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030. 주인공 류태현
* * *
( 저번 화 뒷부분에 업로드 과정에서 누락된 약 1,000자 분량의 내용이 추가되었습니다. 업로드 후 2시간 이내에 29화를 감상하신 독자분께서는 29화 뒷부분을 감상하고 와주세요...! 죄송합니닷...! )
전투가 있었다.
두 사람 간의 전투였다.
여명단의 간부 박지현과 그린하우스 재학생 류태현의 전투였다.
그 외 그 누구도 개입하지 않은 1대 1의 전투였다.
허나 이 광경을 보고 그 누가 그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온 사방에 움푹 페인 크레이터. 무너져 내린 지면. 반으로 꺾인 가로수.
전투가 끝난 호수공원의 모습은 가히 전투가 아닌 전쟁을 방불케 하는 모습이었다. 그 풍경이 단 두 사람, 정확히는 단 한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라곤 누구도 쉽게 믿지 못하리라.
“아.”
그 참상의 한복판에서 류태현이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있었다. 상처는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살짝 찢어진 상처에 피가 조금 맺힌 정도.
그런 그가 허탈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봤다.
사방에 새겨진 크레이터 중에서도 유독 커다란 곳. 방금 전 그가 박지현을 메다꽂은 자리에는 붉은 안개만이 남아있을 뿐 박지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도망쳤네.”
기분 좋게 달아오른 몸이 밤바람에 점차 차게 식어갔다. 전투에 의해 달궈진 이성이 차츰 진정되며 이런저런 생각이 그의 뇌리를 채웠다.
류태현이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보름도 더 전, 어떤 여성이 자신에게 맡기고 간 탈리스만을.
‘……도와주겠다고요? 그럼 염치 불구하고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약 보름 전. 온몸에 상처를 입은 하늘색 머리칼의 여성. 심상치 않은 모습에 도와주겠다 나선 류태현에게 여성은 그렇게 말했다.
‘별 일 아니에요. 그냥 물건을 하나 맡아줬으면 해요. 최대한 빠르게……반드시 찾으러 올 테니까, 그때까지만 이 물건을 맡아주세요.’
여성이 허공에 손짓하자 공간이 작게 갈라졌다. 갈라진 틈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자그마한 반지케이스를 두 개 꺼냈다.
지예원도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그 신기한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던 류태현에게, 여성이 두 반지케이스 중 하나를 넘겼다.
류태현이 케이스를 열어보았다. 아무런 조명이 없는데도 은은한 푸른빛을 뿜어내던 반지. 척 봐도 범상치 않은 물건이라 직감한 류태현이 여성에게 이것이 무엇이냐 물었다.
허나 여성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알려줄 수 없다, 라기 보다는 당신이 알아선 안 된다. 그런 제스처였다.
‘부탁할게요. 아주 중요한 물건이에요. 그러니 한시도 몸에서 떼지 말고 늘 지니고 다녀 주세요. 절대로 다른 사람한테 넘기지 말고요. 금방 찾으러 올 테지만……. 만약 제가 오지 않거든 그 누가 반지를 달라고 해도 절대로 주시면 안 돼요.’
사뭇 진지한 태도에 류태현이 반지가 담긴 케이스를 내려다봤다.
이 반지가 그렇게 중요한 물건인가.
그렇게나 중요한 물건이라면 지나가던 행인인 자신에게 맡기는 게 아니라, 당신이 계속 가지고 있는 편이 낫지 않느냐.
류태현의 당연한 물음에 여성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제가 가지고 있다간 금방 빼앗길 거예요.’
‘미안해요. 시간이 없어서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드릴게요. 여기, 제 번호에요. 내일 이 시간에 제게 연락 주세요. 그 반지를 어디서 돌려받을지 말씀드릴 테니까.’
‘제 이름은 김민아예요.’
‘반드시 돌려받으러 올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김민아는 다시 길을 떠났다. 상처투성이 몸을 힘겹게 이끌며.
다음날, 류태현은 김민아가 준 번호로 전화했다. 허나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음에도 그녀는 단 한 차례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마치 받을 수 없는 사정이라도 있는 것처럼.
