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046. 자각하지 못한 감정
* * *
조유리에게 민채령의 임무를 들먹이며 어거지로 조기퇴근을 따낸 뒤.
오랜만에 안전가옥이 아닌 원래 살던 원룸(그마저도 한 달 정도 산 게 끝이지만)으로 돌아온 나는, ‘지예원의 행방은 퇴근하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거다.’라는 민채령의 말이 무색하게도 그 행방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혹시나 우편함에 편지가 있나 찾아봤으나 편지는 없었다.
그럼 집 안에 무언가 메시지를 남겨놨나 했으나 마찬가지로 없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원룸은 내가 떠났을 때 그대로였다. 켜켜이 쌓인 먼지는 그간 그 누구도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음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아니, 자연스레 알게 될 거라며.’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으나 불만을 토해낼 상대도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민채령에게 직접 연락해봐야 하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띵동.
현관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누구지?’
오늘 예정된 방문객은 없다. 택배 같은 걸 시키지도 않았다. 누군가 갑자기 찾아왔다기에는 이 집의 위치를 아는 사람이래봐야 민채령과 채소연 두 사람뿐이었다. 민채령은 출장 중이니 논외고, 그렇다면 채소연인가?
안녕하세요! 이번에 옆집에 이사 온 사람인데요!
허나 그런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사?’
그러고 보니 비어 있던 옆집이 부산스럽긴 했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별 생각 없이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어?”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밝은 애쉬그레이 색 머리카락이었다.
이어서 그 아래로는 펑키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해괴한 복장이 이어졌다. 해골 무늬가 레터링된 티셔츠나 새까만 광택의 가죽자켓, 허리춤에 은색 체인이 늘어진 핫팬츠 등과 같은 옷 말이다.
마치 인디밴드 무대 의상 같은 복장이라고. 그런 감상을 품자 아니나 다를까, 방문객의 등 뒤에는 커다란 기타케이스가 매달려 있었다. 아무래도 정말 밴드라도 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이 집 방음 별로 안 되는데, 당분간 악기 소음 때문에 고생 꽤나 하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방문객의 얼굴을 살폈다.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성은 짙은 노을빛에 잠긴 채 얼굴 가득 짓궂은 웃음을 띠고 있었고.
“뭐야.”
그 얼굴은 내게 아주 익숙한 사람의 것이었다.
“예원 씨?”
“놉! 제 이름은 예지원! 음악의 꿈을 품고 멋대로 상경했다가 차디찬 현실에 좌절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차마 부모님 집으로 돌아갈 순 없어 급하게 독립한 23살 고졸 백수 기타리스트랍니다! 참고로 다음 주부터 역 앞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일할 예정이에요!”
“……예지원? 뭔 개소립니까 그게. 누가 봐도 예원 씨 맞잖아요.”
발랄하게 자기소개……로 보이는 해괴한 소리를 지껄인 지예원이 멋쩍은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도 알아. 이게 다 뭔 지랄이냐 싶겠지. 근데 그 팀장이란 사람이 준비해준 새 신분 설정이 이런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염색도 했다? 그래도 나름 색 괜찮게 나오지 않았어?”
아무래도 지예원이라는 신분을 그대로 쓰기에는 애로사항이 있을 테니 민채령이 새로운 신분을 준비해준 모양이었다.고작 경비대 팀장이란 사람에게 가능해 보이는 일은 아니었으나, 그게 어디 하루이틀 일인가.
“……지금 이게 도대체 다 어떻게 된 겁니까?”
허나 여전히 상황은 이해 안 가는 것투성이였다. 일단 제일 먼저 안전가옥에 있어야 할 지예원이 내 옆집으로 이사 왔다는 이 상황부터가 나로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부터 다 설명해줄게. 근데 이렇게 탁 트인 복도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날 올려다본 지예원이 기타 케이스를 고쳐 매며 배시시 웃었다.
“어떻게. 내가 네 집으로 갈까, 아니면 네가 내 집으로 올래?”
