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37화 (38/266)

〈 37화 〉 036. 살인멸구(2)

* * *

민채령의 말에 박지현이 힘없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야기……?”

“이야기라기보다는 거래 제안이지. 순순히 투항하고 여명단의 정보를 제공해준다면 목숨을 살려줄게. 어때?”

단도직입적인 그 제안을 들으며 박지현이 민채령을 올려다봤다.

투항한다면 살려주겠다. 그 말은 즉 투항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견 제안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실상은 협박 그 자체였다.

박지현의 몸 상태는 만신창이였다. 저항은커녕 거동조차 불가능한 상태. 고로 그녀에겐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죽기 싫다면 민채령의 제안에 순순히 응해야겠지.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고, 그건 민채령도 동일했다.

단, 박지현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녀의 재생력은 한계에 다다른 상태. 허나 새로운 피를 공급받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떻게든 민채령의 피만 빨 수 있으면 재생에 필요한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으리라.

‘이 여자는 날 전혀 경계하고 있지 않아.’

만약 자신을 경계했다면 엎어지면 이빨이 닿을 거리까지 접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생각은 정확했다. 민채령은 전혀 박지현을 경계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능력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박지현의 상태가 도저히 위협이 안 될 정도로 만신창이인 탓도 있었다.

“……알겠어. 네 제안에 응할게.”

그 방심이 자신의 활로가 되리라. 속으로 진한 미소를 지으며 박지현이 힘없이 그렇게 말했다.

“현명한 판단이야. 조직에 대한 충성이니 신의니 하는 것보다야 자기 목숨이 소중한 법이지. 안 그래?”

“그래. 그러니 이 상처부터 좀 치료해줄 수 있겠어? 보다시피 이런 상태라, 나 혼자선 응급처치도 불가능하거든.”

“지금 보니 부상이 참 심각하네. 용케도 이런 부상으로 안 죽었어.”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린 민채령이 겉옷을 벗어 박지현에게 두르려고 했다. 효과는 별로 없겠지만 지혈이라도 해줄 심산이었다.

그렇게 민채령이 박지현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간 순간.

‘……지금이다!’

허리의 반동을 이용해 몸을 튕긴 박지현이 민채령의 쇄골에 이빨을 꽂았다.

­콰득!

민채령의 몸이 흠칫 떨렸다. 불시의 일격. 방심하고 있던 그녀로선 미처 반응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어리석은 여자. 그렇게 생각하며 박지현이 있는 힘껏 피를 빨았다. 진한 혈액이 그녀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민채령의 피는 박지현에게 있어 극상의 진미였다. 박지현은 강한 초인의 피일수록 보다 맛있게 느꼈다. 헌데 민채령의 피는 지금껏 그녀가 마셔본 그 어떤 피보다도 농후한 맛을 자랑했다.

한 모금 목구멍으로 넘길 때마다 가히 전율이 일어나는 맛. 박지현은 반쯤 이성을 놓은 채 맹목적으로 피를 빨았다. 그녀의 몸에 새겨진 수많은 상처가 빠르게 재생하기 시작했다.

이 속도라면 완치도 불가능하진 않겠다며 박지현이 미소 지었다. 꼼짝없이 죽을 상황이었는데 이 무슨 행운이란 말인가.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의 입에서 옅은 웃음이 연신 흘러나왔다.

“어머.”

그때 그 옆에서 흘러나온 탄성 한 마디.

“서큐버스인줄 알았는데 뱀파이어였어? 조금 의외네?”

민채령의 손길이 부드럽게 박지현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박지현이 놀란 표정으로 눈을 돌렸다.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쯤 그녀는 흡혈에 의한 쾌감과 피로감에 인사불성이어야 할 터. 헌데 민채령은 또렷한 눈빛으로 박지현을 흘겨보고 있었다.

그 입가에 일순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급하게 먹으면 배탈 날걸?”

