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047. 강하늘(6)
* * *
어두운 방 안.
새하얗게 떠오른 모니터의 불빛만이 비추는 자그마한 원룸 안에서, 강하늘은 속옷바람에 후드티 하나만 걸치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타다다다다다닥.
그녀의 손가락이 바삐 오가며 타자를 쳤다. 퀭한 두 눈이 쉴 새 없이 모니터를 훑었다. 한창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그녀의 표정에는, 어째서인지 불쾌한 기색이 다분했다.
우우우우웅.
그때 그녀의 핸드폰이 낮게 진동했다.
강하늘의 표정이 더욱 찌푸려진다. 계속해서 걸려오는 전화를 무시하는 것도 이제 한계였다. 수십 통의 부재중 표시가 떠오른 화면을 보던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강하늘 님. 저는 여일장학재단 소속 장학사 김요하…….
“안 가요. 안 가! 안 간다고! 안 간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 씨발 진짜!!!!”
가, 강하늘 님?
“안 간다고 제가 몇 번을 말해요?! 여일이고 나발이고 아예 그쪽 업계에 관심이 없다니까?! 장학금이 얼마네 유력 길드에 자리를 주겠네 장비를 지원해주겠네 뭐네 해도 절대로 안 간다고! 그렇게까지 말했으면 이제 좀 알아듣고 포기합시다, 예?!”
강하늘 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허나 부디 판단을 재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강하늘 님의 초인으로서의 재능은 무척이나 뛰어나기 때문에…….
“재능이 뛰어나긴 얼어 죽을. 전망 있는 병아리를 낚으시려는 거면 저 말고 다른 학생한테 접근하셨어야죠. 한겨울이나 류태현, 나은솔, 하성민, 성아라……. 뭐 그런 애들이요.”
말씀하신 학생들의 신상정보는 저희 쪽에서도 파악하고 있습니다. 허나 저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하늘 님께 가장 먼저 연락을 드린 겁니다.
“네네. 잘 알겠고요. 저는 여일이든 그린하우스든 헌터아카데미 쪽으론 오줌도 안 눌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제발 이 건으로 다시 전화하시는 일 없길 바라겠습니다. 그럼 이만.”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은 강하늘이 핸드폰을 침대로 휙 던졌다.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듯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한 그녀가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 의정부에 또 다시 A급 던전 발생. 전년 동월 대비 2배 증가된 발생 빈도에 시민들 불안감 호소……. 던전 크라이시스 발생하나? ]
[ 그린하우스 재학생 A양 결국 여명단 단원이었던 것으로 밝혀져……. 국립아카데미의 보안 이대로 괜찮은가. ]
[ 신규 헌터 10명중 3명이 1년 채 넘기지 못하고 헌터 그만둔다. 40년 역사의 너도밤나무 길드마스터 최한량이 말하는 헌터 업계의 암울한 미래. ]
[ 혜화동 살인사건 범인 초인우월조직 ‘노블레스’ 회원인 것으로 확인. 조직범죄 가능성 염두에 두고 관련 조사 착수. ]
화면에 표시된 헌터나 초인과 관련된 수많은 기사와 칼럼들을 보며 강하늘이 생각했다. 역시 이 업계는 사람이 살 곳이 아니라고.
‘자퇴서 수리가 금요일에 완료될 거라 그랬지.’
오늘은 목요일. 고로 내일이면 이 위험천만한 초인 사회와도 안녕이었다.
찌르르르르릉!
그때, 침대에 던진 그녀의 핸드폰이 알람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전화가 아닌 그녀 자신이 미리 맞춰둔 알람이었다.
‘벌써 시간 됐네.’
알람을 끈 강하늘이 방 불을 켜고 컴퓨터 앞에 앉아 헤드셋을 썼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이내 그녀의 눈에 엉망으로 어질러진 방 안 풍경이 보였다.
‘……일단 청소부터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강하늘이 귀찮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
목요일 아침. 나는 별다른 연락도 없이 무작정 추리소설연구회 부실로 향했으나, 일리아나는 마치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부실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 수업은 안 듣습니까?”
“지금 듣고 있씁니다! 원격 수업, ELearning이라는 겁니다!”
