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033. 서큐버스 사건(7)
* * *
류태현의 협력을 얻어낸 그날 밤.
경비대 숙소에서 사용할 류태현의 짐을 가지러 가기 전, 나는 잠시 시간을 내어 안전가옥으로 돌아왔다.
저번에 민채령에게 받았던 장비들을 챙기면서 겸사겸사 채소연하고 지예원의 얼굴이나 볼 심산이었다.
“안수호오오오!!!”
안전가옥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채소연이 달려들었다. 반가우면서도 화가 난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어서 와! 고생했어! 밥부터 먹을래? 아니면 목욕 먼저? 아니면….”
“아니면? 뭐?”
“아니면…. 혹시 이 불쌍한 소연이와 임무를 교대해주러 온 거야…?”
“아니, 곧바로 다시 나가봐야 해.”
“테엥…….”
채소연이 고개를 팍 숙인 채 울상을 지었다.
“계속 여기에만 박혀있으니 답답해…. 밖에 나가고 싶어…. 드라이브하고 싶어…. 게임하고 싶어…. 집에 갈래…….”
힘없이 축 늘어진 채소연을 반쯤 질질 끌며 안으로 들어갔다. 지예원은 거실에서 TV를 틀어둔 채 소파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어, 왔어?”
“예. 식사는 하셨습니까?”
“우리야 진즉에 끝냈지. 왜, 아직 밥 못 먹었으면 남은 거라도 빨리 데워줄까?”
“아뇨, 괜찮습니다. 곧바로 나가봐야 해서요.”
“왜? 이 시간에 잔업이라도 있어?”
“그게.”
자연스레 이번 작전에 대해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보안을 요구하는 일…이긴 하지만 지예원에게 말한다 해서 작전 내용이 새어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개인적인 통신마저 철저히 제한당한 채 이 안전가옥에 보호라는 명목으로 갇혀있는 상태니까.
허나 이번 작전 내용은 그녀에게 민감한 정보였다. 정확히는, 작전 수립의 기반이 된 정보가.
‘류태현에게 김민아가 탈리스만을 넘긴 건 2주 전 금요일 밤…. 지예원이 김민아와 연락이 두절되기 전이다.’
즉 그 사실이 김민아가 살아있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저 김민아가 여명단에 잡히기 전 행적이 일부 공개되었을 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지예원은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그 여부를 가늠하며 나는 지예원의 상태를 살폈다.
겉보기는 멀쩡해보였다. 적어도 며칠 전 그 반쯤 멘탈이 나가있던 모습 보다는 훨씬 나았다.
‘…….’
그렇지만 김민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역시 시기상조겠지.
“……야간 경비 일이 있어서요. 여기 두고 간 장비를 챙기러 왔습니다.”
“그래? 고생하네. 집에만 박혀있는 누구 씨랑 달리.”
“야! 나도 나 나름대로 힘들거든!”
“하는 거라곤 가끔 청소하는 거랑 세탁기 돌리는 것밖에 없으면서 힘들기는 무슨.”
“너 지금 말 다해써?!”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뒤로한 채 나는 내 장비들을 챙기러 갔다. 이번 사건에 대해 지예원에게 이야기하는 건……나중에 민채령하고 상담한 뒤에 결정하도록 하자.
‘내가 말하지 않는 이상 지예원이 이번 일에 대해 알게 될 일은 없겠지.’
……무언가 간과한 기분이 잠깐 들었으나, 아마 기분 탓이리라. 이런저런 장비를 챙긴 나는 곧바로 안전가옥을 나섰다.
***
나는 류태현, 그리고 조유리와 함께 류태현의 집으로 향했다. 류태현의 가족에게 사건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마친 뒤, 생활에 필요한 짐을 챙긴 우리 세 사람은 곧바로 다시 아카데미로 향했다.
어두운 밤길. 조유리가 운전하는 SUV가 텅 빈 고가도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조유리는 그 유약하다 못해 소심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운전 실력이 꽤 준수한 편이었다. 처음 탈 때는 살짝 불안했지만 이제는 마음 놓고 그녀의 운전에 몸을 맡긴 상태였다.
“지, 지금, 지금 쯤…!”
허나 운전실력과 별개로 남자를 거북해하는 건 여전했다. 남자 둘과 밀폐된 공간 안에 있어서 그런가, 평소보다 더 떨리는 목소리로 조유리가 말했다.
“지금 쯤. 경찰이랑 태, 태호. 태호…!”