“……뭐?”

박지현이 무심코 반문한 순간.

­푸욱!

거대한 붉은 칼날이 그녀의 등을 뚫고 튀어나왔다.

“커헉……!”

박지현이 놀란 눈으로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으나 그곳엔 응당 있어야 할 칼자루가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자신의 몸을 관통한 칼날이 체내에서 튀어나온 것임을 그녀가 알아차렸다.

붉게 물든 칼날에선 익숙한 피 냄새가 났다. 그녀 자신의 피 냄새가 아닌, 조금 전까지 마시던 민채령의 피 냄새가.

‘설마 내가 마신 혈액인가?’

자신의 혈액을 조종하는 초능력. 일순 그런 가능성이 뇌리를 스쳤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

허나 그럴 리가 없었다. 박지현은 민채령의 초능력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의 능력은 결코 혈액 조종 같은 능력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붉은 칼날은 도대체 무엇인가.

뇌리를 잠식하는 의문에 굳어있던 그때, 박지현의 목을 민채령이 우악스럽게 틀어쥐었다.

“크윽?!”

“내가 분명 말했지? 순순히 투항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민채령은 여전히 웃고 있는 채였다. 허나 박지현은 그 표정을 웃음이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세상천지 어디에 저리도 차갑고 소름끼치는 웃음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봐? 아니면 좀 더 자기 처지를 알려줘야 하나?”

박지현이 물었던 상처에서 붉은 피가 소용돌이치며 솟구쳤다. 이내 날카로운 칼날 모양으로 벼려진 혈액이 천천히 그녀의 미간을 향해 다가갔다.

“대답해봐.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흐, 흐으!”

박지현이 신음하며 물러서려 했다. 허나 목을 틀어쥔 힘이 어찌나 강한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요지부동이었다.

“대답해보라니까?”

당장이라도 자신의 머리를 꿰뚫을 것 같은 흉흉한 칼날에 박지현의 의지가 꺾이려던 순간.

­쐐애애액!!

새된 파공성을 울리며 날아온 창날에 민채령이 박지현을 내던지며 크게 뒤로 물러섰다.

“어?”

박지현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목표를 잃고 허공을 질주하던 창이 휘리릭 회전하더니 돌연 반대방향으로 되돌아갔다.

­턱!

이내 나무 그늘에서 모습을 드러낸 노인이 그 창을 낚아챘다. 익숙한 얼굴에 익숙한 무기. 박지현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현호 할아버지……?”

유현호. 박지현과 마찬가지로 여명단 강원도 지부의 간부로 있는 인물.

얼굴에 주름이 성성한 노인이 기다란 창을 늘어뜨린 채 천천히 걸어 나왔다.

“조금 늦긴 했다만 상황이 꽤 심각하군. 성학이 놈보다 네 쪽이 더 급해보여서 왔다만, 하필이면 상대가 저 여자라니…….”

이번 습격에서 본래 그의 역할은 경비대나 경찰의 증원을 막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먼 곳에서 전장과 그 주변을 감시하던 와중, 밤하늘을 가르는 안수호의 일격에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감을 직감하여 급하게 지원을 위해 온 것이었다.

“어머. 그쪽도 날 아나보네?”

의외라는 듯 민채령이 말하자 유현호가 끌끌끌 웃었다.

“알다마다. 미리 조사했으니까. 그 금발 경비대원이 속한 팀의 팀장이지 않나.”

“미리 조사했다고? 왜?”

“시치미 떼지 마라. 경비대에서 지예원을, 우리 조직의 배신자를 숨겨주고 있지 않나. 안 그런가?”

“응. 맞아.”

순순히 인정하는 그 모습에 유현호가 짐짓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전혀 숨기려고 하지 않는군.”

“딱히 상관없을 것 같아서. 어차피 너희 둘 다 여기서 살아서 도망치진 못할 테니까.”

“도망친다고? 내가?”

