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52화 (53/266)

〈 52화 〉 051. 병문안과 수박, 수박, 그리고.

* * *

낯선 천장이다.

무릇 기절한 상태에서 의식을 차리면 으레 저런 묘사가 첫 줄을 채우는 법이다. 그 말대로 막 눈을 뜬 내 눈앞의 펼쳐진 건 낯선 천장이었다. 새하얀 텍스로 가공된, 공공기관 느낌이 물씬 풍기는 낯선 천장.

곧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나는 내가 있는 곳이 어딘가의 병실임을 깨달았다. 그것도 사치스럽게도 1인실이었다.

헌데 왜 나는 병실에서 깨어난 것인가. 몽롱한 머리로 기절하기 직전의 사건을 차례대로 떠올린다.

일리아나의 조사 결과를 듣고 곧장 강하늘에게 연락했다.

그녀가 연락을 받지 않아서, 위험에 처한 게 아닌가 싶어 곧바로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그랬더니 웬걸, 아카데미를 자퇴한다던 강하늘은 귀여운 고양이 모양 헤드폰을 쓴 채 온갖 아양을 떨어대며 인터넷 방송 중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사정을 설명하려던 순간 습격자가, 원작에서도 등장했던 진수&성찬 듀오가 강하늘을 납치하러 찾아왔고.

어찌어찌 열심히 싸운 끝에 그들을 내쫓은 뒤,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에 긴장이 풀려서, 그러니까…….

그 이후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아마 놈들과의 전투가 끝난 뒤 그대로 의식을 잃은 것이겠지.

‘……용케도 살았군.’

편법을 썼다곤 해도 그 허성찬을 상대로 판정승을 거뒀다. 갓 빙의했을 때 비루했던 능력치를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었으나, 그런 무모한 짓거리는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뒤진 척 쓰러져 있어도 됐을 텐데.’

도대체 무슨 마가 껴서 거기서 강하늘을 구하겠답시고 설쳤는지, 당시의 내 판단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겼으니 다행이었지만, 여차하면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당장 적의 체내를 노린 영거리 폭발이라는 도박수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없이 죽고 말았으리라.

‘히로인 같은 주요 등장인물도 아니고 지나가는 조연을 위해 목숨을 걸다니, 내가 미쳤지’

이 세상에 빙의하고 나서 약 한달 반,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죽음에 가까이 갔었다. 그 사실을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오싹한 오한이 일었다.

‘……그나저나 내가 기절하고 얼마나 지난 거지?’

나는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덜컥.

그 순간, 왼팔에 걸리는 묵직한 감각.

고개를 돌리자 낯선 여성이 내 팔을 벤 채 엎드려 자고 있었다. 허리 근처까지 오는 검은 머리카락의 여성이었다.

‘민채령인가?’

순간 그렇게 생각했으나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날 간호하다가 잠든 것 같은데, 민채령이 그랬으리라곤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으니까.

“으응…….”

내 움직임에 정신이 든 건지 의문의 여성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적당히 예쁘지만 전체적으로 수수한 인상.

“강하늘 학생?”

내 팔을 베고 자고 있던 건 강하늘이었다. 아바타가 아닌 본래의 모습을 취한 그녀가 졸린 눈으로 날 멍하니 바라봤다.

­주르륵.

반쯤 벌어진 입가로 흐르는 침 한 줄기. 슬쩍 고개를 내리자 그녀가 베고 있던 내 팔 소매가 침으로 추정되는 액체로 범벅이었다. 그 모습에 무심결에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강하늘이 앗, 하고 탄성을 질렀다.

“졔, 졔성합니. 후르릅! 죄송해요. 그, 제가 깜빡 잠이 들어서…….”

제 얼굴에 흐른 침을 닦은 그녀가 내 소매를 보더니 어쩔 줄 몰라하며 눈을 떨었다.

별로 탓할 생각도 들지 않았기에, 나는 그녀를 배려하여 화제를 돌렸다.

