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36화 (37/266)

〈 36화 〉 035. 살인멸구(1)

* * *

혼란스럽다. 그 혼란스러운 뇌리에 하나의 의문이 떠오른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그 의문을 시작으로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정리되지 않은 잡념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진창에 박힌 타이어처럼 생각이 끊임없이 제자리서 공회전했다.

‘그래서 내가 지금, 도대체 뭘 본 거지?’

딱딱하게 굳은 머리를 억지로 회전시키며, 나는 조금 전의 일을 되짚었다.

피를 마셨다. 맛없는 피였다. 길가에 널리고 널린 평범하고 맛없는 피. 허나 맛이야 어쨌든, 이빨을 박아 넣은 이상 전투는 이겼다고 생각했다. 내 흡혈에 저항할 수 있는 자는 손에 꼽는다. 내 능력이란, 흡혈귀의 흡혈이란 본디 그런 것이니까.

허나 반격 당했다. 곧바로 안개화로 도망쳤지만 그 안개화마저 뚫렸다. 적이 휘두른 단검은 거짓말처럼 안개로 변한 내 몸을 절개했다. 안개 상태인 난 무적일 터. 그런데 어떻게 날 공격한 거지?

다행히, 내게는 그 이유를 알아낼 방법이 있었다.

나의 능력은 흡혈한 대상의 피를 매개로 그 사람의 기억을 엿볼 수 있다. 내가 피를 빤 순간 그 사람이 머릿속에 떠올린 기억을.

그래, 나는 저 남자의 기억을 들여다봤다. 수많은 장면과, 소리와, 감각과, 무어라 말할 수조차 없을 상념 덩어리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에 흘러들어왔다.

그가 안개화를 어떻게 파훼했는지. 마력이라는 에너지란 무엇인지. 그의 초능력의 정체와, 그의 오른손에 있는 탈리스만과, 그가 그 탈리스만을 얻게 된 경위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기억을 순식간에 엿보았다.

엿보았으나.

“도대체 무슨 소리야……?”

그 기억의 재생이 끝난 순간, 내 뇌리에 남은 건 단 하나의 의문이었다.

“…………이 세상이 소설이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개소리냐고.”

그 모든 기억들의 기저에 깔린 단 하나의 대전제.

이 세상이 ‘초인들의 시대’라는 판타지 소설 속 세상이라는 것.

차마 믿기지 않아 내가 질문하자 남자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마치 들켰다, 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

“……하.”

그 반응에서 나는 내가 본 기억이 진실임을 직감했다.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거짓말이 능한 사람이라 한들 자신의 기억마저 속이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남자의 기억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세상은 소설 속 세상이며, 나는 그 소설에 등장하는 일개 캐릭터라고.

“……아니야. 그럴 리가”

충격적인 진실을 목도한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저으며 내가 본 진실을, 저 남자의 기억을 애써 부정했다.

……그래. 기억이 꼭 100% 진실이란 보장은 없었다.

예를 들어 저 남자가 과대망상증 환자일 수도 있잖은가. 망상이 너무 심해 스스로의 기억마저 조작해버린 거다. 그래, 자기최면이니 뭐니 하는 것. 예전에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었다.

혹은 누군가 저 남자의 기억을 조작했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을 소설로 여기게끔, 자신을 그 소설 속 세상으로 끌려온 바깥세상의 독자로 여기게끔. 그런 최면이나 세뇌를 누군가 저 남자에게 건 것이다. 무슨 이유로 그런 짓을 벌인 건지는 모르지만,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니면 저 남자가 일부러 내게 잘못된 기억을 보여준 걸지도 모른다. 원리는 알 수 없지만 남자는 내 안개화를 파훼했다. 그렇다면 비슷하게 잘못된 기억을 내게 보여줘서……. 그래. 원리는 모르지만 아무튼…….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예를 들어서…….

그 또한 아니더라도 이런 가능성이…….

하다못해 이랬을 확률도…….

오만가지 가능성을 떠올리며 나는 어떻게든 저 남자의 기억이 진실이 아니라고 애써 부정했다.

나도 안다. 내가 예시로 드는 것들이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일들이라는 것을.

허나 제아무리 비현실적인 이야기라 하더라도, 이 세상이 소설이라는 개소리보다는 현실적일 것이다.