일리아나가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노트북을 가리켰다. 허나 그녀는 노트북엔 관심조차 주지 않은 채 커다란 양장본을 탐독하는 중이었다.
성적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 대학교 취미 동아리 회장들은 으레 이런 법이다.
“근데 여기서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당신이 탐정 일을 하는 건 대외비일 텐데요. 다른 동아리원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그런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추리소설연구회, 실질적 활동 인원 1명! 바로 저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하.”
그래 가지고 동아리 유지는 될까 싶었으나 그건 일리아나가 알아서 할 문제였다. 일단 류태현이 3학년이 될 시점까진 존속하는 걸 확인했으니 그녀가 어떻게든 잘 꾸려나간 것이겠지.
“그래도 만에 하나라도 동아리원이 올 수도 있잖습니까. 역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안수호 고객님 걱정 너무 많은 겁니다! 동아리 회장인 제가 보증하는 겁니다! 누가 올 일은 절대로 없으니 안심”
벌컥.
그 순간, 일리아나의 말이 무색하게도 부실 문을 열고 한겨울이 들어왔다.
“읏?”
나와 시선이 마주친 한겨울의 얼굴에 쩌적 금이 갔다.
“Oh. 말이 씨가 됐다, 인 겁니다…….”
일리아나의 망연자실한 중얼거림. 한편 한겨울은 반쯤 흘러내린 안경을 추스르지도 못한 채 입술만 달싹이고 있었다. 나와 마주친 것이 여간 충격이 아닌 모양.
“좋은 아침입니다, 한겨울 학생.”
“……당신이 왜 여기 있죠? 학생도 아니면서?”
“일리아나 학생에게 개인적인 볼일이 있어서…….”
“개인적인 볼일이요?”
의심스런 눈치로 눈을 흘기는 한겨울에게 일리아나가 태연하게 말했다.
“겨울 씌, 저희 동아리 연구 주제 알고 있지 않씁니까? 추리쏘설 속 추리 기법에 대한 실제 적용 연구지 않씁니까? 그래서 현장 경험 질문 구하려고 여기 안수호 씌 제가 개인적으로 부른 것입니다!”
“정말인가요?”
“예. 맞습니다.”
“정말 그 이유예요?”
내 대답에도 한겨울이 미심쩍은 눈으로 날 노려봤다. 학생도 아닌 내가 동아리실에 있는 게 이상하기야 하겠지만 그렇게 의심할 일은 아닌 거 같은데.
“그럼 달리 제가 무슨 이유 때문에 왔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야 어제 일로 저한테 접근”
한겨울이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두 분이서 볼일이 있으시다니 전 나중에 다시 오죠.”
그렇게 말했으나 한겨울은 쉽사리 발걸음을 돌리지 못했다. 꼭 미련이라도 있는 것처럼.
“겨울 씌? 혹시 ‘불륜전문 양아치 탐정 게르만’ 다음 권이 필요하씬 겁니까?”
“불륜전문……?”
“윽!”
그 노골적인 제목에 한겨울이 얼굴을 붉혔다. 독일어로 적혀 있어서 무슨 제목인지 몰랐는데 설마 그런 제목이었다니.
“그거라면 바로 옆 책장에 있씁니다! 제일 오른쪽 책장 위에서 세 번째 줄입니다!”
“…….”
이쪽 눈치를 살피던 한겨울이 잽싸게 책상으로 다가갔다. 에코백에 넣어둔 양장본을 꺼내 빈자리에 꽂더니, 바로 옆에 꽂혀 있던 다음 권을 빼들고 재빨리 문으로 향했다.
“한겨울 학생.”
그런 그녀를 내가 불러 세웠다. 우뚝 멈춘 한겨울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왜요?”
“한겨울 학생이 무슨 책을 읽든 그건 한겨울 학생의 자유입니다. 가슴을 펴세요.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까.”
“윽.”
그 말에 한겨울의 얼굴이 귀까지 새빨게졌다. 너무 부끄러워하는 것 같아 한 말이었는데 아무래도 역효과였던 것 같다.
“…….”
말없이 날 노려보던 한겨울이 도망치듯 부실을 나섰다. 물론 책장에서 꺼낸 양장본은 소중하게 가방에 넣은 채였다.