별수 없이 류태현은 당분간 그 반지를 자신이 지니고 있기로 했다. 계속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연락이 오겠지.
그렇게 생각한 류태현이 호기심에 탈리스만을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본 건, 그로부터 사흘 뒤의 일이었다.
“흐음.”
탈리스만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며 류태현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범상치 않은 물건에 심상치 않은 사정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 반지를 노리고 다짜고짜 공격해오는 사람까지 있을 줄이야.
오지랖을 부려 도와준다고 나선 건 자신이었지만, 꽤 귀찮은 일에 말려든 것일지도 모르겠다며. 류태현이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웨에에에에에에엥!!!
그때,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에 류태현이 고개를 들었다.
어둑한 호수 저편, 빨간색과 파란색을 교차해가며 점차 접근해오는 경광등 빛. 류태현의 표정이 삽시간에 납빛으로 물들었다.
‘……좆됐다!’
그가 주변 풍경을 둘러보았다. 꽤나 화려하게 싸워대긴 했다. 아무래도 누가 신고라도 한 모양이라고. 그렇게 짐작한 류태현이 곧바로 몸을 돌렸다.
허나 반대편 호숫가에서도 이미 경광등을 앞세운 경찰차들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중이었다. 일직선으로 그에게 오는 것이, 이미 그를 발견한 것이 분명했다.
난장판이 된 호수 공원. 사방에서 몰려드는 경찰차들.
그 한복판에 홀로 선 류태현의 뇌리에 이런 생각이 스쳤다.
‘좆됐다……!’
아무래도 좆된 것 같다고.
그것이 그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
3월 3일. 화요일.
사건 발생 이틀 째. 사건의 피해자는 하루 사이 세 명 늘어 다섯 명이 되었다.
진술 결과 그들 전원은 졸업을 앞둔 4학년이었으며, 전원 동일하게 ‘지예원에 대해 알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사실이 경비대에 알려지고, 그 뒤는 민채령의 예상대로였다.
7팀이 조사하고 있던 지예원에 대한 투서. 그리고 이번 서큐버스 사건.
경비대는 이 두 사건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 말은 즉 이번 서큐버스 사건에 여명단이 관련되어 있다고 판단했단 소리였다.
민채령의 예상대로 수사 규모는 순식간에 확대되었다. 기존에 투서 건을 수사하던 7팀과 더불어 특책과 3팀, 그리고 일반과에서 1개 팀이 차출되어 지예원 탐색에 투입되었다. 동시에 경찰에 정식으로 신고가 접수되어 지역 경찰 역시 지예원에 대한 수사에 돌입했다.
그에 반해 민채령은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정말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는 모양.
‘그렇게 됐으니까, 당분간 소연이는 24시간 내내 지예원 곁에 붙어있도록 해.’
그나마 취한 조치라고 해봐야 낮에만 지예원을 감시하던 채소연을 24시간 내내 안전가옥에 박아두기로 한 것 정도.
‘…………에반뎅.’
채소연의 소소한 반대가 있었지만 가볍게 묵살되었다. 입술만 삐죽 내민 채 불만을 삼키던 채소연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솔직히 조금 통쾌했다.
“안수호. 3팀에게 넘길 서류는 다 준비했나?”
“지금 준비 중입니다 선배님. 어, 근데 혹시 어디 나가십니까?”
이태호는 외출할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
“난 지금부터 속초경찰서로 간다. 이번 사건의 여섯 번째 피해자로 추정되는 학생이 현재 그쪽 유치장에 구금 중이라는군.”
“허, 피해자가 어쩌다 유치장에 갇혔답니까?”
내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묻자 이태호가 동감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우리 아카데미 1학년 학생이 영랑호 호수공원에서 난동을 부리다 인근 주민의 신고로 경찰에 잡혔다고 한다. 본인은 난동이 아니라 누군가가 덤벼들어서 정당방위로 싸운 것이라 주장했다는데, 그 학생이 진술한 상대방의 인상착의가 이번 사건의 범인과 일치한다고 한다. 다른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목에 물린 상처도 있다고 하니, 아마 이번 사건의 피해자가 맞겠지.”
“그렇군요. 아카데미 바깥에서 일어난 사건은 처음 아닙니까?”