……현실적이어야만 했다.

만약 저 기억이 가리키는 진실이 정녕 진실이라면, 그것만큼 끔찍한 일이 또 없을 테니까.

“크윽…….”

상념에 잠겨있던 사이 남자가 몸을 일으켜 자세를 잡았다. 그가 쥔 단검이 붉게 물든 채 형형한 빛을 뿜었다.

‘……그래. 소설 속 세상이니 뭐니 지금은 생각하지 말자. 당장 눈앞의 싸움에 집중하는 거야.’

정신을 좀먹는 상념을 털어내며 나는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캉!

내 손톱과 그의 단검이 교차했다. 샛노란 불똥이 튀기며 금속성의 타격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뭉클.

남자의 단검에 일순 검은 연기가 일렁였다. 그의 초능력. 그렇게 직감한 순간 허리를 크게 뒤로 꺾었다.

­투화악!

검은 직선이 초음속의 속도로 뻗어나갔다. 그 기세에 피부가 파르르 떨렸다. 그것만으로도 방금 그 일격이 견제가 아닌 목숨을 노린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지금껏 저런 공격은 다 안개화로 피했지만, 그가 안개화를 파훼한 이상 섣불리 몸을 안개로 바꿀 수는 없었다. 괜히 피격 면적만 넓혀주는 꼴이니까.

허나 안개화가 뚫렸다 한들 내가 그에게 질 가능성은 없었다.

눈앞의 남자는 미숙했다. 신체능력은 그나마 평균은 되었으나 움직임이 지리멸렬했다. 명백한 초보자의 움직임. 저 재빠른 초능력만 조심하면 근접전에선 따로 경계할 게 없었다.

‘……같은 탈리스만을 쥐고 있으면서도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수도 있구나.’

어제 싸웠던 류태현은 탈리스만의 성능을 100% 끌어내고 있었다. 그렇게밖에 여길 수 없는 강함이었다.

허나 이 남자는 기껏해야 10%는 사용하고 있을지. 그야말로 돼지 목의 진주였다.

‘혹시나 숨겨둔 패가 있을까 싶어 경계했는데, 더 이상 조심할 필요는 없겠어.’

괴물들이 득실거리기로 명성이 자자한 그 특수대책과에도 이런 반푼이는 존재하는 법이구나. 그런 감상을 품으며 나는 남자의 품으로 재빨리 파고들었다.

남자는 반응하지 못했다. 뒤늦게 내게 향하는 단검을 스치며 그의 목을 향해 손톱을 뻗었다.

‘…….’

일순, 다시 한 번 그의 피를 빨까 했으나 곧바로 관뒀다.

두려웠다. 만약 이번에도 같은 결과가, 같은 기억이 보인다면 차마 그 현실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죽어!”

다시금 머릿속을 잠식하려던 상념을 흐트러뜨리며, 나는 있는 힘껏 손톱을 휘둘렀고.

그 순간, 남자의 팔목에 채워진 팔찌가 붉은 빛을 뿜었다.

­까앙!

그의 단검이 내 손톱을 막아냈다. 분명 막을 수 없는 빈틈을 찔렀을 텐데도 불구하고.

‘아티펙트인가!’

아마도 저 팔찌가 가진 효과이리라. 탈리스만으로도 모자라 다른 아티펙트까지 몸에 두르고 있다니. 부족한 무력을 장비로 커버하겠다는 걸까.

“그래봤자야!”

움직임은 빨라졌지만 그뿐. 여전히 동작은 어설프고 전신이 빈틈투성이였다. 신체능력만 믿고 휘두르는 공격 따위 아주 쉽게 피할 수 있었다.

­콰아아앙!!!

그 순간 멀리서 들려온 굉음.

남자로부터 크게 물러나며 나는 굉음이 들린 방향을 바라봤다.

흙먼지가 자욱한 가운데, 성학이 아저씨가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몸을 덮었던 암석은 죄다 산산이 부서져 떨어져나가 있었다.

그 앞에 선 류태현이 가만히 아저씨를 내려다보았다. 류태현 역시 몸이 성하진 않았으나, 아저씨만큼 만신창이는 아니었다.

‘아저씨가 졌다고?’

류태현의 강함은 알고 있었다. 당장 어제 나 자신이 그와 싸워봤으니까. 그는 분명 강했지만 아저씨의 적수가 될 수준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싸웠을 때는 그랬다.