“겨울 씌도 좀 더 자기 취미에 당당해졌으면 하는데, 안타까운 겁니다…….”
“본인 집안 문제니 어쩔 수 없죠 뭐. 근데 그 불륜전문 어쩌고 하는 책은 무슨 내용입니까?”
“금발 벽안 미남 러씨아 탐정이 잘생긴 외모로 의뢰인의 아내들을 꼬셔서 이혼 쏘송에서 이기게 해주는 치정물입니다! 꽤 재밌씁니다!”
거 충분히 부끄러워할만한 내용 맞네.
“하여튼. 겨울 씌는 겨울 씌, 우리는 우리입니다! 슬슬 조사 결과 중간보고 시작하겠씁니다!”
일리아나의 조사 결과를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았다.
1. 학기 초 잠적했던 강하늘은 어떠한 범죄나 사건과도 연루되지 않았다. 실종 신고를 접수한 경찰이 캠퍼스 근처에 위치한 그녀의 원룸에 향했을 때 그녀는 그 자리에 있었다. 가족이나 아카데미측과 연락이 안 된 건 단순히 그녀가 연락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2. 그 기간 동안 강하늘은 하루의 대부분을 인터넷 서핑으로 보냈다. 찾아본 정보는 헌터 업계나 초인 사회에 대한 것, 여러 기업이나 연예인 등 유명인에 대한 정보, 근현대사 전반, 인터넷 문화 등 다양했다.
3. 경찰이 들이닥치고 가족과 연락을 한 다음 날인 이번 주 월요일. 그녀는 그린하우스 학생처에 자퇴서를 제출했다.
4. 그리고 그날 밤 사립 아카데미를 운영 중인 여일그룹 산하 장학재단에서 강하늘에게 접촉했다. 접촉 사유는 장학금을 포함한 각종 지원을 약속하여 강하늘을 여일아카데미로 편입시키려는 것. 담당 장학사는 김요한이라는 사람이며, 월요일부터 바로 어제인 수요일까지 최소 1번의 만남과 일곱 차례의 전화, 142건의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남아있는 문자메시지 내용을 확인한 결과 강하늘은 장학재단의 제안에 줄곧 부정적 입장을 고수했다고 한다.
5. 김요한의 스마트폰 연락 기록을 조사한 결과 장학재단 이사들이나 여일그룹 경영진과의 연락이 다수 확인되었다. 고로 이번 일은 여일그룹 내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6. 한편 김요한은 동시기에 여일그룹 산하 초인재활연구소 나주용 소장과도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았다. 연락은 전부 통화였기에 상세 내용은 불명. 이번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도 있으나 일단 특이사항이기에 조사 결과에 포함했다고 한다.
7.마찬가지로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도 있으나, 어제 오후 11시경 해당 연구소 소속 연구원 중 한 명이 의정부 북부 슬럼으로 향한 것이 확인되었다. 무슨 목적으로 간 것인지는 불명이나, 슬럼의 특성상 건전한 의도는 아닐 것이다.
8. 마지막으로 민채령에 관한 조사 결과. 민채령이 내게 강하늘의 자퇴를 막으라 임무를 내렸지만, 적어도 일리아나가 조사한 범위 내에선 해당 임무에 대한 어떠한 자료도 특책과 데이터베이스 내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관해 일리아나는 이번 일이 완전히 민채령의 독단이거나, 혹은 그녀가 보안 때문에 열람하지 못한 일부 영역에 해당 자료가 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하루 만에 잘도 이만큼이나 조사했군.’
조사 내용은 말 그대로 이번 일에 관한 전반적인 배경사실들이었으나, 그중 특히 주목할 것은 바로 연구소장 나주용의 존재였다.
초인재활연구소는 원작에서도 등장했던 빌런 단체이며, 나주용은 그 빌런 단체의 수장이었으니까.
나주용은 창작물에서 흔히 나오는 매드 사이언티스트로, 그의 연구 분야는 과학기술을 통한 초인의 강화였다. 강화 방안에는 여러가지가 있으나 원작에서 중점적으로 다뤄진 내용은 한 사람의 초인에게 여러 개의 초능력을 인공적으로 심는 다중능력자 연구였다. 실제로 원작 중후반부에는 그가 만들어낸 불완전한 다중능력자 실험체들이 빌런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강하늘의 아바타 능력은 원작에서 등장했던 초능력들 중에서도 가장 다중능력에 가까운 능력.
