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056. 캣파이트
* * *
금요일. 오후 5시.
강하늘을 마중하기 위해 나는 여자기숙사 앞으로 향했다.
“아, 수호 오빠!”
저 멀리 기숙사 입구가 보인 순간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강하늘이 날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적당히 손을 흔들어 인사하자 강하늘이 통통 튀는 걸음으로 빠르게 내게 다가왔다.
“기다리고 있었어?”
“아뇨! 저도 방금 나왔어요. 오빠야말로 일찍 오셨네요.”
강하늘은 하루 사이에 오빠라는 말이 제법 입에 붙은 모양이었다. 적어도 전날처럼 부끄러워하며 쭈뼛거리진 않았다.
……라고 생각했으나, 살짝 빨개진 귓볼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말이 없자 날 올려다보던 강하늘이 배시시 미소 지었다.
방송에서 보여주는 꾸며낸 표정이 아닌 순진무구한 웃음.
그 천진난만한 미소에 자연스레 내 입가에도 웃음이 걸렸다.
“예쁘네.”
“네?”
무심코 중얼거린 한 마디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 강하늘의 모습에, 아차 싶었던 나는 곧바로 덧붙였다.
“오늘 입은 옷 말이야. 그렇게 입으니 꼭 새내기 대학생 같네.”
“아, 옷…….”
그 말에 강하늘이 김빠진 목소리로 살짝 팔을 벌리며 제 차림새를 내려다보았다.
강하늘은 베이지색 니트 가디건에 슬림한 흰색 폴라티, 그리고 하늘색 테니스 스커트 차림이었다. 척 봐도 꾸민 티가 나는 것이 처음 만났을 때의 후줄근한 복장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야 새내기 대학생이니까 새내기 느낌이 나겠죠. 그러는 오빠는 꼭 회사원 같은 차림이네요. 누가 경비원 아니랄까봐.”
강하늘이 볼멘소리로 내 복장을 지적했다. 한껏 꾸민 그녀와 달리 나는 무난한 흰색 셔츠에 슬렉스 차림이었다. 단정하다면 단정한 복장이고, 대충 입었다 생각하면 그렇게도 보일 수 있는 복장.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세상에 빙의한 뒤로 옷을 사러나간 적이 한 번도 없다보니, 가지고 있는 옷이라곤 기본으로 옷장에 들어있던 무난한 것들밖에 없었다.
“오빠도 아직 이십대 초반인데 좀 더 꾸미고 다니셔야죠. 안 그래요?”
“……보통 시옷 받침 들어가면 그때부터 중반이라고 하지 않나?”
“아무튼요! 안 되겠다. 다음에 저랑 같이 옷이나 사러가요. 제가 전신 싹 다 코디해줄 테니까.”
“굳이 그럴 것 까진…….”
“제가!”
내 말을 중간에 끊고 강하늘이 조금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제가 해드리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안 되나요……?”
내 팔에 달라붙다시피 한 강하늘이 살며시 날 올려다봤다. 불안한 눈초리로 우물쭈물 입술을 달싹이는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럼. 다음에 신세 좀 질게.”
“좋아요!”
살짝 돌아선 강하늘이 주먹을 꽉 쥐며 기뻐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자기 옷도 아니고 남의 옷을 사러가는 게 그렇게도 기쁜 일인가.
나로선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본인이 좋다면 그걸로 된 거겠지.
“그럼 출발하죠!”
통통 튀는 걸음으로 앞장서는 강하늘과 함께 나는 아카데미 정문으로 향했다. 정문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져갔다.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가 사람이 많네.’
삼삼오오 모여 즐겁게 떠들며 정문으로 향하는 학생들. 국가 제일의 헌터아카데미라고는 하나 결국 그들도 이십대 초반의 파릇파릇한 청춘이었다. 불금에 친구들과 함께 술집이며 노래방이며 놀러 다니는 것은 여타 대학생들과 다를 바 없었다.
이윽고 도착한 정문은 학생들이 호출한 택시들로 가득했다. 우리 두 사람은 미리 부른 택시를 찾아 탑승했다.
“속초역으로 가주세요.”
“예에.”
이곳 그린하우스가 위치한 곳은 강원도 속초시.