“경찰이랑 태호 선배가 여명단 아지트를 습격했을 거라고요?”
조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슬슬 작전 돌입 타이밍이긴 했다.
지예원에게서 알아낸 아지트가 3곳. 그리고 생포한 저격수로부터 알아낸 아지트가 4곳. 도합 일곱 개의 아지트 중 넷의 정보를 민채령은 경찰에 넘겼다. 나머지 셋은 개인적으로 쓸 곳이 있다나.
그 4개의 아지트를 오늘 밤부터 하룻밤에 한 군데씩 습격할 예정이었다. 범인을 포함한 다른 여명단을 끌어내기 위해서.
이번 작전은 작품 전개적인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컸다.
여명단 아지트에 대한 직접 타격은 원작 중반부의 일. 그것이 편수로는 150화, 시기상으로는 1년 가까이 앞당겨진 셈이니까.
또 원작과 전개가 달라진 것이었지만 이젠 그러려니 했다. 이미 전개는 내 의지와는 달리 원작에서 한참 멀어졌다. 원작 지식은 참고 정도만 하고, 이제부터는 매 사건마다 임기응변으로 대처해나가는 수밖에 없다.
부아아아아앙.
그때 귓가를 울리는 거센 엔진 소리.
도로 뒤편을 바라보자 검은 벤 한 대가 상향등을 밝힌 채 빠르게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거 운전 매너 한 번 더럽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적입니다.”
류태현이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한 대인 줄 알았던 검은 벤 뒤에서 똑같은 벤 몇 대가 출현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편도 3차선 고가도로 위. 우리가 타고 있는 차를 감싸듯 검은 벤들이 달라붙었다. 양 옆은 물론이고 아차하는 순간 앞까지. 순식간에 사방이 막힌 형국이 되서야 나와 조유리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벤의 옆문이 열리며 전신을 시커먼 옷으로 덮은 사내들이 나왔다. 각자 손에 시커먼 총을 쥔 채로.
수상한 검은 차량들, 도로 위에서의 차량 포위, 그리고 총을 꺼내든 사내들.
‘좆됐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사방에서 총구가 불을 뿜었다.
타다다다다다다다당!!!
수십 수백 발의 총알이 일제히 차체에 꽂혔다. 새된 총성과 둔중한 진동음을 울리며 전후좌우 모든 유리창에 새하얀 금이 쩌저적 가기 시작했다.
허나 단 한 발의 총알도 차체를 뚫고 안쪽까지 침범하진 못했다. 몸을 낮춘 채 운전석을 바라보자 마찬가지로 몸을 있는 힘껏 숙인 채 운전대를 붙잡고 있던 조유리가 소리쳤다.
“이, 이거! 이거 바, 방탄유리니까 괜찮으…꺄흑?!”
콰아아앙!!!
그 순간 느껴진,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충격.
경고. 경고. 좌측 장갑 손상률 47%. 좌측 장갑 손상률 47%.
차내에 울려 퍼지는 SF틱한 안내음성. 고개를 들어 왼쪽 창밖을 보자, 활짝 열린 벤의 문 안쪽에서 기계식 공성추(Battering Ram)가 튀어나와 있었다.
‘어.’
그 순간 뇌리에 떠오른 하나의 이미지.
차량 포위. 총알 세례. 그리고 기계식 공성추.
‘이거 윈○ 솔져에서 닉 퓨리가 습격당하는 장면이랑 완전 똑같….’
다고 생각한 순간, 두 번째 일격이 차체를 뒤흔들었다.
콰아아앙!!!
경고. 경고. 좌측 장갑 손상률 68%. 좌측 장갑 손상률 68%.
눈에 띄게 우그러진 왼쪽 차체를 보며 나는 조유리에게 소리쳤다.
“선배! 여명단 놈들 습격입니다! 팀장님께 연락하세요!”
“아, 아까부터 하고 있어! 근데 전, 전파가 안 잡혀!”
“아니, 이런 탁 트인 곳에서 전파가 안 잡힐 리가…!”
허나 재빨리 꺼내든 스마트폰에는 권외 마크가 찍혀 있었다. 그 광경에 전파방해라는 짤막한 단어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콰아아아앙!!!
그 순간 터진 세 번째 일격.
경고. 경고. 좌측 장갑 손상률 89%. 좌측 장갑 손상률 89%.
주행 기능 손상 발생. 차량 속력이 저하됩니다.
“꺄아아아악!”
