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038. 행운과 불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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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과 불운은 상대적이며 유기적이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일도 누군가에겐 행운이나 불운으로 다가올 수 있으며, 누군가의 행운이 다른 이의 불운을 야기하거나, 혹은 그 반대 역시 가능하다.
이 세상에 오롯이 홀로만 존재하는 건 없는 법이다. 세상은 유기적인 짜임새로 연결되어있다. 사건은 독립적이지 않으며 모든 사건은 다른 사건들의 크고 작은 영향 아래 있다.
가령 지예원 때문에 행운 랭크가 하락한 안수호의 불행 역시 그 영향은 오직 그에게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의 불행이 곧 누군가의 행운이 될 수도 있는 것이며, 반대로 누군가의 불행 또한 야기할 수 있으리라.
그리하여 현재.
안수호가 지예원의 요구를 거절하고, 즉 그의 행운이 1단계 하락하고 10시간이 지난 늦은 밤.
민채령에게 사로잡혀 안전가옥 지하벙커에 갇힌 유현호는 구속의자에 몸이 묶인 채 하염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갇힌 방은 본래 수감시설로 만들어진 곳이 아니었다. 허나 지예원을 노렸던 여명단의 저격수를 이곳에 가두기로 결정했을 때, 민채령은 앞으로의 일을 내다보고 이곳에 대대적인 개수공사를 진행했다.
유현호를 겁박하고 있는 전신구속의자와 천장에 다닥다닥 붙은 적외선카메라들. 각 카메라에는 대괴수용 철갑탄을 사용하는 센트리건이 장비되어 있었으며, 유현호가 지정 위치에서 벗어난 순간 수백 발의 총탄 세례를 퍼붓도록 세팅되어 있었다.
모든 벽과 바닥은 충격흡수패널로 도배되어 있었고, 굳게 닫힌 철문에는 방 왼편에 가득 쌓인 폭발물과 연결된 인계철선이 설치되어 있었다. 저래서야 염동력으로 문을 여는 순간 방 전체가 폭발에 휘말릴 것이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초인용 감옥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1급 지정수배범인 그는 의식을 차리고 몇 시간째 탈출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염동력을 발휘하는 그라 한들 사방에서 빗발치는 총탄과 방 전체를 메우는 폭발을 막아낼 수는 없었으니까.
허나 유현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 삼엄한 경계에도 반드시 틈이 있을 거라며 끊임없이 고개를 돌리며 빈틈을 찾아 헤맸다.
정규 감옥이라면 그런 빈틈 따위 예저녁에 전문가들이 찾아내서 막았겠지만, 그가 갇힌 이곳은 정규 감옥이 아니었으므로.
‘시설에 사용된 장비에 통일성이 없다. 필시 국가나 아카데미 소유의 정규 수감시설은 아니겠지. 지금껏 모습을 드러낸 게 그 팀장 한 명인 걸 보면 그 여자가 개인적으로 소유한 시설인 거겠지.’
천장에 부착된 센트리건이나 바닥의 마감을 보면 여기저기 허술한 부분이 보였다. 아마 본래 수감시설이 아니던 곳을 급하게 개수한 것이리라. 유현호가 그렇게 짐작했다.
'헌데 아무래도 선객이 있었던 모양이군.'
유현호의 눈에 바닥에 미처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이 보였다. 그의 짐작처럼 이 방은 본래 지예원을 습격했던 여명단의 저격수가 갇혀 있던 방이었다. 유현호가 옴으로써 자리를 비켜준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오직 민채령만이 알고 있으리라.
우우우웅.
그 순간, 굳게 닫힌 철문에서 들리기 시작한 구동음.
곧 유현호는 이 시설의 주인이 돌아왔음을 직감했다. 인계철선을 포함한 여러 잠금장치가 해제되고, 이내 열린 문으로 커다란 스포츠백을 짊어진 민채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가 들었는지 거의 사람 크기만한 가방을 보며 유현호가 비릿하게 조소를 흘렸다.
“뭔지는 몰라도 바리바리도 싸들고 왔군. 고문도구라도 되나? 왜, 내가 입을 도통 열지를 않으니 억지로라도 입을 열게 할 생각인가?”
“그걸로 당신이 내게 순순히 협력해준다면 얼마든지.”
“그만 포기해라. 너는 내게서 어떠한 정보도 얻어낼 수 없을 테니까.”
유현호의 두 눈동자에 일순 결연한 빛이 감돌았다.