그 점에 주목한 나주용이 강하늘에게 눈독을 들여, 여일의 장학재단을 통해 강하늘에게 접근을 꾀했다고 한다면 김요한 장학사와 나주용 소장 간의 긴밀한 연락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원작에선 없던 내용인데. 아니 잠깐…….’
또 새로운 변경점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한 가지 가능성이 뇌리에 번뜩였다.
‘원작에서 묘사되지 않았다고 해서 꼭 일어나지 않은 일이란 법은 없지.’
당장 지예원에 관한 사건이 그랬다. 원작에서 묘사된 건 그녀가 류태현과 만난 그 장면뿐이었지만, 그 이면에선 내가 알고 있는 이런저런 사건들이 분명히 진행되었을 테니까.
‘어쩌면 이번 강하늘 건도 마찬가지일지도…….’
나는 원작에서 묘사된 강하늘의 행보를 다시 되짚어봤다.
랭킹전에서 한겨울에게 패배한 뒤, 한겨울에게 열등감을 느껴 치졸한 방법으로 해코지를 하려던 강하늘의 시도는 류태현에 의해 저지당한다. 그 뒤 그녀는 주변 학생들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아카데미에서 잠적. 여기까지가 원작에서 나온 강하늘의 행보였다.
‘강하늘이 퇴장한 게 아마 100화 전후, 그리고 나주용이 만든 다중능력자 빌런이 처음 등장한 게 150에서 200화 사이였는데…….’
강하늘의 퇴장 시기는 기말고사 전. 다중능력자가 처음 등장한 건 2학기 시작 직후였다. 시기상으로는 3개월 정도 차이가 났다. 강하늘이 잠적한 뒤 나주용이 그녀에게 접근하여 그녀의 능력을 연구하여 다중능력자 실험체를 만들어냈다면 시기상으로는 얼추 들어맞았다.
‘근데 왜 이쪽 세상에선 거의 3개월이나 일찍 일이 벌어진 거지?’
그 답은 곧 떠올릴 수 있었다. 원작에선 기말고사 직전에나 잠적하는 강하늘이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자퇴를 신청했다. 그게 이유일 것이다.
아마 원작에선 류태현에 의해 잠적한 뒤 실의에 빠진 강하늘을 나주용이 꼬드겼을 것이다. 강함에 대한 집착이 남다르던 강하늘이었으니, 아마 연구에 협력하면 힘을 주겠네 어쩌네 하면서 꾀어냈겠지.
하지만 이 세상에서의 강하늘은 3개월이나 일찍 그린하우스를 떠나려 하고 있었다. 만약 나주용이 이 시기부터 강하늘을 눈여겨보고 있었다면, 그가 원작보다 일찍 움직인 것도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었다.
“고객님의 상사인 민채령 팀장은 어제 여일아카데미로 향했씁니다! 경비대 팀장이 장학재단의 일에 관여. 아주 이상합니다! 저는 당신의 상사가 이번 일에 관한 불법적인 뒷사정을 알아낸 것이라고 쌩각합니다! 실력이 뛰어난 상사입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강하늘이 자퇴하면 나주용이 그녀에게 접근하기 더욱 쉬워진다. 때문에 그녀는 내게는 강하늘의 자퇴를 막으라 시키고, 동시에 자신은 나주용과, 그리고 그가 앞세운 여일과 직접 담판을 짓기 위해 인천으로 향한 것이겠지.
다만 우려되는 건 제아무리 민채령이라 한들 나주용을 막을 순 없으리라는 점이었다.
나주용은 김요한 장학사를 앞세워 강하늘에게 접근했다. 김요한은 여일의 여러 경영진과도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았다. 즉 이번 일의 뒤에는 여일그룹이 자리하고 있다.
여일그룹은 한성그룹의 뒤를 잇는 국내 2위의 재벌가. 제아무리 민채령에게 이런저런 연줄과 인맥이 있다 한들 여일그룹에 비할 바는 못 될 것이다.