눈앞의 남자와 마찬가지로, 류태현 역시 탈리스만의 힘으로 내 안개화를 파훼했다. 허나 그러고도 다소 밀릴지언정 맞상대는 가능한 수준이었다. 성학이 아저씨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수준.

‘설마, 나랑 싸울 땐 전력이 아니었다고?’

뇌리를 스치는 의문. 허나 그런 의문 따위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결과요, 뭐가 어떻게 되었든 성학이 아저씨가 졌다는 사실이었다.

허나 불리한 사실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끄아아악!”

전장의 반대편. 숲속에 메아리치는 비명소리에 시선을 향하자 습격을 위해 데려왔던 부하 한 명이 배를 부여잡고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저건 또 뭐야?’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습격을 위해 데려온 부하 대부분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나마 서있는 이들도 전원 만신창이인 것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반면 그 한복판에 있는 여성 대원은 태연했다. 몸에 부상이 없는 건 아니지만 표정만은 태연자약했다. 마치 감정이 없는 인형처럼.

‘저 여자 한 명한테 전부 당했다고?’

전투에 돌입하기 전 저 여성 대원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분명 덜덜 떨고 있었다. 척 봐도 유약해 보이는 것이 별 볼일 없겠구나, 그렇게 생각했건만 설마 그게 다 기만이고 위장이었다는 걸까.

‘어떡하지? 일단 성학이 아저씨한테 가세해야 하나? 아니면 저 여자를 먼저­.’

“……야.”

그 순간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

“어딜 그렇게 한눈을 팔고 있냐.”

그 목소리에 뒤늦게 남자의 존재를 떠올렸다. 그래, 아직 싸우고 있는 중이었지. 얼른 이 남자를 처리하고 아저씨한테 가세해야 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한 줄기 푸른 번개가 매섭게 튀어 올랐다.

“어?”

시선을 향한 그곳엔 수십 마리의 검은 뱀이 하늘로 고개를 치켜든 채 흔들거리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뱀이 아니라 연기였다. 저 남자의 초능력으로 만들어낸 검은 연기. 푸른 번개에 휩싸인 검은 연기가 밤하늘을 시커멓게 물들이고 있었다.

‘뭐야, 이건?’

허나 연기라기엔 너무나도 끈적했다. 기체라기엔 확실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는 검은 연기에 순간 등줄기를 따라 거센 오한이 일었다.

저건 위험하다.

저걸 맞아선 안 된다. 막아낼 수 있는 공격이 아니다. 무조건 피해야한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는 연기의 기세에 본능적인 직감이 경종을 울려댔다.

허나 발견이 늦었던 탓일까, 내가 무언가 행동을 취하는 것보다도 남자의 출수가 한 박자 빨랐다.

다음 순간, 밤하늘보다 더욱 짙은 어둠이 날 집어삼켰다.

***

연기가 지나간 자리에 뿌리째 뽑혀나간 나무가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졸지에 벌판으로 변한 숲을 바라보며 안수호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입 안에서 느껴지는 씁쓸한 피 맛.

전투에서 입은 부상에 탈리스만에 의한 반동까지. 안수호의 몸 상태는 빈말로도 좋다 할 수 없었으나, 그는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사방을 훑었다. 점차 그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서리기 시작했다.

‘…………이 세상이 소설이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개소리냐고.’

조금 전 박지현이 반신반의한 태도로 중얼거린 말.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박지현이 이 세상이 소설임을 알아차렸다. 어떻게 알아차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일개 캐릭터에 불과한 그녀가 멋도 모르고 이 세상의 진실을 알아차렸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일어나선 안 될 일이기도 했다. 그러한 불안 요소를 그는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

세상의 진실을 깨달은 박지현의 존재가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박지현을 빌미로 천사나 쾌락천마가 개입해올 가능성을 생각하면 결코 그녀를 살려둘 순 없었다.

곧 안수호는 박지현을 이 자리에서 죽여야만 한다고 판단했다.

박지현의 신경이 다른 곳으로 향한 순간, 안수호는 그녀의 빈틈을 노리고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일격을 내질렀다. 그 일격은 확실하게 박지현에게 치명상을 안겨주었다.

안겨주었으나.

“……망할.”