“고통은 익숙하다. 이 나이를 먹으면서까지 여명단에 적을 두면서 온갖 모진 꼴을 당해봤으니까. 네가 어떤 고문을 해온다 한들 내 입을 열게 할 수는 없을 거다.”
“요즘 시대에 물리적 고문은 하책이지. 마음을 읽는 초능력자가 버젓이 존재하는 세상이잖아? 굳이 피곤하게 고문을 왜 하겠어?”
“끌끌끌. 허세로군. 나라에 단 셋밖에 없는 독심 능력자를 네가 어떻게 여기 데려온다는 말이냐.”
한쪽 팔을 잃은 채 잡혀있음에도 불구하고 유현호는 시종일관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 태도가 퍽 뜻밖이라 민채령이 눈썹을 치뜨며 턱짓했다.
“나이가 들어서 노망이 들었나? 잊은 것 같은데 난 국립 아카데미 경비대 소속이야. 그리고 네가 말한 독심능력자 셋 중 여명단 소속인 한 명을 뺀 나머지 둘은 국가 소속이고. 정식으로 요청하면 그들의 도움을 받는 건 손쉬운 일이야.”
“내가 정식으로 체포되었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아니지 않나.”
“뭐?”
유현호가 턱으로 천장에 달린 카메라와 센트리건을 가리켰다.
“감시카메라는 국가시설에서 사용하는 표준규격인데, 연동된 센트리건은 사설 보안업체에서 사용되는 모델이군. 그마저도 전부 같은 모델인 것도 아니야. 아마 급하게 구하느라 통일을 못 한 것이겠지.”
“…….”
“게다가 구석구석 조악한 패널 마감 상태하며, 규격 없이 덕지덕지 설치된 저 잠금장치들까지. 조금만 둘러보면 이곳이 정규 수감시설이 아니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1급 지정수배범인 날 굳이 민간 시설에 감금한 걸 보면, 아무래도 난 정식으로 체포되지 않은 듯 하군. 무슨 목적인지는 몰라도 네가 날 중간에 빼돌린 것일 테지. 안 그런가?”
“70점.”
테이블 위에 스포츠백을 내려두며 민채령이 작게 읊조렸다.
“여기가 정규 수감시설이 아닌 건 맞아. 내가 널 멋대로 빼돌린 것도 맞고. 하지만 내가 이곳에 독심능력자를 데리고 오지 못할 거란 예상은 틀렸어. 외국에 사는 독심능력자와 개인적인 연줄이 있거든.”
“외국이라 한들 그런 희소 능력자는 다 국가에서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 근데 일개 경비대 팀장인 네가 무슨 수로 독심능력자를 동원한다는 거냐?”
“뭘 그리 이상하게 생각해? 일개 사회부적응자 모임도 독심능력자를 보유한 마당에.”
그 말에 유현호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방금 민채령은 그가 속한 여명단을 사회부적응자 모임이라며 깎아내렸다. 평생을 여명단의 이념을 위해 살아온 그로서는 결코 넘겨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설령 독심능력자를 데려온다고 해도 내게서 정보를 얻어낼 순 없을 거다.”
“왜?”
“독심능력자가 내 눈에 보이는 순간 염동력으로 죽일 테니까.”
“내가 그렇게 놔둘 것 같아? 허튼 수작을 부리는 순간 바로 널 죽일 거야.”
“상관없다.”
시원스럽게 대답한 유현호는 제 목숨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이미 살만큼 산 나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따위 옛날에 극복한 지 오래지. 여명단을 위해서라면 이 한 목숨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
“아주 충신 납셨네. 그렇게 목숨이 아깝지 않으면 차라리 조직을 위해서 지금 바로 자살하지 그래? 팔다리가 묶여있어도 염동력을 쓰면 얼마든지 가능하잖아?”
“버리려면 얼마든지 버릴 수 있지만 기왕이면 유용하게 써야하지 않겠나.”
민채령의 명백한 비웃음에도 유현호는 태연하게 되받아쳤다.
“아무리 사방이 꽉 막힌 것 같다고 해도, 살아있는 이상 이곳을 탈출할 수 있을 가능성이 0은 아니지. 네가 날 죽일 생각이 없는 이상 난 끊임없이 발버둥칠거다. 발버둥칠거지만, 앞서 말했듯 조직을 위해 이깟 목숨 정도야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
“독심능력자를 데려올 수 있다면 데려와 봐라. 그 자가 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곧바로 염동력으로 그 자를 죽일 거다.”
