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41화 (42/266)

〈 41화 〉 040. 강하늘(1)

* * *

도소영 교수의 연구실 앞에 도착하자 묘한 기대감이 가슴을 뭉클하게 감쌌다.

지금껏 내가 만나왔던 이들은 류태현을 제외하곤 원작에 등장하지 않았던 사람들뿐. 그에 반해 도소영은 원작에서 히로인으로 등장했던 레귤러 캐릭터니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기대감에 부푼 마음으로 문을 두드리자 얼마 뒤에 들려온 차분한 목소리.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양 옆으로 늘어선 각종 서적들로 가득한 책장과, 그 가운데 놓여있는 자그마한 테이블과, 그 옆에서 전기 포트를 든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도소영이 보였다.

밝은 갈색 머리카락에 녹색 눈동자. 웨이브진 머리카락은 차분하게 묶어 한쪽으로 늘어뜨렸으며, 단정하게 차려입은 정장은 마치 피부처럼 착 달라붙어 보기 좋은 맵시를 자랑했다.

그러한 특징들은 원래 세계에서 봤던 일러스트와 일치했으나, 2D로 그려진 일러스트와 실제 그녀의 얼굴은 당연히 차이를 보였다.허나 어째서인지 나는 단번에 그녀가 도소영임을 인지할 수 있었다. 일러스트로만 봤다곤 해도 익숙한 얼굴이라서 그런가,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인데도 묘한 반가움이 느껴졌다.

그런 내 뒤로 뒤늦게 들어온 채소연이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채소연의 외침에도 도소영은 당황하지 않은 채 은은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녀가 자리를 권하듯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가리켰다.

“경비대 분들이시죠? 편하게 앉으세요. 제가 시간이 났으면 어디 카페라도 가서 만나 뵈었을 텐데, 다음 강의까지 준비해야 할 자료가 있어서.”

“아닙니다, 교수님. 교수님께서 시간을 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너무 그렇게 깍듯이 대하실 필요 없어요. 교수라고 해도 이제 겨우 2년차인 조교수인걸요.”

“네! 그럼 편하게 있을게요!”

채소연이 싱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아무리 그녀라도 저 태도는 당황스러웠는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나 곧 그 얼굴에 다시금 온화한 미소가 자리했다.

테이블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녹차가 올려지고, 도소영이 살며시 입을 열었다.

“강하늘 학생에 관해서 듣고 싶다고 하셨죠?”

“예. 저번에 신고해주신 내용으로 대강의 사정은 파악하고 있습니다만, 교수님께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서요.”

“좋아요. 하지만 그 전에 저도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도소영이 녹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제가 경비대에 사건을 접수했을 때야 학생이 연락두절이었으니 그렇다 쳐도, 결국 본인이 멀쩡히 나타나서 자퇴 신청을 했잖아요? 그런데 경비대에선 왜 아직도 그 학생에 대해 조사하려고 하는 거죠?”

본인이 멀쩡히 나타난 이상 사건성은 없는 것 아니냐. 도소영의 그런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틀 전 자퇴서를 제출하기까지 부모를 포함해 그 어떤 주변인과도 연락이 되지 않은 점이나, 뛰어난 성적으로 입학한 학생이 단 하루도 등교하지 않다가 대뜸 자퇴하겠다며 나타난 점 등.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어서요.”

“그 점은 저도 동의해요. 하지만 자퇴하면 강하늘 학생은 더 이상 그린하우스 재학생이 아니에요. 그런데도 경비대가 나서는 이유는 뭐죠?”

“자퇴 신청이 접수되어 절차가 끝나기 전까지는 여전히 아카데미 재학생이니까요.”

“직업정신이 투철하시네요.”

그 말에 내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말은 재학생을 위하느니 뭐니 했지만 어디까지나 허울일 뿐이었다. 민채령이 강하늘의 자퇴에 대해 조사하고 이를 막으려고 하는 진짜 이유는 그런 건전한 이유가 아닐 테니까.

“경비대의 입장은 알겠어요. 그런 이유라면 저 역시 강하늘 학생의 담당 교수로서 최대한 협력해드려야겠군요.”

“협력에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저희 쪽 질문에 대해 답변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얼마든지요.”