“계속 절 간호해주고 있었던 겁니까?”

“아뇨. 그, 저도 방금 왔어요. 한 열두 시쯤? 아마 1시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당황한 채 손사래를 친 그녀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어?”

곧 강하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은 오후 다섯 시. 그녀의 기억이 1시까지라면, 그녀는 적어도 네 시간 이상 내 팔을 베고 자고 있었단 소리였다.

“죄, 죄송해요. 그, 팔 안 저리세요……?”

강하늘이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만날 때마다 불평불만 가득하던 그녀가 내게 쩔쩔매는 모습이 낯설기 그지없어서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아…….”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점차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까만 눈동자가 사방팔방으로 구르며 갈 곳을 잃은 채 방황했다.

“아, 맞다! 과일! 과일 사왔어요! 병문안에는 역시 과일이죠! 아플 땐 과일이 소화시키기 좋잖아요? 아니, 달달한 게 상처 회복에 좋다고 그랬나? 아니면 수분 섭취? 아무튼!”

강하늘이 횡설수설하며 침대 옆 냉장고에서 까만 비닐봉지를 꺼냈다.

헌데 그 크기가 심상치 않다.

“……안에 도대체 뭐가 든 겁니까?”

“수, 수박인데요?”

“예?”

그녀가 꺼낸 건 내 머리보다 커다란 수박이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른 과일도 많았을 텐데 이 3월 초봄에 굳이 수박을, 그것도 병문안 선물로 들고 온다고?

“그, 보통 병문안 올 땐 좀 먹기 편한 과일을 들고 오지 않습니까? 이걸 도대체 어떻게 먹으라고…….”

“앗…….”

내 말에 당황한 듯한 강하늘이 곧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수, 수박 좀 사올 수도 있잖아요! 저희 집에선 제가 감기 걸렸을 때마다 엄마가 수박 잘라줬단 말이에요! 수박은 수분이랑 당분이 많아서, 그, 아무튼 환자한테 좋다고, 그랬는데…….”

허나 기세 좋던 그 목소리는 점점 사그라들었다. 삽시간에 잘 익은 수박처럼 얼굴을 붉힌 강하늘이 또르르 내 시선을 피했다.

그 또한 낯설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원작의 강하늘은 결코 보여주지 않은, 소설에 묘사된 내용만으론 결코 알 수 없었을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

강하늘의 반응은 마치 진짜 사람 같았다. 그 모습만 보면 도저히 텍스트와 설정으로 이루어진 소설 속 캐릭터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내 눈앞에서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날 흘겨보지만, 어쨌든 내게 구해진 입장인지라 싫은 소리 하나 못 하고 답답하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있는 그 모습은.

아무리 봐도 나와 같은 인간으로밖에 보이지 않아서, 무심코 이곳이 소설 속 세상이고 그녀가 캐릭터에 불과하다는 사실마저 잊을 정도였다.

그 모습에. 그 인간다운 모습에. 그 인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모습에.

문득, 그녀를 구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알겠어요, 알겠어! 제가 직접 깎아주면 불만 없는 거죠?! 하여튼, 그래도 기껏 선물이랍시고 들고 왔는데 곱게 받아주면 얼마나 좋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수박은 좀 아니잖습니까. 게다가 지금 제가 과일 같은 걸 먹을 수 있는 상태인지도 모르고.”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파열된 내장은 다 봉합했고, 포션 희석액으로 소화 기관은 완전히 치료가 끝났다고 했으니까요. 당분간은 유동식 위주로 드셔야겠지만, 수박 같은 과일은 괜찮다고 의사분께서 말씀하셨어요.”

“참 자세히도 알고 계시네요.”

“그, 그거야…….”

내 시선을 피한 강하늘이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제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신데, 걱정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런 것치곤 어째 아직까지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 한 마디도 없군요.”