유현호가 창을 허공에 던졌다. 그러자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라도 있는 것처럼 창이 허공에 고정되었다.

“고작 경비대 팀장 주제에 오만하기 짝이 없군.”

다음 순간, 허공에 떠오른 창이 맹렬한 기세로 민채령에게 쇄도했다.

­캉!

새된 울림을 내며 허공에서 불똥이 튀었다. 어느새 민채령 앞에 출현한 반투명한 방어막을 보며 유현호가 입맛을 다셨다.

“그게 그 소문이 자자한 절대방어인가.”

절대방어. 그것이 대외적으로 알려진 민채령의 초능력이었다.

방어 계열 능력 중에서는 국내에서 따라올 자가 없는 명실상부 최강의 방어 능력. 소문에 따르면 용의 숨결조차 막아낼 수 있다고 하던가.

그 실물을 직접 눈으로 본 유현호는 흥미롭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그래. 흥미로움. 딱 거기까지였다.

“창과 방패의 싸움이라. 흥미가 동하긴 한다만 안타깝게도 여흥을 즐길 때는 아닌 것 같군.”

유현호가 느릿하게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콰득!

“읏!”

다음 순간, 민채령의 목에 진한 손자국이 새겨졌다.

그녀의 몸이 서서히 허공으로 떠오른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목을 졸리는 모양새.

“최강의 방패니 뭐니 소문이 자자하다만, 그래봐야 결국 방패에 불과하지.봐라, 제아무리 방패가 단단하다 한들 보이지 않는 염동력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방패란 결국 형체가 있는 것을 막기 위한 수단.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 형태도, 질량도 존재하지 않는 유현호의 염동력을 막을 순 없었다.

­꾸우우욱.

그의 염동력이 민채령의 목을 꽈악 죄었다. 허나 민채령의 표정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처럼.

그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오싹함을 느낀 박지현이 크게 외쳤다.

“얼른 죽여 할아버지! 저 여자 다른 능력을 숨기고 있어!”

“다른 능력……?”

다른 능력이라, 어디서 탈리스만이라도 구해 정착시켰단 말인가.

일순 관심을 보인 유현호였으나 곧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굳이 알아볼 필요는 없겠지.”

­우두둑!

그가 주먹을 쥐자 민채령의 목뼈가 힘없이 꺾였다.

유현호가 염동력을 거두고 민채령의 몸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즉사였다.

‘……이렇게 싱겁게 끝난다고?’

너무나도 싱거운 결말에 박지현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허나 죽은 건 죽은 거였다. 직접 손을 쓴 유현호가 그 사실을 보증했다.

“목뼈를 분질렀다. 제아무리 초인이라 한들 저 상태로 살아있을 수는 없겠지.”

자, 봐라. 그렇게 말하며 유현호가 창으로 민채령의 목을 잘랐다. 손쉽게 잘린 목이 새빨간 피를 흩뿌리며 데구르르 굴러갔다.

“하. 하아.”

그제야 박지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감이 풀린 탓일까, 뒤늦게 전신의 모공에서 식은땀이 진하게 새어나왔다.

“크윽!”

그 순간 뒤늦게 엄습해오는 격통에 그녀가 신음하자 유현호가 걱정스로운 눈치로 물었다.

“……호되게도 당했군. 회복은 가능하겠나?”

“마실 피만 있으면 어떻게든…….”

“마침 잘 됐군. 저기 갓 죽어 따끈따끈한 시체가 있으니까.”

유현호가 염동력으로 박지현의 몸을 허공에 띄웠다.

“저 시체의 피를 마시고 회복에 전념해라. 나는 그 사이 성학이 놈한테 가세하러 갈 테니까­”

“누구 마음대로?”

그 순간.

들려선 안 될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귓가를 맴돌았다.

박지현과 유현호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다음 순간, 약속이라도 한듯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숲의 나무 그늘, 짙게 펼쳐진 어둠 속에서 정장 차림의 여성이 슬쩍 몸을 내밀었다.