“제가 그쪽으로 가죠.”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즉답?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대놓고 들어가겠다니, 대담도 하셔라.”
“제 방은 한 달 넘게 청소를 안 해서 지금 먼지투성이거든요.”
“내 방도 비슷하지만, 뭐 좋아.”
두어 발자국 물러선 지예원이 손가락으로 옆집을 가리켰다.
“영광스런 첫 손님이니 극진하게 대접해줄게. 자, 들어가자.”
***
“……정말 아무것도 없는 방이군요.”
그것이 지예원의 방에 들어선 안수호의 첫 감상이었다.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지예원의 방은 살풍경했다.
방 안에는 옵션으로 들어있던 최소한의 살림살이를 제외하면 단 하나의 가구조차 없었다. 있는 거라곤 쇼핑백에 담겨진 옷가지 몇 벌과, 구석에 놓인 베개와 이불 한 쌍이 전부였다.
“나도 오늘 아침에 막 온 거거든. 이제부터 차차 맞춰가야지. 마음 같아선 원래 집에 있던 짐들을 다 들고 오고 싶은데, 거긴 지금 경찰이 쫙 깔려있어서.
저번 서큐버스 사건에서 붙잡힌 김성호의 증언에 의해 경찰은 지예원이 여명단 단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현재 지역 경찰은 눈에 불을 켜고 그녀의 행방을 쫓고 있었다.
“그래서 사실 대접하고 싶어도 대접할 수 있는 게 없어. 라면이라면 있는데 아직 저녁 안 먹었으면 라면이라도 먹을래?”
“그것보다 지금 상황에 대한 설명부터 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라.”
“그럼 물 좀 올려놓는다?”
가스레인지에 라면 물을 올려두는 지예원을 안수호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러자 지예원이 눈을 찌푸리며 볼멘소리를 뱉었다.
“뭐. 내 집에서 내가 배고파서 라면 좀 끓여먹겠다는 게 그리 불만이야?”
“그걸 꼭 굳이 지금……. 아니, 됐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 가득 매운 라면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마다했던 안수호도 그 냄새에 자연스레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지예원의 사정이 궁금한 것과 별개로 일단 공복이긴 했으니.
“엉?”
그러나 3분 뒤, 지예원이 바닥에 내려둔 라면은 1인분뿐이었다.
“엉? 은 무슨. 너 안 먹는다며. 니껀 없어.”
“아니 그래도 기왕 끓이는 김에 같이 끓였으면”
“웃겨 진짜. 그럴 거면 처음부터 먹고 싶다고 말을 하지.”
앞접시용으로 쓰는 냄비 뚜껑 위에 지예원이 라면을 한 젓가락 올렸다. 삐리한 복장으로 탁자도 없이 바닥에 앉은 채 그러고 있는 꼴이 정말 영락없는 백수 같다고. 그렇게 생각한 안수호에게 지예원이 인심 썼다는 듯 젓가락과 냄비 뚜껑을 건넸다.
“옜다. 한 입 줄게. 그래도 손님이니 특별히 가장 맛있다는 첫 한 입으로 주는 거야. 나 착하지?”
“……됐습니다. 라면 하나 가지고 누구 코에 붙인다고. 그냥 예원 씨나 많이 드시죠.”
“아까부터 이랬다가 저랬다가 갈대마냥 갈팡질팡하네. 혹시 그날이야?”
“……예?”
후루룩.
당황한 안수호를 뒤로하고 지예원이 라면을 입에 넣었다.
“와, 진짜 맛있네. 장소가 달라지니까 똑같은 라면도 맛이 달라지는 건가? 그 답답한 안전가옥에 있을 때랑 아주 천지차이네, 천지차이야.”
“…….”
“아주 궁금해 미치겠다는 표정이네. 알겠다, 알겠어. 이제 그만 어떻게 된 건지 이야기해줄게.”
그 말에 안수호가 자세를 바로했다. 눈으로 보이는 그 경청하겠다는 태도에 지예원이 피식 웃었다.