“그래. 게다가 이번 피해자는 다른 피해자와 달리 범인과 접촉한 후에도 의식을 잃지 않았다더군. 꽤 쓸만한 진술을 얻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간 피해자들은 다들 기억이 흐릿한 편이었으니까.”
“그거 다행이군요. 그래서 그 1학년 학생은 누구랍니까?”
별 의미 없이 던진 질문. 그저 주인공과 같은 1학년이라는 사실에 호기심이 동해 꺼낸 의문에 지나지 않았다.
“류태현이라고 하더군.”
“………예?”
때문에 바로 그 주인공의 이름이 이태호의 입에서 나온 순간,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러지? 아는 학생인가?”
“……아뇨. 모릅니다.”
“그렇겠지. 어제 막 개강한 신입생이니까.”
덤덤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태호. 허나 이쪽은 도무지 진정할 수 없었다.
‘류태현이라고? 걔가 왜 여기서 나와?’
오늘은 3월 3일. 학기 시작 이틀째. 원작대로의 전개라면 류태현은 별일 없이 수업을 듣고 있을 터. 그런데 그가 지금 유치장에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전개가 바뀐 건가?’
내 존재 때문에 다소 전개가 바뀔 건 예상하고 있었다. 허나 하필이면 뒤틀린 전개에 주인공이 휘말려들게 되다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당혹감에 물든 머리로 재빨리 원작 전개를 되짚는다.
본래 오늘 예정되어 있던 사건은 대인격투술 수업에서의 학생간 대련.
대련 상대는 1학년 수석입학생이자 본작의 히로인이기도 한 한겨울로, 대련에서 승리한 류태현을 한겨울이 의식하는 것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될 예정이다.
헌데 그 류태현은 지금 유치장에 갇혀있는 상황.
‘좆됐다. 존나게 꼬였어.’
주인공과 히로인의 첫 만남이 불발되었다. 그 사실에 경악하고 있던 사이 이태호가 사무실을 나서려 하고 있었다.
“선배님!”
“왜 그러지?”
“그, 혹시 저도 같이 가면 안 되겠습니까?”
엉겁결에 꺼낸 말. 같이 가봤자 내가 그를 유치장에서 빼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아마 불안했기 때문이리라.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원작 전개가 점점 뒤틀리고 있다는 사실이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무슨 소리하는 거냐. 사정청취에 둘씩이나 갈 필요가 어디 있다고. 쓸데없는 소리 말고 조유리랑 같이 3팀에 넘길 서류나 준비해라.”
그 말을 남기고 이태호가 사무실을 나섰다. 그를 붙잡으려 반쯤 일어났던 내 시선이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어, 그럼. 수, 수호 씨? 이, 이거 3팀에 넘길 서류 초본이에요. 이, 인원수대로 뽑았, 뽑았으니, 까. 저쪽에서 제본, 좀 해줄래요……?”
류태현의 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혼란스러운 정신을 애써 진정시키며 이 뒤틀림을 수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수호 씨? 제, 제본 좀 부탁드려도….”
주인공과 히로인의 첫 만남이 불발되었다. 그렇다면 그 만남을 비슷하게 연출해낼 수는 없을까.
“수, 수호 씨……?”
아니, 내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류태현과도, 한겨울과도 일면식조차 없었다. 헌데 그런 내가 어떻게 두 사람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연출해낸단 말인가.
“제본. 어, 서류, 제본 좀…….”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다 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전개를 수습하는 건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흐, 흐윽! 수, 수호…….”
허나 수습을 포기한다 해도 류태현은 반드시 만나봐야 했다. 그가 이번 사건의 범인과 접촉한 것이 우연인지 아닌지. 그 사실만은 분명하게 해야만 했으니까.
‘유치장에서 풀려나면 곧바로 연락할 수 있도록, 일단 류태현의 연락처부터 확보해야겠어.’
행정과에 부탁하면 그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유는 대충 이번 사건의 사정청취 정도로 얼버무리면 되겠지.
“수, 수호 씨.”
“선배님. 잠시 행정과에 다녀오겠습니다.”