원래 세계의 속초는 시골은 아니지만 결코 번화한 도시라곤 할 수 없었다. 허나 이 세계의 속초는 강원도 내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였다. 90년대 말에 그린하우스 설립에 더해 아카데미와 제휴한 각 길드 및 기업체가 우후죽순 들어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속초역 역시 원래 세계에선 폐쇄된 역이었지만, 여기선 수도권지하철에 KTX 노선까지 연결된 그야말로 속초 교통의 중심지. 그 주위에 자리한 번화가는 신촌이나 강남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라는 설정이다.
그래, 설정.
역전 거리가 강남에 준하네 뭐네 이야기는 무성하지만, 정작 나는 한 번도 그 근처에 가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빙의하고 거의 두 달 동안 아카데미 근처에만 박혀있었구나.’
남는 시간에 어딜 놀러가기 보다는 초능력 연습이나 근력운동 따위만 해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갓 빙의했을 때는 경비대 일이다 지예원이다 뭐다 하며 바빴기도 했고.
‘당분간은 평화로웠으면 좋겠는데.’
사건이 원작의 진행을 따른다면 학생들의 목숨이 위험할 수준의 위기가 찾아오는 건 4월 중순 정도.
그 사이 약 한 달의 여유기간 동안 가능하면 이후 전개를 대비해 이런저런 준비를 끝마쳐두고 싶었다. 힘도 약하고 삶도 불안정했던 빙의 초기와 달리, 이제는 어느 정도 내 삶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상태였으므로.
‘흑룡회의 설아현도 한 번쯤 만나봐야 하고. 3월 말에 옥션에 출품될 ’그 물건‘도 가능하면 입수하고 싶어. 그러려면 자금이 필요한데, 원작 지식을 이용해서 급전을 땡길 수 있을만한 곳이 어디가 있으려나…….’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겨 있자 택시기사가 백미러를 스윽 보며 물었다.
“거, 데이트인가요?”
“네?”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내가 무심결에 반문했다.
“어허허허! 아니, 뭐. 이 시간에 한껏 꾸미고 나란히 나온 거 보고 대충 연인사이인갑다~ 했죠. 아닌가요?”
“여, 연인이요?”
택시기사의 오지랖에 강하늘이 당황한 눈초리로 목소리를 떨었다. 그 모습에 백미러로 이쪽을 보던 기사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야, 남학생분이 아주 복 받으셨어! 보아하니 서너 살은 차이나는 것 같은데. 거 왜 그런 말도 있잖습니까? 남녀 사이에 네 살 차이는 궁합도 안 본다고.”
“그, 그게. 저희는…….”
강하늘이 얼굴을 붉히며 말을 떨었다. 척 봐도 곤란해 보이는 기색이 역력하여 나는 곧바로 기사에게 대답했다.
“저희 둘은 그런 사이 아닙니다.”
“잉? 그래요?”
내 단언에 기사가 무안하게 웃었다.
“아이고오오오! 이 늙은이가 입이 주책이었습니다. 옆에 여학생이 하도 깨가 떨어지는 눈으로 흘긋흘긋 그쪽을 보길래 당연히 그렇고 그런 줄 알았어요. 거 미안들 합니다.”
“아뇨. 그…….”
슬쩍 고개를 돌리자 강하늘은 당황한 건지 부끄러운 건지 모를 표정으로 입술만 오물거리고 있었다.
곧 슬쩍 내 눈치를 살핀 그녀가 살며시 내게 물었다.
“여, 연인 사이는 아니지만 일단 데, 데이트는 맞지 않나요……?”
“……예?”
“아니. 그. 일단, 남자랑 여자랑 둘이서 놀러 나온 거면 데이트……잖아요? 에? 아니! 물론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요! 하지만 데이트라고 꼭 연인끼리란 법은 없잖아요? 서, 서양에선 친한 친구들끼리 놀러 다니는 것도 데이트라고 한다고 그러던데?”
갑자기 데이트란 단어의 어원이며 사용 실태며 횡설수설하기 시작한 강하늘.
그런 그녀를 유심히 보던 택시기사가 씨익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청춘이구만.”
쭉 뻗은 도로를 달리는 바람소리에 택시기사의 중얼거림이 스산히 흩어졌다.
***
잠시 후.
