
안수호가 재빨리 몸을 날린다. 그 뒤를 투명한 얼음송곳이 뒤쫒는다.
안수호는 회피에 전념하는 한편 신중하게 기회를 엿봤다. 쓰러뜨리기 위한 기회가 아니었다. 도망치기 위한 기회였다. 이미 한 번 실패하긴 했지만, 아직 그의 노림수는 남아 있었다.
‘호오.’
그 기세를 빌헬름 역시 알아차렸으나 구태여 내색하진 않았다.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심보였다.
‘빌헬름은 날 얕잡아보고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듯이 내 실력을 가늠하고 시험하고 있어. 그렇다면 적어도 한 번, 아직 한 번은 기회가 있을 거다.’
그 한 번의 기회를 살려 틈을 만들고 그 사이 게이트를 통해 도망친다. 조금 전과 같은 계획이었다.
‘좋아, 간다!’
파앙!
외곽을 따라 돌며 얼음송곳을 피하던 안수호가 빌헬름에게 달려들었다.
투화아아악!
그 손에서 검은 연막이 뿜어져 나와 빌헬름의 시야를 가렸다. 그 연막 속으로 파고들며 안수호가 검을 휘둘렀다.
어리석은 녀석!
물론 그 정도로 빌헬름의 움직임을 제한할 순 없었다. 달인의 경지에 달한 그의 감각은 시각 따위에 의존하지 않았다. 연기를 가르고 자신의 머리로 짓쳐드는 단검을 빌헬름은 보란듯이 검으로 쳐냈다.
캉!
그의 검과 부딪힌 안수호의 단검이 힘없이 허공을 날았다.
그래. 힘없이.
마치 일부러 놓아준 것처럼 말이다.
음?
안수호의 검은 미끼였다. 설마 안수호가 자신의 유일한 무기를 놓아버릴 거라고 빌헬름은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 그 자신의 발상이 거기까지 이르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안수호의 기량이 일천하다는 것을 알기에 방심한 탓이었다.
빌헬름이 당황한 사이, 그 틈을 노려 안수호가 달라붙듯 빌헬름의 몸에 매달렸다. 그 오른손이 그의 투구 아래쪽 틈새를 붙잡는다.
‘근접박투. 유술인가?’
감히 자신에게 기술을 걸 셈인가. 그렇게 생각했으나 안수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키이이이잉!
탈리스만이 맹렬한 빛을 뿜는다. 반지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모여드는 마력의 유동에 빌헬름이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낀 순간.
투콰아아아앙!!!
틈새로 찔러 넣은 안수호의 손가락에서 검은 폭발이 일어나며, 빌헬름의 투구가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됐다!’
빌헬름의 몸에서 떨어진 안수호가 곧바로 게이트 방향으로 달렸다.
주인의 묘를 지키는 묘지기가 된 빌헬름은 수천 년의 시간을 버티기 위해 망령이 되었다. 그의 갑옷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일종의 리빙 아머와 같은 상태라 보면 된다.
안수호는 그 빈공간에 손을 찔러 넣어 폭발을 일으켰다. 허성찬과의 싸움에서 시도했던 기술과 같은 원리였다.
허나 그때와 다른 점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빌헬름의 갑옷은 안수호의 최대 화력 폭발조차 능히 견뎌낼 강도라는 점이었다. 제아무리 내부에서 폭발을 일으킨다 한들 피해는 거의 주지 못하겠지.
하지만 피해가 없다고 해서 그가 생성해낸 연기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몸속에서 터진 대량의 연기는 순식간에 팽창해 갑옷의 온갖 틈새를 통해 바깥으로 빠져나가고자 했다.
가령, 몸체와 투구의 연결부라든가.
안수호의 능력에 피해를 입는가의 여부와는 별개로, 단순히 얹어져 있을 뿐인 빌헬름의 투구는 폭발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허공을 날았다. 안수호의 노림수가 바로 그것이었다.
제아무리 그라도 갑자기 몸 안에서 폭발이 일어나 머리가 달아나면 당황할 수밖에 없겠지.
그런 생각에서 벌인 짓이었고, 그 예상은 훌륭하게 적중했다.
불시의 일격을 통해 안수호가 번 시간은 약 3초.
짧은 시간이었지만 전력을 다해 게이트로 달린다면 아슬아슬하게 도망치는 게 가능한 시간이었다.
