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44화 (45/266)

〈 44화 〉 043. 강하늘(4)

* * *

생각해보면 민채령이 내게 내린 이번 임무는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경비대 팀장이 일개 학생의 자퇴를 막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나 역시 그 점을 이상하게 여겨 민채령에게 이유를 물었으나, 그녀는 실수의 벌충만을 언급하며 내게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다. 이유가 뭐든 명령이니 따르기만 하면 되겠지. 그렇게 수동적으로 생각했다.

허나 강하늘의 성격이 원작에서 크게 바뀐 것과 더불어 수상한 엑스트라 퀘스트, 거기에 의문의 장학사의 존재까지.

속속들이 밝혀지는 요소요소들을 보면서 나는 이번 일이 결코 수동적인 자세로 임해선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직감했다.

아니, 비단 이번 일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삶에서 이러한 수동적인 태도는 독이 될 것이다. 쾌락천마는 악의를 가진 채 내 주변 상황을 조정하고 있다. 수동적으로 반응만 하며 살아가다간 결국 막다른 곳에 몰리게 되겠지.

‘휘둘리지 마라. 주도적으로 판을 짜는 거다.’

그간 봐왔던 수많은 빙의물 주인공들을 생각해라. 빙의자라면 으레 그렇게 행동해야만 하는 법이지 않은가.

그래. 분명 처음에는 그렇게 행동하고자 했다. 허나 특책과에 들어오고 민채령의 부하가 되면서 나도 모르게 안주했다. 어떻게든 자리 잡은 삶에 안주해버리고 말았다.

그래선 안 되었다. 민채령에게 여러 도움을 받고, 그녀 덕에 내 삶이 안정된 것은 사실이다. 허나 민채령은 비록 내 상관이긴 해도 그녀는 나의 무조건적인 아군이 아니다. 그녀의 속내는 알 수 없으며, 그 이전에 그녀는 나와 달리 소설 속 캐릭터였다. 쾌락천마가 얼마든지 악의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소설 속 캐릭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때늦은 경각심이 뇌리를 잠식했다. 만약 쾌락천마가 민채령을 통해 날 엿먹이려 한다면, 나는 꼼짝없이 놈의 농간에 놀아나게 되겠지.

‘민채령과의 관계를 일신해야 한다. 적어도 지금처럼 무작정 휘둘리는 관계여선 안 돼. 그녀와 대등하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날 지킬 수 있는 패 하나쯤은 보유해야만 한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 임무는 나와 그녀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한 첫 단추가 될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경비대 팀장인 민채령이 강하늘의 자퇴 여부에 연연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그녀가 내게 이런 임무를 내린 것은, 강하늘의 자퇴 번복이 모종의 로직으로 그녀의 이익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겠지.

그 관계를 내게 밝히지 않은 걸 보면 아마 떳떳한 관계는 아니리라. 수상쩍은 장학사의 존재도 그렇고, 이번 일의 이면에는 분명히 내가 모르는 거대한 사정이 존재할 것이다.

게다가 엑스트라 퀘스트에도 분명 그렇게 적혀있지 않았던가. 강하늘의 존재가 내게 큰 도움이 되리라고.

‘어찌되었든 이번 일의 뒷사정을 조사해볼 가치는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한 내가 향한 곳은 그린하우스 재학생들끼리 만든 동아리 중 하나인 ‘추리소설연구회’였다.

전교생 규모 약 3,500명의 그린하우스에는 약 100여개의 동아리가 존재한다. 추리소설연구회 역시 그러한 동아리 중 하나였다.

추리소설연구회. 겉으로는 각종 추리물의 서사나 트릭 구조를 분석하여 실제 범죄 수사 과정에 적용하네 어쩌네 하지만, 그 실상은 추리물 오타쿠의 친목 모임에 불과했다.

허나 추리소설연구회의 진짜 정체는 따로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연구회 회장의 정체가 따로 있는 것이지만.