“지, 지금부터 하려고 했거든요?! 대놓고 말하기 낯간지러우니까 천천히 분위기부터 잡으려고 했는데! 그쪽이 그렇게 말해버리면 제가 뭐가 돼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강하늘이 복잡한 감정이 떠오른 얼굴로 외쳤다.

“뭐 고맙다는 인사 받고 싶어서 생색이라도 내는 거예요 지금? 아니, 기껏 만화 속 히어로처럼 여자앨 구했으면 잠자코 점잖이나 떨 것이지. 뭘 구차하게 고맙다는 말 안 하냐고 따지고 들어요 도대체?! 분위기 다 깨지게 진짜!”

“뭐 제가 만화 속 히어로는 아니잖습니까.”

“네! 그렇죠! 제가 잠시 착각했네요! 댁은 그냥 대학교에서 월급 받고 일하는 경비원일 뿐인데, 제가 아주 단단히 착각을 했네요 정말!”

씩씩대며 외친 강하늘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려 퍼지며 우리 둘 사이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

곧 다시 얼굴을 붉힌 강하늘이 뒷머리를 벅벅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아무튼 구해줘서 고마워요. 하아, 진짜. 이게 이런 분위기에서 말할 대사가 아닌데…….”

토라진 듯이 입을 삐죽 내민 강하늘이 후드 모자를 깊숙이 눌러썼다.

“하여튼 무사히 깨어나서 다행이네요. 그쪽 거의 사흘이나 잠들어 있었어요.”

“사흘이나 말입니까?”

그렇다면 사건 뒷정리니 경찰 조사니 하는 것들은 다 끝났을 터. 나는 강하늘에게 내가 의식을 잃은 동안의 일에 대해 물어봤다.

“글쎄요? 저도 들은 게 없어서.”

허나 강하늘은 아무것도 모른다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사건 당사자인데 들은 게 없다뇨?”

“제 말이 그 말이에요. 근데 경찰도 경비대도 아무런 말을 안 해주는 걸 어떡해요? 신원 미상의 2인조에 의한 납치 미수. 그 외 상세 불명. 제가 들은 건 딱 이게 전부에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나주용이나 여일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진수, 성찬 놈들과 접촉한 흔적을 남겼을 리가 없다. 게다가 그 두 사람은 슬럼가 태생의 무호적자. 경찰 수사가 난항을 겪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민채령이라면 대강의 사정을 알고 있겠지만, 그녀가 굳이 강하늘한테 친절하게 설명해줄 이유도 없고 말이지.’

“그쪽은 뭐 아는 거 없어요?”

방금 막 의식을 차린 내가 사정을 알아봐야 얼마나 알겠는가. 아마 답답한 마음에 무심결에 꺼낸 질문이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네?”

하지만 난 알고 있노라고 대답했다.

[ 강하늘의 자퇴를 막으세요. 강하늘과 친분을 쌓으세요. 강하늘을 당신의 곁에 두세요. 그녀의 존재는 당신에게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엑스트라 퀘스트의 메시지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강하늘과 친해지라고. 그녀는 반드시 내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시스템이라고 100% 신뢰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껏 시스템은 내게 어떠한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엑스트라 퀘스트의 메시지는 평소와 묘하게 다른 느낌이기도 했고.

강하늘의 자퇴를 막고, 그녀와 친분을 쌓기 위해선 이번 일의 배후를 밝히는 게 좋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강하늘에게 내가 파악하고 있는 이번 사건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여일에 대해서, 나주용에 대해서, 다중능력자라는 그의 연구분야에 대해서, 그리고 성찬, 진수 일당과 나주용의 연결에 대해서.

나는 민채령에 관한 부분을 제외한 모든 사실을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강하늘의 표정은 납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시발 진짜. 조용히 좀 살겠다는데 왜 애먼 놈들이 말썽이야…….”

착잡한 표정으로 미간을 짚은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가 이제 어쩌면 좋을까요?”

“……일단 자퇴를 번복하고 아카데미에 남는 게 좋을 겁니다. 그래야 여일이 당신을 건드리기 어려워질 테니까요.”