“안수호 고객님! 이번 사건에선 아주 구린 냄새가 납니다! 대사건의 예감! 이런 정보를 가져온 고객님에게 저 일리아나, 아주 감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리아나는 흥미진진한 사건 내용에 신난 것처럼 보였다. 정작 조사를 의뢰한 나는 꼬일대로 꼬인 인과관계에 머리가 터질 지경인데.
‘천천히 생각해보자. 민채령이 여일로 향한 것이 이번 사건에 대한 정보를 쥐고 경고 차원에서 간 거라면.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거지?’
가장 좋은 건 민채령의 경고를 듣고 나주용이 강하늘에게서 손을 떼는 것. 허나 그럴 가능성은 한없이 적었다.
나주용은 연구를 위해서 불법적인 인체실험도 서슴지 않는 빌런. 고작 경고 한 번으로 강하늘이라는 매력적인 연구 자료를 포기할 위인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민채령의 경고가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나주용이나 여일이 민채령에 대해 파악하고 있다면, 그녀의 행동이 자극제가 되어 강경책으로 나올 지도 모르니까.
가령, 민채령의 관여로 인해 온건한 설득을 포기하고 강제로 강하늘을 납치하려고 시도한다든가.
나주용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원작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히로인의 납치를 꾀하기도 했으니까.
“잠깐.”
그 순간, 뇌리를 스친 하나의 가능성.
“일리아나. 분명 나주용의 부하 연구원이 의정부의 슬럼으로 향했다고 했죠? 그게 정확히 언제였습니까?”
“어제 오후 11시경입니다만?”
“11시……?”
머릿속에 혼잡하게 흩어진 단서들이 하나씩 맞물리기 시작한다.
강하늘이 자퇴서를 제출한 게 월요일. 그리고 민채령이 내게 임무를 내린 게 화요일 오후. 그리고 그녀가 여일로 향한 게 바로 어제인 수요일.
그리고 나주용의 부하가 슬럼으로 향한 건 그날 밤 11시.
슬럼 거주민이 아닌 자가 슬럼으로 향할 때는 슬럼에 볼일이 있을 때뿐이었다. 그리고 의정부 슬럼은 온갖 범죄자가 들끓는 범죄의 온상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고로, 돈만 쥐어주면 여자 한 명 납치해주겠다는 양아치 놈들은 얼마든지 있을 터.
“이런 씨발.”
만약 나주용이 민채령의 관여로 인해 급한 마음에 강경책을 꺼내들었다면?
강하늘을 강제로 납치해 실험 재료로 써먹을 심산이라면?
그 실행범을 구하기 위해 그의 부하가 슬럼으로 향한 것이라면?
걱정이 지나친 것일지도 모른다. 허나 쾌락천마가 그간 내게 보인 치졸한 짓거리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안수호 고객님? 무쓴 일입니까? 얼굴 색 완전 창백합니다! 거의 유사 백인 수준”
“일리아나. 잠시만.”
손으로 그녀의 말을 제지한 채 나는 강하늘에게 전화를 걸었다.
“……망할.”
허나 강하늘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무심한 신호음만이 무미건조하게 울려댈 뿐.
고작 전화 좀 안 받은 것 가지고 유난을 떠는 걸 수도 있다. 단순히 무슨 사정이 있어 전화를 받지 못하는 것일 지도 모르지 않는가.
하지만.
어쩌면.
설마.
“……일리아나. 혹시 강하늘이 살고 있는 원룸 주소 알고 있습니까?”
순식간에 뇌리를 잠식한 불안감에 나는 어느새 일리아나에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
“당연히 알고 있씁니다! 제가 누구라 생각하는 겁니까?”
일리아나가 스마트폰을 조작하자 곧 한 통의 문자메세지가 도착했다. 강하늘의 원룸 주소가 담긴.
“감사합니다. 일리아나.”
“혹쒸, 사건입니까?”
일리아나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잠시만 기다려달라 말하더니 부실 구석의 서랍에서 자그마한 볼펜 한 자루를 꺼냈다.
“그건?”
“볼펜 모양 신호 수신기입니다! 뚜껑 부분 누르면 제 폰으로 신호 옵니다! 긴급 신호! 만약 신호가 오면, 곧바로 제가 경찰 불러드리겠씁니다!”
“……그래준다면 고맙죠.”