“말도 안 돼…….”

유현호의 힘없는 중얼거림이 허공에 흩어졌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눈앞의 여성을 바라봤다.

허리까지 늘어진 긴 생머리에 육감적인 몸매.

초승달처럼 가늘게 휜 눈매와 입가에 그려진 진한 미소.

그 모습은 조금 전 자신이 죽였을 터인 여성과 완전하게 동일했다.

“이게 무슨…….”

분명히 죽였을 터인 민채령이 살아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민채령은 조금 전, 자신이 확실하게 죽였다. 의심의 여지도 없는 즉사였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모습을 드러낸 민채령은 조금 전 잘려나간 자신의 머리를 품에 안아든 채였다.

“누구한테 가세한다느니, 회복에 전념하라느니. 누가 그렇게 하게 놔둔대? 내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데?”

태연하게 말을 건네는 민채령을 보며 유현호가 몸을 떨었다.

환각인가. 순간 그렇게 생각했으나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제아무리 환각이라 한들 그의 감각을 속일 순 없었다. 염동력으로 민채령의 목을 틀어쥐었을 때, 그 감촉은 분명 살아있는 생명체의 감촉이었다.

생명의 감촉이었고, 그 생명을 꺼뜨리는 감각까지 확실하게 느꼈다.

민채령은 자신이 죽였다. 확신에 찬 판단이었다. 그 증거로 민채령의 목 없는 시신은 지금도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민채령이 살아있는 것 또한 사실.

도무지 그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위험하다.’

80년을 살아온 그의 직감이 일제히 경종을 울렸다. 이 상황은 위험하다. 얼른 몸을 피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꾸드득.

일순, 민채령의 그림자가 기괴하게 휘었다.

“뭣?!”

다음 순간, 그녀의 그림자에서 시뻘건 촉수가 튀어나왔다.

­콰직!

살이 짓이겨지는 소리가 숲에 울려 퍼졌다.

가까스로 몸을 피한 유현호가 그 촉수를 바라봤다. 촉수의 목표는 애초부터 그나 박지현이 아니었다. 그들의 뒤편에 쓰러져있던 민채령의 시체였다. 마치 맛있는 먹이를 탐하듯 촉수가 게걸스레 시체를 휘감았다.

­휘리리릭!

휘감은 시체와 함께 촉수가 순식간에 그림자 속으로 다시 빨려 들어갔다. 직후 민채령이 품에 안아 들었던 자신의 머리를 그림자 위로 떨어뜨리자, 그림자가 호수의 표면처럼 파문을 일으키며 그 머리를 집어삼켰다.

기괴한 광경이었고,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 광경 앞에 두 사람은 할 말을 잊었다. 그 자리에서 태연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오직 민채령뿐이었다.

“무기로 쓰는 창. 거기에 염동력을 쓰는 늙은 노인이라. 누구인지 대충 알 것 같네.1급 지정수배범인 유현호지? 꽤 거물이네. 아마 여명단 안에서의 지위도 꽤 높겠지?”

그러므로 네게도 제안하겠다.

그렇게 덧붙인 민채령이 싱긋 웃어보였다.

“순순히 투항하지 않을래? 그럼 목숨은 살려줄게.”

박지현에게 했던 것과 같은 제안을 빙자한 협박. 허나 유현호의 신경은 전혀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정신은 오로지 조금 전 일어난 사태에 팔려있었다.

‘민채령의 초능력은 절대방어였을 터. 그 증거로 저 여자는 내 창을 자신의 초능력으로 막아냈다. 헌데 그렇다면 방금 저 여자가 선보인 다른 능력들은 뭐지? 기괴한 촉수에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한 사람이 두 개도 아니고 초능력을 세 개나 보유하고 있다고?’