말 그대로 속초역 바로 앞에 떡하니 자리한 패밀리 레스토랑의 상호를 본 순간, 나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백이네?’
커다란 간판에 붉은 글씨로 적힌 글자는 원래 세계에서 유명하던 스테이크 하우스의 것이었다. 포털사이트나 유명 연예인 등 이 세상의 일부 요소가 원래 세계와 겹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묘하게 반가웠다.
“어서오세요 손님. 예약은 하셨나요?”
“네. 강하늘로요.”
“강하늘 외 한 분 확인했습니다. 자리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적당히 어두운 조명에 호주식 인테리어로 꾸며진 가게 안. 창가에 자리한 2인석에 앉은 우리 두 사람은 곧바로 메뉴판을 펼쳤다.
헌데 가격대가 생각보다 셌다. 내가 괜찮겠냐는 얼굴로 강하늘을 보자 그녀가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펴며 말했다.
“돈 걱정은 하지 마시고 마음껏 시키세요.”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비싸지 않아? 역시 내가 먹을 건 내가 계산”
“돈 걱정은 하지 마시고!”
마음껏 시키세요. 그렇게 덧붙인 강하늘이 싱긋 웃었다.
“여기 파스타가 엄청 맛있다 그러더라고요? 그니까 각자 스테이크 하나에 같이 먹을 파스타 하나……. 아니, 두 개? 아니다. 배부를 수도 있으니 파스타는 하나만 시키죠. 식전빵도 있으니까요! 저는 티본 스테이크에 자몽 에이드. 오빠는요?”
“여기 달링 포인트 스트립이랑……. 음료는 괜찮아. 그냥 물 마실게.”
“에이, 더 비싼 거 시키셔도 되는데. 뭐, 티본이 양이 많이 나오니까 그거 같이 먹죠 그럼. 아, 파스타는 제가 정해도 되죠?”
“좋을 대로.”
“에헤헤. 사실 먹고 싶었던 파스타 메뉴가 있었거든요. 그럼 여기 스파이시 시푸드 알리오 올리오로 주문할게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벨을 눌렀다.
“네, 주문 받겠습니다.”
곧 다가온 직원에게 강하늘이 메뉴판을 손가락으로 콕콕 짚으며 주문했다.
“일단 티본 스테이크 580그램 미디엄으로. 거기에 자몽에이드랑 스파이시 시푸드 알리오 올리오랑요. 오빠가 달링 포인트 스트랩이었죠? 굽기는 어떻게 하실래요?”
“아, 저는 미디엄 레어로……어?”
“네, 미디엄 레어 확인했습니……엥?”
그 순간 두 개의 탄성이 겹쳤다. 하나는 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문을 받으러 온 직원의 것이었다.
“……안수호?”
직원의 얼굴에 걸려 있던 상큼한 미소에 금이 갔다. 밝은 애쉬그레이 색 머리카락 아래 자리한 얼굴에 차츰 당황의 기색이 서리기 시작한다.
“지예원? 네가 왜…….”
여기 있냐. 라고 말하려던 순간 불현듯 떠오른 기억.
‘놉! 제 이름은 예지원! 음악의 꿈을 품고 멋대로 상경했다가 차디찬 현실에 좌절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차마 부모님 집으로 돌아갈 순 없어 급하게 독립한 23살 고졸 백수 기타리스트랍니다! 참고로 다음 주부터 역 앞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일할 예정이에요!’
“아.”
그 순간 나는 전날 느꼈던 묘한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설마 강하늘이 찾은 가게랑 지예원이 일하는 가게가 겹쳤을 줄이야.’
그야말로, 참으로 공교로운 우연이었다.
……우연이겠지?
“응? 아는 사람이세요?”
사정을 모르는 강하늘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러자 지예원의 시선이 강하늘에게로 향했다.
일순 지예원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쪽 분은 누구셔?”
“강하늘이라고 이번에 알게 된 그린하우스 1학년이야. 그, 너도 저번에 봤잖아? 네가 나 병문안 왔을 때…….”
“아, 기억났어. 그때 그분이지? 너 다쳤을 때 옆에 있었다던.”
지예원이 오자마자 강하늘이 떠나서 두 사람이 마주친 건 아주 잠깐이었을 텐데도, 그녀는 용케 강하늘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는 채를 하자 곧 강하늘도 생각났다는 듯 탄성을 흘렸다.