도망치는 게 그 혼자라면.
게이트로 향하는 와중, 그 짧은 찰나 그의 시선이 반대편에 주저앉아있는 강하늘에게 향했다.
사고가 극한의 속도로 회전한다. 강하늘을 구했다간 시간에 맞추지 못한다. 재빠른 판단이었다. 방금과 같은 얕은 수는 두 번은 통하지 않는다. 이번 기회를 놓쳤다간 다시는 빌헬름의 틈을 만들어낼 수 없으리라.
살기 위해선 강하늘을 버려야 했다.
버려야 했으나.
문득 마주친 강하늘의 두 눈에 떠오른 감정을 본 순간.
적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격통에 의한 아픔보다도, 자기 때문에 또 다시 사건에 휘말린 안수호에 대한 미안함으로 가득찬 그 두 눈을 본 순간.
‘……젠장.’
어느새 안수호의 몸은 게이트가 아닌 강하늘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잡아!”
안수호가 강하늘의 팔을 낚아채서 달렸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이 약 1초.
직후 그가 있는 힘껏 지면을 박차 게이트로 내달렸다. 오른손으로는 강하늘을 옆구리에 끼고, 왼손으로는 등 뒤를 향해 연신 능력을 발동하며 조금이라도 추진력을 얻었다. 탈리스만을 최대로 발동하고 있는 건 당연했다. 반동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오직 이 순간 도주를 위한 최선의 발버둥.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고 어느새 푸르른 게이트가 눈앞에 나타났다. 빌헬름이 어디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차마 등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뒤를 돌아봄으로써 생기는 아주 작은 낭비조차 지금의 그에겐 사치였다.
쐐애애애액!
그것이 오판이었다.
만약 그가 그 순간 뒤를 돌아봤다면, 그 일격을 피해낼 가능성이 조금은 있었을 텐데.
콰직!
“컥?!”
둔중한 충격과 함께 안수호의 몸이 고꾸라진다. 두 무릎이 지면에 쓸리며 수십 미터를 미끄러진다. 게이트까지의 거리는 고작해야 30미터.
“커, 커헉! 쿨럭!”
허나 그 거리를 안수호는 좁힐 수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단 한 걸음조차 떼기가 어려웠다. 격통이라는 개념을 넘어선 작열감이 그의 허리께를 뜨뜻하게 데웠다.
그 복부에는 빌헬름이 던진 서리검이 박혀있었다. 수도꼭지마냥 콸콸 쏟아지던 혈액이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안수호는 내장이 타오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기실 얼어붙고 있음에도 느끼는 격통을 작열감에 비유하는 이 상황이 아이러니하다면 아이러니했다.
방금 그 일격. 내가 리빙 아머인 것을 간파한 모양이군. 괜찮은판단이었다. 과연,한낱 장난감이라곤 해도 일단은 신의 축복을 받은 자라는 건가.
빌헬름이 느긋하게 두 사람에게 접근했다. 게이트가 지척이건만 그는 한없이 여유로웠다. 그야 둘 다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강하늘은 두 다리가 얼어붙었고, 안수호는 그의 검에 허리가 두 쪽 나다시피 했으니까.
허나 그 소녀를 구하려고 한 것만은 오판이었구나. 혼자 도망치려 했다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을 텐데.
그 빈정거림에 안수호가 강하늘을 보았다.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강하늘.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 미안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강하늘.
강하늘의 눈가에 왈칵 눈물이 솟아올랐다. 아무리 봐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이 상황에 그녀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미, 미안해요…….”
하염없이 흐느끼며, 숨을 헐떡이며, 필사적으로 그에게 사과했다.
“나 때문에. 내가, 내가 멍청하게 게이트를 착각해서……. 흐극! 내가 좀만 빨리 움직였다면……! 애, 애초에 갇히지도……! 흐끅! 갇히지도 않았을 텐데에……!”
자기 때문에 죽게 돼서 미안하다.
강하늘은 연신 안수호에게 사과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듯 하염없이 사죄했다. 쓰러진 안수호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가에서 흐른 눈물이 안수호의 뺨을 적셨다.
따듯했다.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그 따듯함에 정신을 차린 안수호가 그녀에게 작게 말했다.