“선배! 이 차 혹시 비행 기능이라든가 그런 건 없습니까?!”
“자, 자동차에 그, 그런 게 있을! 있을 리가 없잖아요…!”
“이런 망할!”
전체 방탄 기능에 차량 통제 AI도 있어 혹시 있을까 싶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비행 기능은 없나.
‘손상률 89%. 지금까지 퍼센트가 오른 기세를 보면 다음 일격에 문이 뚫린다.’
그렇게 판단한 순간 류태현이 주먹을 말아쥔 채 나섰다.
“대원분들, 이대로 있다간 문이 뚫리고 총알 세례에 벌집이 될 뿐입니다! 차라리 먼저 열고 나가서 싸우겠습니다!”
“그, 그건 안 돼요! 류태현 학생은 보, 보호 대상인데!”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나갈 기세인 류태현. 그런 그의 어깨를 내가 꽈악 붙잡았다.
“……저리 비키세요.”
슈오오오오.
탈리스만이 발동되고 까만 가죽 장갑 위로 푸른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류태현이 흠칫 눈을 떨며 날 바라봤다.
“당신, 그건 설마.”
무언가 알아차린 듯한 류태현을 뒤로한 채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류태현이라면 달리는 차 위에서도 충분히 싸우겠지. 하지만 나나 조유리는 그렇게 싸우지 못해. 류태현이 우릴 지키면서 싸울 수도 없을 테니, 문이 뚫리는 순간 들어올 총알세례에 벌집이 될 뿐이야.’
게다가 적의 전력도 모르는 채 섣불리 싸울 순 없었다. 저 벤 안에 어떤 흉악한 초능력을 지닌 적이 타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이 포위 상태에서 싸우는 건 놈들이 원하는 바다. 싸우든 도망치든 우선 이 포위를 빠져나가야 해!’
그렇게 판단한 나는 곧바로 조유리에게 외쳤다.
“선배! 지금 이 고가도로 아래 있는 게 뭡니까?! 주택가나 도로입니까?!”
“아뇨! 새, 생태 공원!”
“그럼 됐습니다!”
오른손에 능력을 집중한다. 시커먼 연기가 오른손을 중심으로 압축되기 시작했다.
창밖을 바라본다. 벤 안쪽에 자리한 공성추가 거친 구동음을 울리며 당장이라도 이쪽을 때릴 기세로 진동했다.
“돼, 됐다뇨? 뭐가 됐는데요? 수, 수호 씨 지금 뭘 하시려고….”
“날아서 탈출할 겁니다!”
“나, 날아? 이 차에 비행 기능은 없다고.”
내가 하려는 짓을 깨달았는지 조유리가 말을 잇지 못한 채 놀란 눈으로 날 바라봤다.
“서, 설마. 아, 아니죠…?”
콰아아아앙!!!!
그 순간 공성추가 충돌함과 동시에 왼쪽 차체 문이 떨어져 나가고.
‘지금이다!’
눈앞에 보이는 검은 벤, 그보다 조금 아래 도로 바닥을 향해 나는 있는 힘껏 연기를 발사했다.
투콰아아아앙!!!
다음 순간, 우리가 타고 있던 SUV가 밤하늘로 튀어 올랐다.
“꺄, 꺄아아아아악!!!”
폭발의 반동으로 허공에 떠오른 차체. 부서진 문 너머로 시커먼 연기에 싸인 고가도로가 보였다. 튀어 오른 높이는 거의 30미터 이상. 지면까지의 높이는 약 50미터.
이내 솟구치던 기세가 죽고 차체가 공중에서 기우뚱 기울었다.
“떠, 떨어진드아아아아!!”
조유리의 비명. 점점 가까워지는 지면. 발광하는 탈리스만. 휘몰아치는 검은 연기.
이윽고 차체가 지면에 충돌하기 직전, 내 손아귀에서 두 번째 연기가 터져 나왔다.
투화아아아악!!
떨어지던 차체의 기세가 우뚝, 멈췄다. 손아귀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추진체 역할을 하여 차체의 낙하 속도를 상쇄한 것이었다.
기울어진 각도로 사선으로 날아간 차체가 이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면에 미끄러지듯 추락했다.
까가가가가가가각!!!!!
지면과 마찰하는 측면에서 불똥이 튀었다. 기세를 이기지 못한 차체가 사정없이 옆으로 굴렀다.
“어, 어엇!”
