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경비원으로 빙의당했다-30화 (31/266)

〈 30화 〉 029. 서큐버스 사건(4)

* * *

해질녘을 넘어 박명에 다다른 시간.

안수호와 통화를 마친 민채령은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서큐버스……로 추정되는 이번 사건의 범인이 지예원을 알고 있다. 어디 알고만 있을까, 피해자에게 지예원이란 학생을 아느냐고 직접 질문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안수호는 이번 일이 여명단과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민채령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서큐버스가 여명단에 협력하고 있을 가능성. 혹은 서큐버스와 비슷한 능력을 지닌 여명단원이 범인일 지도 모른다.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가능성을 점치던 민채령의 시선이 데스크탑 화면으로 향했다. 화면에는 며칠 전 아카데미로 보내진 익명의 투서가 떠올라 있었다.

지예원이 여명단 단원임을 알리는 투서.

아마 여명단에서 지예원이 그린하우스에 의탁하지 못하도록 이런 투서를 보낸 것이리라. 민채령은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다.

그 짐작은 정확했다. 실제로 그 투서는 여명단에서 보낸 게 맞았으니까.

하여튼. 장난이라기엔 지나치게 자세한 투서의 내용에 경비대는 반신반의하며 수사에 착수했다. 민채령이 투서에 대해 먼저 알아차렸다면 어떻게든 막았겠지만, 그녀가 손을 쓰려 했을 때엔 이미 오태성이 이끄는 7팀이 수사를 시작한 뒤였다.

아직 투서 내용이 진실이라 확정된 것도 아니었기에, 경비대 안에서도 투서의 내용에 대해 아는 이는 7팀을 포함한 몇몇이 고작이었다.

허나 이번 사건 피해자의 진술로부터 지예원의 이름이 나온 이상, 이태호나 조유리를 포함한 다른 대원들도 곧 이 투서를 통해 지예원에 대해 주목할 터.

그렇게 되면 수사 규모의 확대는 불가피하다. 아카데미 안에서 벌어진 상해 사건에 여명단이 관련되어있을 가능성이 존재하는 이상, 경비대 전체가 수사에 착수할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상대가 여명단이니만큼 지역 경찰의 개입도 배제할 수 없으리라.

“……흐음.”

지예원의 행적을 쫓는 이가 많아지는 건 그녀로서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잘못했다간 그녀가 지예원을 숨겨주고 있다는 사실이 들통날지도 모르니까.

여명단은 국가에서 지정된 반정부 테러단체.

그 구성원은 발견 즉시 경찰에 신고해야하며, 고의로 여명단 단원을 숨겨주거나 도움을 준 자는 관련 법률에 따라 처벌받게 되어있다.

만약 자신이 지예원을 숨겨준 걸 들키면 어떻게 될까.

자신의 연줄을 사용하면 사건 자체를 덮는 건 어렵지 않다. 애초에 덮는 게 불가능했으면 처음부터 지예원을 품으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 동원한 인맥들에게 ‘민채령이 여명단과 관련되었다’는 약점을 쥐어주게 되리라는 게 그녀로서는 달갑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괜찮더라도 무언가 수틀리는 순간, 그녀의 적들은 그 약점을 내세우며 그녀를 물어뜯으려 할 것이므로.

그러한 위험을 감수할 정도의 가치가 지예원에게 있는가.

약 보름 전, 지예원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엔 그 질문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명단은 철저하게 베일에 싸인 범죄조직. 배신자라 해도 그 조직의 정보원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란 좀처럼 오지 않는 법이니까.

여명단에 관한 정보는 그녀에게 있어 활용할 여지가 무궁무진했다.

가령, 실적이 필요한 경찰관계자에게 정보를 넘겨 은혜를 입힌다거나. 반대로 여명단 구성원에게 접근해 신고를 빌미로 협박하여 부수적인 이득을 취한다거나.

여명단과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범죄조직에게 정보를 넘겨 뒷세계의 연줄을 얻어내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여명단이 불법적인 일로 벌어들인 뒷돈을 몰래 빼돌리기도 했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 수많은 부하와 연줄을 거느린 민채령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난 보름 간 지예원이 토해낸 정보를 민채령은 적재적소에 활용하며 상당한 이득을 거머쥐었다.