“내가 안전가옥에서 나오게 된 경위를 요약하자면, 나와 그 팀장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야. 나만 거길 떠나고 싶어 한 게 아니라, 그 팀장 역시 날 내보내고 싶어 했거든.”
당초 민채령이 지예원을 한성그룹의 안전가옥에 보호라는 명목으로 구금한 데에는 복잡한 이유가 얽혀 있었다.
첫 번째로는 여명단의 추격으로부터 그녀를 지키기 위함이며, 두 번째로는 경찰의 눈으로부터 그녀의 행방을 숨기기 위함이기도 했고, 세 번째로는 배신자이긴 하나 여전히 범죄자 신분인 그녀를 고정된 장소에 가둬두기 위함이었다.
민채령이 지예원을 위해 그렇게까지 수고를 들인 것은 전적으로 그녀가 가지고 있는 여명단의 정보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녀의 정보는 민채령에게 톡톡히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허나 지예원의 보호로부터 거의 한 달 가까이 시간이 지나고, 또한 이번에 유현호의 신병을 그녀가 확보함에 따라 상황이 변하게 되었다.
우선 첫 번째. 지예원의 가치가 크게 하락했다.
민채령은 이번 사건을 통해 유현호라는 새로운 정보원을 확보했다. 심지어 그는 여명단의 간부, 가지고 있는 정보의 양이나 질은 지예원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지예원과 달리 태도가 협조적이지 않다는 단점이 있긴 하나 민채령에겐 큰 문제가 아니었다. 따라서 민채령의 입장에서 볼 때 지예원의 정보원으로서의 가치는 이전에 비해 크게 하락한 셈이었다.
두 번째. 지예원에 대한 경찰의 추격이 본격화되었다.
당초 유현호가 보낸 투서에 의해 시작된 지예원에 대한 추격은, 여명단 간부 김성호의 증언에 의해 보다 심해졌다. 비록 지예원은 여명단 내에선 지위가 그리 높지 않았으나, 그녀의 대외적 신분이 문제였다. 그린하우스 4학년 재학생이라는 신분이.
국내 최고의 헌터아카데미이자, 비단 헌터뿐 아니라 초인 업계 전체를 선도하는 그린하우스. 그곳의 재학생이, 그것도 그냥 재학생이 아닌 우수한 성적을 보이던 재학생이 여명단 단원이라는 사건은 결코 가벼이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그리고 세 번째. 안전가옥에 유현호를 감금하게 되면서 민채령이 안전가옥의 보안을 일신하고자 마음먹었다.
안전가옥은 속초시 외곽의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다. 당연히 외딴 곳이니만큼 주변은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었다. 그런 곳에 안수호나 채소연 같은 이들이 주기적으로 드나드는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본다면 수상하게 여길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이에 민채령은 안전가옥을 외부로부터 철저히 단절시키고자 마음먹었다. 그녀가 개인적으로 구한 믿을 수 있는 고용인에게 유현호의 관리를 맡기고 안전가옥에 대한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절대로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게끔.
이상 세 가지 이유에 의해 지예원의 존재는 민채령에게 계륵처럼 여겨졌다. 계속해서 데리고 있기에는 메리트보다 리스크가 컸다. 그렇다고 죽이기도 껄끄러웠다. 민채령은 아직 안수호가 지예원과 무슨 관계인지 알아내지 못했으니.
“그런 와중에 내가 그 팀장한테 거래를 제안한 거지. 지금 생각해보면 타이밍이 아주 좋았어.”
제아무리 지예원이 처치곤란이라 한들, 무작정 내보내달라는 말은 민채령이 들어줄 리가 없다. 때문에 지예원은 민채령에게 부탁이 아닌 거래를 제시했다.
“내가 가진 모든 정보를 넘기겠다. 또한 필요하다면 당신의 부하가 되어 당신을 위해 열심히 일해주겠다. 또한 경찰이나 여명단에게 잡히더라도 당신과 관련된 사실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하겠다.”