아직 강하늘의 신변에 위험이 생겼다는 보장은 없다. 허나 최악의 경우 나주용이 고용한 범죄자들과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의 실력을 예상할 수 없는 이상, 적과 마주치면 곧바로 경찰을 부르는 편이 합당하리라.
“꼭 추리소설 같아서 두근거립니다! 당신은 사건 현장으로 가는 홈즈! 저는 뒤에서 보좌하는 왓슨인 겁니다!”
노골적으로 기뻐하는 일리아나를 뒤로하고 나는 곧바로 부실을 나섰다.
강하늘이 살고 있는 원룸은 그린하우스 근처였다. 아마 통학이 쉬운 곳에서 자취하려는 심산이었으리라. 덕분에 나는 20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녀가 사는 원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녀가 방은 꼭대기 층인 501호. 급한 마음에 나는 계단을 서너 칸씩 뛰어서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사는 원룸 문 앞에 다다른 순간.
꺄아아아아악!!
안쪽에서 들린 명백한 비명 소리에 나는 내가 우려가 현실로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강하늘 학생! 괜찮습니까?!”
급하게 문을 두드리면서 외쳤으나 그녀의 대답은 없었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나는 있는 힘껏 문고리를 돌려 부수었다. 여인혁의 근골정렬 덕에 성장한 내 신체능력은 평균적인 초인 수준은 되었다. 허름한 원룸 잠금장치 정도야 손쉽게 부술 수 있었다.
쾅!
적과 마주칠 것을 각오한 나는 급하게 챙겨온 스턴블레이드를 뽑아든 채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섰다.
“강하늘 학생!”
“꺄아아아아악! 에어프라이 님 5만 코인 미션 감사합니닷! 스나로 5킬? 그 정도야 껌이죠! 바로 적들 척살하러 대도시로 달려가게습니닷!”
“……엉?”
허나 원룸 안쪽의 상황은 내 예상과 전혀 달랐다.
내가 사는 원룸과 비슷한 크기의 방 안. 문을 등지고 의자에 앉은 여성이 고양이 모양 헤드셋을 쓴 채 꺅꺅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처음엔 강하늘인가 싶었으나 머리카락 색이 전혀 달랐다. 강하늘은 평범한 검은 머리였지만 눈앞의 여성은 가을 하늘이 연상되는 밝은 하늘색 머리카락이었다.
“일단 차부터 찾아야겠네요! 네? 뒤? 뒤에 적 없는데요? 게임 말고 현실이요? 네, 네?”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은 여성이 헤드셋을 벗고 내 쪽을 돌아보았다.
여성의 하늘색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잡티 하나 없는 백옥 같은 피부에 단정한 이목구비. 인상은 전혀 달랐으나 난 그 낯선 얼굴에서 묘한 익숙함을 느꼈다.
“……강하늘 학생?”
하늘색 머리카락의 여성은 강하늘과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일단 다른 얼굴이긴 했지만, 그녀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연상할 수 있을 정도로 닮아 있었다.
거기에 목소리나 체구도 강하늘과 동일했다. 이제 보니 머리스타일도 비슷했다.
처음엔 분장인가 싶었으나 뒤늦게 그녀의 능력이 떠올랐다. 아바타 능력. 분명 기본적인 변신 기능도 포함된 초능력이었지.
“어, 어어, 다, 당신 그때 그……!”
강하늘로 보이는 여성이 날 가리키며 외쳤다.
그 뒤편 모니터에는 묘하게 익숙한 게임 화면과 빠르게 올라가는 각양각색의 글자들이 떠올라 있었다. 거기에 더해 모니터 위에 고정된 동그란 카메라와 그 옆에 거치되어 있는 커다란 마이크까지.
그 요소요소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곧바로 파악했다. 허나 예상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광경에 나는 그녀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이게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그러는 그, 그쪽이야말로, 이게 지금 뭐, 뭐하는 짓이에요!?”
강하늘이 맥없이 부서진 현관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척 봐도 당황스러워 보였으나 당황스러운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주용이 고용한 자들에 의해 위험에 처해 있을 거라 예상한 강하늘은, 놀랍게도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게임 방송을 하던 중이었다.
그것도 시청자에게 간드러진 목소리로 아부나 떨면서.
'뭔 시발.'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