어디까지나 치명상을 입혔을 뿐. 그녀의 목숨을 앗아가는 데까진 이르지 못했다.

“도망쳤나.”

바닥에 흩뿌려진 커다란 핏자국. 허나 응당 보여야 할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수호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

한편 그 시각. 안수호로부터 약 삼백 미터 떨어진 숲속.

“아, 크으, 윽­!”

만신창이가 된 박지현이 나무 둥치에 기댄 채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박지현의 상태는 심각했다. 왼팔과 두 다리는 잘려나갔는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으며, 전신에 날카롭게 베인 자상이 가득했다. 특히 깊게 베인 옆구리에서는 시뻘건 창자가 요란하게 흘러나와 있었다. 전신의 뼈는 가루처럼 잘게 부서졌으며 양 고막은 파열, 왼쪽 안구 역시 터져나가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안수호는 박지현이 도망쳤다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저 운 좋게 폭풍에 휘말려 멀리 날아간 것에 불과했다. 제아무리 박지현이라 한들 이런 상처를 입고도 멀쩡히 움직일 수는 없었다.

평범한 초인이었다면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부상. 박지현이 가까스로 목숨이나마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녀의 재생능력 덕이었다.

­꾸득. 꾸드드득.

상처 사이에서 새 살이 돋아나며 서서히 재생이 이루어지곤 있었으나 그 속도는 아주 느렸다. 상처가 한 군데가 아닌 전신에 걸쳐 퍼져 있기 때문이었다.

‘……완치까지는 대략 30분. 거동이 가능한 정도로 회복하는 데에도 15분은 걸리겠어.’

15분. 그 안에 안수호가 그녀를 찾아내면 그녀는 죽게 되리라. 움직일 수조차 없는 그녀로서는 그저 안수호가 자신을 찾지 못하길 간절히 빌 수밖에 없었다.

‘빌어? 누구한테?’

문득 든 생각에 그녀가 피식 웃었다.

만약 정말 이 세상이 소설 속 세상이고 자신이 소설 속 캐릭터에 불과하다면, 자신의 운명은 결국 소설을 쓴 작가에게 달려있다는 것 아닌가.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탈리스만의 정착 확률은 통상 1만분의 1인데, 상식적으로 한 명이면 몰라도 두 명이나 정착에 성공할 리가 없잖아.’

우연이라 치부하기에도 지나치게 낮은 확률. 허나 그것이 이곳보다 높은 차원에 존재하는 작가의 안배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이 세상이 소설이라면 그 또한 우연이 아닌 필연일 테니까.

‘그럼 내가 폭풍에 휘말려 여기까지 날아온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걸까.’

그렇다면 희망이 있었다. 만약 작가가 자신을 죽이고자 마음먹었다면 그냥 그 자리에서 죽이면 되는 일 아닌가. 헌데 이렇게 그 남자로부터 자신을 멀리 떨어뜨린 걸 보면 아직 죽을 차례는 아닌 것 같다고. 박지현이 넌지시 그렇게 예상했다.

“하하…….”

그녀의 입에서 힘없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목숨이 경각에 달한 시점에 소설의 전개니 작가의 의도니 하는 것들을 따지는 자신의 꼴이 퍽 우스웠기 때문이다.

“그런 상처를 입고도 웃을 수 있다니, 꽤 강단 있네?”

그 순간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

박지현이 뒤를 돌아보려 했으나 나무 뒤에서 튀어나온 양손이 그녀의 어깨를 꽈악 붙들어 맸다. 팔이 잘려나간 어깨 단면에 새하얀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크윽!”

“여명단 단원이지? 그 상처로 살아있는 걸 보면 간부급인 거 같은데. 혹시 이름 좀 알려줄 수 있니?”

귓가를 간질이는 듯한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박지현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기댄 나무는 별로 두껍지 않았다. 고개를 완전히 돌리면 나무 뒤편에서 자신을 잡고 있는 이의 모습이 보일 터.

“너는……!”

이내 완전히 고개를 돌린 그녀의 얼굴에 일순 경악이 스쳤다.

“네가, 여기 어떻게…….”

“응? 날 알아?”

박지현의 말에 민채령이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내 흐릿한 달빛이 비추는 그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날 안다면 이야기가 빠르지. 우리 잠시 이야기 좀 할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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