그 대가로 지예원이 요구한 것은 세 가지였다. 보호라는 명목의 구금으로부터의 해방과, 경찰이나 여명단을 따돌릴 새로운 신분, 그리고 가능하다면 김민아의 수색을 도와줄 것.
서로의 득실을 비교하면 민채령이 손해인 제안이었다. 허나 민채령은 흔쾌히 그 제안을 수락했다. 마침 지예원의 처리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시점이기도 했고, 숙련된 스파이인 그녀를 부하로 부릴 수 있다는 점이 특히 매력적으로 작용했다.
물론 지예원의 말만 믿고 그녀를 풀어줄 정도로 민채령은 허술하지 않았다.
“해방의 대가로 여기, 이쯤에 마이크로칩이 심어졌어.”
지예원이 자기 목덜미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손톱 크기의 희미한 흉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 칩 덕분에 민채령은 24시간 내내 내 위치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어. 그리고 버튼 하나 누르는 걸로 내 신경계를 교란해 몸을 마비시킬 수 있지. 아, 그리고 억지로 빼내려고 하면 폭발해. 펑! 하고.”
그야말로 노예 목줄이나 다름없었으나 지예원으로선 아무래도 좋았다. 답답한 우리 안에서의 삶보다는 설령 목줄을 차더라도 마음껏 바깥을 거닐 수 있는 지금의 삶이 더 좋았으므로.
“그리하여 난 그 답답한 안전가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지. 예지원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얻어서 말이야.”
지예원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냄비 안은 어느새 국물까지 싹싹 긁어먹어 텅 빈 채였다. 허나 라면의 존재 따위 이미 안수호의 머릿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폭발하는 마이크로칩이라고?’
안수호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폭발하는 마이크로칩. 억지로 빼낼 때에 한정한다곤 하나 민채령의 임의로 기폭시킬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터였다.
말하자면 민채령은 지예원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지예원의 생사여탈권을 쥐었다는 건 즉, 안수호 자신의 목숨 역시 그녀의 손에 놓여있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미친…….’
만약 지예원이 민채령을 배신한다면, 설령 배신하지 않더라도 민채령 자신이 그렇게 느낀다면, 혹은 단순 변심에 의해 민채령이 지예원을 죽이고자 마음먹는다면.
민채령은 버튼 하나로 지예원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손쉽고도, 아주 간편하게.
“자기 목숨을 남의 손에 맡기다니, 지금 제정신입니까……?”
“나한텐 그만큼 자유가 절실했으니까.”
“그깟 자유가 뭐라고!”
안수호가 악에 받쳐 외쳤다. 연기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었다. 졸지에 민채령이 자신의 목줄을 쥐게 된 상황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뭐야? 왜 그리 과민반응해?”
허나 사정을 모르는 지예원 입장에선 이해가 되지 않는 반응이었다.
“마이크로칩은 강제로 적출하려고 하지 않는 이상 폭발하지 않아.”
“그걸 어떻게 압니까?! 만약 민채령이 임의로 기폭시킬 수 있다면 어쩔 거냐고요!”
“내가 그 여자한테 쓸모 있는 동안에는 그럴 일은 없겠지. 이래 보여도 난 꽤 유능한 편에 속하거든.”
“민채령이 당장 내일 마음을 달리 먹고 당신을 죽이려 할지 어떻게 압니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쓸모가 다하는 순간 헌신짝 버려지듯 죽임당하는 거라고요!”
“나도 알아. 그러니까 그렇게 되기 전에 내 목적을 이뤄야지.”
“목적?”
그 말에 안수호의 뇌리에 스치는 하나의 단어.
“설마 김민아를 말하는 겁니까?”
지예원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거래 조건 중에 김민아의 수색을 도와달라는 조항도 있던가. 그렇게 생각한 안수호가 질린 얼굴로 입술을 잘근 씹었다.