“그걸 막기 위해 네가 날 죽인다 해도 상관없다. 기꺼이 죽어주마. 만약 날 죽이지 않고 제압해서 생각을 읽어내려 한다면 주저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
“못 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이 부조리한 사회를 바꾸기 위해 끈질기게 살아남아 발버둥 치면서도, 대의를 위해서라면 그 한 목숨 따위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는 자. 그런 자만이 여명단에서도 간부의 위치에 오를 수 있는 거다. 어중이떠중이 범죄자 놈들하곤, 가슴에 품은 신념과 각오의 무게가 달라도 한참 다르지.”
일장연설을 마친 유현호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서렸다. 그 결연하면서도 자신만만한 태도에서 민채령은 그의 말이 한 치의 허세도 없는 진심임을 직감했다.
직감했으나.
“푸흐.”
민채령은 그 결연한 진심이 우스웠다.
“푸흐흣!”
이쪽이 가진 패를 알지도 못한 채, 마치 달관한 듯 자신을 내려다보는 노인의 태도가 우습기 그지없었다.
“……왜 웃지? 내 말이 농담으로 들리나?”
“아니, 그냥.”
민채령이 즐겁다는 얼굴로 스포츠백 위에 손을 얹었다.
꿈틀.
그러자 경련하듯 짧게 떨리는 가방.
그 모습에 유현호의 얼굴에 일순 불안한 기색이 스쳤다.
“그러니까 네 말은 그거잖아?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결국 수틀리면 죽겠다는 뜻이잖아. 안 그래?”
민채령이 미소 지었다. 본 적 있는 미소. 어제 밤 숲 속에서 그녀가 지었던 바로 그 뱀과 같은 미소였다.
“근데 어쩌나. 죽음으로써 내게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거야말로 큰 오산인데?”
부우우욱.
스포츠백의 지퍼가 열리고 그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팔다리가 잘린 채 가방 안에 담겨있던 박지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
그 내용물을 본 유현호는 순간 할 말을 잊었다.
그의 시선이 떨린다. 명백한 동요의 반응. 늙은이의 여유라며 늘 초연하기만 하던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감출 수 없는 경악과 당혹감만이 그 얼굴에 자리한다.
박지현의 모습은 어젯밤 숲속에서 봤을 때와 비슷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잘려나간 팔다리의 접합부와 이마의 상처가 봉합되어 있다는 것 정도.
꼭 치료라도 한 듯한 모양새였으나 그래봐야 시체에 불과했다. 박지현은 어제, 안수호가 던진 단검에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했으므로.
그런가. 동료의 시체를 보여줘 자신을 동요시킬 심산이로구나. 유현호가 그렇게 짐작했다.
“……으우.”
박지현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기 전까지는.
“……이게, 무슨?”
“자, 눈을 뜨렴. 네 동료가 앞에 있잖니?”
민채령이 박지현의 몸을 세워들었다. 그러자 감겨있던 그 두 눈이 미약하게 뜨여졌다.
“으, 아으?”
갓 자고 일어나 깊게 잠겨 있는 목소리가 그 입에서 새어나온다.
유현호의 시선이 박지현의 전신을 훑었다. 전신이라고 해봐야 두 다리가 잘려나가 상반신밖에 없는 몸이었지만 아무튼,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반쯤 뜨여진 두 눈. 눈빛은 한없이 탁했으나 확실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힘없이 벌어진 입 역시 미약하지만 확실하게 따스한 숨결을 토해내고 있었다.
두 어깨는 그녀가 살아있음을 알리듯 호흡에 따라 얕게 오르락내리락 했고, 드러난 피부에는 분명하게 혈색이 돌고 있었다.
그 요소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유현호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알아차렸으나, 이를 쉽게 받아들이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그럴 수가. 분명 죽었을 터다. 그런데 어떻게…….”
온갖 초능력이 판을 치는 세상이지만 죽은 이를 살릴 수 있는 방법만은 없었다. 그것이 그가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말했잖아. 죽음으로도 내게서 도망칠 수 없을 거라고.”
허나 민채령은 그 상식을 정면에서 부정했다.