그리하여, 마침내 추리소설연구회 동아리방 앞에 도착한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이었다.

­벌컥.

“어?”

“엇?”

갑작스레 열린 문과 그 안에서 튀어나온 한 명의 여성.

본 적 없는 안경을 쓰고 있었지만 그 붉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못 알아볼 순 없었다. 워낙 익숙한 얼굴이기도 했고, 그 이전에 당장 오늘 좀 전에 만났던 상대였으니까.

“한겨울 학생?”

“당신은 좀 전에 그…….”

“예. 경비대 소속 안수호입니다.”

내 이름을 들은 한겨울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 수업 시간 아닙니까?”

“교수님 사정으로 휴강됐어요. 덕분에 일정이 붕 떠서, 마침 동아리 모집 기간이기도 하겠다, 관심 있던 동아리들을 쭉 둘러보고 있는 중이에요.”

“추리 소설을 좋아하시나보군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품에 안고 있는 양장본을 지긋이 내려다봤다. 제목은 생소한 외국어라 읽지 못했지만, 동아리방에서 들고 나온 걸 보면 아마 추리소설이겠지.

내 물음에 한겨울이 양장본 제목을 손으로 가리며 얼굴을 살짝 붉혔다.

“……아뇨? 별로 안 좋아하는데요?”

“추리소설을 좋아하니까 추리소설연구회에 온 것 아닙니까?”

“일에 도움도 안 되는 추리소설 따위에 낭비할 시간은 제게 없어요. 여긴 그냥, 소설 속 추리 기법을 실제 수사에 적용할 수 있도록 연구한다는 주제가 흥미로워서 와본 것뿐이에요.”

“그렇습니까.”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나는 흐뭇한 웃음을 지울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난 속일 수 없다. 한겨울이 중증의 추리소설 매니아라는 건 원작에서도 나오는 사실이었으니까.

딱히 부끄러울 것도 없는 취미지만 한겨울에게 있어선 사정이 달랐다. 한성그룹의 후계자로서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 자부하는 그녀에게 있어서, 소설 탐독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낭비였으니.

때문에 그녀는 추리소설을 좋아하면서도 자신의 그러한 취미를 부끄러워하고 숨기고자 했다.

물론 약속된 전개에 따라 그녀의 취미는 주인공에게 들키게 된다. 그리고 주인공은 주인공답게 그녀의 취미를 선뜻 긍정해준다. 원작 초반에 자주 나왔던, 히로인의 호감 스택을 쌓기 위한 이벤트 중 하나였다.

허나 그것은 적어도 앞으로 3달 뒤의 이야기.

이 시점에서 한겨울이 추리소설연구회에 적을 두고 있다는 걸 들킨 건 상정 외의 일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적을 두려고 한 것이겠지. 아직 가입조차 안 한 모양이니.

‘설마 나한테 들킨 거 때문에 동아리에 가입하지 않으려고 하진 않겠지?’

그랬다간 조금 곤란해진다. 추리소설연구회는 명백히 메인스토리에 발을 걸친 요소 중 하나였으니까.

“……왜 그런 눈으로 보시죠? 제가 거짓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이나요?”

한겨울은 부끄러운 기색으로 입술을 잘근 씹고 있었다. 꼭 들켜선 안 될 것을 들킨 듯한 반응. 원작에서 주인공에게 동아리원임을 들켰을 때와 같은 반응이었다.

차이점이라면 그녀가 아직 동아리원이 아니라는 것과, 나는 그녀에게 있어 호감이 있는 남자는커녕 오늘 막 만난 귀찮은 경비대원일 뿐이라는 점.

“오해하지 말아주실래요? 정말 약간의 흥미가 동해서 와본 것뿐이에요. 근데 생각해보니 별로인 것 같네요. 이런 동아리에 시간을 낭비할 바에야 훨씬 도움이 되는 다른 동아리에 들어가는 편이­”

“딱히 이상할 것도 없지 않나요?”