뻥 뚫린 왼편으로 내 몸이 튕겨져 나가려던 순간 류태현이 내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쿵! 쿵! 쿠웅! 쿠웅…….
그렇게 몇 바퀴를 돈 차체가 이내 회전을 멈췄다.
“하으으으으….”
에어백에 고개를 박은 채 정신을 못 차리는 조유리. 마찬가지로 류태현에게 붙들린 채 골골대고 있는 나.
유일하게 멀쩡한 건 류태현뿐이었다. 과연 주인공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류태현이 차 밖을 살피며 우리에게 말했다.
“운행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내려서 싸우죠.”
“아뇨, 도망칠 겁니다. 굳이 놈들과 싸워줄 필요는 없어요.”
“……놈들이 우릴 순순히 놔준다면 말이죠.”
“예?”
순순히 놔주고 자시고 놔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고가도로 아래로 도망쳤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저 멀리 보이는 고가도로에서 시커먼 그림자 열댓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런 시발.”
그래, 쟤네들도 다 초인이겠지.
날 기준으로 생각해서 간과한 사실이지만, C급 이상 초인이면 20미터 고가도로에서 떨어져도 다소 다치는 걸로 끝난다. 기껏해야 발을 잘못 디뎌서 발목이 삐는 정도?
하여튼, 결론은 고작 20미터의 낙차 따위 저들에겐 그리 어려운 장애물도 아니란 소리다.
폐차 수준으로 우그러진 SUV에서 빠져나오자, 15명의 남녀가 이미 우리 앞까지 바짝 다가와 있었다.
‘도망치는 건 무리인가.’
나는 곧바로 허리춤에서 안타레스의 단검을 뽑아들었다. 동시에 옷 아래 두른 엑소머슬 슈트를 활성화했다.
꾸우우욱.
슈트가 전신의 근육을 기분 좋게 꽈악 조였다. 그런 내 옆으로 류태현과 조유리가 자리했다.
“역시 경비대가 얽혀있었구나?”
아무도 없는 허공에 메아리치는 목소리.
다음 순간 사방에서 몰려든 붉은 연기가 한 곳에 뭉쳐 사람의 형상을 이뤘다. 이내 모습을 드러낸 건 아름다운 인상의 묘령의 여성이였다.
“또 만났네? 류태현이라 했나? 저번에는 신세 좀 졌어.”
“신세? 먼지 나도록 얻어맞았다는 걸 잘못 말한 거 아닌가?”
여성의 인사에 빈정거림으로 응수한 류태현이 주먹을 앞세운 채 자세를 낮췄다. 그가 내게 작게 속삭였다.
“어제 절 공원에서 습격한 녀석입니다. 능력은 신체변형이랑 안개화, 정신공격, 그리고 재생. 꽤 성가신 적입니다.”
“그렇다면 저 여자가….”
저 여자가 바로 이번 서큐버스 사건의 범인인가. 확실히 류태현이 말한 능력은 서큐버스가 보이는 능력과 비슷하긴 했다.
다만 저 여자는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서큐버스의 능력을 사용하는 초능력이라도 있다는 건가.
‘신체변형, 안개화, 정신공격, 재생…. 하나같이 성가시기 짝이 없는 능력들이다.’
허나 류태현의 말을 들어보면 그에게는 저 여자를 상대할 방법이 있는 듯 했다. 그렇다면….
“류태현 학생. 저 여성의 상대는 맡겨도 되겠습니까?”
“이미 한 번 저한테 져서 꽁무니 내뺀 년입니다. 금방 정리하죠.”
류태현이 입고 있던 후드를 벗어던졌다. 살벌하게 단련된 근육이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어우. 무서워라.”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내젓는 여성.
“근데 어쩌나? 오늘 네 상대는 내가 아닌데?”
여성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한 순간.
콰아아아앙!!
무언가 거대한 덩어리가 지면에 떨어졌다.
자욱하게 일어난 흙먼지. 이내 먼지가 가라앉고 모습을 드러낸 건 거구의 중년 사내였다. 까만 나시 옆으로 드러난 우람한 팔에는 시커먼 문신이 가득했다. 그 팔근육은 류태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두꺼웠다.
“성학이 아저씨. 저기 제일 왼쪽에 있는 애가 걔야. 부탁 좀 할게?”
“내게 맡겨라.”
중후하게 울리는 목소리. 성학이라 불린 남성이 류태현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으흐흐흐. 박지현의 얘기만 듣고 꽤 기대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비실비실한 멸치 새끼였잖아?”