“감사합니다. 우선 첫 번째. 강하늘 학생의 자퇴 사유가 구체적으로 뭡니까?”

“구체적이고 자시고도 없어요. 헌터가 될 생각이 전혀 없다고 그러더군요. 본인에겐 가망이 없다며.”

가망이 없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강하늘은 원작에서 한겨울에게 덤볐다가 패배하는 캐릭터였다. 허나 1학년 수석인 한겨울이 워낙 뛰어난 거지 강하늘 역시 객관적으로 보면 결코 약한 초인이 아니었다. 일단은 국내 최고의 아카데미 신입생 중에서도 가장 높은 분반 소속이니, 헌터가 된다면 불세출의 영웅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뛰어난 헌터로 이름을 날릴 수 있을 터.

‘워낙 자존심이나 에고가 센 캐릭터라 본인의 수준에 만족하지 못 한 건가?’

일순 그렇게 생각했으나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강하늘이 자기 실력에 의문을 품고 비관하기 시작한 건 한겨울과의 대련 이후. 적어도 지금 시점의 그녀는 자신의 실력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헌데 한겨울에게 패배하지도 않은 그녀가 왜 가망이 없다며 아카데미를 자퇴하려 하는가.

“혹시 헌터가 아니라 달리 다른 직업을 가지고 싶다고 말하진 않았습니까? 가령 경찰이나 군인, 혹은 민간 보안업체 같은…….”

“전혀요. 오히려 그런 직업을 지망한다면 자퇴할 이유가 전혀 없죠. 자퇴할 바에야 그린하우스에서 제공하는 관련 커리큘럼을 밟는 게 더 이득일 테니까요.”

초인이라고 모두가 괴수를 사냥하는 헌터가 되는 건 아니다. 초인의 뛰어난 신체능력과 초능력에 대한 수요는 헌터 외에도 경찰이나 군인, 소방관 같은 공직은 물론이고 민간업체에도 차고 넘쳐날 정도로 있으니까.

그리고 그린하우스는 헌터아카데미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그러한 다른 진로에 대해서도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제공해주고 있다. 당장 저번 서큐버스 사건의 피해자였던 이영한도 연구원 지망생으로서 관련 커리큘럼을 밟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강하늘이 조금이라도 초인의 능력을 요하는 직업을 가질 계획이라면 굳이 아카데미를 자퇴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는 건 설마…….’

“설마 강하늘 학생은 아예 초인 업계를 떠나려고 하는 게 아닌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런저런 이유로 일반인처럼 살고자 하는 초인이 없는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건 좀 이상하지 않아요?”

지금껏 잠자코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채소연이 입을 열었다.

“실력이 달려서 자퇴하는 학생이야 늘 있었지만 강하늘? 걔는 1분반이라면서요? 딱히 제 실력을 비관할 수준도 아니고, 다른 학생들이 뛰어나서 기가 질렸다기엔 수업 첫날부터 안 나왔다면서요. 그럼 아예 그 전부터 자퇴할 생각이었다는 건데, 그랬으면 애초에 입학 등록을 안 했겠죠. 우리 아카데미 최종 등록은 2월 중순이니까.”

“엉?”

채소연의 조리 있는 의견에 나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뭐. 왜. 뭘 그런 눈으로 봐?”

“아니, 조금 다시 봐서. 너도 생각이란 걸 하긴 하는구나.”

“……칭찬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어. 비꼬는 거야.”

“…….”

채소연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날 째려봤다. 그 시선을 피해 도소영에게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바라본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확실히 그건 좀 이상하네요. 합격 통지 이후부터 최종 등록 기한까진 꽤 여유 시간이 있었을 텐데…….”

“어쩌면 등록 이후부터 학기 시작 사이 기간에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죠.”

“그래봤자 2, 3주밖에 안 되는 기간인 걸요. 그 사이에 마음이 바뀔만한 일이라고 해봐야……. 아!”

도소영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탄성을 뱉었다.

“뭔가 떠오르셨습니까?”

“2월 22일에 입학생 대상 예비 대학이 있었어요. 선배들이 후배한테 학사일정이나 진로 같은 걸 설명해주며 친목을 다지는 자리죠. 필수 참석은 아니라 오지 않은 신입생들도 많았지만, 분명 강하늘 학생은 예비 대학에 참석했었어요.”