“아! 저도 기억나요. 그때 좀 늦게 오셨었죠? 바나나랑 포도랑 들고……. 저 근데, 혹시 이 분이랑은 무슨 사이세요?”
“무슨 사이냐고?”
지예원과 내 관계는 한 마디로 정의내리기 어려운 사이였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끙끙대던 나는 결국 별 수 없이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그, 옆집 사는 이웃이야.”
“오, 오빠네 옆집이요……?”
“오빠, 라고……?”
강하늘과 지예원의 시선이 마주쳤다. 내게는 보이지 않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두 사람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뭐야. 두 사람 다 왜 그래?”
꼭 길가에서 마주친 고양이마냥 사나운 눈초리로 서로를 쏘아보던 두 사람이 동시에 내게 고개를 돌렸다.
“네가 여자랑 단 둘이 레스토랑이라니 별일이네. 무슨 일로 온 거야?”
먼저 입을 연 것은 지예원이었다. 테이블 위에 손을 짚은 지예원이 내 쪽으로 몸을 바짝 가까이 대었다. 마치 내 시야에서 강하늘을 가리려는 듯이.
“그, 저번 일의 답례로”
“데, 데이트인데요?”
“어?”
“……데이트?”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강하늘은 어색하게 웃는 채였고 지예원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아, 아까 택시 안에서 그렇게 말했잖아요. 그렇죠, 오빠?”
강하늘이 내 대답을 재촉하듯 물었다. 그 눈동자에 자그마한 불안감이 스친다.
“데이트라니, 진짜야?”
불안감을 표하는 건 지예원도 마찬가지였다. 지예원이 떨리는 두 눈으로 빨리 진실을 말하라며 날 압박해왔다.
‘잠깐 시발. 이거 설마…….’
그 갑작스런 상황에.
그 예기치 못한 상황에.
그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거 설마 캣파이트인가?’
캣파이트.
고양이 싸움.
웹소설 쪽 은어로는 주인공을 두고 싸우는 히로인 간의 신경전을 의미하는 말.
나는 차분히 지금 상황을 제3자의 시선으로 되짚어봤다.
예기치 않게 마주친 두 여성 캐릭터.
서로를 향한 원인 모를 묘한 적대감.
그리고 가운데 끼인 남자의 눈치를 보며 대답을 재촉하는 이 상황까지.
차분히 분석한 상황은 여타 하렘물 웹소설이나 러브코미디 만화에 흔히 등장하는 캣파이트 장면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대답해 안수호. 지금 이 말 정말이야?”
“오빠, 택시 안에서 했던 말들 기억나시죠?”
일치했으나, 그럼에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얘네가 뭐라고 날 두고 캣파이트를 벌여?’
나는 주인공이 아니고 이 두 사람도 히로인이 아니었다. 그런데 캣파이트가 도대체 웬 말인가.
내가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을 못하고 있자 강하늘이 초조한 기색으로 지예원에게 쏘아붙였다.
“저, 이웃끼리 만나서 반가운 건 알겠는데 일단 주문부터 처리해주실래요? 일단 저희는 손님이고 그쪽은 직원이시잖아요?”
그 말에 지예원이 매서운 눈초리로 강하늘을 노려봤다.
일순 두 사람 사이에 매서운 기류가 돌았다.
긴장감이 도는 침묵.
그 무언의 대치 끝에 먼저 물러선 것은 지예원이었다. 예정된 결과였다. 강하늘이 직원과 손님의 관계를 들먹여대니 별 수가 있겠는가.
지예원이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럼주문을 확인하겠습니다. 티본 580 미디엄에 달링 포인트 스트랩 미디엄 레어. 스파이시 시푸드 알리오 올리오에 자몽에이드. 맞으신가요?”
“네. 맞아요. 확인하셨으면 이만 가보시죠? 둘이서 할 이야기 많은데.”
“……주문 접수했습니다. 바로 식전빵을 내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가능하면 다른 직원 통해서 가져다 주셨으면 해요. 모처럼의 데이트를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데이트…….”
나와 강하늘을 번갈아 쳐다보던 지예원이 흐응, 하고 콧소리를 냈다. 곧 내 곁을 스쳐지나가려던 그녀가 내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야. 정말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야?”