“예?”

그런 내가 이런 말을 해봤자 얼마나 효과가 있겠냐만은, 당장의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나는 주인공의 공을 가로채기로 했다.

“한겨울 학생은 동아리에 시간 낭비니 뭐니 말씀하셨는데, 애초에 동아리라는 게 그러라고 있는 거지 않습니까. 일부를 제외하고 동아리는 거의 다 취미 위주잖아요.”

본래 대학교 동아리란 열에 아홉은 동아리를 빙자한 친목질 술자리 모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건 그린하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 동아리 활동에서까지 건설적인 목표를 잡는 거야 물론 좋은 일입니다만……. 한겨울 학생은 이미 충분히 노력하고 있지 않습니까. 숨 돌릴 시간 정도는 있어도 괜찮잖아요?”

“당신…….”

한겨울이 오묘한 눈빛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성공했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한겨울의 미간이 여지없이 찌푸려졌다.

“그쪽이 뭐라고 절 가르치듯이 주제 넘는 소리를 하는 거죠? 일개 경비원 주제에?”

“……예?”

그 매몰찬 반응에 나도 모르게 멍청하게 반문했다.

“저는 한성그룹 회장의 손녀딸이에요. 그린하우스 수석 입학생이자, 4년 뒤엔 수석졸업생이 될 사람이고, 머지않아 한성그룹의 후계자가 될 사람이라고요. 그런 제 삶을 그쪽 같은 범부의 시선으로 재단하지 말아주실래요?”

“……범부? 제가 말입니까?”

“그 창창한 나이에 학교 수위 노릇이나 하고 있는 사람이 범부가 아니면 뭔가요?”

범부라면 평범한 사람이란 뜻이던가. 그야 난 범부가 맞긴 했다. 맞긴 했으나, 면전에 대고 저렇게 말하니 묘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그, 저는 일반과가 아니라 특책과­”

“알죠. 특책과가 일반과랑 달리 그나마 쓸만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는 건. 근데 그래봤자 업계 10위권 헌터 길드랑 겨우 엇비슷한 수준이잖아요? 그린하우스 재학생 입장에서 보면 그냥저냥 평범한 수준이거든요?”

그러니까 범부, 평범한 보통 사람이지 않느냐.

그렇게 덧붙인 한겨울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저한테 이래라저래라세요? 남한테 훈수질 할 시간에 제 앞길이나 잘 챙기시죠! 별꼴이야 진짜.”

세차게 고개를 돌린 한겨울이 날 지나쳐 반대방향으로 멀어졌다. 나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허. 이게 뭔…….”

주인공 때와 같은 반응을 바란 건 아니었다. 원작에서의 류태현과 지금의 나는 달라도 너무 다르니까. 허나 이렇게까지 매몰차게 반응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어떻게든 수습해보겠다고 했다가 욕만 잔뜩 처먹은 나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포기하기로 했다.

모르겠다, 시발. 나중에 해결하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연구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연구회 부실은 8평 정도의 자그마한 방이었다. 양 옆으로는 책이 한가득 꽂힌 책장이 주욱 이어져 있었다. 가운데에는 푹신한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있었고 한쪽 벽면엔 무언가 잔뜩 적힌 화이트보드와, 작동은 되나 싶은 브라운관 TV와, 그 외 기타 잡다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한교울 씌? 뭔가 놓코 가씬 물건이라도­”

그 가운데에서 추리소설연구회 회장, 일리아나 파우스트였다.

일리아나 파우스트는 흔히 ‘진저’라고 부르는 아일래드인의 특징이 짙게 드러난 영국인 유학생이었다. 한겨울보다 탁한 갈색에 가까운 붉은 머리카락에 짙은 녹색 눈동자. 피부는 병약하리만치 새하얬으나 그 위로 자리한 주근깨가 활달하고 건강한 인상을 주었다.