도소영이 예비 대학 참석자 명단을 우리에게 보여줬다. 확실히 그 안에는 강하늘이라는 이름 석 자가 분명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예비 대학에서 진로에 관한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겠군요. 혹시 예비 대학 때 강하늘 학생과 대화는 해보셨습니까?”

“아뇨. 하지만 강하늘 학생하고 같은 조였던 학생들이라면 아마 이야기를 나눠봤을 거예요. 예비 대학 프로그램은 조별 활동 위주로 짜여있으니까.”

“혹시 같은 조였던 학생이 누군지 아십니까?”

그 말에 도소영이 스마트폰을 뒤졌다.

“예. 여기 나와 있네요. 강하늘 학생하고 같은 조였던 신입생은 유설, 유진, 앨런 번스타인, 그리고 한겨울 학생이네요.”

‘빙고.’

원작에서 한겨울과 대립했던 강하늘이 예비대학에서 한겨울과 같은 조였다. 그 사실아 과연 공교로운 우연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예비대학 프로그램이 원작에서부터 존재하던 설정이든 아니든, 같은 조였던 두 사람 사이에는 모종의 접점이 있었으리라. 그리고 만약 강하늘이 예비대학을 계기로 자퇴를 마음먹게 되었다면, 그 계기는 한겨울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그렇게 직감했다.

이후 시간이 허락하는 하에 도소영과 질의응답을 가졌으나 이렇다 할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강하늘의 자퇴 원인을 파헤치려면 역시 한겨울을 위시한 같은 조원이었던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있잖아, 안수호. 왜 굳이 이렇게 일을 귀찮게 하는 거야?”

도소영의 연구실을 나서자 채소연이 내게 물었다.

“귀찮게 한다니, 뭐가?”

“이번 일은 그 강하늘이라는 애의 자퇴를 막는 거잖아. 그럼 그냥 직접 찾아가서 자퇴하지 말아달라고 설득하면 안 돼?”

“되겠냐?”

생각이란 게 있는 건지 의심되는 그 의견에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좀 전에는 나름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길래 의외다 싶었는데, 역시 채소연은 채소연이었다.

“이미 자퇴하기로 마음먹은 사람한테 생판 남이 대뜸 찾아가서 자퇴하지 말라고 해도 들일 리가 없잖아. 설득다운 설득을 하려면 적어도 원인이 뭔지 정도는 조사해야겠지.”

“팀장님은 모르신대?”

“어. 모르신다더라.”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알려주지 않은 건지 확실치 않았으나, 적어도 겉으로는 본인도 원인을 모른다고 했었다.

“그럼 이제 어쩌게?”

“같은 조였던 학생들하고도 이야기를 해봐야겠지. 일단 한겨울부터.”

나는 도소영에게서 받은 한겨울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르. 뚝.

­누구시죠?

점잖으면서도 날카로운 목소리에 나는 곧바로 내 소속을 밝혔다.

“그린하우스 경비대 특수대책과 소속 안수호라고 합니다. 한겨울 학생 맞으십니까?”

­네. 제가 한겨울이에요. 그런데 경비대에서 무슨 일로?

“예비대학에서 같은 조였던 강하늘 학생 기억하시죠? 그 학생에 관해서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형사사건인가요?

“예?”

갑작스런 질문에 내가 반사적으로 반문하자 그녀가 다시 한 번 물었다.

­형사사건이냐고요.

“아뇨. 그, 형사사건은 아닙니다.”

­그럼 민사소송인가요?

“아뇨. 민사소송도 아닙니다…….”

­제게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하셨는데, 질문의 대상이 꼭 저여야만 하는 건가요?

“꼭 그런 건 아닙니다. 한겨울 학생을 포함해 예비대학에서 같은 조였던 다른 학생들에게도 질문을­”

­즉, 굳이 저일 필요는 없다는 거죠?

전화기 너머에서 한겨울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럼 다른 학생들에게 물어보시죠. 안타깝게도 저는 꽤 바쁜 몸이라. 제 시간은 꽤 비싸거든요.

­뚝.

그 말을 마지막으로 통화가 끊겼다.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허.”