지예원을 품는 건 분명 위험요소를 동반하지만, 지예원에겐 그만한 가치가 있다.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예원은 멍청이가 아니다. 자신의 존재가치가 여명단의 정보라는 걸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민채령에게 모든 정보를 단번에 불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정보라는 패가 바닥나는 속도를 의도적으로 늦췄다.

허나 그렇다 한들, 지예원이라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정보란 결국 언젠가 바닥나게 되어 있다.

민채령은 과연 지예원에게 쓸만한 정보가 얼마나 남아있을지 가늠해보았다. 어디까지나 추정치였다. 그리고 그 추정치를 가지고 민채령은 다시 한 번 지예원을 숨겨준다는 행위의 리스크와 리턴을 저울질했다.

‘……애매한데.’

지예원은 여명단 내에서 지위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가진 정보라고 해봐야 결국 한계가 있을 터.

민채령은 그 한계가 멀지 않았다고 짐작했다.

‘그래, 쓸만큼 썼지.’

지예원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되려는 시점. 이 이상 지예원을 품고 있는 건 자신에게 독으로 작용할 지도 모른다.

한 번 그렇게 생각하자 그녀의 머릿속에서 재빠르게 지예원의 처분에 대한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경찰에 넘기는 건 무리겠지. 살기 위해서 나나 경비대를 물고 늘어질 테니까. 기억을 조작한다 해도 경찰 쪽에 기억을 읽는 능력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마음 편하게 죽일까.

그런 생각이 민채령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람 하나 죽여서 은닉하는 건 그녀에게 손쉬운 일이었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동원되는 건 전원 그녀에게 물심양면 ‘의존’하고 있는 그녀의 부하들 뿐. 고로 이 일로 남에게 약점이 잡힐 일도 없다.

지예원의 존재가 드러난 뒤 그것을 덮는 건 어렵다. 하지만 이쪽에서 먼저 죽인 뒤 은폐하는 건 쉽다.

그렇다면 자신은 쉬운 방법을 택할 뿐이다. 지예원의 이용 가치는 아직 충분히 남아 있지만, 리스크를 생각하면 때로는 다소의 리턴을 버려야할 때도 있는 법.

‘하지만…….’

하지만, 그 순간 민채령의 뇌리에 안수호의 존재가 떠올랐다.

안수호. 그 의뭉스러운 신입은 지예원과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이다.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민채령은 생각했다. 당초 지예원에 대한 정보를 누가 자신에게 들고 왔는가. 바로 안수호였다.

‘안수호의 이야기를 듣고 지예원을 돕기로 결정한 건 나 자신이야. 하지만 어째서 안수호는 내게 그 정보를 가지고 왔지?’

사람은 이득과 손해로 움직인다. 그녀의 지론이었다. 그 지론에 입각했을 때, 자신을 통해 지예원을 구함으로써 안수호 또한 무언가 이득을 얻었으리라.

탈리스만을 얻은 것? 그래, 그게 목적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불확정요소가 너무 많다.

이미 탈리스만 건으로 안수호를 한 번 떠본 적 있었지만, 그의 말마따나 안수호의 손에 탈리스만이 쥐어진 건, 수많은 우연이 겹친 끝에 일어난 기적 같은 일이었다.

탈리스만은 그가 의도한 이득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가 의도한 이득은 무엇인가.

‘나한테 자신의 정보력을 과시한 것? 나는 여명단의 내부 사정도 꿸 수 있을 정도의 정보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 의미인가?’

아니, 너무 모호한 이득이다. 이미 신진우 교수 건으로 그의 정보력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자신에게, 굳이 위험부담을 져가면서 다시 한 번 눈도장을 찍을 필요가 있을까?

‘아니면 나처럼 여명단 내부의 정보원을 얻고 싶어서?’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안수호는 이미 여명단 내부의 배신자의 여부까지 알아낼 정도의 정보력을 갖추고 있다. 굳이 정보원으로서의 가치에 주목하여 지예원을 지켜낼 필요는 없을 터.

‘그렇다면 반대로, 내게 지예원이라는 정보원을 쥐어주는 게 목적이었나?’

이건 좀 그럴듯했다. 자신이 지예원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는 걸 짐작하고 지예원을 자신에게 넘긴 것일 지도 모른다. 일종의 은혜를 베푼다는 느낌으로.

그래. 말은 되는 이유다.