“제가 자퇴하지 않으면 그쪽 경비대에서 절 지켜주는 건가요?”

“그건……. 아마도 그럴 겁니다.”

확답은 내릴 수 없었다. 진수, 성찬 놈들과 여일의 상관관계를 경찰이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경비대 역시 그럴 가능성이 컸다. 아마 경비대 차원에서 강하늘에게 24시간 경호인원을 붙여줄 일은 없겠지.

그나마 민채령은 사정을 파악하고 있을 테지만, 그녀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상 그녀가 강하늘을 지키려고 할지 말지도 미지수였다.

‘아니, 어쩌면 민채령도 강하늘을 노리고 있는 걸지도 몰라.’

단순히 강하늘이라는 인재를 탐내는 것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에 하나 민채령도 나주용처럼 강하늘의 능력을 통해 무언가 이득을 취하려고 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네요. 경비대 사람들이 다 그쪽처럼 유능하다면 안심할 수 있겠­”

“아뇨. 경비대도 너무 믿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네? 왜요?”

“그야……. 경비대 사람 중에 몰래 여일에게 협력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습니까.”

차마 경비대 실세가 널 노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직속 부하인 나조차 의심을 받게 될 테니까.

“……그럼 제가 믿을 사람이라곤 이제 그쪽밖에 없다는 이야기네요?”

그렇게 말하는 강하늘의 표정은 썩 괜찮아 보였다. 상황이 그리 좋지 못함에도 그녀의 입가엔 은은한 웃음기가 번져 있었다.

“오늘 일요일이니까 내일 날이 밝으면 곧장 학생처로 가서 자퇴 번복부터 해야겠네요. 자퇴서는 이미 금요일에 처리됐겠지만, 뭐 사정사정하면 어떻게든 되겠죠.”

“인터넷 방송은 어떻게 할 겁니까?”

“당연히 계속 해야죠. 아카데미 다니면 생활비다 등록금이다 깨질 돈이 얼마인데 벌 수 있을 때 벌어야 할 거 아니에요? 게다가 제가 또 은근히 방송이 적성에 맞더라고요. 진짜 얼굴을 안 보여도 되니까 마음껏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고 해야 하나?”

­띠링!

그렇게 말한 강하늘이 소탈하게 웃어보인 순간, 시야 중앙에 푸른색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 엑스트라 퀘스트 클리어. ]

[ 당신은 강하늘의 자퇴를 막았고 그녀와 친분을 맺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부디 그 관계를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

<보상/>

1. 경비율 증가 3%(현재 경비율 : 8%)

※경비율이 10%에 이를 경우 <스킬 :="" 아카데미의="" 경비원="">의 효과에 의해 1개 능력치의 랭크를 1단계 상승시킬 수 있게 됩니다.

===

그 메시지에 한시름 놓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로써 또 하나의 사건이 일단락되었구나 하며.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요?”

그 말에 곧바로 시스템 메시지를 비활성화 했다. 나는 시스템 메시지를 보고 있었을 뿐이었으나, 강하늘 입장에선 내가 말없이 그녀를 빤히 바라본 것처럼 보인 모양이다.

내가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자 강하늘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대뜸 제 뺨에 손을 가져가더니, 곧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그, 그렇게 차이가 많이 나나요?”

“예?”

“아바타랑 제 본판 말이에요. 계속 빤히 보시길래 혹시 두 얼굴을 비교하고 계신 게 아닌가 해서……. 화, 확실히 이 얼굴을 기반으로 하긴 했지만 여기저기 손을 많이 대긴 했죠. 눈매라든가, 콧대라든가, 피부도 그쪽이 더 깨끗하고. 그 외에도 뭐……. 그래도 그렇게까지 이상하단 눈으로 빤히 바라보실 건 없잖아요.”

나는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으나, 아무래도 강하늘은 내 시선을 그런 의미로 해석한 것 같았다.