“내 밑에는 유능한 부하들이 많거든. 성공 확률이 낮긴 하지만 갓 죽은 시체라면 어떻게든 살려낼 수 있어. 그 과정에서 조금 ‘공작’을 하면 내 말에 고분고분 따르는 꼭두각시로 만들 수도 있고. 얘 같은 경우에는 뇌손상이 너무 심해서 이렇게 백치가 되어버렸지만, 소생은 성공했으니 뇌 기능을 회복시키는 거야 일도 아니지. 그러니…….”
민채령의 시선이 유현호를 훑었다. 마치 먹잇감을 감지하는 뱀의 혓바닥처럼.
“설령 네가 염동력으로 자기 뇌를 곤죽으로 만든다 한들 소용없다는 이야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이럴 일이 가능할 리가…….”
“가능하고 자시고 이렇게 보란 듯이 성공했는데, 그래도 의심하는 거야?”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민채령이었으나, 사실 이번 박지현의 소생은 그녀로서도 아슬아슬한 도박이었다.
본래 사자의 소생 자체가 어지간해선 불가능한 일이다. 갓 죽은 시체에 한정해서, 시체의 상체가 멀쩡하다는 전제 하에 그 성공 확률은 기껏해야 10% 미만. 그마저도 박지현의 경우 뇌 손상을 포함한 기타 손상이 심각했기에 성공 확률은 2%나 겨우 되었을까.
'정말 운이 좋았지.'
박지현의 소생이 성공한 건 순전히 운이 따라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운이 과연 그녀 자신의 운일까.
앞서 말했듯 이 세상은 유기적인 짜임새로 이어져있다. 사건들은 독립적이지 않으며, 모든 사건은 다른 사건들의 크고 작은 영향 아래에 있다.
이날, 지예원 때문에 하락한 행운 랭크의 영향은 안수호 본인이 아닌 민채령에게 향했다. 그에게 직접적인 불행이 닥쳐오는 대신, 민채령에게 뜻밖의 행운이 작용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안수호에 대한 불행을 야기한 것이다.
박지현의 소생이 성공했다는 하나의 사건. 그것은 민채령에겐 행운으로, 안수호에겐 불행으로 작용했다.
비록 불완전한 소생이었으나 어쨌든 살아난 이상 뇌 기능을 치료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만약 뇌 기능을 정상적으로 복구할 수 있다면그녀 역시 민채령에게 있어서 훌륭한 정보원이자 장기말이 되리라. 그렇기에 민채령에게는 행운이었다.
한편 박지현이 되살아난 이상 안수호가 그녀를 죽임으로써 숨기려고 했던 이 세상의 불편한 진실이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할 가능성이 생겼다. 결코 높은 가능성은 아니었으나, 살인멸구로 확실하게 0으로 만들었던 가능성이 다시 생겨났다는 것만으로도 안수호에겐 충분히 불행이었다.
이렇듯 세상일이란 유기적인 짜임새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날 안수호의 불운은 돌고 돌아 민채령의 행운으로, 그리고 그 자신의 불행으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그 행운과 불운이 제3 자인 유현호에게는 과연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
“자, 이제 알겠지? 도망칠 길 따위 없다는 거.”
이지를 상실한 박지현의 몸을 보란 듯이 들어올리는 민채령을 보며 유현호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걸 느꼈다.
고문이라면 버틸 수 있다.
독심능력자를 데려온다 해도 선수를 치면 마음을 읽히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안 된다면, 정말 방법이 없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각오마저 했다.
허나 눈앞의 여자에겐 죽음조차 별다른 장애가 되지 않았다. 애써 부정하고 싶었지만, 보란 듯이 살려낸 박지현의 존재가 차가운 현실을 상기시켜줬다.
“그러니 서로 피곤하게 기 쓰지 말고, 순순히 내게 협력해주라. 응? 부탁할게.”
말로만 부탁이지 거진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좀 전의 결연함을 잃은 유현호의 눈빛이 탁하게 물들었다. 이내 그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안수호의 불운이, 민채령의 행운이 그에게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
사실 그것은 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민채령에게 잡힌 시점에서 이미 그의 운은 다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아무쪼록 신중히 생각하길 바라.”
민채령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방 안에 낮게 울려 퍼졌다.
***
그로부터 일주일 뒤.
저번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겠다. 그 말을 앞세운 민채령의 부름에 안수호는 남들이 다 퇴근한 늦은 오후 홀로 팀장실로 향했다.
박지현을 죽인 실수에 대한 벌충.