허나, 과연 이유가 고작 그것뿐일까.

안수호는 고작 자신에게 자그마한 은혜 하나를 입히고자 여명단 단원을 숨긴다는 커다란 리스크를 짊어지려 했을까.

지예원을 돕는다는 것은 즉 국가에서 지정한 테러리스트를 돕는다는 것. 안수호는 과연 고작 저런 알량한 이유 하나 때문에 자신에게 그런 제안을 했을까.

아니, 그건 합리적이지 않다.

민채령은 생각했다. 안수호의 행동이 합리적이지 않게 보인다면 가능성은 둘 중 하나였다.

그가 이성에 따른 합리가 아닌 감정이나 충동에 따라 행동했거나, 혹은 그의 행동이 그녀가 모르는 근거에 의한 합리적인 행동이었거나.

뭐가 되었든 결론은 동일했다. 안수호와 지예원 사이에는 그녀가 모르는 모종의 관계가 있다. 그리고 그 관계 때문에 안수호는 지예원을 구해내야만 했겠지.

허나 그것이 본인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자신을, 민채령이라는 야심으로 똘똘 뭉친 경비대 팀장을 끌어들인 것이 아닐까.

어디까지나 가설이었다.

허나 가설이 미덥지 못하다면 이를 증명해보면 될 노릇.

지예원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되려는 이 시점, 지예원을 품고 있는 행위가 위험하다는 건 안수호 역시 알고 있을 터.

만약 자신이 지예원을 내쳐야한다고 말했을 때, 안수호가 자신의 의견에 거절 의사를 표한다면.

­똑똑.

그렇게 거절하면서도 이렇다 할 명분이나 이유조차 내세우지 못한다면.

“……들어오렴.”

만약 안수호가 그런 반응을 보인다면, 이 의심은 곧 확신이 되리라.

팀장실 문을 열고 묵묵히 들어오는 안수호를 바라보며, 민채령이 두 눈을 게슴츠레 흘겼다.

***

어둡다.

창밖의 풍경은 이미 해가 지고 난 뒤의 어스름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스러질 듯 흐릿하게 비쳐오는 남색 빛이 팀장실 안을 어둑하게 비추었다.

민채령은 불도 켜지 않은 채 안수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완연한 어둠 속에 잠긴 채.

안수호는 민채령에게 이영한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했다. 물론, 지예원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빠짐없이.

이야기를 다 들은 민채령은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뱀과 같은 차가운 시선이 안수호의 미간을 꿰뚫고 지나갔다.

민채령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안수호는 대충 짐작이 갔다.

이미 그에게 있어 서큐버스 사건 따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민채령 또한 같으리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안수호. 하나만 물어볼게. 왜 지예원을 구하려고 한 거야?”

“여명단의 정보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요. 놓쳐선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안수호의 즉답에 민채령이 살며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예상했던 대답이었으니까.

“그래? 하지만 넌 이미 여명단에 정보원을 가지고 있잖아. 여명단 내부의 배신자에 대한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을 정도면, 굳이 새로운 정보원은 필요 없을 것 같은데?”

“팀장님께도 정보원을 손에 쥐어드리고 싶었습니다. 팀장님이시라면 지예원이 가진 정보를 유용하게 쓰실 수 있을 테니까요.”

이번에도 민채령은 고개를 저었다. 마찬가지로 그녀가 예상했던 대답.

“맞아. 네 말대로 지예원은 아주 유용했어. 덕분에 지난 2주간 내 나름대로 재미 좀 봤지.”

하지만.

민채령이 그렇게 덧붙이며 안수호에게 말했다.

“지금 우리 상황이 좀 위험한 건 알고 있지? 이번 사건으로 인해 지예원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되면 언제까지고 지예원을 숨길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어. 만약 지예원의 소재가 탄로나고, 거기에 너와 내가 얽혀있다는 걸 경비대나 경찰이 알아차렸다가는…….”

민채령의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스멀스멀 올라와 가슴을 옥죄는 긴장감에 안수호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떻게 될지 알고 있지?”

여명단은 국가에서 지정한 반정부단체. 단원은 발견 즉시 경찰에 신고해야 하며, 이를 알고 있으면서도 단원의 소재를 신고하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도움을 주었을 경우, 관련 법률에 따라 처벌을 받는다.