한 명의 초인이 보유한 초능력은 기본적으로 1개. 운 좋게 탈리스만을 얻어 정착에 성공했다면 2개의 능력을 지니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었다.

허나 3개부터는 확실하게 규격 외였다. 하물며 민채령이 보유한 초능력이 3개뿐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3개가 가능하다면 4개도, 혹은 그 이상도 가능할 테니까.

“……투항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그의 직감이 말했다. 절대로 그 제안에 응하면 안 된다고.

저 정체모를 여자에게 목숨을 맡겼다간 어떤 꼴을 당할지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았다. 여명단 간부인 그들은 체포되는 순간 사형이 확정이었다. 허나 저 여자에게 잡혔다간 죽음보다 더한 꼴을 보게 되리라. 유현호가 본능적으로 그렇게 직감했다.

“그래. 쓸데없는 저항은 하지 마. 어차피 너희는 날 못 이기니까.”

“확실히 그건 그럴 것 같군.”

복수의 초능력을 지닌데다가 죽어서도 부활하는 괴물을 상대하는 법 따위, 유현호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헌데 그거 아는가? 불리한 상황에서의 도주 능력은 여명단원의 기본 소양이라네.”

­투화아아악!!!

다음 순간, 유현호의 염동력에 그들이 서있던 지면이 뒤집어지며 엄청난 양의 흙먼지가 비상했다.

­콰아앙!!

직후 박지현을 안아든 유현호가 곧바로 허공을 향해 날아올랐다. 염동력에 휩싸인 두 사람의 몸이 민채령의 반대 방향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꽉 잡아라! 이대로 도망친다!”

“도망친다고? 그럼 성학이 아저씨는?!”

“그놈까지 챙길 시간 없다! 너 하나 챙기는 것만으로도 벅차!”

한시라도 빨리 민채령에게서 멀어져야 한다. 오직 그 일념만으로 유현호는 모든 염동력을 추진력으로 변환해 그녀에게서 도망쳤다.

한편 그 시각. 유현호가 일으킨 흙먼지가 가라앉은 숲속.

전신이 흙투성이가 된 민채령이 불쾌하다는 얼굴로 유현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이내 그녀가 허공을 향해 검지손가락을 겨눈 채 나지막하게 말했다.

“탕.”

­퍼억!

다음 순간, 허공을 날던 유현호의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커헉!”

불시의 기습에 그가 공중에서 중심을 잃고 지면을 굴렀다. 무엇에 당했는지 인식조차 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오른쪽 옆구리에 휑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크으으으윽!”

구멍에서 시뻘건 피가 꿀렁꿀렁 올라왔다. 그가 정신을 집중해 염동력으로 출혈을 막았다.

출혈이 심하긴 했지만 거동에 무리는 없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보는 박지현을 다시 안아든 채 그가 재차 날아오르려고 했다.

­퍽!

허나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이번에는 그의 왼쪽다리가 피를 뿜었다.

‘총인가? 아니, 총성은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원거리에서 적을 공격하는 초능력인가. 그렇게 생각한 그가 민채령이 있는 방향을 향해 거대한 염동력의 벽을 만들어냈다.

­퍼어억!

다음 순간, 붉은 살점 같은 것이 염동력의 벽에 박혔다. 퍼억, 퍼억, 퍼억, 거센 파열음을 내며 자그마한 살점들이 연신 염동력의 벽을 두드렸다.

‘빌어먹을…….’

공격은 막았다. 허나 더 이상 도망칠 방법이 없었다. 제아무리 그라도 지혈과 비행, 방어를 동시에 수행할 수는 없었으니까.

“……다 부질없는 짓인데 참 필사적이셔라.”

어느새 두 사람을 쫓아온 민채령이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유현호가 창을 쏘았다.

­챙!

허나 이번에도 창은 민채령의 방어막에 막혔다. 어떻게든 방어를 뚫어내려는 듯 부들부들 떨리는 창을 보며 한숨을 내쉰 그녀가 검지로 유현호를 가리켰다.