김민아는 현재 여명단에 잡혀 있는 상황. 그런 그녀를 구해내기 위해선 목숨을 걸어야 할 터.
민채령에게 제 명줄을 쥐어준 것으로도 모자라 친구를 구하기 위해 죽음마저 각오한 그 모습에 안수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도대체 예원 씨는 자기 목숨을 뭐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것은 그녀의 희생에 대한 감동이나 각오에 대한 경의 따위가 아니었다.
“……아까부터 왜 그리 반응이 격해? 내 목숨이니 내 마음대로 쓰겠다는 게 뭐가 문제라고……”
“그건…….”
그것은 답답함이었다. 지예원이 죽으면 자신 역시 죽는다. 그 사실을 밝히지 못한다는 것이 답답했고, 그러한 사실을 모른 채 멋대로 목숨을 걸겠다느니 하는 지예원의 태도가 답답했다.
답답한 마음에 안수호가 애먼 인상만 찌푸렸다. 마음 같아선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고 밝히고 싶었지만 어디 그게 가능한 일인가. 말해봤자 믿어주지도 않을 테고 설령 믿어준다 한들 이 세상의 진실을 밝히는 것으로 인한 파급효과를 그는 도무지 예상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었다.
안수호의 얼굴에 그런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기실 제 목숨만 걱정하는 이기적인 감정이었으나, 사정을 모르는 지예원에게는 그 얼굴에 떠오른 감정이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내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렇게 싫어? 왜?”
지예원이 생각했다. 목숨을 건 것은 자신인데 왜 눈앞의 남자는 마치 자신의 목숨이 걸린 것처럼 저토록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가.
문득 그녀의 뇌리에 며칠 전, 안전가옥에서 나눴던 그와의 대화가 재생되었다.
‘저는 예원 씨를 여기서 내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왜?’
‘예원 씨가 죽지 않았으면 하니까요.’
‘어째서?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이잖아. 내가 죽든 말든 그게 너한테 무슨 상관이라고…….’
지금 그녀가 품은 그 의문을, 며칠 전 그녀는 안수호에게 직접 물어봤었다. 그때 눈앞의 남자가, 안수호가 자신에게 뭐라고 대답했던가.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기는 하지만, 예원 씨가 죽으면 아마 많이 괴로울 것 같습니다.’
이내 떠올린 대답에 지예원의 두 눈이 크게 떨렸다. 떨리는 그 두 눈으로 지예원은 눈앞의 남자를, 안수호를 지긋이 바라봤다.
만난 지 얼마 안 됐다, 라고 하기에는 이미 첫 만남으로부터 한 달여가 지났다. 고작 한 달에 불과했지만 그 밀도는 아주 짙었다. 그녀가 안전가옥에 있는 동안 안수호 역시 거의 그곳에 살다시피 했으니.
그 한 달 동안 지예원은 안수호에게 나름대로의 호감을 품게 되었다. 연정이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호감이었다. 굳이 파고들자면 은인에 대한 감사였다. 안수호는 자신의 목숨을 구했고, 이후 안전가옥에서의 생활에서도 자신의 편의를 최대한 돌봐주었으니.
지예원은 그러한 자신의 정이 일방향적이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안수호 역시 자신에게 정을 품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녀가 죽으면 괴로울 거라고 그녀에게 말했던 거겠지.
‘하지만 어째서?’
지예원이 의문을 품은 건 바로 그 점이었다.
그녀가 안수호에게 호감을 품은 건 이상하지 않다. 그녀는 목숨을 구해진 입장이고, 이후의 생활에서도 그에게 줄곧 도움을 받기만 했으니까.
허나 안수호는 어떤가. 지예원 자신은 안수호에게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김민아와 관련된 일로 두 번이나 그에게 우는 소리를 했다. 그런 굵직한 사건 외에도, 감정 기복이 심했던 그녀의 안전가옥에서의 태도는 그녀의 수발을 드는 안수호에게 심한 스트레스를 주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미운 정이 들 수는 있다. 그래도 오래 마주했으니 어느 정도의 호감이 생길 수야 있을 것이다. 허나 진심으로 목숨을 걱정하고, 그녀의 죽음에 괴로워할 정도의 감정을 품게 되는 건 이상했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나한테 이상하리만치 잘 해줬지.’