이 세상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상식이었고, 안수호 역시 이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넌 아마 모르겠지만, 폐건물에서의 전투가 있던 주말 다음 월요일에, 아카데미로 익명의 투서가 도착했어.”

민채령이 데스크탑 화면을 안수호에게로 돌렸다. 밝게 빛나는 화면 속에는 지예원이 여명단임을 주장하는 투서가 표시되어 있었다.

“지예원이 여명단 단원임을 알리는 투서야. 장난으로 치부하기에는 적혀있는 내용이 꽤 상세해서, 7팀에서 이미 수사에 착수했어. 뭐, 별다른 수확이 없어서 곧 흐지부지 될 것 같았지만……. 이번 진술에서 지예원의 이름이 나왔으니 수사에 다시 불이 붙겠지. 오히려 전보다 더욱 거세게.”

“그럴 수가…….”

그런 투서가 존재했다는 것조차 몰랐던 안수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투서가 여명단이 보낸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민채령의 말마따나 경비대가 지예원이라는 학생에 대해 주목하게 되었단 점이다.

“제아무리 경비대가 본격적으로 수사에 나선다 한들, 어지간해선 들키지 않을 거야. 내 일처리는 완벽했어. 지예원이 내 손에 있다는 걸 알아차릴만한 흔적은 단 하나도 남기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하지만, 나만큼은 아니어도, 다른 팀 대원들도 꽤 유능한 편이거든. 그게 조금 불안하네?”

불안하다. 그렇게 말하는 민채령의 표정에서는 일말의 불안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즐거움마저 엿보였다.

“물론 안 들키고 넘어갈 수도 있지. 하지만 들킬 수도 있어. 리스크가 있다는 이야기야. 그리고 지예원에 대한 리스크와 리턴을 두고 고민한 결과, 난 그 아이를 이만 내치는 게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드네?”

“내친다는 건…….”

지예원을 경찰에 넘긴다는 건가. 그런 안일한 생각이 안수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허나 민채령은 안수호와 달리 철두철미한 여자였다.

어둠 속에서 민채령의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웃음이었다. 지예원의 소재가 들키는 건 그녀에게 달갑지 않은 일일 텐데도, 민채령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뱀처럼 웃었다.

얼굴 가득 진한 미소를 머금은 채 민채령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죽여야지. 깔끔하게.”

지예원을 죽인다.

그렇게 말한 민채령의 표정에는 일말의 감정적 동요도 없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한 도덕적 거부감? 그런 게 있을 턱이 없다. 그런 불필요한 인간성은 진즉에 쳐낸 뒤였다.

민채령의 차가운 미소에서 안수호는 그 사실을 짐작했다. 민채령은 필요하다면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지예원을 죽일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그렇게 직감했다.

“하지만­.”

엉겁결에 나온 한 마디. 제대로 된 문장을 이루지 못한 단어들이 안수호의 입 안을 맴돌았다.

지예원을 죽여선 안 된다고. 민채령에게 그렇게 말해야만 한다.

허나 안수호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마치 그의 속내가 뻔히 보인다는 듯 민채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예원을 죽이는 거에 반대하고 싶은 거니? 그래,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얼마든지 들어줄게.”

“단, 지예원이 가지고 있는 정보의 가치를 운운하며 날 설득할 생각은 하지 마. 내 스스로 이미 그녀가 가지고 있을 정보와, 계속 그녀를 숨기고 있을 때의 위험을 저울질한 끝에 결정한 거니까.”

“또한 지예원을 죽이는 것에 대한 위험 요소……. 가령 지예원의 반항이나 죽인 뒤의 증거인멸 같은 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마음만 먹으면 저항할 새도 없이 단번에 죽일 수 있고, 사람 한 명 죽인 흔적 지우는 거야 나한테는 일도 아니니까.”

“그리고 설마, 설마 그러진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알량한 도덕과 윤리를 내세울 생각은 마렴.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느니,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아니지?”

“자, 그래서.”

“방금 말한 이유를 제외하고도 지예원을 죽이는 것에 반대하는 이유가 있다면, 한 번 말해보렴?”

안수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이 채 변명을 짜내기도 전에 온갖 가능성을 봉쇄하는 민채령을 보며 안수호는 그녀가 단단히 준비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번 진술에 대한 자신의 보고를 들었을 때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민채령은 한참 전부터 지예원을 쳐낼 시기를 가늠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안수호의 뇌리를 스쳤다.