“아뇨. 딱히 그런 생각은 안 했습니다. 아바타나 본판이나 별 차이도 없던 걸요.”

“네?”

확실히 강하늘의 아바타와 본판의 외모는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 편이었다. 하지만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아바타 모습인 그녀를 처음 봤을 때 곧바로 그녀임을 알아차렸듯, 강하늘이 취한 아바타의 모습은 그녀의 본판과 대동소이했다.

“푸흐.”

내 대답에 얼굴을 붉힌 강하늘이 이내 피식 웃었다.

“방금 그 대사는 꽤 괜찮았어요. 둔감한 얼굴로 은연중에 칭찬하는 게 꼭 소년만화 주인공 같네요.”

“하필 비유를 해도 그런 비유를…….”

제 딴에는 우스갯소리라고 한 것이겠지만 소설 속에 빙의된 내 입장에선 복잡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그런 내 사정을 모르는 강하늘은 내가 멋쩍게 미간을 찡그리자 뭐가 그리 좋은지 배시시 웃었다.

­드르르륵!

그때, 병실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어?”

갑작스레 병실에 난입한 건 채소연이었다. 한 손에 커다란 봉투를 짊어진 그녀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채소연?”

“깨, 깨어, 깨어났구나아아아아! 드디어 깨어났어어어어어!!!”

다음 순간 채소연이 눈물을 글썽이며 내게 달려들었다. 그 돌격에 나는 본능적으로 초능력을 발동했다.

­투확!

“악!”

야구공 크기로 압축한 연기에 맞은 채소연의 고개가 뒤로 휙 꺾였다.

“왜 때려!!!”

“갑자기 달려들기에 그만…….”

“직장 후배가 사흘이나 잠들어있다 깨어났는데 반가운 마음에 그럴 수도 있지!!”

“……직장 선배신가 봐요?”

“아뇨. 동기입니다.”

저 쥐방울 자식이 진짜. 어디서 얼렁뚱땅 선배 행세야?

“근데 그쪽은 누구……아!”

채소연이 강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겁쟁이 욕쟁이 자퇴생!”

“……뭐?”

빠직, 강하늘의 관자놀이에 굵은 핏줄이 돋았다. 채소연의 얼굴을 살피던 그녀가 곧 기억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누군가 했더니 그때 수호 씨 옆에서 떽떽거리던 꼬맹이잖아? 웬 초등학생이 경비대원이랑 같이 있나 했더니, 그쪽도 경비대원이었나 보네요?”

“꼬맹이? 초등학새애앵??? 이게 예의를 밥말아처먹었나!”

“피차 마찬가지죠. 그쪽도 저한테 대뜸 겁쟁이니 욕쟁이니 그랬잖아요?”

“겁쟁이에 욕쟁이 맞잖아!”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자기 잘못도 돌아보지 못하고 떽떽거리기만 하는 게 영락없는 초등학생 꼬맹이네요.”

갑자기 급발진하는 채소연과 한 마디도 지지 않겠다는 듯 응수하는 강하늘.

‘그러고 보니 강하늘도 원래 한 성깔 했었지.’

깨어난 이래로 줄곧 얌전한 모습만 보여서 잊고 있었으나, 강하늘은 나와의 첫 만남에서 대뜸 시발이라며 욕부터 박던 다혈질이었다. 걸어 다니는 분노유발제인 채소연과의 상성은 최악에 가까웠다.

“내가 틀린 말 했어?! 싸우는 게 겁나서 자퇴해놓고 우리가 찾아가니까 대뜸 욕부터 박았으면서! 그럼 겁쟁이에 욕쟁이 맞잖아!!”

“듣자듣자 하니까 도저히 못 들어주겠네. 내 사정은 하나도 모르면서 뭘 잘난 듯이 그딴 식으로 말해?!”

“이게 진짜!”

“뭐! 진짜, 뭐?!”

“두 사람 다 그만.”