하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본래 한겨울은 재벌 3세라는 캐릭터성 탓에 다소 안하무인한 구석이 있긴 했으나 이 정도는 아니었을 터. 설마 대놓고 문전박대 당할 줄은 몰랐다.

“……와, 걔 진짜 싸가지 없다. 이름이 뭐라고? 한겨울? 이름값 좀 하네. 아주 말투에서부터 찬바람이 쌩쌩 부는데?”

“…….”

“어쩔 거야? 일단 다른 학생한테 갈 거야?”

“그래도 되지만 되도록이면 한겨울한테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데…….”

원작에서 대립했던 두 사람이 예비대학 같은 조였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설령 우연이라고 해도 제대로 된 검증도 없이 넘어가기엔 뒷맛이 찝찝했다.

“이야길 들어보고 싶어도 어쩌게? 저쪽에서 만나주지 않으면 답이 없는 걸?”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야.”

그렇게 말한 나는 미리 저장해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간의 신호음이 울리고, 이내 전화기 너머에서 상쾌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어, 태현아. 난데.”

­네 형. 무슨 일로 전화 주셨어요?

전화 상대는 류태현이었다. 지난 일주일 간 그와 친해지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한 끝에 우리는 서로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 사실 노력이랄 것도 없었다. 류태현은 원체 사교성이 좋은 녀석이었으니까.

“태현이 너 한겨울 학생이랑 친하지?”

­겨울이요? 친하……지는 않고, 그냥저냥 점심 같이 먹고 오후에 같이 훈련하러 다니는 정도? 근데 왜요?

그게 친한 게 아니면 뭐냐.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꼴에 주인공이라고 여자관계에 한해서만 둔감한 것 보라지.

“부탁 하나만 하자. 일 관련으로 한겨울 학생한테 묻고 싶은 게 몇 가지 있는데, 혹시 자리 좀 마련해줄 수 있어?”

­자리요? 왜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방금 직접 전화했다 거절당했다. 자기는 바쁜 몸이라던데.”

­아하하핫! 하긴, 걔가 요즘 바쁘게 지내긴 해요.

“그래서. 가능하겠냐?”

내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류태현이 이내 흔쾌히 대답했다.

­확답은 못 드리겠지만 일단 한 번 물어볼게요.

“그래, 고맙다.”

확답은 못 한다지만 상관없었다. 류태현의 부탁이라면 한겨울은 결코 거절하지 않을 테니까.

그로부터 정확히 10분 뒤. 류태현으로부터 한겨울과 약속을 잡아냈다는 연락이 도착했다.

역시 주인공이라 그런가, 일처리 하나는 확실한 녀석이었다.

***

오후 3시 정각.

강의와 강의 사이의 1시간짜리 공강을 활용해 류태현과 한겨울, 그리고 나와 채소연의 네 사람은 두 사람의 다음 수업이 있는 강의동 근처 카페에 모였다.

“음료 가져왔어!”

채소연이 커다란 쟁반 째로 우리 네 사람이 마실 음료를 내려두었다. 계산은 채소연이 전부 했다. 선배니 연장자니 뭐니 하며 자기가 사주겠다는데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채소연이 배시시 웃으며 음료를 돌렸다. 내 앞에는 평범한 아메리카노. 류태현은 에스프레소와 설탕/시럽 3봉지씩. 한겨울은 얼음 가득 넣은 아이스티. 그리고 채소연 본인은 쿠키랑 휘핑크림을 잔뜩 얹은 자○칩 프라푸치노였다.

“감사합니다. 채소연 대원님.”

“감사는 무슨! 이런 건 원래 어른이 사는 거니까!”

“그래도 감사한 건 감사한 거죠. 저 같은 자취생한테는 가볍게 마시는 커피 한 잔도 꽤 크게 다가오거든요. 사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의가 바른 친구네! 필요하면 기프티콘 몇 장 보내줄까?”

“아하하하.”

신난 채소연과 멋쩍게 웃는 류태현. 그런 두 사람을 뚱한 표정으로 보던 한겨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기요. 저 시간 별로 없으니까 용건이나 빨리 꺼내주시죠?”

그 말에 일행의 시선이 전부 한겨울에게로 향했다.