‘너무 안일했다. 적어도 당분간은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리 안일한 판단은 아니었다. 이번 사건에서 지예원의 이름이 거론되지만 않았어도 민채령은 굳이 지예원을 죽여서 내칠 생각은 하지 않았을 테니까.

‘어떻게 해야 하지?’

무슨 이유를 대서라도 이 결정에는 반대해야만 했다. 지예원이 죽으면 자신 역시 죽을 테니까.

허나 안수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긴장감으로 차오른 머리로는 그럴듯한 변명을 짜내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얼어붙은 안수호를 보며 민채령이 살며시 물었다.

“침묵은 긍정이라고 보면 될까? 아니면…….”

민채령의 말이 늘어진다. 단어와 단어 사이의 간극이 벌어진다. 벌어질수록 그 목소리는 보다 또렷하게 안수호의 귓가에 맴돌았다.

“나한테 혹시,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는 거니?”

“그건.”

정곡을 찌르는 그 말에 안수호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민채령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제아무리 민채령이 뛰어나다 한들 시스템에 의한 페널티에 대해서 어떻게 알아차리겠는가. 허나 자신에게 말 못할 사정이 있다는 것은 이미 간파했을 터.

‘차라리 대놓고 시스템에 대해 말할까? 지예원이 죽으면 나도 페널티로 죽는다고?’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황당한 말을 그녀가 믿어줄 턱이 없다. 그랬다간 오히려 지금까지 쌓았던 신뢰마저 잃게 되겠지.

‘아니면 의뭉스럽게 얼버무릴까? 지예원을 살려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고. 하지만 아직은 말하지 못한다고?’

역시 고개를 저었다. 얼버무리는 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해서 그랬다간 쓸데없는 의심을 사게될 게 뻔했다. 아니, 의심은 이미 사고 있는가.

안수호가 탄식했다. 마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 같은 답답함.

둘 사이에 긴장되는 침묵이 흘렀다.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듯 여유로운 태도로 안수호를 바라보는 민채령. 그런 민채령을 보며 안수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

침묵이 흘렀다.

정적이 감돌았다.

고요함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두 사람이 다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은 채, 영원과도 같은 몇 분이 흘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푸흣!”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민채령이 돌연 웃었다.

지금까지의 미소와는 다른, 마치 참지 못해 튀어나온 듯한 웃음.

“푸흐흐! 아하하하핫!”

민채령이 웃었다. 웃음이 새어나오다 못해 박장대소했다.

그 모습에 안수호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는 민채령이 웃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도저히 웃을 상황이 아니었다. 헌데 왜 그녀는 웃는가. 뭐가 그리 재미있기에 팀장실이 떠나가라 저리 웃음을 흘리는 것인가.

당혹감에 차오른 안수호의 시선을 받아내며, 민채령이 이내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너무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짓지 마. 지예원을 죽인다느니 어쩌니 한 거, 다 그냥 한 번 해본 소리니까.”

“………예?”

“농담이라고. 농담. 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서 한 번 해본 말이야.”

어찌나 웃었는지 민채령은 눈가에 눈물마저 맺혀 있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쳤다.

반면 안수호는 여전히 당황한 채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당혹감이 가시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심해져갔다.

'농담이라고? 지금까지 한 말이 전부 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설마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안수호가 반신반의한 태도로 물었다.

“……농담이라고요? 그럼 안 죽일 겁니까?”

“그래. 내가 말했잖아. 일처리는 완벽했다고. 지예원에 관해선 절대로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거든. 설령 들키더라도 충분히 내 선에서 덮을 수 있고.”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그럼, 진심이지. 명색이 경비대 팀장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인다고 하겠어? 푸흐흐.”

뭐가 그리 우스운지 연신 웃어대는 민채령. 그런 민채령을 보며 안수호 역시 멋쩍게 웃었다.멋쩍게 웃었으나, 그 속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당황스러웠다. 혼란스러웠다. 곧 당황과 혼란이 가시니 차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까지 한 말이 다 농담이었다고? 내가 지 말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는데. 감히 날 가지고 놀아?' 그런 생각이 안수호의 뇌리에 가득 차올랐다.