민채령이 과연 그 벌충으로 무엇을 요구할지 안수호는 대충 짐작이 갔다. 박지현의 죽음으로 민채령이 잃은 것은 여명단의 정보원이었고, 그 자신 역시 그녀에게 정보원의 역할을 기대 받아 기용되었으니.
안수호는 내심 긴장되는 가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원작 지식 덕에 일반인은 결코 알 수 없는 여러 정보를 손에 쥐고 있는 그였으나, 원작에 나오지 않은 내용은 알 방법이 없었다. 만약 민채령이 원작에 나오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그에게 정보원으로서의 역할을 요구한다면 꽤나 진땀을 빼게 되리라.
허나 이전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박지현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자리에서 죽여야만 했다. 그 생각만은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없었다.
“들어가겠습니다.”
이윽고 그가 팀장실 안으로 들어서자, 어둑한 사무실에서 노을을 등진 채 민채령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째 불릴 때마다 저녁에 불리네.’
저번 서큐버스 사건에 관해 호출받았을 때도 이처럼 노을 진 저녁 시간대였다. 그때도 조명이 꺼진 사무실 안에서 민채령은 노을을 등진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왜 어두운데도 조명을 키지 않는 걸까. 단순히 노을이 좋은 것인가, 아니면 민채령 나름대로의 분위기 연출인 것인가.
시답잖은 생각을 하던 와중 민채령이 입을 열었다.
“안수호. 분명 내게 그랬지. 저번 실수에 대해선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반드시 벌충하겠다고.”
“예. 분명 그렇게 말씀드렸죠.”
“그 말이 진심이었길 바랄게. 이번 일은 꽤 까다로운 일이거든.”
안수호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민채령의 입에서 까다롭다는 말이 나올 정도면 예삿일이 아닐 게 분명했으니까.
과연 민채령은 자신에게 어떤 일을 시키려고 하는가. 안수호의 뇌리에 오만 가지 가능성이 스쳤다. 어떤 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았고, 어떤 건 도저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긴장되는 순간. 서류를 뒤적이던 민채령이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올해 입학한 어느 신입생과 관련된 일이야.”
안수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어떤 신입생의 뒤라도 캐라는 것인가. 아니면 대인 경비임무? 어쩌면 신입생으로 잠입한 여명단의 스파이를 그녀가 알아차린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 원작에서도 둘인가 셋 정도 1학년 신분의 스파이가 있었지, 안수호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 신입생의 분반은 1분반. 마침 류태현이랑 같은 분반이네.”
그 말에 그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류태현이 속한 1분반은 원작에서도 가장 많은 비중으로 다루어진 반이었다. 히로인은 물론이고 주인공의 라이벌이나 이후 대적하게 될 몇몇 빌런마저 속해있는, 온갖 사건의 중심이 되는 곳.
그 1분반과 관련된 일이라면 필시 원작과도 관련된 일일 터. 묘한 기색으로 뜸을 들이는 민채령을 보며 안수호가 주먹을 꽉 쥐었다.
“하여튼 그 1분반에 강하늘이라고 신입생이 한 명 있거든? 근데 걔가 어제 행정처로 이런 서류를 제출했더라고?”
민채령이 안수호에게 한 장의 서류를 건넸다.
자퇴서였다.
“……자퇴서?”
“응. 학기 첫 날에 담당교수가 실종 의심이라며 사건 접수한 학생인데, 어제 대뜸 나타나선 자퇴하겠다고 그랬다네?”
그 말에 안수호의 머릿속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1분반 학생의 자퇴는 원작에 없던 일이었다.
민채령이 말한 담당교수의 사건접수. 그러고 보니 서큐버스 사건에 대해 들었던 날 도소영이 특책과 행정실에 방문했었지, 하고 그가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그 일 역시 마찬가지로 원작에선 없던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하늘이라는 그 학생의 이름.
‘분명 한겨울한테 개겼다가 깨지고 흑화하는 단역이었을 텐데?’
그런 학생이 왜 대뜸 자퇴를 신청하는가. 그런 의문이 들었으나 그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의문이 있었으니.
“그, 이 학생이 자퇴하려고 한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걸 왜 저한테”
“막아.”
“예?”
“강하늘의 자퇴를 막으라고. 어떤 수를 써서든 반드시 막아내. 성공한다면 저번에 네가 저지른 ‘실수’는 그걸로 눈감아줄게.”
“……예?”
전혀 예기치 못한 요구에 안수호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왜? 어떤 일이든 한다며?”
그러거나 말거나, 민채령은 짓궂게 미소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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