키는 175 정도로 서양인 여성임을 감안해도 꽤 큰 편이었으며, 늘씬하게 뻗은 팔다리가 꼭 모델 같은 느낌을 주었다. 허나 모델 같은 외모에 비해 패션 센스는 최악에 가까웠다. 새하얀 박스티에 대문짝만한 고딕체로 ‘Death to Herlock Sholmes!(혈록 숌즈에게 죽음을!)' 프린팅된 문구를 보아하니, 그녀는 적어도 뤼팽 시리즈를 좋아하지 않는 건 분명했다. 과연 영국인답다면 영국인다운 취향이었다.

“어, 당씬, 누구입니카?”

일리아나가 묘한 악센트의 한국어로 그렇게 물었다. 어딘가 어리숙한 인상이었으나 그녀의 진짜 모습을 아는 나는 그녀의 작은 손짓 하나하나마저 연기임을 알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한국의 아카데미에 온 유학생이자 중증의 추리소설 매니아. 허나 그 진짜 정체는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해커이자 자칭 탐정이었다. 이른바 아는 사람만 아는 숨은 실력자라는 놈이었다.

그녀의 정체를 아는 고객들은 대부분 그녀의 고향인 영국 사람들. 고로 민채령은 그녀의 정체를 모를 가능성이 컸다.

설령 일리아나와 민채령 사이에 연결이 있다고 해도 일리아나는 고객 간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 주의다. 즉 내가 여기서 그녀에게 의뢰하는 내용이 민채령의 귀에 들어갈 일은 없다.

“저, 누구냐고 물었씁니다. 대답 부탁합니다.”

“일리아나 파우스트. 당신의 힘을 빌리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녜?”

눈을 동그랗게 뜬 일리아나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책상 위에 늘어져있던 가입희망서를 꺼내들었다.

“동아리 가입 신청입니카? 좋은 선택입니다! 당씬이 추리쏘설을 좋아한다묜! 우리 동아리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있다, 입니다!”

“아뇨. 동아리 가입 문의가 아닙니다. 제 용건은 일리아나 파우스트, 당신 개인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천재 해커이자 유능한 탐정인 당신에게요.”

“에? 천재 해커? 탐정? 무슨 소리입니카?”

일리아나가 무슨 말이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내 그녀가 멋쩍게 웃으며 가입희망서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어, 무슨 말인지 잘 모루겠씁니다. 저희, 추리쏘설연구회지 탐정싸무소 아닙니다. 실제 탐정 NO. 추리쏘설 좋아하는 사람들 모임. 이해했씁니카?”

“잘 알죠. 저도 추리소설 좋아하거든요.”

“오! 역쒸! 그렇다면 이야기하는 겁니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 물론 저는 영국의 자랑! Sherlock Holmes 씨리즈 입니다!”

“셜록은 저도 좋아합니다. 특히 영화나 드라마로 나온 영상물요. 그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건 리처드 감독판 셜록 홈즈고요.”

그 말에 일리아나의 몸이 흠칫 떨렸다.

가장 좋아하는 추리물로 리처드 감독판 셜록 영화를 꼽는 것. 그것이 그녀와 고객들 사이에 공유되는 암호 중 하나였다. 물론 그걸로 끝은 아니다. 단순히 영화 종류만으로는 우연히 겹칠 수도 있는 거니까.

의미심장한 눈을 한 그녀가 내게 물었다.

“오. 쵸큼 의외입니다! 그 영화, 훌륭한 오락영화입니다만, 매니아들 사이에선 평 아주아주 갈리는 것입니다. 혹쒸 어떤 점이 좋았는지 말해주씰 수 있습니카?”

“감독이 골수 셜로키언이라 원작에 대한 색다른 해석이 재미있었죠. 작중 마약중독자로 나온 홈즈 역할에 진짜 마약중독자 출신 배우를 섭외한 점이 블랙코미디 같아서 좋았어요. 분명 인터뷰에서 뭐라고 말했더라? 그래, 분명­”

일리아나가 내 말에 집중하는 가운데, 나는 원작에서 읽었던 암호문을 그대로 읊었다.