허나 분노조차 가신 뒤, 차츰 돌아오는 이성과 함께 떠오르는 의문.

민채령이 말하길 전부 농담이었단다. 헌데 정말 그녀는 농담으로 지예원을 죽이니 마니 했던 것일까.

‘아니, 그럴 리가.’

안수호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농담일 리가 없다. 농담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지예원을 죽이겠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분명 진심이었다. 진심이라는 게 분명히 느껴질 정도의 기백과 박력이 있었다.

민채령은 진심으로 지예원을 죽일까 고민했다. 진심으로 자신을 추궁했다. 그럼에도 갑자기 태도를 180도 바꿔 농담이라며 어물쩡 넘어가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느새 완벽히 돌아온 차가운 이성으로, 안수호는 그 저의를 어렵지 않게 짐작해낼 수 있었다.

‘……한 번 봐주겠다는 건가.’

안수호와 지예원의 수상한 관계성. 추궁하려면 얼마든지 추궁할 수 있다. 허나 이번 한 번은 넘어가주겠다.

민채령은 진실을 추궁하기보다 그를 한 번 봐주는 것을 택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안수호로선 알 수 없었다. 단순한 변덕일 수도 있고 그에게 은혜를 입히려는 목적일 수도 있다. 어쩌면 안수호 자신은 상상도 못할 기상천외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 의문의 답은 오직 민채령만이 알 것이다.

“이번 한 번은 봐줄게.”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뭐가 그리 기쁜지. 뭐가 그리 웃긴지.

마치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 민채령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오늘 나한테 하나 빚진 거야. 알겠지?”

빚진 거야. 그 말에 묘한 강세를 두며 민채령이 말했다.

그 순간, 민채령의 두 눈에 일순 붉은 안광이 서렸다.

***

한편 그 시각, 그린하우스 인근에 위치한 영랑호 호수공원.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호수 둘레길에 마련된 벤치에 묘령의 여성이 앉아 있었다.

여성의 이름은 박지현. 여명단의 강원도 지부 간부이자, 경비대가 ‘서큐버스 사건’이라 부르는 이번 사태의 주범이기도 했다.

경비대의 예상과 달리 아카데미 안에서 남성들을 습격한 건 서큐버스가 아닌 그녀였다. 그리고 그 목적은 민채령과 안수호가 짐작했듯 지예원의 행적을 쫓는 것이었다.

고요하다못해 을씨년스러운 호수 풍경을 바라보며 박지현이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안녀엉. 할아버지. 늦은 시간인데 일어나 계시네? 나이 먹으면 저녁잠이 많아진다더니 꼭 그런 건 아닌가봐?”

­쯧. 쓸데없는 소리 말고 경과 보고나 해라. 탐색은 어떻게 되고 있지?

전화기 너머의 상대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여명단의 간부인 유현호였다. 유현호의 물음에박지현이 입가에 묻은 피를 혀로 훔쳤다.

“아직까진 이렇다 할 소득이 없네. 방금 전에는 나름 지예원이랑 친하다는 애를 물었는데, 걔도 지예원이 지금 어디 있는지에 대해선 전혀 모르더라고.”

­지금까지 몇 명에게 손을 댔지?

“다섯 명. 첫날 두 명에 오늘 세 명이었어.”

­조금 많군. 경비대가 냄새를 맡은 것 같으니 슬슬 몸을 사리도록 해라. 너무 눈에 띄게 날뛰다간 들킬 수도 있으니.

“아하하핫! 걱정 마셔. 이동할 때는 늘 불가시 상태로 이동했고, 일을 벌일 땐 반드시 CCTV가 없는 곳에서만 벌였으니까.”

­놈들의 수단이 CCTV뿐일 거라 단정 짓지 마라. 경비대도 나름 수사기관이다. 범인 추적과 관련된 초능력 한둘 정도 보유하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아.

“알았어. 주의할게. 하여간 잔소리도 참 심하다니­.”

­탓 탓 탓 탓 탓.

그때,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박지현이 통화를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호수 둘레길을 따라 한 남자가 그녀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 밤중에 조깅이라도 하는 걸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도 박지현은 점차 다가오는 남자를 예의주시했다.