“…뭐?”
“그래도 멸치치고 나름 구색은 갖췄군. 그래, 한 국물용 멸치 정도?”
사내의 유치한 도발. 설마 저런 도발에 넘어가진 않겠지 싶어 류태현을 바라보자 그가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마십쇼. 저딴 도발은 기별도 안 오니까.”
“그렇구.”
“하지만 저 문신돼지가 절 가만히 놔둘 것 같지도 않군요.”
문신 돼지. 그에게 멸치 운운하던 성학을 말하는 것이었다.
“저놈부터 금방 정리하겠습니다. 얼마 안 걸릴 겁니다.”
말을 차분하게 했지만 류태현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도발이 제대로 먹힌 것 같았다.
“아니, 그럼 저 서큐버스 여자는 누가.”
“저 여자라면 안수호 대원님께서 맡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류태현이 내 오른손을 가리켰다. 무슨 일인가 싶어 의아해한 순간, 그가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 장갑 안쪽에 있는 반지, 제 것과 같은 탈리스만인 것 같은데 맞습니까?"
"그걸"
어떻게 알았냐. 그렇게 말하려다 숨을 삼켰다. 내가 경계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가 어깨를 슬쩍 으쓱였다.
"맞죠? 제 탈리스만이랑 비슷한 기운이 느껴졌거든요. 제가 이래저래 감각이 많이 예민한 편이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예민한 것도 정도가 있다.아무리 류태현이 마력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해도, 발동 중도 아닌 평시 상태의 탈리스만에서 새어나오는 마력을 감지한다고? 탈리스만을 장비한 나조차 느끼지 못하는 감각인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눈앞의 남자는 이 세상의 주인공. 말도 안 되는 일을 밥 먹듯이 저지르는 자였다. 그깟 감각 하나 예민한 거야 새삼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아무튼. 그 반지의 힘을 담아 공격하면 저 여자가 안개로 변해도 타격이 들어가더라고요. 원리는 모르지만 아무튼 들어갔습니다."
어쩐지 육탄계인 그가 안개화 능력자를 상대로 우위를 점한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런 비밀이 있었나.
‘하지만 적이 저 서큐버스년만 있는 것도 아닌데.’
저 서큐버스 여자가 간부 내지는 리더처럼 보이긴 했지만, 적은 그녀와 성학 외에도 열넷이나 더 있었다. 이런 탁 트인 곳에서 싸우면 그 열네 명이 곧바로 협공을 가해오겠지.
“쩌, 쩌! 쩌…!”
그 순간 옆에서 들린 단발적인 외침.
“쩌, 쩌리들은 제, 제가 맡겨, 맡겨주…!”
강해보이는 말과 다르게 시선조차 맞추지 못하는 소심한 태도.
허나 그녀 역시 민채령이 기용한 2팀 대원. 저렇게 자신하는 걸 보면 믿는 구석 하나 정도는 있는 거겠지.
“14명이나 되는데 혼자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네, 네!”
“……그럼 맡기겠습니다.”
이로서 대충 대진표가 결정되었다.
류태현 VS 성학
나 VS 서큐버스 여자
그리고 조유리 VS 나머지 14명의 쩌리들.
이길 수 있을까. 일순 불안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이길 수 있을까, 가 아니다. 반드시 이겨야만 해.’
천천히 다가오는 적들과, 그에 맞춰 우리 앞을 지키듯 가로막은 류태현.
그 커다란 등을 보고 있자니 묘하게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주인공도 있는데 어떻게든 되겠지.’
낙관적인 판단. 허나 아예 근거도 없는 자신감도 아니었다.
민채령이 지원해준 각종 장비, 여인혁을 통해 강화한 신체, 그리고 샛별의 숨소리.
지금의 나는 과거 비루했던 E급 초인 안수호가 아니었다. 단시간이나마 특책과 대원조차 압도할 수 있는, 나름대로 구색을 갖춘 전투원이었다.
‘…시발.’
그래도 전투를 앞두고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아무리 신체적 여건이 나아졌다 한들, 내 정신은 아직 평화롭게 살던 현대인의 태를 다 벗지 못했으므로.
그런 날 흘끗 바라본 류태현이 내게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십쇼. 제가 있잖습니까.”
두 주먹을 쾅 부딪힌 류태현이 호전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1학년 수석하고도 싸워서 이겼는데, 저딴 놈들 정리하는 거야 일도 아닙니다.”
다음 순간, 호기롭게 외친 그가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