“‘홈즈가 즐기는 농도 7%의 코카인은 내게 있어서 너무 맹탕이다.’ 이런 말이었을 거예요.”

“오.”

작게 탄성을 뱉은 일리아나가 책상 아래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철컥, 하고 동아리실 문에서 잠기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창문에 드리워진 블라인드가 자동으로 챠라락 내려갔다.

어느 쪽이든 일개 동아리실에 있을법한 장치가 아니었다. 그걸 선뜻 보였다는 건 내가 말한 암호문이 그녀에게 통했다는 뜻이리라.

“……말씀하신 영화, 셜로키언들 사이에서도 평이 극명하게 갈립니다! 태극권으로 범인을 제압하는 홈즈라니 그게 말이 되는 일입니카? 그래서 많고 많은 셜로키언, 그중 그 영화를 제일 좋아한다 말하는 싸람,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하고 일리아나가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전 그 영화 아주 좋아합니다! 그 쌕다른 설정 재밌습니다. 혹시 영화 보셨습니카?”

“아뇨. 아직요.”

“나중에 시간 나면 한 번 보는 겁니다. 오락적 색채 강하다, 이퀄, 입문용으로는 괜찮은 편이다, 라는 겁니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요.”

“어째 다들 그렇게 말만 하면서 결국 아무도 안 봅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어깨를 으쓱인 일리아나가 배시시 웃었다.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모습이 영락없는 말괄량이 시골 처녀였다.

“잘 찾아왔습니다 고객님! 싸설탐정 겸 해커 겸 현역 여대쌩, 일리아나 파우스트! 만나서 반갑씁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절 찾아왔습니카?”

허나 그 정체는 그녀의 말처럼 사설탐정 겸 전문 해커.

온갖 드리프트를 박아댄 원작 후반부에서도 계속해서 활약하는 주인공의 소중한 정보원, 일리아나 파우스트가 가슴을 쭉 펴보이며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조사해 주었으면 하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사건입니카?”

그 말에 순간 일리아나에게 민채령의 본격적인 뒷조사를 의뢰해볼까 싶었으나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시기상조다.’

일리아나는 뛰어난 탐정이었으나 그녀의 실력이 절정에 오르는 건 몇 년 뒤의 일이었다. 지금의 그녀는 실력이 좋긴 해도 아직 어설픈 구석이 있을 터. 섣불리 민채령의 뒤를 캐는 건 위험했다.

‘굳이 서두를 필요 없지. 일리아나랑은 앞으로도 계속 관계를 유지할 거니까.’

나는 일리아나에게 딱 이번 사건에 대해서만 설명했다. 강하늘이라는 신입생이 갑작스레 잠적하더니 돌연 자퇴하겠다며 나타난 것. 특책과 팀장인 민채령이 그 자퇴를 막으려고 한다는 것. 그리고 의문의 장학사가 강하늘에게 접근하려 했다는 것.

이러한 현재 상황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와, 그 이면에 얽힌 사정을 캐내줬으면 한다. 그렇게 말하자 내 말을 잠자코 듣던 일리아나가 내게 물었다.

“흥미로운 사건입니다! 근데, 고객님께선 이런 정보들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카?”

“제가 이런 사람이라서요.”

나는 군말 없이 내 특책과 대원증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오, 하고 작은 탄성을 뱉었다.

“상사의 뒤를 캐는 부하직원!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기입니다! 꼭 추리소설 도입부 같씁니다! 이제 어둠 속에서 암약하는 그림자 조직이 등장하는 겁니카?!”

“글쎄요. 그걸 알고 싶으니까 당신을 찾아온 거겠죠?”

“좋씁니다! 사건 내용, 아주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저는 자원봉사자 아닙니다. Give and Take. 의뢰에는 그에 합당한 보수가 필요한 법. 이해하셨씁니카?”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보수로 뭘 받는 지도요.”