“……저기요?”
“뭐 됐어. 오늘 퇴근하고 집으로 찾아갈게. 그때 설명해줘. 알겠지?”
집으로 찾아갈게. 그 말에 강세를 둔 지예원이 강하늘을 흘기다 몸을 홱 돌렸다. 작게 속삭였으나 명백히 강하늘보고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곧 지예원이 자리를 뜨자 강하늘이 씩씩대며 내게 물었다.
“……오빠. 저 사람이랑 무슨 사이에요?”
“말했잖아. 이웃이라고.”
“그냥 이웃이죠? 그게 끝이죠? 그렇죠?”
“그렇다니까."
"정말이죠?"
"그렇다고 몇 번을 말해. 아니, 왜 그렇게 지예……. 예지원한테 신경 쓰는 건데?”
“그건…….”
입을 오물거리던 강하늘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볼멘소리로 툭 내뱉었다.
“……저, 저 예지원이라는 사람 조금 마음에 안 들어요.”
동문서답이었다. 강하늘은 내 물음에 대답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없어 보였으나, 그 행동에 깔린 진의를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렵지 않았지만.
‘도대체 왜?’
다소 건방진 소리였지만, 나는 하렘물에 흔히 나오는 둔감한 주인공 놈들과 달리 최소한의 눈치는 있었다. 강하늘과 지예원의 태도는 그 저의가 뻔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강하늘의 모습은 하렘물에서 다른 히로인을 질투하는 히로인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리고 강하늘 보다는 덜했지만, 지예원으로부터 느껴지는 낌새도 그와 비슷했다.
그렇기에 의문이었다. 도대체 왜, 왜 저 둘이 내게 하렘물 히로인 같은 반응을 보이느냔 말이다.
‘둘 다 나한테 반했을……리는 없지.’
그럴 리가 없다. 어처구니없는 망상이었다. 그렇게 확신한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강하늘과 나의 관계는 고작해야 보름도 안 되었다. 지예원과의 관계도 끽해야 한 달이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두 사람이 내게 반할 일이 도대체 뭐가 있다고. 물론 내가 두 사람에게 닥친 위기에서 그 둘을 각각 구해내긴 했지만, 고작 ‘구원’ 한 번 당했다고 생판 모르던 남한테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품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무슨 소설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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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시발. 소설 맞구나.
그래, 이 세상은 소설 속 세상이었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적어도 이 세상의 모태가 된 웹소설이란 장르에선 여성 캐릭터가 구원 한 번 당한 걸로 연심을 품는 건 아주 흔한 일이었다.
그리고 강하늘과 지예원은 소설 속 여성 캐릭터다.
‘천천히, 차분하게 되짚어보자.’
나는 그동안 두 사람이 내게 보인 행동이나 반응을 천천히 되짚어봤다.
알고 있다. 직접 고백 받은 것도 아니면서 누가 자기한테 반한 게 아닌가 설레발치는 게 얼마나 꼴사나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알고있었기에 최대한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애매한데.’
애매했다. 그것이 결론이었다. 두 사람과 얽힌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이 나와 나름대로의 친분을 쌓은 건 사실이지만, 그 관계에 이성적 호감이 들어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글쎄올시다였다.
일단 지예원. 저번에 자취방에서 나눴던 대화 이후 지예원과 내가 감정을 터놓고 허물없이 지내는 건 사실이었다. 허나 그건 친구 내지는 믿을 수 있는 동료로서의 관계였지, 결코 연심이 녹아들어 있진 않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편 강하늘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내게 부쩍 살갑게 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성격 좋은 여자 후배 내지는 여동생로서의 범위 내였다. 고작 오빠라 불러주고 친근하게 대해준다 해서 그게 나한테 반했다는 뜻이겠는가. 나는 늙다리 복학생마냥 예의와 호의를 헷갈리는 놈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식전빵 나왔습니다.”
“……저기요. 분명 다른 직원분 통해서 가져다 달라고 했을 텐데요?”
“공교롭게도 바쁜 시간대라 다들 바빠서요.”
“저기 카운터에 직원 둘이서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제가 아직 여기서 일한 지 얼마 안 돼서요. 차마 선배들한테 제 일을 떠넘기기 힘드네요.”