나는 한겨울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붉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가까이서 보니 마치 투명한 보석처럼 반짝이는 빛을 머금고 있었다.

복장은 목까지 올라오는 단촐한 니트 한 장뿐이었으나, 원단의 질감이나 마감 상태에서 척 봐도 명품인 것이 눈에 보였다. 괜히 비싸보이려고 온갖 부속이나 브랜드 로고가 박힌 싼티나는 명품이 아닌, 단정한 디자인에서 고급스러움이 은은하게 풍겨오는 진짜배기 명품이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는데도 한겨울에게선 일반인과 다른 아우라가 풍겨왔다. 의도적으로 연출해낸 분위기가 아니었다. 한성 그룹의 후계자로서, 어려서부터 체계적인 엘리트 교육을 받아온 그녀만이 지닐 수 있는 자연스러운 아우라였다.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예의 없게 시리.”

노골적인 반감을 내세우는 한겨울의 태도에 류태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예의요? 지금 이 자리는 제가 시간을 내서 저분들을 만나주고 있는 거잖아요? 예의를 차린다면 오히려 저쪽에서 차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분들이 나이도 더 있으시고 아카데미 직원분들이신데…….”

“그럼 더욱 저쪽에서 예의를 차려야죠. 아카데미 직원이란 게 결국 학생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란 거잖아요. 제 말이 틀렸나요?”

“한겨울 너 진짜­”

“이게 예의를 밥 말아 먹었나!”

류태현의 말을 끊은 채소연이 언짢은 표정으로 그녀를 째려봤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쥐방울만한 1학년 주제에 어디 어른한테 그런 태도를 보여?!”

“쥐방울? 그쪽 눈은 옹이구멍인가요? 제가 쥐방울이면 그쪽은 뭐, 한 벼룩쯤 되시는 것 같은데?”

“뭐?! 벼룩?!”

채소연이 쬐그만하다며 내려다보듯 한겨울이 이죽거리자 채소연이 발끈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이 쪼끄만한 1학년이……!”

“푸흣.쪼끄만한 건 제가 아니라 그쪽이겠죠. 겉으로 보이는 키는 물론이고 성격이나 인품도 아직 덜 자라신 것 같은데. 그리고…….”

한겨울이 게슴츠레 눈을 흘기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자세히 보니 덜 자란 구석이 하나 더 있었네요. 처음 봤을 때 무심코 초등학생인줄 알았다니까요?”

한겨울의 시선이 은연중의 채소연의 가슴팍으로 향했다. 그 시선을 느낀 채소연이 얼굴을 붉히며 노발대발했다.

“야! 나 원래 모습은 이거보다 훨씬 키도 크고 몸매도 너보다 더 쭉쭉빵빵하거든?! 한 번 확인해 볼래?!”

­꾸드득!

다음 순간, 뼈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채소연의 머리에서 붉은 뿔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빡!!!

“악!!!!”

허나 내가 있는 힘껏 그녀의 정수리를 때리자, 반쯤 자라나려던 뿔이 도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고개를 홱 돌린 채소연이 숫제 눈물까지 글썽이며 날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노려봤다.

“왜 때려?!”

“왜 맞았는지 곰곰이 생각해봐라. 곰곰이 생각해보고, 그래도 이유를 모르겠거든 그 무지가 곧 이유라고 생각해라.”

“씨잉….”

그 말에 채소연이 정수리를 문지르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입을 삐죽 내민 채 생각에 잠긴 것이, 정말 내 말대로 자신이 맞은 이유에 대해 고찰하는 것 같았다.

“……뭔가요, 이건. 설마 이런 시대착오적인 꽁트나 보여주려고 절 부른 건 아니겠죠?”

그 광경에 한겨울이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한심하다는 듯한 그 시선에 괜히 멋쩍어져서 헛기침을 한 내가 표정을 가다듬고 그녀에게 말했다.

“아뇨. 강하늘 학생에 대해 묻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습니다. 부디 협조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 말에 한겨울의 시선이 류태현에게 향했다. 채소연의 모습을 보며 낄낄대던 류태현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한다. 잠시간의 침묵. 한동안 뚱한 표정으로 류태현을 바라보던 한겨울이 이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10분 안에 끝내세요. 제 시간은 아주 비싸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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