“……연막을 피워서 놈의 시야를 가릴 거야. 그때 게이트를, 향해 도망쳐……. 다리가 언 거는, 아바타를 해제하면 아마, 회복될 테니까…….”
“네, 네?”
순간 안수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그녀가 반문했다.
“제, 제가 오빠를 안고 도망치면 되는 거죠……?”
“……아니, 너 혼자 가는 거야.”
“어째서……?”
도망칠 수 있다면 함께 도망치면 되지 않느냐. 그런 얼굴을 하고 있자 안수호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연막을 피운다 한들 빌헬름은 신들린 감각으로 자신들을 포착할 것이다. 아마 강하늘 혼자 도망치는 것도 벅찰 터. 그 와중에 자신이라는 짐까지 들고 있다간 가뜩이나 낮은 도주 확률이 더욱 낮아질 것이다.
‘게다가 난 이미…….’
시야는 흐릿해져만 가고 귀는 한없이 먹먹했다. 감각은 아득하여 이젠 격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빌헬름의 서리검은 단 일격에 안수호의 생명을 확실하게 불살랐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죽음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것을.
그러한 사정을 설명하고 싶었으나 설명할 시간도 기력도 없었다. 안수호는 그저 힘없이 게이트를 가리킬 뿐이었다.
그 의도가 전해졌는지 강하늘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녀의 고개가 푹 숙여진다.
이내 강하늘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안수호를 향해 환하게 웃어보였다. 이 자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일상을 보낼 때 그녀가 보여주던 포근한 웃음.
“……야.”
그 웃음에서 안수호는 불길함을 느꼈다.
파앙!
강하늘의 아바타 능력이 풀린다. 짧은 단발이었던 푸른 머리카락이 다시 검은색 긴 생머리로 돌아온다. 도주를 위해선 안수호와 신호를 맞춰야 했건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애초에 도망칠 생각이 없었으니까.
아바타 능력이 풀리며 얼어붙었던 다리가 회복되었다. 천천히 일어선 그녀가 빌헬름과 마주봤다.
그 거리 약 5미터. 빌헬름이 마음만 먹는다면 단숨에 좁힐 수 있는 간격.
카라라라라락!
수십 개의 눈꽃이 피며 빌헬름의 손에 새로운 서리검이 쥐어졌다. 가증스런 초월자에 대한 화풀이는 끝났다. 강하늘이 달려들면 벤다. 도망치려 해도 벤다. 안수호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여도 벤다. 아무튼 뭐가 됐든 간에 눈앞의 적을 베어 이 전투를 마무리하고자 했다.
허나 강하늘은 도망치지도, 달려들지도 않았다. 그저 천천히 걸어나와 안수호의 앞을 막아섰다. 마치 빌헬름으로부터 그를 지키려는 것처럼.
허.
얼굴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연신 히끅거리는 신음을 내면서, 두 어깨는 바들바들 떨리고 무릎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운 주제에.
그런 와중에 감히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그 모습에 빌헬름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측은하군.’
그 감탄은 곧 측은지심으로 변했다. 남자는 여자를 구하고자 목숨을 걸었고 여자는 남자를 지키고자 도망칠 기회를 버렸다. 빌헬름은 두 사람의 사정 따위 전혀 몰랐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허나 빌헬름의 검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주군의 검. 검은 판단 따위 하지 않는다. 그저 명령에 따라 휘둘러질 뿐이다. 그리고 그에게 내려진 명령은, 이 묘소에 침입한 모든 적을 확실하게 배제하는 것.
……그대들에게 원한은 없다. 이 검은 주군의 안식을 방해한 그 초월자 놈에 대한 내 치기어린 복수심이자 화풀이일지니, 고로 원망하려거든 날 원망하도록 해라.
차마 주인을 욕보일 순 없어 빌헬름이 그렇게 말했다. 반쯤은 맞는 말이기도 했다. 멋대로 자신을 이 세상에 끌고 온 초월자 놈에 대한 복수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지금은 그 복수심이 측은지심에 잠시 가려졌을 뿐.
이윽고 빌헬름이 검을 치켜들고 강하늘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안수호를 지키기 위해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최소한의 자비로써, 단번에 목을 베어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죽이도록 하자.
그렇게 생각한 빌헬름이 검을 휘두르려던 순간.
파아아아아앗!!!!
두려움에 움츠러든 강하늘의 가슴에서 한 송이 벚꽃이 활짝 피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