모텔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 안수호는 채소연과 달리 여명단인 자신을 말로 설득하고자 했다.
어쩌면 안수호의 무조건적인 호의는 그 첫 만남 때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의문이 짙어질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남자는. 안수호는 왜 자신에게 그런 무조건적인 호의를 보이는가. 그럴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잠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그녀의 뇌리에 문득 다른 가능성이 떠올랐다.
어쩌면 안수호가 그간 자신에게 보인 모습은, 호의에 기반한 게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인 것이 아닐까.
지예원은 천천히 그동안 안수호가 자신에게 보인 모습과 행동들을 되짚어봤다.
첫 만남. 전투태세에 들어선 채소연과 그녀 사이를 가로막으며 전투가 아닌 대화로 풀어가고자 했다.
폐건물에서의 전투. 그녀를 버리고 도망쳐도 됨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여명단의 암살자와 싸워 그녀를 지켰다.
안전가옥에서 깨어났을 때. 내심 자살을 생각하고 있던 그녀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말아달라 부탁했다.
그녀가 안전가옥에서 내보내달라 부탁했을 때. 안수호는 그녀가 죽으면 괴로울 거라고 그녀의 목숨을 염려했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애초에 여명단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고자 처음 마음먹은 것이 안수호, 바로 그였노라고.
그동안은 그 모든 행동이 불가사의한 호의에 기반한 것이라 생각했다.
“저기, 안수호.”
허나 이렇게 천천히 되짚어보니, 그의 행동을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점이 그녀의 눈에 보였다.
“너는 왜 그렇게까지 내 목숨에 집착하는 거야?”
안수호의 행동은 호의라기보다는, 마치 그녀의 목숨을 보전하는 것 그 자체에만 집착하는 것 같다고.
우연찮게 정곡을 찌른 그 의문에 안수호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찰나의 동요였다. 아차 싶은 안수호가 곧바로 표정을 고쳤다. 허나 그 잠깐의 동요를 지예원은 분명하게 포착해냈다. 포착해냈고, 그 반응을 통해 본능적으로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았음을 직감했다.
“왜? 내가 죽으면 너한테 곤란한 일이라도 생겨?”
자신의 목숨이 안수호에게 어떤 의미인지, 시스템과 관련된 사정을 모르는 지예원은 결코 유추할 수 없었다. 유추할 수 없었기에, 그간 안수호가 자신에게 보인 모습을 통해 짐작할 뿐이었다.
‘여명단이니 탈리스만이니 다 떠나서, 그쪽은 아카데미 학생이고 저는 경비대 경비원이잖습니까.’
그런 그녀의 뇌리에 스친, 언젠가 안수호가 그녀에게 했던 한 마디.
‘경비원은 늘 재학생의 안전을 위해 노력하는 법이죠.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우연찮게 떠올린 말이었으나 공교롭게도 이 상황의 핵심을 관통하는 말이었다.
‘에이, 설마.’
설마 고작해야 그런 이유 때문일까. 고작 경비원이라는 직업 하나 때문에 그토록 자신의 목숨에 집착하여 목숨을 걸고 지켜내려고 했겠는가.
지예원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그녀의 입은 머릿속에 떠오른 좀 전의 의문을 그대로 읊고 있었다.
“혹시 내 목숨에 집착하는 게 네 직업 때문이야? 네가 아카데미 경비원이고 내가 아카데미 학생이라서?”
“그건”
말문이 막힌 안수호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다.
“………그런 이유도 없잖아 있긴 하죠.”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얼버무리듯 내뱉은 애매모호한 답.