“그렇다면 이야기 빠릅니다. 제가 받는 보수. 의뢰에 합당한 돈! 혹은 제가 흥미를 가질만한 쌔로운 정보! 당신은 어느 쪽입니카?”

“이걸로 하죠.”

그녀의 눈앞에 특책과 대원증을 흔들어보였다. 그러자 일리아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아시다시피, 그린하우스 경비대 특수대책과는 여타 아카데미 경비대와 달리 지역 경찰과의 수사 연계나 용의자 인도 협정이 체결된, 말하자면 경찰에 준하는 수사조직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일반인은 접근할 수 없는 이런저런 정보를 잔뜩 쥐고 있죠. 당신이 필요한 정보가 있다면 특책과 대원의 권한을 이용해 도와드리겠습니다.”

“흥미로운 제안입니다!”

일리아나가 주먹을 붕붕 휘두르며 기뻐했다. 예상 보다 격한 반응에 오히려 내가 당황할 정도였다.

“특쑤대책과 데이터베이스, 2학년 때 해킹하려고 시도해본 적 있씁니다! 대부분 쉬웠지만, 특정 영역만 쓸데없이 방화벽이 강해써 좌절한 것입니다! 그 부분만 보안담당자가 너무 유능한 겁니다! 정보 빼내기는커녕, 들키지 않으려고 흔적 지우는 데만 고생고생 한 겁니다!”

그 말에 나는 얼추 상황을 이해했다. 특책과 내부에서도 특히 보안이 강력한 부분이라면 아마 민채령과 관련된 부분일 것이다. 그녀의 아래에는 해커와 같은 정보전 담당 부하도 분명히 있을 테니.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 민채령을 상대로 해킹을 시도해놓고 들키지 않을 정도의 실력은 있다는 뜻이다.’

앞서 언급했듯 일리아나의 실력은 아직 성장 도중이었다. 즉 잘만 성장하면 언젠가는 민채령의 아성을 위협할 해커로 자라나는 것도 꿈은 아니었다.

새삼 이런 유능한 인재를 내가 왜 이제야 만나러 왔는지 생각했으나,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동안은 굳이 일리아나를 만나러 올 필요가 없었지.’

그동안에는 내가 따로 무언가에 대해 조사할 필요가 없었다. 어지간한 정보는 민채령이 다 알아서 물어와 줬으니까.

하지만 그 민채령을 더 이상 덮어놓고 믿을 수 없는 이상, 내게도 독자적인 정보원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래서 의뢰는 어떻게 하실 거죠? 받아들여주시는 겁니까?”

“좋습니다! 사건도 흥미롭고, 보수도 만족스럽씁니다! 받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 첫 단추가 원작에서도 활약한 일리아나 파우스트라면 더할나위 없겠지.

“이번 일도, 그리고 앞으로도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배시시 웃는 일리아나에게 악수를 권하며 내가 그렇게 말했다.

***

한편 그 시각. 그린하우스 부지 내 인적이 드문 어느 카페.

구석진 자리에 몸을 숨기듯 앉은 한겨울은 따듯한 아메리카노를 앞에 둔 채 커다란 양장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책의 정체는 조금 전 그녀가 추리소설연구회 회장으로부터 받은 책이었다. 독일어로 쓰인 유명 추리소설. 그녀가 독일어를 포함한 여러 외국어에 능하다는 걸 안 일리아나가 야심차게 추천한 걸작이었다.

그녀의 집에는 단 한 권의 추리소설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나 손윗형제들은 그러한 낭비를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때문에 그녀는 추리소설을 읽기 위해 없는 시간을 쪼개 도서관에 다니곤 했다. 추리소설연구회에 관심을 보인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였다. 부모님도 형제자매도 없는 아카데미 동아리실이라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독서에 빠져있을 수 있을 테니.