“아, 네헤. 그, 제, 제본은 제가, 제가 할게요오…….”
“예? 아, 네. 고생하세요.”
서류 뭉치를 한아름 안고 있는 조유리에게 꾸벅 인사하고 나는 사무실을 나섰다.
***
속초경찰서 내 유치장.
경찰의 협조를 구한 이태호는 류태현을 만나기 위해 유치장 안으로 들어섰다.
속초경찰서의 유치장은 이중구조로 되어 있었다. 입구 쪽에는 일반인을 가두기 위한 일반적인 유치장이 있었으며, 그 안쪽에 굳게 닫힌 철문 너머가 바로 류태현과 같은 초인들을 가두기 위한 곳이었다.
초인의 신체능력은 적게는 일반인의 두세 배에서 많게는 수십 배 이상. 그런 그들을 가두기 위한 설비는 일반적인 유치장과 궤를 달리했다.
기본적으로 철창의 두께부터가 일반 유치장의 두 배 이상이었으며, 그 재질 역시 단순 강철이 아닌 특수 합금이었다. 구금된 이들은 전기충격 기능이 내장된 족쇄를 차고 있었으며, 천장에는 수십 대가 넘는 감시카메라가 즐비했으며, 각 길목마다 마취탄을 발사하는 센트리 건이 부착되어 있었다.
유치장이라기보다는 교도소라는 말이 어울릴법한 설비.
허나 어쩔 수 없었다. 최소한 이정도 설비나마 갖춰놔야 비범한 신체능력을 지닌 초인들을 구금할 수 있으니.
그 살벌한 유치장의 가장 깊숙한 곳. 이 유치장 안에서도 가장 경계가 삼엄한 장소.
류태현은 바로 그곳에 구금되어 있었다.
“…….”
철창 안에서 퀭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류태현을 보며 이태호가 마른 침을 삼켰다.
‘……몸 한 번 살벌하게도 만들었군.’
초인은 같은 근육량으로도 일반인보다 훨씬 강한 힘을 낸다. 허나 초인 역시 근육량이 많아질수록 근력이 증가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태호는 조각처럼 빚어진 류태현의 몸을 바라봤다. 한 치의 낭비도 없이 오직 근육만으로 가득 채워진 상체는 그가 품고 있는 저력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벌떡.
그때 류태현이 자리에서 일어서 철창으로 다가왔다. 이내 그 손이 우악스럽게 창살을 틀어쥐자 그의 팔뚝에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류태현이 이태호를 노려보았다. 명확한 적대감을 실은 채로.
‘왜 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협조적으로 진술을 받아내긴 글렀군.’
그에게서 풍겨오는 심상치 않은 기세에 이태호가 자세를 잡았다.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만약 눈앞의 남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깟 철창 따위 엿가락처럼 끊어질 것이라고.
“형사님.”
류태현이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이태호가 형사인줄 알고 있었다.
“지금 몇 시입니까?”
“……11시다. 11시 28분.”
이태호가 손목시계를 들어보이자 류태현의 시선이 그곳에 집중되었다. 한참이나 시계를 뚫어져라 보던 그 고개가 푹 꺾였다. 직후 새어나오는 깊은 한숨.
“……출석 체크는 진즉에 끝났겠네. 망할…….”
직후 이어지는 불평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이태호에게 쏘아붙였다.
“……저기, 형사님. 부탁 하나만 합시다.”
“부탁?”
“저기 뒤편에 서랍장 보이시죠? 저기 두 번째 서랍 안에 제 핸드폰이 있습니다. 전화 한 통만 하게 잠시만 꺼내주세요. 흰색 아○폰 11입니다.”
유치장에 구금된 자에게 통신기기를 넘기다니 어불성설이었다. 허나 그에게서 풍겨오는 짐승 같은 기세에, 이태호는 식은땀을 흘리며 서랍장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 정도야 괜찮지만 핸드폰을 네게 넘길 순 없다. 내가 대신 조작해주지. 그래도 괜찮겠나?”
“상관없습니다. 연락처에서 도소영 교수님이라 저장된 번호로 전화 한 통만 걸어주십쇼. 패턴은 없습니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가져다 대자 류태현이 철창에 바짝 붙었다.