허나 지예원은 그 대답에 섞인 일말의 진심을 느꼈다. 느꼈기에, 그 순간 지예원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허탈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럼 이젠 내 목숨 따위 신경 쓸 필요 없겠네. 난 이제 그린하우스 학생이 아니니까.”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얼마 전에 제적당했어. 여명단 단원인 게 들켰으니 당연한 일이지.”
그 말에 안수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던 일이었다.
‘지예원이 더 이상 재학생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경비원 스킬의 사망 페널티 조건은 주요 등장인물임과 동시에 아카데미 재학생인 캐릭터의 사망.
즉 아카데미 재학생이 아니게 된 지예원의 죽음은 더 이상 그의 목숨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안수호의 얼굴에 일말의 안도감이 스쳤다.
“와.”
그리고 그 안도감을 지예원은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동안 나한테 이상하리만치 잘해준다 했더니, 설마 그게 다 네가 경비원이기 때문이었어? 직업 정신 하나는 진짜 출중하네.”
퉁명스럽게 내뱉은 지예원은 가슴을 죄어오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가늠하던 그녀가 이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우습게도, 그녀가 느끼는 감정의 정체는 배신감이었다.
지예원은 안수호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 그녀 자신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 호감엔 다소의 연정이 섞여 있었다. 지예원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숨까지 건 안수호의 모습에 그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약간의 연정을 품게 되었다. 사랑이라 부르기엔 한없이 작은 감정이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느끼는 배신감이 바로, 그 연정에 대한 배신감이었다.
자신이 안수호에게 품은 감정만큼은 아니더라도, 안수호 역시 자신을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안수호가 자신의 안위를 그렇게까지 걱정해주는 거라고.
허나 실상은 달랐다. 안수호가 그녀의 목숨을 염려하는 이유는 그가 경비원이기 때문이었다. 고작 경비원이라는 이유로 그렇게까지 그녀를 염려한 것은 이상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간 안수호가 보인 호의가 온전히 그의 감정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 앞에서 그녀가 모르는 자세한 사정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이상하네. 기분이 왜 이러지?’
다만 그 연정을 자각하지 못했던 지예원으로선, 스스로 품은 격한 감정의 원인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안수호가 자신의 목숨을 염려한 이유가 본인의 직업 때문인 게 뭐 어떤가.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소 충격적이긴 해도, 조금 어떨떨하긴 해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지 않느냐고.
두근. 두근. 두근.
허나 억울하다는 듯이 격하게 뛰는 심장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오묘한 감정은 그녀의 이성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지예원은 그러한 이성과 감성의 간극이 이해되지 않았다.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물론 예원 씨의 안위를 걱정하는 게 제가 경비원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간 같이 지내오면서 쌓인 인간적인 정이라든가, 사람으로서 응당 가져야 할 공감 능력 같은”
“무슨 혓바닥이 그렇게 길어? 꼭 뭐 잘못한 사람처럼.”
이해되지 않았기에, 그 불이해로부터 도망치고자 마음에도 없는 말을 우스갯소리랍시고 내뱉었다.
“이를 어쩌나? 우리 경비원 씨가 날 보호해줄 이유가 사라져 버렸네. 이거 설마 이제 볼일 없다면서 날 경찰에 넘겨버리는 거 아니야?”
짓궂은 농담으로 애써 불편한 감정을 외면하려고 했다. 그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본능적인 방어기제였다.
“하, 하하하.”
한편 이 상황이 거북했던 안수호 역시 그 농담에 적극 편승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여명단은 저번에 잔뜩 잡아서 당분간 실적이 부족할 일은 없거든요.”
“하하. 그거 다행이네.”
그 반응에 지예원이 얼떨떨하게 웃었다. 그간 그녀가 짓던 짓궂은 웃음과는 다른, 묘하게 어색한 웃음이었다.
“근데 너 언제까지 나한테 존댓말 쓸 거야? 너 24살이라며? 나보다 한 살 많은데 그냥 말 놓지 그래?”