“고객의 요구잖아요? 뭣하면 정식으로 클레임이라도 걸어드릴까요?”
“사정을 설명해드렸는데도 그러신다면 저야 별 수 없죠. 큰일이네요. 잘리면 다른 알바 자리를 구해야 할 텐데 그동안 생활비는 어떡해야 할지…….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친절한 이웃한테 이래저래 신세 좀 지어야겠는데요?”
“시, 신세요? 그게 무슨”
“수호랑은 이래저래 교류가 깊거든요. 서로 옆집이라 같이 저녁을 먹는다거나, 슈퍼도 같이 가고. 아, 예전에 한 번 욕실도 빌려 썼었죠.”
“요, 욕실이요?!”
“아, 빌려 쓴 건 아닌가? 둘이서 같이 들어갔는데 빌려 썼다고 표현하기는 좀 그렇죠?”
“가, 가가가가 같이???”
‘그런데 왜 니들은 내 앞에서 시발 별 같잖은 삼류 라이트노벨 캣파이트 씬을 찍고 있는 거냐고…….’
마음 같아선 대놓고 너희 왜 그러냐, 설마 나 좋아하냐 하고 묻고 싶었으나 어디 그럴 수야 있겠는가.
행여라도. 아니, 높은 확률로 저 둘은 내게 이성적 호감이 없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저딴 질문을 해댔다간 어떻게 되겠는가? 곧바로 분위기 싸해지면서 그간 쌓은 친분이고 나발이고 다 파탄 나겠지. 어지간한 확신이 없는 이상 이성관계에서 남자가 먼저 '너 나 좋아하냐' 따위의 질문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난 어지간한 확신은커녕, 전력으로 두 사람이 내게 연애감정을 품고 있을 가능성을 부정하는 중이었다.
하여튼. 어떻게든 이 세상의 엔딩을 봐야하는 내게는 두 사람과의 관계가 무척 중요했다. 별 같잖은 가능성 하나 때문에 그 관계를 파탄낼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없었지만.
“오빠? 같이 욕실에 들어갔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설마 둘이 그렇고 그런…….”
“어라? 뭐야. 좀 전에는 무슨 연인 사이인 것처럼 말하더니 아직 둘이 그런 사이는 아닌가 보네?”
“오빠! 이 여자랑 정말 그냥 이웃 사이에요?!”
“언제까지 뚱하게 입만 다물고 있을 거야? 슬슬 설명 좀 해주지?”
“대답해봐요. 오빠! 네?!”
“대충 무슨 상황인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네 입으로 직접 말해줘. 얘랑 무슨 사이야?”
“……있잖아. 너희 둘 다 거의 오늘 처음 만난 사이면서 왜들 그렇게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
계속해서 히로인 같은 반응을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이, 마치 명백한 진실을 눈앞에 들이미는 것 같아서.
“꼭 무슨 집착 심한 여자친구 보는 느낌이네.”
다소의 위험을 감수하고 나는 두 사람을 떠보기로 했다.
“뭐?”
“네?”
두 사람의 탄성이 겹친다. 강하늘이, 지예원이 그게 무슨 소리냐면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어색한 침묵.
"하."
"아하하……."
곧 두 사람이 동시에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뭐래? 너 뭐 잘못 먹었어? 여자친구는 무슨. 김칫국도 정도가 있지.”
“오빠. 그냥 농담 삼아 하신 말씀이시죠? 저희 둘이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지예원이 소름이 돋는다며 제 팔뚝을 손으로 문질렀다. 강하늘이 난처하다는 듯 멋쩍게 옆머리를 배배 꼬았다. 둘 다 명백하게 말하진 않았지만, 말투만 들어보면 꼭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착각하지 말라고. 누가 너 따윌 좋아하겠느냐고.
“……크흠.”
허나 단숨에 귀까지 빨개진 채 멋쩍은 듯 시선을 피하는 지예원의 모습과.
“흣. 푸흐….”
살며시 시선을 내리깔며 묘하게 기분 좋은 듯한 웃음을 흘리는 강하늘의 모습에.
‘이런 시발.’
그럴 리가 없다며 몇 번이고 부정한 그 가능성이, 이내묘한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다.
‘……개연성 존나 좆박았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