그 양장본은 일리아나가 그러한 한겨울의 사정을 배려한 결과였다. 독일어로 된 하드커버 양장본이라면 행여 가족이 보아도 쉽게 추리소설이라 짐작할 수 없을 테니.

평소엔 남들 몰래 동아리실로 와서 번역된 책들을 읽고, 집에선 프랑스어나 독일어 같은 생소한 언어의 원서를 읽는다. 동아리실에 들락날락하는 모습만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는다면 가족에게 그녀의 은밀한 취미가 들킬 염려는 없었다.

‘그래봤자 뭐해. 이미 들켜버렸는데.’

한겨울이 조금 전 마주쳤던 안수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예 자신을 모르는 사람과 마주친 거라면 상관없으나, 안타깝게도 안수호는 그녀의 신분을 알고 있는 자였다.

상식적으로 안수호를 통해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그녀의 가족에게 전해질 확률은 거의 없다. 무시해도 좋을 수준이겠지.

허나 모든 일에 편집증처럼 완벽을 추구하는 한겨울에게 있어선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확률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선 이미 안수호를 통해 가족에게 동아리 건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질 가능성이 수십 가지도 넘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냥, 동아리에 들어가지 말까.’

일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는 사람에게 들킨 이상 가족에게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이지 않을까.

그래. 애초에 동아리 가입부터가 이미 그녀 기준으로는 충분히 위험을 내포한 결정이었다. 언젠가 그녀의 가족에게 들키게 되어 꾸지람을 듣는 것보다는, 차라리 처음부터 가입하지 않는 게 낫지 않은가.

‘그래. 들어가지 않는 게 맞겠지. 그게 맞는 거야.’

마음 편히 추리소설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을 원했다. 좋아하는 소설에 대해 원 없이 이야기를 나눌 친구를 원했다. 그 때문에 추리소설연구회에 들어가려고 결정한 것이었지만, 그녀에겐 스스로의 부끄러운 취미보다 한성그룹 후계자로서의 삶이 더 중요했다.

‘딱히 이상할 것도 없지 않나요?’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안수호의 말이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겨울 학생은 동아리에 시간 낭비니 뭐니 말씀하셨는데, 애초에 동아리라는 게 그러라고 있는 거지 않습니까. 일부를 제외하고 동아리는 거의 다 취미 위주잖아요.’

‘뭐 동아리 활동에서까지 건설적인 목표를 잡는 거야 물론 좋은 일입니다만……. 한겨울 학생은 이미 충분히 노력하고 있지 않습니까. 숨 돌릴 시간 정도는 있어도 괜찮잖아요?’

듣는 순간 열불이 났다. 이쪽의 사정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평범한 사람에게야 그것이 맞는 말일지 몰라도, 한성그룹의 차녀인 그녀에게 있어선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안수호의 말은 평범하게 생각했을 때 곧이곧대로 맞는 말이란 뜻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라도 아주 잠깐 정도는 숨을 돌리는 법이다. 그게 당연했다. 인간은 24시간 내내 쉬지 않고 돌아갈 수 있는 기계가 아니니까.

한겨울은 스스로 그런 기계가 되고자 했다. 기계와도 같은 완벽을 추구하여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마침내 한성그룹 후계자의 자리를 꿰차고자 했다.

허나 그런 자신에게도 아주 잠깐의 휴식은, 자그마한 취미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느냐고.

어쩌면 안수호는 그런 맥락으로 자신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닐까.

문득 든 생각에 가슴 한 켠이 뭉클해졌으나, 한겨울은 이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렇게까지 생각했겠어?’

그냥 생각 없이 내뱉은 훈수에 지나지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한겨울이 다시 지긋이 테이블 위에 놓인 양장본을 내려다보았다.

허나 그 두 눈에는 이전보다 더욱 짙은 고민의 빛이 서려 있었다.

***

마찬가지로 그 시각.

특수대책과 2팀 사무실.