“하긴. 이제 그린하우스 학생도 아니니 쓸데없는 예의 차릴 필요는 없겠네. 그럼 이제부터 말 놓는다?”
“그래. 말 놓으니까 훨씬 낫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그동안 그 예원 씨, 예원 씨, 하는 그 간드러지는 존댓말 때문에 닭살이 돋을 지경이었거든.”
“간드러지는 존대라니.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서 예의를 차린 거지. 난 너랑 달리 초면부터 반말 쓰는 성격이 아니라서.”
“왜, 그럼 지금이라도 존댓말로 바꿔줘?”
“말 한 번 잘했다. 기왕 그러는 거 아예 호칭도 오빠라고 부르지 그래?”
“오빠는 지랄. 널 그렇게 부를 바에야 차라리 혀 깨물고 말지.”
두 사람 사이에 쉴 새 없이 말이 오갔다. 두 사람 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고자 아무 말이나 지껄인 결과였다.
허나 효과는 확실했다. 지예원의 가슴 속에 자리했던 배신감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차츰 옅어져갔다. 애초에 오래도록 남을 정도로 강렬한 배신감도 아니었다. 그녀가 안수호에게 품은 연정은 고작해야 그 정도였다.
적어도 아직은.
어느새 진정된 감정에 지예원이 피식 웃었다. 조금 전의 어색한 웃음보다는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하여튼 그렇게 됐어. 당분간 23살 기타리스트 예지원으로서 옆집에 살게 됐으니까, 아무쪼록 잘 부탁할게.”
“그래. 이사떡은 언제 돌리냐?”
“보다시피 아무것도 없는 살풍경한 집이라서요. 돌릴 거라곤 어디보자……. 라면 밖에 없네? 이번에야말로 하나 끓여줄까?”
“그래주면 고맙지. 마침 배고프던 참이었거든.”
“기대해도 좋아. 내가 라면 하나는 아주 기똥차게 끓이거든.”
“설마 그 냄비 그대로 쓰는 건 아니지?”
“말하지 않아도 제대로 씻어서 쓸 거니까 잠자코 기다리기나 하셔.”
지예원이 도망치듯 냄비를 들고 싱크대로 향했다. 시끌벅적하던 방 안에 순식간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십년감수했군.’
그 적막 속에서 안수호가 소리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지예원이 자신의 행동을 그런 식으로 의심할 거라곤, 심지어 우연이라곤 해도 정곡을 찌르리라곤 도저히 예상치 못했으니까. 그로서는 심장이 철렁한 경험이었다.
우우우웅.
그때 안수호의 스마트폰이 진동을 울렸다. 화면을 확인해보자 발신번호 표시 제한 상태로 문자가 하나 도착해 있었다.
[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최종 아니라 중간보고입니다. 내일 저희 동아리로 찾아와주세요. ]
발신자는 적혀있지 않았지만, 내용으로 보나 그 어색한 한국어로 보나 문자를 보낸 상대는 일리아나 파우스트임이 명백했다.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엄청 빠르네.’
안수호는 내일 아침에 찾아가겠다고 답장을 보내려다가 발신번호 표시제한이라 답장이 불가능함을 뒤늦게 깨달았다. 낮에 받았던 일리아나의 번호로 답장할까 생각했으나, 굳이 발신번호 표시제한으로 보낸 이유가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내 그만두었다.
“뭐야? 누구한테 문자라도 왔어?”
설거지를 마친 지예원이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냥 있어.”
“누군데 그래. 설마 애인?”
별 생각 없이 농담 삼아 건넨 질문이었다. 지예원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기실 그 질문은 조금 전에 그녀가 느꼈던 배신감이 무의식중에 표출된 결과였다.
“그럴 리가. 애인이고 나발이고 없어. 지금 난 누구랑 마음 놓고 사귈 때가 아니거든.”
“그래?”
때문에 안수호의 대답에 묘한 안도감이 들었을 때, 지예원은 왜 자신이 안도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럼 됐고."
다만, 꿀꿀했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