뚜르르르르르.
뚜르르르르르.
하염없이 이어지는 신호음.
뚝.
여보세요?
이내 흘러나온 여성의 목소리에 류태현이 곧바로 대답했다.
“네,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이번년도 A분반 신입생 류태현이라고 합니다!”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상쾌한 어조로.
“갑자기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예, 맞습니다. 수업 불참 건으로요. 제가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서 오늘 수업에……. 아, 벌써 연락을 받으셨군요. 예. 예. 아뇨, 그, 일단은 정당방위인데……. 예. 아닙니다. 예. 어, 죄송합니다. 교수님. 결코 그런 게 아니라…….”
전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쩔쩔매는 류태현을 보며 이태호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좀 전까지의 날 선 기세는 어디 갔는지, 철창에 달라붙은 채 힘겹게 통화를 이어가는 그의 모습에선 무해하다 못해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예. 교수님. 기억하고 있습니다. 초인으로서 자부심은 가지되 결코 오만하게 행동하지 마라. 첫날 OT 때 해주신 말씀이죠. 가슴 깊이 새겨듣겠. 아니, 죄송합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예. 그래서 그런데 그, 죄송합니다만 혹시 오늘 대인격투술 수업 출결 관련해서……. 예, 전 잘못 없습니다. 아니 거의 없을 걸요? 정당방위였습니다. CCTV에도 다 찍혔어요. 예? 그러게요. 분명 CCTV에 다 찍혔는데도 풀어주질 않습니다. 예, 교수님. 하여튼 그래서 출결 관련해서 그, 어떻게 오늘 결석을 출석 처리는 안 되더라도 공결처리라도 좀... 아, 안 되나요. 그래도 어떻게……. 아, 예.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예. 들어가십쇼. 교수님. 통화 감사했습니다.”
쿵!
통화가 끝나자마자 류태현이 창살에 머리를 박았다. 둔탁한 충격음에 주변 감시카메라가 일제히 그에게 향했다.
“형사님…….”
그러거나 말거나. 류태현이 이태호에게 말했다. 아주 착잡한 어조로.
“……억울합니다. 분명 CCTV에 그 여자가 절 먼저 공격하는 게 찍혔다면서요. 전 정당방위였을 뿐입니다. 형사님도 아시잖습니까…… 근데 왜 계속 절 여기 붙잡아두는 겁니까? 예? 덕분에 무단결석으로 출결 점수 3점 깎였습니다. 망할, 장학금 노리고 있었는데…….”
힘없이 푸념하는 그에게서 처음 봤을 때의 기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내뱉는 푸념 한 마디마다 이곳 경찰에 대한 원망감만이 찐득하게 묻어날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태호가 생각했다.
진술, 아주 협조적으로 받아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류태현 학생. 출결이라면 제가 공결로 바꿔드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나오고 싶으시다면, 당장 빼내드릴 수도 있고요.”
“예?”
류태현이 고개를 들어 이태호를 바라봤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진짭니까? 그게 된다고요? 아니 형사님 그, 액면가는 되게 젊어보이시는데 의외로 계급 좀 있으신가봅니다?”
“전 형사가 아닙니다.”
이태호가 경비대 대원증을 꺼내들었다.
“그린하우스 경비대 특수대책과 소속 이태호 대원입니다. 류태현 학생이 현재 연루된 사건은 경비대 특수대책과에서 자체적으로 수사에 착수하였습니다. 아카데미 학생이 관련된 사건이기 때문에 본 사건에 관해선 저희 특수대책과가 지역 경찰에 대해 보다 우선적으로 수사권을 갖습니다.”
“……그래서요?”
“즉, 제 요청 하나면 류태현 학생을 당장 빼낼 수 있다는 뜻이죠.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경비대 사정청취 명목으로 출결 역시 공결로 처리해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류태현 학생이 제게 협조적인 태도로 나온다는 전제 하에 말입니다만…….”
“형사님. 아니, 경비대 선생님.”
상황을 파악한 류태현이 씨익 웃었다.
“뭐든지 물어보시죠. 성심성의껏 답변해드릴 테니.”
그 긍정적인 태도변화에 이태호 역시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