­퍼억!

염동력을 조종하던 유현호의 오른손이 펑 터졌다.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손목 아래가 사라진 오른팔을 그가 움켜쥐었다.

“쓸데없는 저항은 하지 말고 투항하라니까? 본인들의 가치를 몰라서 그런가? 여명단 간부 정도면 나름 섭섭지 않게 대우해줄 수 있는데?”

왜 자신의 제안을 듣지 않는지 이해가 안 된다며, 민채령이 태연자약하게 중얼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을 보며 박지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여명단 간부 생활을 하며 그녀는 온갖 범죄자를 봐왔다.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만도 여기지 않는 극악무도한 악인도 심심찮게 만나봤다. 그런 이들의 앞에 섰을 때도 그녀는 일말의 두려움조차 느끼지 않았다.

허나 민채령의 앞에선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해서? 아니, 그런 간단한 이유가 아니었다.

무어라 말로 정리해서 설명할 순 없지만, 민채령에겐 그녀가 그간 봐왔던 악인들과는 무언가 질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다고. 그렇게 짐작했다.

“왜 그렇게 고민하는지 모르겠네. 뭐가 됐든 죽는 것보다는 나을 텐데.”

아니, 오히려 죽는 게 나을 것이다. 그녀에게 투항했다간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꼴을 겪게 되리라.

박지현과 유현호가 동시에 그렇게 직감했다. 박지현은 뱀파이어 특유의 날카로운 감으로, 유현호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노인의 혜안으로.

“하. 하하.”

그 순간, 박지현이 실성한 듯 웃음을 흘렸다.

“……결국 난 곱게 죽지 못할 악역이라는 거네.”

민채령의 목을 물었을 땐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유현호가 민채령을 죽였을 땐 마침내 살아남았다고 생각했다. 허나 결국 결과는 변함없었다.

여명단이라는 범죄조직의 간부. 그런 ‘설정’을 부여받은 나라는 인간은 결국 비참한 끝이 예정된 캐릭터였다고. 박지현이 그렇게 생각했다.

“악역?”

민채령의 반문에 박지현이 피식 웃었다.

만약 자신이 악역이라면 눈앞의 저 여자는 선역이란 말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이런 싸이코 같은 여자가 선역인 소설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하.”

아마 민채령 역시 악역일 것이다. 그것도 자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거악. 그리고 이 세상이 그 흔한 권선징악을 부르짖는 소설이라면, 언젠가 그녀 역시 자신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으리라.

“아, 아핫! 아하하.”

저 높은 곳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누군가의 안배에 따라.

“아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핫!”

결국 삶이고 나발이고 다 부질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연신 웃음이 나왔다. 미친 듯이 웃어대는 박지현을 민채령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봤다. 박지현 역시 그런 민채령을 바라봤다.

'저 여자는 자신의 운명을 알까.'

이 세상이 소설 속 세상이며 자신은 일개 캐릭터에 불과하다는 걸. 태어났을 때부터 어떤 삶을 살아가고 어떤 죽음에 이르게 될지 모든 게 정해져있으며, 아무리 발버둥친다 한들 그 안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아마도 모를 것이다. 차마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박지현이 이내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 사실 우리는…….”

­퍽!

직후, 어디선가 날아온 단검이 박지현의 미간을 꿰뚫었다.

주르륵, 붉은 피가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박지현의 눈동자가 생기를 잃고, 이내 그 몸이 힘없이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민채령이 말없이 그 광경을 바라봤다. 당황한 기색은 없었다. 그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아주 작은 흥미로움과, 약간의 기대감과, 그리고 다소의 불쾌함뿐.

“……이게 무슨 짓이니?”

이내 그녀가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바라봤다.

저만치 떨어진 곳. 안수호가 단검을 던진 자세 그대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응? 안수호. 대답해보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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