내 말에 씩씩대던 두 사람이 일제히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환자복 앞섬을 풀어헤치며 붕대투성이 상체를 보란 듯이 두 사람에게 내보였다.

“환자 앞에서 병문안이랍시고 온 사람들끼리 아주 잘 하는 짓입니다. 그렇죠?”

“……죄송해요. 제가 조금 흥분했네요.”

“헹! 알긴 아네!”

“저저 시발 진짜.”

마지막 욕은 강하늘이 아닌 내가 뱉은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쏘아낼 것처럼 손 안에 연기덩어리를 만들어내자 채소연이 핫! 하면서 제 이마를 두 손으로 감쌌다.

“병문안 왔으면 쓸데없이 싸움붙이지 말고 병문안이나 해. 나 깨어났다고 울면서 달려들던 놈이 이젠 난 안중에도 없네?”

“건강한 거 봤으니 됐지 뭐! 맞다! 내가 너 먹으라고 과일도 사왔지롱! 짜잔!”

채소연이 새까만 비닐봉투를 들어보였다.

헌데 그 크기가 이번에도 심상치 않았다.

“설마 수박이냐?”

“딩동댕!”

“이런 시발 진짜.”

도대체 이놈이고 저놈이고 환자한테 수박이 웬 말인가. 설마 이 세계에선 그게 정상인 건가? 원래 세계에서 온 내 감성이 이 소설 속 세상의 상식을 따라가지 못하는 건가?

“도대체 왜 다들 하필이면 수박이야? 좀 환자가 먹기 편한 과일로 가져오면 어디 덧나?”

“어차피 어지간한 부상은 포션으로 다 회복했을 거 아냐! 대충 알아서 잘라먹으면 되지 호들갑은!”

차마 자기가 잘라주겠단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점이 채소연답다면 채소연다웠다.

“수박만 두 통인데 이걸 도대체 언제 먹으라고…….”

“응? 아직 더 있는데?”

“뭐?”

채소연의 말에 내가 반문하자 그녀가 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 여기 올라올 때 지예워……언이 아니라 예지원도 1층에 있었거든. 다른 사람 병문안 온 게 아니면 걔도 너 보러 온 거 아닐까? 보니까 걔도 과일 봉투 같은 거 들고 있던데.”

우연이라기엔 지나치게 공교로운 타이밍이었다. 깜빡 졸았던 강하늘이야 그렇다 치고, 채소연이나 지예원은 어떻게 내가 깨어날 줄 알고 딱 맞춰서 병문안을 왔단 말인가.

“걔도 수박 사왔으면 진짜 웃기겠다. 그치?”

“웃기긴 무슨. 지예……지원이 너처럼 상식이 없는 줄 아냐?”

“상식이 없……. 죄송합니다…….”

“아뇨. 강하늘 학생이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졸지에 팔자에도 없는 하렘물 전개에 빠진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머리가 아픈데, 아주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드르르륵!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지예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일어나 있네? 게다가 처음 뵙는 분도 있고.”

예지원 설정의 일환인지 지예원은 화려한 오버로크가 가득한 야구점퍼에 커다란 스냅백을 비스듬히 쓴 채였다. 도대체 저런 옷은 어디서 구한 건지 원.

“하여튼 깨어났다니 잘 됐네. 병문안 선물이라고 과일 좀 싸왔거든.”

“혹시 수박이야?”

내 질문에 채소연과 강하늘, 두 사람이 눈빛을 빛내며 지예원이 들고 있는 봉투를 바라봤다. 그 강렬한 시선에 지예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엉? 아니? 먹기 편하라고 포도랑 바나나 조금 싸왔는데, 갑자기 웬 수박?”

그냐가 봉투에서 보란 듯이 노란 바나나 송이를 꺼내들었다.

그 모습에 채소연과 강하늘이 작게 혀를 찼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니들 왜 그래?”

사정을 모르는 지예원이 벙찐 얼굴로 바나나를 든 채 고개를 갸웃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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