안수호와 헤어져 사무실로 복귀한 채소연은 곧바로 팀장실로 향했다.

그러나.

“어라? 왜 안 열려?”

굳게 잠긴 사무실 문. 힘을 주어 연다면 이깟 잠금장치 따위야 손쉽게 부술 수 있겠으나, 아무리 채소연이라도 ‘잠겨 있는 사무실 문을 억지로 열면 안 된다’ 정도의 상식은 있었다.

“유리 선배? 팀장님 어디 가셨어요?”

“응?”

그 말에 자리에서 업무 중이던 조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이내 상황을 파악하곤 아하, 하고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좀 전에 나가셨어. 외부 출장이라고 하시던데.”

“출장이요? 또 외국으로 나가신 거예요?”

2월에 민채령이 외국으로 나갔던 일을 기억한 채소연이 그렇게 물었다.

아카데미 경비대에 웬 출장이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린하우스 경비대는 국내 유일의 국립헌터아카데미 내 수사조직이라는 점에서 여타 아카데미 경비대와 구별되는 몇몇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걸 꼽자면 바로 경비대가 가진 준 경찰급 수사권한일 것이다. 비록 아카데미 내부 사건에 한한다고는 하나 그린하우스 경비대는 경찰과 동등한 수사권한을 지닌다. 적어도 아카데미 안에서는.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아카데미란 비단 그린하우스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아니. 다른 아카데미로 가셨어. 인천에 있는 아카데미라 하셨는데…….”

그린하우스는 국내 유일의 국립아카데미로서 국내의 여러 아카데미와 업무 제휴를 맺었다. 그중에는 그린하우스 경비대, 특히 특수대책과 대원의 파견과 관한 제휴 조항도 있었다.

이번 민채령의 출장도 그러한 업무 제휴의 일환이었다. 단, 특이할만한 점이 있다면, 이번 일의 경우 상대 아카데미에서 민채령의 출장을 요청한 것이 아닌, 그녀 스스로 해당 아카데미로의 출장을 자진했다는 점이었다.

“다른 아카데미요?”

조유리의 말에 채소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민채령은 자신에게 개인적인 임무를 하달했다. 특책과 정식 임무가 아닌 그녀의 개인 임무. 그 말은 즉 그 임무가 아주 중요한 뜻이라고, 채소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허나 그런 중요한 임무를 내려놓고 정작 자신은 다른 아카데미로 출장을 갔다니. 그것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평소의 민채령이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지예원 사건 당시에야 그녀가 이미 출장을 가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일이고. 그때 단 한 번을 제외하고 민채령은 채소연에게 임무를 내렸을 때 절대로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그럼에도 민채령이 자리를 비웠다. 그렇다면 그 행동의 저의는 무엇인가.

안타깝게도 채소연에겐 그 사정을 추리해낼 판단력이 부족했다. 그 누구보다도 직선적이고 직설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던 그녀는 머리 아프게 고민하는 것보다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팀장님이 왜 그러셨지? 혹시 무슨 일로 출장가신 건지 아세요?”

채소연의 질문에 조유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사정을 모르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글쎄. 무슨 장학재단 관련 일로 가셨다고 들었는데…….”

장학재단이라는 말에 채소연의 눈에 돌연 이채가 떠올랐다.

만약 이 자리에 있던 게 그녀가 아닌 안수호였다면 곧바로 민채령의 출장과 강하늘의 자퇴의 연관성을 짚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강하늘에게 접근한 장학사가 소속된 장학재단으로 민채령이 향했구나, 하고.

허나 안타깝게도, 실로 안타깝게도 채소연에겐 그러한 연관 관계를 추리해낼 사고력이 부족했다.

“장학재단이요?”

흐릿한 기억에 의존해 입에 걸리는 단어를 그렇게 되뇌긴 했으나.

“갑자기 웬 장학재단? 기부라도 하려고 하시나?”

채소연에게 가능한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실로 안타깝지 않을 수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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