둘 사이에 거리가 좁혀짐에 따라 점차 박지현의 눈에 남자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키는 185 정도. 복장은 후드집업에 트레이닝복 바지. 푹 눌러 쓴 후드 때문에 그늘이 져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드러난 하관은 그녀의 또래로 보였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허나 말 그대로 마주쳤을 뿐이다. 곧바로 시선을 거둔 남자의 모습에 박지현 역시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며 고개를 돌렸다.

돌리려고 했다.

남자의 오른손에 끼워진, 푸른 보석이 박힌 반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남자가 박지현을 스쳐 지나갔다. 박지현이 놀란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쫓았다. 그 시선을 오로지 남자의 오른손에 고정한 채로.

박지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몸에서 붉은 안개가 스멀스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찾았다.”

­찾았다? 그게 무슨 소리­.

다음 순간, 박지현의 몸이 쏜살같이 남자를 향해 쇄도했다.

­파앙!

붉은 안개를 흩뿌리며 박지현이 순식간에 남자에게 도달했다. 날카롭게 솟아난 손톱이 남자의 목을 노린다.

­터억.

"……어?"

허나 불시의 기습은 실패로 돌아갔다. 기세 좋게 내지른 일격은 허무하게 막혔다. 남자에게 오른팔을 붙잡힌박지현이 놀란 얼굴로 탄성을 뱉었다.

"음?"

기습을 막아내긴 했으나 놀란 건 남자 역시마찬가지였다. 남자의 시선이 박지현의 오른손에서 천천히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이내 그 얼굴에 한 줄기 의문이 떠오른다.

"……누구냐? 처음 보는 얼굴인데."

"큿!"

박지현이 오른팔을 빼내려고 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핏줄이 설 정도로 꽉 쥔 남자의 손아귀 힘에 그녀의 손목에서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우드득!

"끄흐윽?!"

격통. 직후 그녀의 몸이 붉은 안개로 화했다. 안개로 변한 채 남자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박지현의 몸이 십여 미터 뒤에서 다시 형체를 이뤘다. 남자가 부러뜨린 손목도 어느새 원상복구 되어있었다.

"오."

그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 보던 남자가 후드 집업을 벗어 던졌다.

드러난 남자의 얼굴은 서글서글한 미남형이었다. 근처를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뭇 여성의 시선을 사로잡을 외모. 허나 그 아래로는 그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다부진 근육질 몸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드득. 우득.

남자의 양 주먹에서 뼛소리가 울렸다. 주먹의 관절을 풀며 남자가 천천히 박지현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신기한 능력이네. 너 뭐냐?"

"……그러는 넌 누구지? 왜 네가 그 탈리스만을 가지고 있는 거야?"

"엉? 이거? 몇주 전에 웬 이쁜 누님이 나한테 맡기고 간 물건인데. 아, 혹시 이거 가지러 온 거야?"

남자가 오른손에 낀 탈리스만을 과시하듯 들어보였다. 박지현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자 남자가 피식 웃었다.

"맞나보네. 그런데 어쩌나. 이거 맡긴 누님께서 그러셨거든. 자기가 다시 찾으러 올 때까지 절대로 다른 사람한테 빼앗기지 말라고."

"……뭐?"

"다짜고짜 공격하는 걸 보니 대충 견적 나오네. 적어도 그 누님 동료는 아닌가봐?"

그렇게 말한 남자가 주먹을 앞세운 채 자세를 낮췄다.

­휘오오오오!

그의 손에 있던 탈리스만이 푸른 빛을 발했다. 남자의 몸을 중심으로 푸르스름한 기운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심상치 않은 기세에 박지현이 살며시 뒷걸음질치며 물었다.

"……너, 도대체 누구야?"

"류태현."

남자가 싱긋 웃으며 제 이름 석 자를 읊었다. 마치 거리낄 것조차 없다는 듯이.

"오늘 막 개강한 파릇파릇한 신입생이야."

"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시원시원한 대답에 박지현이 허탈하게 웃었다. 이내 그녀가 두 팔을 앞세운 채 자세를 잡았다. 날카롭게 자라난 손톱이 달빛을 받아 청명하게 빛났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전투 상황. 허나 남자는, 류태현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류태현.

초인들의 시대의 본래 주인공.

무릇 한 세상의 주인공이라면 이처럼, 갑작스러운 사건에도 담대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공격은 그쪽이 먼저 했으니 지금부턴 정당방위야."

다음 순간, 류태현의 신형이 사라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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